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홀짝 추천13 비추천0

2013. 01. 08. 수요일

편집부 홀짝







 








철없다는 국어사전상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의미상으로 우리가 흔히 세상 물정을 모른다라고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네 엄마들이 흔히 너 언제 철들래?’라고 할 때의 의미는 보통 너 언제 나이 값 할래?’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니 철없는 사람이 가진 주요한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겠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상태의 사람. 그리고 나이 값을 못하는 사람. 전자는 주로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의미일 테고, 후자는 비교적 나이를 먹은 사람들에게 주로 사용하는 의미일 게다. <찌질한 위인전>에서 이번에 소개할 인물이야말로 어쩌면 철없다가 내포하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1.jpg


화가 이중섭. 1916년에 태어나 195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6.25전쟁 등 우리나라의 굴곡진 근대사를 모두 겪었던 인물. 그 암울하고 혹독한 시기.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는 살얼음판 같은 시대를 살면서 유독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사람. 너무나 어린아이 같고 천진난만했던 나머지 나이 값 못하는 어른으로 보이기도 했던 위인.


<찌질한 위인전>의 일곱 번째 인물, 이중섭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16 4 10,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일대의 부농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부()의 영향력이 평양 시내에까지 미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그의 집안을 일으킨 것은 이중섭의 할아버지로, 사업 수완과 정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섭의 아버지는 이러한 조부를 그리 닮지는 못했던지 성품이 문약한데다가 우울증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중섭의 부친 이희주는 결국 우울증에 정신분열증까지 더해져 나이 서른에 허망하게 요절하고 마는데, 이 때 장남 중석이 12, 여동생 중숙이 5세였다.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날 당시 중섭은 모친의 복중 태아인 상태로,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혹자는 말년의 이중섭이 정신분열증세로 고생했던 것을 부친의 요절과 연관 지어 유전적 병인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복(裕福)한 집안의 유복자(遺腹子) 이중섭


워낙 부유한 집안의 손()으로 태어난 덕에 이중섭은 무엇이든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랐다. 누릴 수 있는 모든 교육적 혜택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태어난 중섭은 형과는 열두 살, 누이와는 다섯 살 터울의 늦둥이이자 사실상 집안에서 태어난 마지막 핏줄이었으니 홀어머니인 모친 이 씨의 넘치는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물을 관찰하는 것에 유달리 애착이 강했던 중섭은 보통학교 4학년 시절 이미 회화의 뜻을 두었으며 졸업 후 오산중학에 진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바로 그 오산중학이다.


오산중학, 조선인으로서의 자각


2.jpg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지금의 의주지역)에 위치한 오산학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식민지하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다.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당시의 오산학교는 사상가 함석헌 선생이 30대 나이의 청년 교사로 재직중이기도 했으며, 학교 근처에는 조선의 3대 천재 중 하나로 불렸던, 그 때까지만 해도 변절하기 전의 춘원 이광수의 일가가 살고 있었다.


망해가는 아니, 이미 망해버린 나라에서 민족 교육의 뿌리를 자처한 오산학교에서 이중섭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키운다. 일제가 국어 말살 정책을 본격화했던 시기에 불과 중학생에 불과한 이중섭은 후배 김창복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창복아 나는 조선의 진짜배기 소만을 그릴 테다. 그리고 조선 언문을 남겨줄 테다. 너도 네 그림에 조선 냄새를 담아보아라.” 

-『이중섭 평전』고은



자라나는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 ,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 전인교육에 앞장섰던 오산중학으로의 진학은 이중섭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오산학교의 가르침과 함께 그의 첫 스승인 임용련과 백남순을 만났기 때문이다.


임용련과 백남순


임용련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조선을 탈출, 중국을 거쳐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정말 흔치 않은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이후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예일대의 지원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견문을 쌓을 수 있었고,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프랑스에 미술 유학을 와 있던 백남순을 만나 그곳에서 결혼했다. 임용련, 백남순 부부는 프랑스 화단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 출품하여 나란히 입선할 정도였다. 그 후 두 사람은 귀국한 뒤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그렇게 이중섭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3.jpg

임용련, 백남순 부부

임용련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그 후 생사를 알 수 없으며 

백남순은 자녀들을 데리고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회화에 뜻을 품고 있었던 이중섭에게 오산학교와 그곳에서 만난 임용련, 백남순 부부는 화가 지망생으로서 그가 조선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반대로 임용련에게도 이중섭을 제자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승으로서 그가 거머쥔 행운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재능은 청소년 시절에도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일가가 있는 원산으로 돌아온다. 고향인 평원에서 원산으로 터를 옮긴 장남 이중석이 원산에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중섭의 집은 여전히 그 위세가 대단했다. 중석의 기질이 문약한 그의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이중석은 사업 수완이 탁월한 청년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산에서 백화점을 경영하는 등 가세를 오히려 불려나갔던 그의 형 덕분에 여전히 이중섭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 금전적 형편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집안의 가장이나 다름없는 형 중석이 이중섭이 미술 공부를 계속하려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는 것 정도였을 뿐이다.


