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1. 09.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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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지난번에 올렸던 단편 SF 소설 <20년 전후>를 갖고 이야기를 해 보자.
7편에서 설명했듯이 시간여행은 여러가지 역설과 모순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자칫 잘못하면 말도 안되는 스토리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구조들 중 내가 원하는 상황을 선택해서 플롯을 만들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진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내적인 일관성만 유지하면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거다.
그럼 <20년 전후>의 타임라인과 인과율 구조를 살펴보자. 은근 헷갈리게 만드는 작중 인물들의 말과 달리 이 소설 속에 타임라인은 하나 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서 우원이 선택한 관점은 ‘과거로 돌아가도 현재나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바꾸기 위해 일을 벌인다 한들 변하는 것은 없고, 상황에 따라서는 도리어 내 그런 노력 때문에 현재가 지금의 모습이 된다. 극중에서 지미 웰즈는 밥이 범죄자가 된 걸 알고 이를 뒤집으려 과거로 돌아가지만, 실제로는 그 노력 자체가 밥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이런 우주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죽이려 들어도 무슨 이유에서든 결국 실패하게 되는데, 어떤 완벽한 작전을 짜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혹은 내 그 노력 때문에 되려 지금의 내가 태어나는 기초가 만들어지거나, 성공한다 한들 알고 보면 그가 내 진짜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등의 숨겨진 요소가 있어야 된다. 많은 SF작품들이 실제로 이런 시간여행 세계관을 사용한다.
이런 설정의 장점은 흥미로운 인과율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거다. <20년 전후>에는 아래와 같이 과거/미래 방향 통틀어 총 4번에 걸친 시간여행이 등장한다. 시간적 기준은 밥이 떠나고 10년이 지난 후, 즉 지미가 담배구멍 시간여행을 시작한 시점을 현재, 0으로 표기한다.
현재(0) -> 지미와 밥이 헤어진 날(-10) -> 현재(0) -> 지미와 밥이 만나기로 한 날(+10) -> 현재(0)
시간여행을 하는 지미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1박 2일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이지만 밥의 관점에서 지미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서야 나타난다. 두 사람에게 시간 자체가 달리 흐른 것은 없지만 지미의 시간여행 때문에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 거다. 한편 보스턴 경찰대가 나타난 후부터 보면 밥은 지미가 떠나자마자 경감에게 맡겨진 그의 편지를 받지만 지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현재로 돌아가 8년이나 지난 후에야 그 편지를 쓰게 된다. 이 상황은 아래에서 보듯 순환적 인과관계를 구성한다.
시간여행 SF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런 기묘한 플롯은 단지 논리적인 신기함 뿐 아니라 아니라 독특한 반전의 쾌감이나 허무감, 페이소스 등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시간여행의 논리로 반전시키는 묘미는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 로버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 등에서 맛볼 수 있으니 관심있으면 찾아 읽어보시라.
쓰다 보니 시간여행 소설 작법 비슷한 이야기가 됐는데 굳이 글쓰기에 도전할 생각이 없어도 나름 흥미롭지 않나 싶다. 그럼 이제 지미와 밥의 대화 중에서 농담처럼 등장한 단어, 평행우주에 대해 간략하게 함 접근해 보자.
평행우주론의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에 우주가 여러 갈래로 쪼개진다는 거다. 긴 세월동안 물리학계의 가장 황당무계한 이설로 치부되다가 요즘은 상당히 진짜 과학의 입지에 꽤 올라서 있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우원을 예로 함 보자.
평행우주론에 따르면...
1) 우원이 여기에 어떤 문장을 쓰느냐에 따라 우주는 갈라져 나간다.
2) 우원이 어떤 문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주가 갈라져 나간단다.
3) 우리의 모든 선택이 각각의 우주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는 지금 쓰는 글도 포함된다.
4)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자, 이렇게 저 위 ‘평행우주론에 따르면...’ 다음으로 우원이 쓸 수 있는 글의 종류는 사실 한계가 없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내용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겠지만 글타고 아예 쓸 수 없는 건 또 아니니 말이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선택이 존재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우주가 갈라져 나간다고 평행우주론은 이야기한다.
2010년에 개봉한 이 영화와 지금 이야기하는 평행우주론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 영화에서 차용한 소재는 신기하긴 하지만 과학은 아니고, 그로 인해
뭔가 헷갈릴 소지를 대중적으로 제공했다. 흠.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갈라진 우주는 다른 우주와 아주 비슷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다. 위 1),2),3)은 내용상 거의 차이가 없어서 쓰는 우원이나 읽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허나 여전히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원이 4)나 5)를 썼다면 어떨까.
