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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1. 08.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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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의 밤



철수는 이 술집에서 수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아가씨를 만나고 싶었다. 철수가 알고 있는 민수아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바로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생겼다. 화장실에서 나와 미로 같은 술집 실내를 천천히 걸었다. 방문이 열릴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안을 살펴보았다. 기묘한 설렘과 떨림, 그러나 룸살롱을 빠져나오기까지 수아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철수는 입구에 도착해서 화장실을 알려 준 주먹과 다시 만났다. 용기를 내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물었다.

 

 

“지금 수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먹은 귀찮다는 투로 철수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단단한 플라스틱 명함에는 ‘강남 골프’라는 상호와 ‘김진아 실장’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철수는 명함을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주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주먹은 철수의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등을 떠미는 듯한 기세로 몰아냈다. 그러면서도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놀러 오십시오.”

 

 

제 발로 쫓겨나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면서 철수는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업소에 수아라는 아가씨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주먹은 위압적인 태도로 다음을 기약했다. 수아는 오늘 출근하지 않았거나 어느 방 안에서 일하는 중이라는 걸까. 철수는 계단참에 멈춰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수아를 만나려면 손님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수는 골프숍으로 위장한 룸살롱의 명함을 소중하게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술집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사이로 동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들렸다. 장재완 대리는 연초에 무리를 해서 일본산 중형차를 계약했다. 하지만 차를 사 놓고는 대출금을 갚느라 생활이 빠듯했다. 강남역에 주차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는데 주차비는커녕 기름값을 대기도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타고 다니지도 못하는 차를 자랑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법무과장은 법무과 업무에는 성과급이 없다는 점이 불만이었다. 여직원과 남직원의 직능은 입사할 때부터 퇴사할 때까지 달랐고 콘돌리자 과장은 더 이상 승진을 꿈꿀 수도 없었다. 남대문에서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시작은 허술했으나 사무실에서 오래 일한 직원들 중 여전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콘돌리자 과장은 자신의 일본어 실력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주위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을 하면서 일본어 재주를 써먹을 일이 없기도 했다.

 

박치훈 과장은 이 술자리를 마치고 다음 차수로 넘어가기를 바라며 부어라 마셔라 연신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신이 나는 척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어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이제 좋은 데 갈까요?’ ‘이 잔만 비우고 나가실까요?’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술자리를 옮길 결정권을 가진 본사 보안과장과 사장은 그들이 본사에서 함께 일할 때 알았던 다른 선배의 뒷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 오진성은 고현지에게 지분대고 있었다. 꽤 많이 취해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현지에게 집이 어디인지를 자꾸 캐물었다. 현지는 마뜩찮은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진성의 호기로운 제안을 거절했다.

 


“건대 입구에서 가까워요.”

 

“그래. 이 오오빠가 바래다 준다니까 그러네.” 

 

“역세권이라 현지 혼자 가도 안 위험해요.”

 

 

고현지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오진성은 현지가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의 상체는 점점 현지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철수는 괜히 오진성에게 화가 났다. 철수는 붉어진 눈으로 오진성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조황진 과장이었다. 조황진이 철수를 달래듯 사근사근 말을 붙였다.


 

“철수 여자친구는 잘 있어?”

 

“지금 호주에 갔습니다.”


“호주는 왜?”

 

“워킹홀리데이 간다고.”

 

“언제 오는데?”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그래도 기다려 봐야죠.”

 

 

조황진 과장과 말을 섞으면서도 철수의 시선은 오진성에게 향해 있었다. 취기와 객기가 뒤엉켜 눈알이 뜨거워졌다. 그 뜨거운 시선을 현지마저 알아차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오진성은 철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내들의 세계에 익숙한 조황진은 두 녀석을 이대로 두었다간 뒤끝이 좋지 않은 사고가 벌어지게 되리라 직감했다. 조황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철수를 일으켜 세웠다. 주량이 한계를 넘어선 것이 분명한 철수가 사고를 치기 전에 그만 들어가 보라고 억지로 권했다.