이중섭은 20세가 되던 해(1935)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학풍이 보다 호방한 동경문화학원으로 전학하여 미술 공부를 계속한다. 이미 그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어서 당대 일본 화단의 거물 중 한 사람인 동경문화학원의 쓰다 교수 또한 이중섭을 인정해 마다하지 않았다.


4.jpg

동경문화학원 재학시절의 이중섭


야마모토 마사코, 이남덕


이렇듯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작품 세계의 지경을 넓혔다. 그러나 이중섭의 일본 유학이 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1938, 이중섭은 같은 동경문화학원에 재학중인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이름의 일본 여학생을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 마사코는 훗날 이중섭이 귀국한 뒤 1945년에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와 원산에서 이중섭과 혼인한다. 태평양 전쟁 말 미군의 공습 속에 목숨을 걸고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 임시 왕복선에 몸을 맡겨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야마모토 마사코는 동경문화학원 재학 시절만해도 비교적 일본의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집안의 재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화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당시 일본에 비하면 폐허나 다름 없는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하여 한국 남자와 사는 것이란 여간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정책으로 인하여 조선인들이 강제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만 했던 시대에 마사코는 거꾸로 야마모토 마사코에서 이남덕이 되었던 것이다


5.jpg

이중섭과 이남덕의 결혼 사진


같은 해, 이남덕의 조국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했고, 이중섭의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이중섭에게도 조국의 해방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중섭 개인으로서는 바로 그 때가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모든 수난이 시작이었다.


가난의 시작


우리가 흔히 이중섭을 떠올릴 때 함께 연상하는 것은 지독한 가난일 것이다. 이중섭에 대한 우리의 그러한 인식은 일견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해방 후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는 1956년까지 줄곧 생활고에 힘겨워 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이중섭=가난이라는 등식은 맞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반을 펼쳐 놓고 보면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것이, 이중섭의 인생 40년 가운데 적어도 30년 이상 동안은 그가 남부럽지 않게 풍족한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중섭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5. 한반도가 해방의 환희에 들떠있던 시기, 그리고 이중섭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던 시기다.


이중섭은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도록 집안에서 한 번도 돈을 버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업가 기질이 탁월한 그의 형이 집안의 재산을 잘 물려받아 그것을 더욱 키워왔던 덕에 이중섭은 일본으로 유학도 떠나고, 일본에서 오히려 다른 한국인 친구에게 돈을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중섭은 결혼을 하기까지의 인생 여정에서 집안 덕을 꽤나 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문제는 해방 후 한반도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졌다는 것이고, 하필이면 이중섭의 집안이 38선 이북의 원산에 살고 있었다는 것일 게다.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진 이북에서 이중섭의 형 중석은 하루 아침에 인민의 적이 되었다. 그 동안 축적한 막대한 재산은 오히려 독이 되어 중석은 추악한 부르주아지가 된 것은 물론, 그 부의 축적이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조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제 부역 혐의까지 받았던 것이다. 악질 지주계급, 악질 친일파의 혐의를 쓴 이중섭의 형 중석은 원산 내무서에 수감된 후 처형되었다.(행방불명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중석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자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궁핍해져만 갔다. 그리고 몇 해 지나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화. 아내 남덕과 두 아들, 그리고 죽은 형의 장남인 조카 영진과 함께 한 겨울 원산 부두에서 부산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피난민이 된 이중섭은 이전까지의 삶에서는 전혀 마주할 수 없었던 가난이라는 상대와 지난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7.gif


그의 찌질함


서두에서 필자가 감히이중섭을 철없다 표현한 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어린아이와 같은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감성과 행동의 이중섭은, 그것이 예술적 감수성이나 인간적 순수함으로 발현될 때에는 그러한 점이 미덕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고, 처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자체로 찌질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중섭은 4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참으로,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았던 사람이다.


모성 편집


어머니의 뱃 속에서 아버지를 여읜 유복자인 이중섭은 모친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고 이중섭 또한 모성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다. 이중섭 평전』을 저술한 시인 고은은 이러한 이중섭의 모습을 모성 편집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한 일례 중 하나가 이중섭이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 4학년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성장이 조금 빠른 아이라면 사춘기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는 나이까지 엄마 젖을 빨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에나 흔한 일이 아니다. 이중섭은 보통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젊은 어머니와 떨어져 평양 시내의 외가에 기거했는데, 이따금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될 때면 어머니의 가슴에 파묻혀 떨어질 줄 몰랐다고 한다.


