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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관광객이 목가적인 풍경을 찍으러 해변에 갔다가 어부가 고깃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어부에게 날씨는 좋고 바다에 고기도 많은데 왜 이렇게 누워서 빈둥거리느냐고 물었다.


"고기는 필요한 만큼 잡았거든."


"하루에 서너 차례 더 출항하면 고기를 서너배는 더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러면 1년쯤 뒤에는 배를 한 척 살 수 있을 텐데요.”


“그러고 나면?”


“한 3년이 지나면 작은 배 한두 척을 더 사고 결국에는 여러 척의 어선을 지휘하며 물고기 떼를 추적할 헬리콥터를 장만하게 되거나, 잡은 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을 여러 대 살 수 있을 거에요."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멋진 해변에 편안히 앉아 아름다운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며 쉬는 거죠!"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던 거잖수!"


멈출 수 없는 탐욕에 휩싸인 자본주의적 삶을 풍자할 때, 종종 인용되는 가난한 어부의 우화다.




■ 나는 자연인이다!


끝없는 욕망과 무한경쟁의 삶의 공허함을 깨닫고 이 우화의 주인공처럼 경쟁 사회를 이탈하여 아예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출연자들 대부분이 그렇다. ‘자연인’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 자체를 거부하며 가난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주 시청자 층이 중장년층이라고 하던데, 그만큼 치열한 경쟁 사회에 지친 이들에게 로망처럼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살아가는 데에는 무한 경쟁과 욕망에서 벗어나겠다는 개인적 동기만 스며있지 않다. 환경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는 이들은 대체로 화석원료와 원자력을 혐오하여 전기와 수도까지 거부할만큼 생태지향적 삶을 지향한다. 허핑턴포스트에 소개된 페달과 하얼 부부는 그런 신념의 소유자 중 대표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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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비교적 젊은 30대 초반의 이 부부는 서울의 아파트에 살고 있던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환경단체에 근무하면서 생태지향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도시의 삶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면서 아내 페달은 자급자족의 삶을 결심하고 남편 하얼을 설득하여 전남 장흥의 버려진 집터에 자리를 잡는다.


원자력과 화석 등 ‘더러운’ 에너지로 만드는 수도, 가스, 전기 일체를 이용하지 않는다. 소비를 최소화 하고, 텃밭을 일구며 자급자족하기 때문에 생계비는 50만원 안팎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사회와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다. 태양광으로 충전한 스마트폰으로 SNS까지 하며 가끔은 읍내에 나가 영화도 보고 책도 사본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생길 때, 주변 이웃이나 생태적 삶을 응원하는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수입은 글쓰기, 강연, 숲속 체험 같은 프로그램 등의 지자체 공모를 진행하면서 얻게 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생활은 “불편하기는 해도 불행하지 않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삶과 가치관을 남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무한경쟁과 환경 파괴로 폭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열차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하나의 예시로서 봐달라고 한다.


하얼 부부같이 신념을 갖고 젊은 나이에 귀농한 부부는 흔치 않다. 자발적 가난을 넘어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언론 매체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생활을 담은 기사는  끝없는 경쟁과 기계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이 부부의 생활은 귀감이 될 만한 삶으로 소개된다.


이들의 생활을 체험한 한 여행 작가의 후기를 보자.


나의 가장 뛰어난 재주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라고 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그가 월든 호숫가의 숲에서 자급자족하며 2년을 보낼 있었던 것은 재주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편리함에 대한 욕심을 나는 어디까지 포기할 있을까.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5 , 전남 장흥의 동백숲에서 사흘을 보냈다. 발랄한 아내 페달과 듬직한 남편 하얼, 아기 비파가 사는 집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다. 겨우내 마련한 장작을 밥을 짓고, 물을 끓이고, 방을 데워야 한다. (...)


그들은 일상의 수많은 노동을 놀이처럼 해내고,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선수였다. 밤에는 쑥과 비자나무 열매를 넣어 끓인 물을 세숫물로 내놓았고, 아침에 방문을 열면 댓돌 신발에 찔레꽃 송이가 놓여있었다.(...)


숲에서 나는 전율이 정도로 행복했다. 숲은 고즈넉했고, 공기는 더없이 싱그러웠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언제든 신선한 대기 속으로 나설 있다는 , 그것만으로도 페달과 하얼의 삶이 부러웠다. 편리와 풍요에 대한 과욕이라는 안의 먼지가 결국 세상을 미세먼지로 덮어 숨통을 다시 조여 오는 역설이 삶이었다. 정작 불편한 삶을 감수한 페달과 하얼은 건강하고 쾌적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결국 미세먼지를 비롯한 환경문제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따라오지 않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에어컨과 자동차를 사지 않고, 안의 모든 플러그를 빼놓고, 가급적 고기를 먹지 않으며 사는 이상으로 나는 무엇을 있을까. 동백숲에 머무는 사흘 동안 페달과 하얼이 말없이 내게 묻는 같았다. 안의 먼지를 덜어내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있는지를.


