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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생각난다. 젊은 남자 영어 선생님이었다. 미혼이었고, 외모도 깔끔한 편이어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젊은 선생님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늘 뭔가를 조르거나(일찍 끝내주세요,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불만을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날 주제는 두발 규정이었다. 앞에 앉은 학생 몇몇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학교는 단발머리를 할 수 있잖아요. 왜 우리만 숏커트 머리를 해야 해요?”


선생님이 다정하게 답했다.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월요일 조회 시간에 너희가 운동장에 쫙 줄을 서잖아? 그때 조회대 위에서 보면 얼마나 깔끔한지 몰라! 정말 보기가 좋아.”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하며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떠들었다고 허벅지를 다섯 대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얼얼했다. “뭐 그런 거지같은 말이 다 있습니까? 우리가 당신들 보기 좋으라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라고 멋지게 반항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찍소리 못하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혼자 난리를 쳤다. 인기 많은 남자 선생님이어서 그랬는지 큰 호응은 없었다.


중간고사 이후였나. 선생님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시험 문제도 쉽게 냈는데 말이야. 점수가 50점도 안 되는 애들은 사람의 두뇌를 가졌다고 보기가 어려워. 유인원 정도 쯤 이겠지” 쉬는 시간이 됐는데 한 친구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늘 끝에서 5등 안에 들던 친구였다. “영어 선생님이 나를 두고 한 말이야. 내 점수를 아는 거야. 분명히 나를 봤어...” 전교에서 손꼽히는 날라리에, 맷집도 좋던 친구가 그렇게 풀죽어 하는 걸 처음 봤다. 며칠 후 그 친구는 느닷없이 모히칸 머리를 하고 학교에 나타났다. 우리 학교는 ‘여자도 귀 위까지 머리를 쳐올릴 것’ 이 교칙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친구가 귀 위를 넘어, 정수리까지 머리를 쳐올리자 선생님들은 난리를 쳤다. 그 친구와 길을 걸으면 남학생들이 “재수 없다”고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50점 이하는 사람도 아니야" 라는 말. 그 시절 학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너무 흔해서, 늘 최하위권 성적을 내던 그 친구와 가깝지 않았다면 나는 기억조차 못했을 거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90점을 받은 학생과 40점을 받은 학생이 기억하는 교실의 풍경은 너무나도 다르다. ‘너희들이 짧은 머리를 하고, 한 줄로 서 있으면 참 보기 좋아’라는 말은 내가 학창 시절 들은 최악의 멘트 중 하나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 말을 기억조차 못한다. 그 정도는 귀싸대기, 성적에 관련한 폭언과 차별, ‘니 아버지 뭐하시노’ 류의 하드코어한 기억들에 차곡차곡 밀려나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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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학부모들이 학교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본인 학생 시절의 기억만으로 학교와 교사들을 예단한다’, ‘사람들은 일단 교사라면 까고 본다’ 일리 있다. 억울한 심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가지 정도는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내 또래의 교사들은 학생이었던 시절, 성적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늘 상위 5% 안에 들던 사람들이다.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비교적 모범생들이었던 교사들이 기억하는 학교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잔인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자기 어렸을 때 학교만 알지, 요즘 학교 돌아가는 모양새는 몰라’ 라는 의견의 맹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부모들이 학교를 모른다고 하지만, 교사인 우리도 정작 옆 반 교실의 상황은 잘 모른다. 특정 교사가 ‘교사로서’ 어떤 사람인지는 동료교사, 학생, 학부모의 관점이 몹시 다를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늘 학부모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들이 학교에 대해 더 잘 알도록 도와주지는 않는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상처를 ‘괴담’ 정도로 치부하는 교사들도 있다. 과거 사회가 이상했기 때문에, 학교도 당연히 그만큼 이상했던 것 뿐 이라고도 한다. 어찌보면 맞다. 교사들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가치와 규범을 참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래서 일단 이상한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 속에서 어떤 교사들은 무섭도록, 덩달아 날뛴다. 제도, 구조, 문화가 문제였으니 교사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주장을 하고 싶거든 교사를 지성인, 전문가라고 보는 관점부터 스스로 거뒀으면 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덕의 상실>의 저자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말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사인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 이야기의 자취를 걷다 보면, 학교와 교사들을 향한 외부의 불신을 막연한 무지나 터무니없는 비난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학부모들에게 죄의식을 갖거나, 굽신거리자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간의 역사, 경험과 관점의 차이, 자기방어 기제 등을 직시하고 학부모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교사와 학부모는 피해의식에 뒤얽혀, 지금처럼 늘 평행선만을 달릴 것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이 질문 속의 나는 참 작고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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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교사를 말한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SickAlien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