이중섭은 그 밖에도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모성 편집적 행동을 보였는데, 이러한 모성 편집의 근원은 여러 가지로 유추가 가능하다. 고은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한 젊은 어머니가 겪어야만 했던 여성으로서의 아픔에 주목한다. 대게 그런 상황에서 수절한 미망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쏟는 것일 테고, 죽은 남편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인 이중섭은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 것이다. 또한 곁에서 그러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중섭이 간접적으로 느꼈을 어머니의 아픔과 그로 인한 연민이 이중섭의 모성 편집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읜 이중섭 역시 결핍된 부성 때문에 더욱 더 모성에 천착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중섭의 모성 편집은 자연스럽게 이성에게 전이되었다. 그가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과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줄곧 어머니처럼 편한 여자가 좋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통학교 3, 4학년까지 어머니 젖을 빨았던 이중섭의 모성 편집은 마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구순기 고착 상태와 같은 모습이다. 이중섭은 그의 아내 남덕의 발가락을 특히 예뻐했는데, 그는 유독 아내의 발가락을 빨아주는 것을 좋아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중섭이 결혼한 뒤에 터진 전쟁으로 인하여 중섭은 어쩔 수 없이 칠십 노모를 원산에 두고 처자식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한다. 이중섭의 모든 행위와 정서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으나-필자가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구순기 고착 상태의 정신적 발현이 모성 의존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이중섭에게 있어 상당히 큰 충격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중섭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전이된 모성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일 게다.


몇 년 후 이중섭은 생활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면서 완전하게 모성과 유리된다. 독신 생활 중 들른 거제도의 바다를 보며 이중섭은 그제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확정을 짓는다.


그래... 어머니는 돌아가셨단 말야...... 어머니는 죽었어...... 어머니는 나를 남겨두고 죽었어...... 헤에.”

-『이중섭 평전』, 고은


이 사건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 이중섭은 정신분열의 병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정신 분열의 병인, 그것이 여태 잠복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중섭의 모성 편집이 그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은의 추론에 필자 또한 동의하는 바다.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분열의 와중에 식음을 전폐한 이중섭이 그나마 여성이 떠다 먹여주는 밥은 거절하지 않고 목에 넘겼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할 수 있을 것이다.


6.jpg

아내를 일본으로 보낸 후의 사진(가운데)


독신 생활 중 이중섭은 이따금 지인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유곽에 드나드는 일이 잦았는데, 이 때에도 이중섭은 굳이 성교를 하고 싶지 않은 날이어도 벌거벗은 여자를 눕혀 놓고 가만히 보거나 옆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중섭의 모성 편집만으로 그를 찌질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사람치고 찌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하편에서는 세상 물정에 관심도 없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중섭의 모습과 그의 철없음, 기행, 그리고 말년에 나타난 그의 정신분열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다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아마도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뱀발.


이중섭의 인생을 고흐의 그것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고흐는 제가 <찌질한 위인전>의 두 번째 인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죠. 제가 생각하기에 이중섭과 고흐는 아주 많이 닮기도, 오히려 반대이기도 한 화가들입니다.


비슷한 면으로는 집안에 우울증 혹은 정신분열을 겪은 사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중섭과 고흐 모두 정신 분열 혹은 착란으로 고생했다는 점일 겁니다. 또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죠.  모성에의 집착 또한 비슷한 면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인 면도 많습니다. 일단 고흐는 모성의 결핍에서 출발한 모성에의 집착이었다는 점에서 이중섭과 다릅니다. 또한 고흐는 이성에게 인기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번번히 사랑에 실패한 인물인 반면, 이중섭은 수려한 외모에 운동 실력도 출중하고 노래까지 잘해서 여성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았었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이중섭은 이남덕이라는 일생의 연인과 만나 결혼하고 서로 지극한 사랑을 이어나갔죠.


고흐는 일생에 유화를 단 한 작품만 팔 수 있었을 정도로 당대에는 별다는 주목과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이중섭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부터 기대와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전쟁통에도, 전후 폐허가 된 나라에 있으면서도 작품이 종종 팔렸습니다. 대구 미국공보원장 맥타가트라는 미국인은 이중섭의 은지화(담배 은박지에 그린 그림, 이중섭이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지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이중섭이 은지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유복했던 일본 유학시절부터였다고 합니다. 워낙 독창적인 화법과 다양한 시도를 즐겨했던 이중섭의 능력이 '가난'에 조금이라도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여 적습니다) 세 작품을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는데, 뉴욕현대미술관은 만장일치로 소장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하편에서도 소개할 것이지만, 이중섭의 작품과 화가로서의 재능을 흠모한 나머지 '돈은 모두 내가 델테니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달라'며 후원에 나선 재산가도 더러 있었습니다.


7.jpg

이중섭의 은지화 작품


막상 정리하고 보니 이중섭보다 고흐가 훨씬 비극적 삶을 산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고흐와는 다르게 이중섭이 겪어야했던 비극이 따로 있습니다. 식민지-해방-전쟁-분단이라는 시대의 비극이죠.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