 

철수는 동료들을 남겨두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휘척휘척. 강남대로를 따라 술에 취한 사람들이 좀비 같이 움직였다. 밤은 피부에 생긴 멍자국처럼 푸르스름하게 얼룩져 보였다.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의 밝은 불빛이 묵직하고 두텁게 느껴졌다. 철수는 만약 손을 뻗어 빛을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이 토끼털 같이 부드러운 감촉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렇게 두 팔로 허공을 더듬으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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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노점에서 팔고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수레 위에 커다란 곰 인형과 혀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 인형, 바닥에 엎드린 얼룩 고양이와 열쇠고리에 매달린 노랑 오리까지, 보송보송한 봉제인형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철수는 수레 앞에 서서 빼곡하게 쌓여 있는 봉제인형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어 주먹만 한 크기의 코알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코알라의 앞발 부분에 집게가 숨겨져 있어서 어딘가 달아놓을 수 있는 인형이었다. 집게를 눌렀다 놓으면 플라스틱으로 만든 코알라의 손이 딱딱 소리를 냈다. 그렇게 코알라 인형으로 박수를 치다가 철수는 지갑을 꺼내서 인형 값을 치렀다.

 

 

“귀여워라. 저 사주시는 거예요?”

 

 

철수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현지였다. 군대에서 심하게 다친 뒤로 철수의 왼쪽 눈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가 옆에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곁에 서 있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 자란 사내가 인형의 세계에 빠져서 정신을 놓고 있는 모습을 여자에게 들킨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는 철수가 코알라 인형을 들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당연히 저를 위한 선물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노점 수레에 설치된 밝은 조명 불을 받아 취기에 붉게 달아오른 현지의 뺨이 반짝반짝 빛났다. 발그레한 양 볼의 솜털까지 빛이 났다. 인형의 세계에 가까운 어린 여자의 웃음을 보자 철수는 기꺼이 인형을 내밀었다. 현지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부끄러운 듯 덥석 손을 내지는 않았다. 철수가 코알라의 앞발 집게를 벌려서 현지의 핸드백 손잡이에 인형을 매달아 주었다. 현지는 가방에 달린 작은 털뭉치를 내려다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철수를 향해 말했다.

 

 

“주임님. 현지랑 맥주 한 잔 더 드실래요?”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를 듣자 철수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지가 술집에서 철수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이 분명했다. 철수가 황급하게 그들이 빠져나온 술집 골목을 살폈다. 다른 동료들이 이 모습을 목격하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 했다. 인형을 받아들고 배시시 웃고 있는 현지가 원망스러웠다. 철수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사장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메인서버에 접속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며칠에 걸쳐서 이런 일을 하다가는 의심을 살 것이다.

 

 

“오늘은 좀 그런데…”

 

“아, 맞다. 오늘 저녁에 할 일 있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일인데요?”

 

 

철수가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중에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카카오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연아(하트) 왜전화안해요?’ 모르는 사람인데, 하면서 채팅창을 열어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박치훈 과장이 담당한 채무자였다.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자의 손님이 가게에 와 있을 때, 전화를 걸어서 빚이 얼마나 되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었다. 철수가 채팅내용을 확인하자 여자로부터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지금전화’ ‘분위기좋으니까’ ‘얼른’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현지가 고개를 빼고 철수의 전화기를 살펴보았다. 프로필에 예쁘장한 여자 사진이 뜨는 걸 보고는 내심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에요?”

 

“채무자에요.”

 

“어… 현지는 잘 모르지만 밤에는 전화하고 문자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요.”

 

“오늘 밤에 이 채무자 만나기로 했던 거예요?”

 

“아니에요.”

 

“근데 왜 톡하세요?”

 

 

철수는 꼬치꼬치 캐묻는 현지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의혹을 살 만한 상황이었다. 이 채무자에 대해서 박치훈 과장에게 연락을 해 주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도 꽤나 술에 취해서 일을 할 정신은 없을 것 같았다. 박치훈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회사 사람들이 철수가 현지와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철수는 현지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저 술은 더 못 마실 것 같아서…”

 

“그럼 커피나 한 잔 하실래요?”

 

“그래요.”

