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흔히 최후의 한 발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종종 내리지만, 이 명령을 진정으로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는 일본군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영국군의 윌리엄 슬림(William Slim)장군이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일본군은 최후의 최후까지 싸웠다. 모든 지휘관들의 꿈을 실현한 부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인격과 지성, 판단력을 제거한 로봇과 같은 군대라고 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역사에 기록된 일본군은 ‘광기(狂氣)’와 ‘세뇌(洗腦)’같은 부정적인 단어로 기억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낙조(落照)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때 정규항공모함 6척, 소형 항공모함 10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드웨이 해전에 이르면 5척으로 줄어들었고, 1944년 9월 마리아나 해전에서는 정규항공모함 5척, 소형 항공모함 9척을 합해 총 14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다.
반면 미국은, 남태평양 해전 직후에는 태평양 방면에 엔터프라이즈호 1척 만을 작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속도로 전시경제로 전환한 다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1942년 말 부터는 새로 개발한 대형 항공모함 ‘에섹스급’을 두 달에 1척 꼴로 생산해 내는 놀라운 스피드를 보였다. 그 결과 무려 15척의 에섹스급 항공모함을 건조했고, 인디펜던스급의 소형 항공모함은 1943년 중에만 9척을 건조했다. 그리고 소형 호위항모는 무려 124척이나 찍어 냈다.
1942년의 남태평양 해전 이후 1년 8개월 동안 일본과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원한 직접적인 해전은 없었다. 이 공백기 동안 미국은 완벽하게 전시경제로 전환했다. 일본의 희망이 사라졌다. 두 달에 1척 꼴로 정규항공모함을 찍어내는 미국을 일본이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인도네시아-뉴기니-필리핀-캐롤라인 제도-마리아나 제도-오가사와라 제도로 연결된 해상방위라인을 설정. 절대방어선(絶対防御線)이란 명칭을 붙였다. 태평양 전쟁 후반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오지마 전투, 필리핀 해의 전투(레이테 만 전투, 마리아나 전투) 등등이 바로 이 절대방어선을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다.
절대적인 생산력의 열세 속에서 일본군은 방어라인을 중심으로 압도적인 물량의 공세를 버텨냈다. 그러나 한계는 곧 드러났다. 1942년 8월부터 1년 반 동안이나 벌어진 솔로몬 항공전에서 일본은 약 2,500대의 항공기를 잃었고(또 그만큼의 파일럿을 잃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1944년 2월 20일 마지막 제로 전투기 23대를 라바울에서 트럭 섬으로 후퇴하면서 방어라인을 후퇴 시켰다.
그 반면에 미 해군은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태평양 전쟁 초창기에는 항공모함 1척을 투입할 때마다 온갖 고민을 다 했었지만, 1943년 중반이 되자 ‘부자 옛말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이때부터 미 해군은 현대적인 항모 기동부대 편제와 전술을 완성시켰다. 전쟁 초기에는 그렇게 할 물자도, 병력도, 노하우도 없었지만, 경험이 쌓이고, 병력이 모이고, 물자를 찍어내면서부터 완전체로 거듭난다.
예전에는 1척 혹은 2척씩 항공모함을 분배 배치했었다면, 1943년 중반부터는 3~4척의 항공모함을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여기에 레이더와 신형 대공포를 장착한 전함, 순양함을 호위함으로 붙이고 그 뒤에 보급함을 따로 배치해 하나의 기동부대를 만들어 전선에 배치한다. 이는 오늘날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원형이 된다.
항공모함뿐만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 초창기 와일드캣과 신참 조종사로 버텨야 했던 항모 비행단들은 이제 일본 전투기를 압도하는 신형 기체들과 충실히 훈련받은 파일럿들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 사이 일본은 어떻게 됐을까? 전쟁 초기 태평양 상공을 주름잡던 파일럿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 빈자리를 신참 파일럿들이 대체했다. 동양의 신비라 자랑하던 제로센은 미군의 신형 전투기 앞에서 ‘불타는 관’이 된지 오래였고, 제로센의 개량형이나 신형 기체들은 미국의 핼캣, 콜세어, 무스탕, 라이트닝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양에서나 질에서나 일본은 미국에게 밀렸다.
일본에게는 출구가 없어 보였다.
가미카제(神風)의 등장
敷島のやまと心を人問はば朝日ににほふ山ざくら花
: 시키시마의 대화혼이 무어냐고 남이 묻는다면, 아침해에 붉게 타는 산벚꽃이라 대답하겠네.