서울로 돌아온 나는 보일러 스위치를 올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넣은 ,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들었다. 문명의 혜택에 관한 , 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비루한 존재였다. 월든 호숫가도, 동백숲도 너무 멀었는데, 전기 스위치는 눈앞에 있었다.”


(김남희, < 나의 미세먼지>, 한국일보)


극도의 절제 속에 생태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자연인’ 앞에 느끼는 우리의 감정은 어쩌면 이 작가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도덕적 존경심을 갖게 되면서도, 문명의 안락함을 버릴 수 없다는 자책감이 하나의 세트처럼 섞여 들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치열한 경쟁 속에서 패배한 우리 같은 루저들이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저렇게 젊고 고학력자인 사람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루저로서 힘겹게 살 바에야 비록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연인’으로 과감히 뛰어 들어가는 것도 선택 가능한 옵션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런 ‘자연인’의 삶이 현실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그렇게 괜찮게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도덕적 장점으로 여겨지는 환경친화적 측면에서 살펴봐도 그렇다.




■ 생태주의는 생태적인가?


‘더러운’ 에너지원인 화석 원료로 만들어진 전기, 수도, 가스보다 매일 때는 나무 장작이 과연 더 환경 친화적인가? 장작불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이산화질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대규모 연소시설이나 화석연료를 태우는 공장이 없는 춘천의 경우를 보자. 청정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유해대기 물질 중 PAHs(다환 방향족 탄화수소) 농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다. 장작을 주요 연료로 때는 북한에서 넘어온 대기 물질 때문이다. 경제규모는 한국의 10% 수준도 안 되는 북한이 대기오염 수준은 10배 이상이다. 여기에는 석탄 만이 아니라, 나무 장작도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장작으로 화장을 하는 관습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여기서 나온 대량의 대기오염 물질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서 인도 법원에서는 가스와 전기와 같은 ‘환경친화적’인 연료로 바꾸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칠레의 사정도 비슷하다.  칠레의 남쪽 지역에서는 주거형태를 막론하고 많은 가정에서 저렴한 연료인 나무 장작으로 때는 보일러를 이용하고 있어 대기오염 정도는 최악에 이르렀다. 매년 4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장작 난방을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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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나무장작으로 화장하는 모습)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나라 전체 인구 중 10%(500만)가 ‘자연인’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하면 환경적인 측면으로도 엄청난 퇴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기오염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인구수를 염두에 둔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은 생태적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밝혔듯이 농촌보다는 도시에서 사는 것이 사실은 훨씬 더 환경 친화적이다.


“우리는 숲과 기름을 태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변 환경에 해를 입힌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한다.... 더 크고 인구밀도 높은 도시들이 더 적은 전기를 소비한다. 단독주택은 평균 다섯 집 이상이 들어선 아파트 건물 내 한 집의 평균 전기 소비량보다 88% 전기를 더 소비한다. 교외 지역의 가구는 도시 지역 가구보다 평균 27% 전기를 더 소비한다... 환경보호주의자란 사람들은 개발을 준교외 주변으로 이동시키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운전하게 만들고 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도시의 승리>)


상용전기를 쓰지 않겠다는 하얼부부조차 어쩔 수 없이 SUV 차량을 구매하여 운전하는 것을 보면 농촌의 고비용 저효율의 삶은 드라마틱할 정도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북한만 보더라도 그렇다. 에너지 사용량은 남한의 10%도 안 되고 이구는 절반에 불과하다.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도 남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지만 북한의 산림은 엄청나게 황폐화 되었다.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산악지대가 많은 북한의 산림 면적은 남한보다 34% 정도 컸다. 지금은 오히려 20% 적다. 매년 평양 시보다 조금 더 큰 면적(1280㎢)이 사라지고 있다. 산림 황폐화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이 61종에 달한다. 1997년 한 미국의원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녹색으로 뒤덮인 남한을 보니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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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시대 인구는 남한 기준으로 10% 수준이었고, 현대의 화석에너지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었나? 116년 전 독일의 지그프린트 겐테라는 기자가 조선에 들어와서 남긴 르포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이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묘사된 산림의 상황은 참담한 기분을 갖게 한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한양)을 내려다보면 헐벗은 산림으로 암담하고 황폐한 모습이다. 특히 나무 하나 없는 산봉우리는 비바람에 마모돼 마치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납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이 도시는 500년 동안(조선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벌목을 했으니 지금 이렇게 완전히 헐벗고 황폐화한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와 함경도의 깊은 산골에 울창한 삼림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예전엔 이곳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혹독하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땔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둥산으로 땔감의 값이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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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1904년)에 조선에 온 스웨덴 기자 그렙스트도 같은 증언을 했다.