 

 

철수가 재빨리 길가의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갔다. 2+1 행사 중인 캔커피 세 개를 사들고 나왔다. 현지에게 하나를 주자 현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자 철수는 다급한 마음에 캔커피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현지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라고, 야밤에 카페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라고,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철수는 알아채지 못했다. 현지가 실망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터덜터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으나 철수는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철수는 편의점 앞에서 캔을 열어 단숨에 커피를 들이켰다.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가 목구멍을 적시자 그제사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남은 캔커피 하나도 마저 마셔버릴까, 아니면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갈까, 고민하다 생각이 났다. 한참 전부터 서류가방이 손에 없었다. 언제부터였나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 술집에서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수아의 대출서류를 찢어 버리고서 가방을 잊고 나왔다.

 

잰 걸음으로 아까의 술집 화장실을 향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 여전히 그 자리에 물건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방은 이미 사라졌다. 구두자국과 배설물과 토사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화장실에서 철수는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사건은 오늘 있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해주는 증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라리 모든 것이 손을 떠나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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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회사 사람들과 마주쳤다. 본사 보안과장과 사장을 필두로 조황진과 박치훈, 한승철 과장 일행이 일차를 정리하고 나와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박치훈 과장이 철수를 발견하고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어이, 브라더~”

 

 

한껏 들뜬 목소리, 전에 없이 친근한 말투였다. 술 냄새가 훅 밀려오며 동시에 그의 체중이 철수의 왜소한 몸을 짓눌렀다. 철수는 힘겹게 박치훈을 어깨로 밀면서 일으켜 세웠다. 조황진 과장이 다가와 거들었다. 그러자 박치훈은 철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조황진에게 기대듯이 어깨동무를 했다. 박치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황진에 의지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연민이 밀려왔다. 박치훈은 술에 취한 밤이면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아가씨들이 나오는 유흥업소를 향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유흥업소를 찾아가는 사내들의 뒤를 따르면서 철수는 심란해졌다. 어느 업소에서 수아라는 아가씨를 다시 만날까 두려웠다. 만약 철수가 수아를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든 이미 추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아의 흔적을 찾아낸다고 해서 그 그림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철수는 수아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수아의 빈자리를 실감하지 않더라도 자취생활은 외롭고 고단했다. 그리고 철수는 박치훈 과장이나 장재완 대리 같이 유흥업소를 들락거리며 외로움을 달래고 싶지 않았다. 철수는 여러 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수아를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여자를 만나 어떻게든 결혼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여자라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결혼생활에 찌들게 되면 잔소리를 쏟아내는 마누라가 되리라. 그때쯤 되면 철수도 회사생활에 찌든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자식이 자라는 과정은 흐뭇하겠지만 아이들이 훌쩍 자란 뒤에는 더 이상 아빠를 상대해 주지 않을 게다. 아내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남편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철수도 다른 아저씨들이 그러하듯 캔디나 미미 같은 아가씨를 찾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을 아내에게 들킨다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질 테고.

 

텔레비전 광고에 따르면 인생은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않은 것이었다. 남자는 동창회에 나가서 중형차를 보여주며 성공을 입증하고, 여자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서 드레스를 걸치고 와인을 마시며, 그 집에 사는 아이는 동무에게 얼음 나오는 정수기를 자랑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화목한 가정은 그런 그림이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산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철수는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발걸음을 멈췄다.

 

인사도 하지 않고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옷을 벗었다. 셔츠와 속옷을 빨래바구니에 넣고 한 벌 뿐인 양복 재킷과 바지는 옷걸이에 걸어 섬유탈취제를 뿌려놓았다.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하면서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던 채무자가 떠올랐다. 애타게 영감님을 속여 줄 전화를 기다렸을 테지. 하지만 이제와 박치훈 과장에게 사실을 알린대도 해결하긴 너무 늦었다.

 

다음으로 현지가 생각났다. 잘 들어갔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애꿎은 전화 때문에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코알라 인형 때문에 괜히 앞으로 관계가 어색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독거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연락을 하는 편이 도리어 흠 잡히기 좋은 구실이 아닐까 싶었다.

 

샤워를 하려고 안경을 벗으면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새 안경을 맞춰드려야지 하는 결심, 그러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에도 시간이 너무 늦었다. 별로 급한 일도 아닌데 굳이 밤중에 전화를 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내일 아침이나 오후의 적당한 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 여유가 있을지는 내일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철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계획하며 현재를 살았다. 그러나 과거는 설명하기 어려웠고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현재는 언제나 늦어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늦어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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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가


편집 : 꾸물,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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