그로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서 독자 열분들 중 누군가가 우원의 헛소리에 분노해서 악플을 남기고, 그 악플이 씨가 되어 현피를 뜨게 되고, 전국 싸움신인 우원의 근성어린 주먹에 그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우원은 살인범으로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 참 둘 다에게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개인적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를 엄청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원이1)2)3)중 하나를 선택했던 우주에서는 살인을 저지르는 대신 글쟁이로 승승장구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급기야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 통일이라는 대박을 끌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문제의 청년 악플러는 잠깐 동안의 철없는 악플 행위를 중단하고 맘잡아 결혼해서 애를 열셋이나 낳는데, 그 38대 손자가 천 년 후 우주의 황제로 등극할지 알게 뭐냐는 거다.
이래저래 악플은 안좋은 거라는. 사진은 우주의 황제
머 하다보니 좀 과장이 지나치긴 했다만 이렇듯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소위 나비효과를 거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근데 실은 나중에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느냐와는 상관없이 그 선택들 자체가 이미 다른 우주를 생성하고 있다. 왜냐면 한 우주에서 우원이 1)과 2)를 동시에 쓰는 일은 원리적으로 벌어질 수 없기 때문인데, 이건 글의 내용하고는 무관한 일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과 관련해서 중요한 건 여기서 ‘우주가 갈라진다’는 말은 무슨 상징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평행우주론을 주창하는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와 태양, 은하, 은하단, 우주 거대구조를 포함하는 직경 수백억 광년의 전체 우주가 그때마다 ‘실제로’ 갈라진단다. 이런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게 진지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 바탕에 더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공포의 양자역학.
양자역학 관련 방정식의 일부.
0, 1, X 등 우원이 아는 문자도 가끔 보인다.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물리학을 양분하는 두 축이다. 이 복잡한 과학 원리에 대해 여기서 우원이 길게 설명하는 건 좀 무리고 다음에 벙커에 전문가와 함께하는 자리를 함 마련할 계획이니 기둘리시라. 암튼, 텔레비젼을 가능케 하는 실용적인 측면과 우주의 실체성을 흔들어놓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 측면이 공존하는 도깨비같은 분야가 바로 이넘이다.
양자역학 관련해서 대중적으로 제일 유명한 예로 열분들도 들어봤음직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는데, 걍 이걸 통해 평행우주론에 접근해 보자. 양자역학의 주류라고 할 코펜하겐 해석이 주장하는 바는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야만 비로서 실체가 정립된다는 건데,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와 관련해서 1935년에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여기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는 밀폐된 상자가 있다. 이 물질은 1시간에 50%의 확률로 핵분열을 일으키는데, 그러면 알파입자가 방출된다. 상자 안에는 가이거 계수기가 들어 있어서 만약 알파입자가 검출되면 연결된 망치가 작동, 청산가리가 든 병을 깨트리고 그 개스를 맡은 고양이가 죽는다. 따라서 원리상 고양이의 생사 확률은 반반이 되고, 1시간 후에 상자를 열기 전까지 우리는 이 불쌍한 동물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내가 속을 들여다보든 안 보든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고 상자를 열기 전에 이미 그 결론은 내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상황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고 다만 어느 쪽인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걍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적용하면 이 상자 속의 고양이는 관찰자가 상자를 열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죽은 것과 산 것이 중첩된 상태’, 즉 Dead or Alive 가 아니라 Dead & Alive 상태에 놓여 있다. 개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상태에 놓여있다는 게 중요한데, 관찰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에 중첩 상태의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실체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근데 아무리 양자역학의 괴이한 원더랜드라 한들 생물이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다고 주장하는 건 좀 너무하지 싶은 거다. 그래서 실은 슈뢰딩거가 이 예를 갖고 온 이유도 코펜하겐 해석의 이런 황당한 면을 - 원래의 양자역학은 소립자 영역에서의 이론이고 고양이 같은 큰 물체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 반박하기 위한 거였는데, 복잡무도한 고등수학의 세계인 양자역학에 친숙한 고양이가 동원된 이 사고실험의 대중성과 상징성 덕에 되려 양자역학의 흥미로운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암튼,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평행우주론이다. 원체 SF적인 느낌이라 최근에 나온 것 같지만 이미 60년 전인 1954년에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휴 에버렛 3세가 논문을 통해 제안한 거다. 여기에 따르면 상자 안에서 1시간 안에 핵분열이 일어나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주는 아예 둘로 쪼개져 버린다. 즉,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고양이가 죽은 두 가지의 우주가 생겨나는 건데, 이 방법을 통해서라면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괴이한 상태를 피해갈 수 있다.
물론 그 결과 생겨나는 우주관은 더 괴상쩍게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논리적 모순에 빠지진 않는 거다.
원체 인기있다 보니 다양한 패러디 물도 나돌고 있다.