에도시대의 국학자였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남긴 와카(和歌 : 일본의 정형시) 중 한 구절이다. 여기서 시키시마는 일본 열도를 의미했고, 야마토, 아사히, 야마사쿠라란 말은 일본어를 모른다 해도 익히 들어봤음직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 중 몇 개는 일본 전함에도 사용됐다.
갑자기 일본 와카를 언급한 이유는, 이 와카가 일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대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 볼 때 최초의 가미카제 공격대는 1944년 10월 20일 아침에 탄생한다. 최초의 공격대는 4개 전대 24명으로 구성됐는데, 각각의 전대명이 바로 시키시마, 야마토, 아사히, 사쿠라였다.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아 보인다.
원래 가미카제는 1274년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불어온 태풍을 의미한다. 두 번의 몽고침공을 물리친 태풍은 말 그대로 ‘신의 바람’이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전력에 점차 본토로 밀려들어가는 일본으로서는 반전의 기회. 아니, ‘희망’이 필요했다.
그 희망으로 거론됐던 것이 바로 다이아다리(體當 : 체당)이었다. 일본군으로서는 특별난 게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편성되기 이전에도 ‘우발적’으로 특공은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항공모함 히류(飛龍)에서 발진한 2차 공격대의 대장인 토모나가 죠이치(友永丈市) 대위가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에 돌진한 경우다. 굳이 항공모함이 아니어도 전투기나 잠수함 등에 특공을 한 경우는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연료가 떨어졌거나, 대공포에 맞아 비행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하는 등 급박한 상황에서 벌어진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공격이었지, 출격 전부터 자폭을 결정하고 뛰어든 공격은 아니었다.
이들이 특공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도저히 미국의 기동함대를 뚫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이착륙 훈련을 마친 신참 조종사들을 데리고 대공포의 벽과 최신 함재기의 산으로 둘러쳐진 미군 기동함대 부대를 공격해 항공모함을 격침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대본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들이 생각해 낸 건 목숨을 건 자폭 공격이었고, 1944년 3월부터 특공병기인 카이텐(回天), 오카(櫻花), 신요(震洋) 등을 개발해 편성해 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항공부대의 ‘일부’ 조종사들과 지휘관들이 불을 당긴다. 부대 내의 소수의견들이 지휘부까지 올라가게 된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豊田 副武)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의 인적 자원 중 가장 비싸고, 양성하기 어려운 것이 전투기 조종사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령 급 전투기 조종사 1명을 양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123억 정도다. 임관해서 소령을 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10년 정도 걸리는 걸 감안한다면, 전투기 조종사 1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한 구조부대가 따로 운영되고 있고, 전투기 조종사들도 정기적으로 생존훈련을 받는다.
이들은 전쟁 시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인적자원이다. 그런 그들을 100% 죽음이 확정된 자살특공작전에 투입한다는 건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본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분위기가 만연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인물이 튀어나온다. 바로 제26항공전대 사령관이었던 아리마 해군소장이었다.
그는 1944년 10월 15일 미군 기동함대가 루손 섬 앞바다에 출현했다는 보고를 듣자 공격명령을 내린다. 그리고는 이 공격대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말한다. 오니시는 직접 제로센을 타고 미국 기동함대로 향했는데, 이 전투에서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미국 항공모함 프랭클린에 특공을 했다.
오니시는 특공 직전 마지막 무선을 남겼는데,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걸려 있다. 귀관들은 혼신을 다하라.”
였다. 아리마의 특공 소식을 접한 도요다 소에무(豊田 副武) 연합함대 사령관은 특공부대의 편성을 결정하게 된다. 이 결정의 뒤에는 제1 항공함대 사령관인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郞) 해군중장의 집요한 설득이 있었다. 필리핀 전역에 전개한 항공기를 모두 긁어모아봤자, 30대 정도의 제로센과 같은 수의 공격기가 고작인 상황에서 미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막을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기에 오니시는 특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당시 이 특공부대 편성을 결정하던 자리에 있었던 전임 1항공함대 사령관 테라오카 긴페이(寺岡謹平) 중장은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밝혔는데,
“평범한 전법으로는 효과가 없다. 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원귀가 되어야 한다. 이 결사대는 지원자에 한해 선발해야 하며, 먼저 고급 장교와 지휘관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원자가 있을까? 그들 젊은 독수리들에게 직접 호소해 볼까? 먼저 우리 부대의 전투기 조종사들 중에서 지원자를 선발하면 다른 곳에서도 지원자가 나설 것이다. 만일 전 해군 항공대가 이를 결행하면 해군의 수상부대도 그 뒤를 따르겠지. 모든 해군이 그런 기백으로 나선다면 육군도 뒤따를 것이고, 전군이 일어서면 일억 국민도 따르지 않을까?”