“조선에서 땔감은 나무나 나뭇가지는 물론 건초, 마른 나뭇잎, 가축들의 배설물 등등 뭐든 닥치는 대로 이용했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불을 때는데 땔감이 부족해 가격이 높아, 도시의 경우 1인당 수입의 25%를 땔감 구매에 썼다.”(<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18세기 온돌의 대중화로 헐벗기 시작한 우리의 산은 해방직후 50%가 민둥산이었고, 사막 같은 산지가 8%나 되었다고 한다. 일제가 조림산업을 시행했어도 그 정도였다.


과거의 지평을 더 넓혀 수렵채집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농경 사회 훨씬 이전의 원시시대조차도 결코 생태 친화적이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전체 동물 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때가 훨씬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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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0년전 호주 대륙에 건너온 인류는 그 곳 동물들에게 그야말로 치명적인 존재였다. 150만년 동안 빙하기에도 견뎌왔던 대형 동물 디프로토돈을 비롯해 수많은 동물들이 불과 수 천년 만에 멸종되었다. 그곳에서 서식했던 몸무게 45kg 이상의 대형 동물 24종 가운데 23종이 멸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멸종의 행렬은 호모사피엔스가 개척한 섬과 대륙마다 번번이 일어났다. 14,000년 전 미 대륙에 호모사피엔스가 도착한 지 2천년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동물이 사라졌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멸종된 동물은 종(種)의 범위를 뛰어 넘어 속(屬)으로까지 확장된다. 북미의 대형동물 47속 중 34속, 남미에서는 60속 중 50속이 사라졌다. 3천만년 넘게 번성하던 동물들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인구의 수렵채집인 들로부터 멸종당했다.


이런 과거를 환기하는 일은 현대의 환경 문제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가했던 치명적 사실을 밝히는 일은 현재의 생태계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의욕을 갖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현실의 문제는 현실에서 해결해야


생태주의자들처럼 과거의 삶을 이상화하고 재생시키는 방식은 곤란하다. 한국인의 생활습관으로 전세계인이 산다면 지구 3.3개가 필요하다고 환경주의자들은 경고하지만, 지금의 인구 수준에서 과거 생활 방식으로 되돌아가 현재의 생태 자원을 보존하려면 수백 개의 지구도 모자를 것이다.


물론 하얼 부부와 같은 생태주의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자고 주장하지도 않고, 그런 생활문화 운동을 벌이지도 않는다. 아마 그들의 선의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현대 사회의 경쟁 질서를 완화하고 환경 파괴를 멈추자는 데 있을 것이다.


끝없는 욕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이들의 철학적 소신은 지금의 현실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우리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윤리적 방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현실과 동떨어진 수도자적 고행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환경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삶은 개인으로서는 올바를지 몰라도 일반화시키면 성립할 수 없는 구성의 오류나 다름없다. 자신들처럼 살 것을 권장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개인의 취향일 뿐 대안적 삶으로 제시될 성질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생태주의자의 근본적인 문제는 욕망 비판이 문명 비판으로 단선화 되기 쉽다는 데 있다.


실현 가능성 제로의 대안 제시는 현대 사회의 병폐 개선을 지연시키는 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생태주의라는 삶의 양식이 예찬되는 것을 보며 드는 느낌은 착잡함이다. 결코 보편화 할 수 없는 것을 모두가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성공한 자의 삶을 롤모델로 제시하는 자기계발서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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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으로 가정을 일구고 살아가려면 아무리 ‘자연인’이라도 결코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더욱이 적은 노동으로 자족하며 살아가려 할수록 더욱 사회 의존적이 되어야 한다. 집적과 분업의 효과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현대의 생산력은 충분히 그럴 역량을 갖고 있다.


대공황을 극복한 수요이론 창출로 유명한 케인스는 100년이 지난 즈음이면 주5일 하루에 3시간만 일해도 충분할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할 것이라고 1930년에 예견했다. 경제학자답게 역사적인 자본 축적률 및 기술 진보의 비율을 기초로 삼아 계산한 결과였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부국의 경제는 케인스가 예견한 생산력 수준에 근접했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약간은 줄어들었지만 그의 예견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가 고민해야 될 부분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시간에 더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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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론2 - 한국 사회의 노력 이데올로기

루저론3 - 능력주의와 공정사회의 함정

루저론4 - 무한경쟁은 미친 짓이다


신루저론 - 끝없는 욕망과 희소성 그리고 루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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