흰쪽으로 보면 alive, 검은 쪽으로 보면 dead.
이렇게 ‘관찰’을 통해 갈라지는 우주는 앞서 말한 ‘선택’에 의해 갈라지는 우주와 비슷하다. 모든 선택 행위에는 사실상 관찰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우주가 갈라지다니. 그것도 모든 존재가 모든 선택을 할 때마다 갈라진다? 그럼 이 순간 우원의 단어 선택, 열분들의 코 후빌까 말까 선택, 시리우스 근방 행성에 사는 육식동물의 먹이 선택, 안드로메다 은하에 사는 외계인의 낮잠이냐 섹스냐의 택일 등등이 매번 우주를 갈라놓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우주가 매 밀리세컨드마다 무한히 많아지고 있다고?
어처구니 없어 보이지만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게 사실일 ‘수’ 있다고 그들의 무기인 수학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거다. 다만 이 갈라진 우주들 간에 소통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따라서 우원은 노벨문학상을 받고 통일의 대박을 성취하는 스스로의 영광된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게 됐다.) 근데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말은 검증 불가능하다는 말의 다른 뜻이기도 해서, 이런 식이면 아무리 논리나 수학이 그럴싸 해도 과학의 필연적 과정인 검증절차를 거치지 못한다. 이 점이 평행우주론의 무기이자 - 틀렸다고 확인할 수 없으니 - 한계 - 옳다고도 확인할 수 없기에 - 로 일컬어진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얼마전 개봉했던 <소스코드>나 선댄스 영화제
개봉작인 <어나더 어쓰> 등의 작품들이 평행우주 관련 주제를 다루고 있다.
소스코드는 많이들 보셨겠고 에스에프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잘 엮어낸 <어나더 어쓰>도 열분들게 추천하는 바이다.
여자 주인공 예쁘다.
우원의 소설 <20년 전후>로 돌아가 보면, 비록 등장하는 타임라인은 하나지만 어떤 평행우주 속에는 지미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거나 아예 담배구멍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거다.(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밥은 선량한 사람이 돼 있겠지만, 평행우주 사이를 넘나들지 못하는 한 그 점은 실용적 의미는 없다. 그건 ‘그런’ 우주에 사는 지미와 밥에게만 적용될 뿐 ‘이’ 우주에 있는 지미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미가 이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이유 자체가 이미 과거에 특정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시간여행의 진짜 속성에 근거해서,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바꾸는 게 실은 가능하다고 가정하자. 만약 그게 된다면, 그런 일은 논리적으로 보면 다른 평행우주로 갈아타는 일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만약 지미가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밥에게 목걸이를 주는 걸 막을 수 있다면 그 우주 속에서 밥은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지미가 목걸이를 준 범죄자 밥의 우주가 아예 소멸되는 건 아니다. 평행우주론은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늘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우주에서 지미의 과거 변경 행위와는 별개로 지미가 목걸이를 준 상태의 우주는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고, 거기서 밥은 여전히 범죄자가 되고 둘다 불행한 미래를 맞는다. 다만 ‘이’ 지미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뿐이다. 반대로 보면 ‘이’ 우주가 아예 사라진 게 아니라 다만 거기 있던 지미가 과거의 다른 선택을 통해 ‘저’ 우주로 옮아 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좀 복잡하지만 이런 식으로 평행우주 사이의 교통이 실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과거로의 시간여행부터 가능해야 하니 간단치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평행우주들 사이의 다리는 어쩌면 공간이 아닌 시간적인 것에서 형성될지도 모른다.
요거 우원의 아이디언데 노벨문학상 대신 물리학상을 노려볼까나;
근데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평행우주가 정말 존재하고 무한히 많은 내가 있고 나의 모든 가능한 선택이 그 각각의 우주에서 다 벌어지고 있다면, 나란 인간 머 한 세상 어떻게 살던 마찬가지인거 아니냐?
이런 주장이 등장하는 어떤 영화도 본 적이 있다만, 요거야말로 순전한 착각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어느 우주에 어떤 파토가 살고 있던 ‘나’는 지금 여기 하나 밖에 없다.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졌던, 어느 시점까지 나와 똑같이 행동했던 상관없이 바로 지금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단지 이 존재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우주들에서 무한 수의 파토가 얼마나 행복하던 고통받던 이 내가 실제로 체험하지 않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남들 눈에는 그들과 내가 비슷하거나 똑같이 보일 지 몰라도 내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타인일 뿐이다.
음, 말 나온 김에 다음 시간에는 그 쪽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인간복제부터 시작해서 뇌 속 정보를 컴퓨터에 업로드하거나 아예 통째 기계몸으로 바꿔 영원히 산다는 류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따라오는 혼란, 그리고 질문.
...‘나’는 도대체 뭘까.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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