비장해 보이지만, 한 마디로 ‘개소리’다. 100% 죽음이 담보 된 작전. 그것도 전쟁 시 가장 중요한 인적자원이라 할 수 있는 전투기 조종사들을 활용한 자살특공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당시 일본은 상식에서 이탈한지 오래였다.
어찌됐든 이렇게 해서 특공대 편성은 결정됐고, 24명의 조종사가 편성된다. 그리고 이 특공대에 ‘가미카제 특공대’란 이름이 명명됐다(이 이름을 붙여준 이는 제201 해군 항공대의 선임참모 이노구치 중좌였다).
최초의 특공
세키 유키오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난 덴노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게 아냐. 사랑하는 내 마누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에게 내 마누라가 강간당할 거 아닌가? 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어때, 멋지지 않나?"
- 시키시마대 지휘관 세키 유키오 대위
24명의 특공대가 결성됐을 때 가장 문제가 됐던 게 지휘관의 인선이었다. 공식적으로 특공부대는 자원자에 한해서이고, 베테랑 파일럿들은 제외됐다. 그러나 최초의 특공을 지휘할 지휘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을 인솔하고, 통제하려면 아무래도 베테랑이 필요했다. 그 결과 세키 유키오 대위를 선정해서 ‘자원을 권유’하게 된다. 당시 세키 유키오 대위는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다음날 특공을 자원(?) 한다.
그의 말처럼 특공은 미친 짓이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그 미친 짓을 권유하던 때였다. 그러나 최초의 특공은 실패했다.
당시 레이테만의 제공권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은 제대로 정찰기를 띄울 여유가 없었고, 결국 공격대가 직접 목표를 찾은 다음 ‘돌격’을 해야 했다.
특공대들은 몇 번이나 레이테만 이곳저곳을 훑으며, ‘특공’을 할 대상을 찾았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몇 번의 허탕을 친 야마사쿠라 편대의 히사노 중위는 10월 21일 출격을 했다. 그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물론, 미 해군의 함대에 격돌하지는 못했다. 그저, 연료가 떨어져 추락했을 것이란 추정만 할 뿐이다. 첫 번째 특공은 실패였다.
그리고 대망의 10월 25일. 4번의 허탕을 친 세키 유키오 대위의 시키시마 편대는 5번째 출격을 하게 된다. 5대의 특공기, 4대의 호위기로 구성된 특공편대는 보급을 받던 미 해군 함대를 발견하게 된다.
1944년 10월 25일 10시 53분 일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편대가 미 해군 함대에 돌입하게 된다. 세키 유키오 대위의 전투기는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안고 항공모함 세인트 로(Saint Lo)에 돌입. 항공모함을 격침한다. 뒤이어 나머지 4대의 전투기들도 각각 다른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에 돌격한다.
특공은 성공했다.
호위 항공모함 1척 격침, 1척 대파, 중순양함 1척을 격침했다. 당시 일본군의 전력으로 이 정도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200대의 전투기를 동원해도 성공할까 말까한 대성공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郞)의 첫마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데,
“세키, 눈을 뜨고 있었구나!”
였다. 상당히 비장해 보이는 발언이지만, 결국 부하를 죽으라고 등 떠민 자가 그 성과를 확인한다는 내용이 아닌가? 심하게 말한다면, ‘눈 뜨고 잘 죽었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포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은 성공했고, 이들 5명의 가미카제 파일럿들은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게 됐고, 육군과 해군을 가리지 않고 자살특공 열풍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여담이지만, 세키 유키오 대위가 격침한 세인트 로(Saint Lo)는 격침이 예정돼 있었다는 것이 당시 세인트 로에 탑승한 승무원들의 반응이었다. 원래 세인트 로의 함명은 미드웨이였다(그 이전에는 ‘차핀 베이Chapin Bay’였다). 그러다가 1944년 7월 18일 프랑스의 도시 ‘생로(Saint-Lô)’를 탈환한 기념으로 1944년 10월 10일 세인트 로(Saint Lo)로 개명한다. 해군 수병들 사이에서 함의 이름을 바꾸는 건 불길한 것으로 취급 받았는데, 세인트 로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이 배가 격침될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미신이라 가볍게 취급할 수도 있는데, 세인트 로에서 살아남은 승무원들은 입을 모아 함명을 바꿔서 격침됐다고 주장했다.
어찌 됐든 세키 유키오란 이름과 세인트 로(Saint Lo)란 이름은 역사에 각인됐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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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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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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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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