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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1. 15. 수요일

편집부 홀짝







 








'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 군'


'구촌(이중섭의 호, 필자 주)의 가장 크고 유일한 기쁨인 남덕 군'


'나의 거짓 없는 희망의 봉오리 남덕 군'


'나의 귀여운 즐거움이여. 소중한 나만의 오직 한 사람, 남덕이여'


'나 혼자만의 귀여운 남덕'


'나의 살뜰한 사람.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남덕 군'


'나의 소중한 특등으로 귀여운 남덕'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오직 하나인 남덕 군'


-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의 제목,

『이중섭(1916-1956)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지음/박재삼 옮김

 

상편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이중섭의 원산 생활은 전쟁과 함께 막을 내린다. 해방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었을 때에도 이중섭은 원산에 남았다. 이는 이중섭의 사상이 공산주의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중섭은 정치와 사상에 있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중섭이 원산에 남은 이유는 그저 원산이 여지껏 가족과 함께 살아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오히려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크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 동무, 이 그림을 설명해 보오.”


중섭은 이제까지 이런 굴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림을…… 설명한단 말이오.”


그게 동무의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이오. 조선 인민은 조선 인민이 아는 예술만을 존중하오. 인민이 알도록 어서 설명해 보오.”


그는 약간 성난 듯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소, 이 소는 우리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소요. 이 아이들은 장차의 우리나라를 뜻합니다."


아이들이 둘이군. 흐음, 어느 것이 북조선이고 어느 것이 남반부요?”

-『이중섭 평전』, 고은


위에 소개한 일화에 나타나듯 예술가 이중섭이 공산주의 사상 아래에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당시의 남한 사회가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폭 넓게 허락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노래가사에 나오듯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난민들이 배에 올라탔던 바로 그 겨울,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다시 후퇴하던 1950년 혹한의 그 겨울에 이중섭 일가는 피난길에 오른다. 넘치는 피난 인파 속에 배에 올라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이중섭은 모친과 형수를 원산에 남겨둔 채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첫째 아들을 생후 1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잃은 이중섭에게는 그 후 얻은 태현(47년 생)과 태성(49년 생)이라는 어린 아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중섭의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험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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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의 지독한 삶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피난민 수용소에 갇힌 이중섭과 그의 가족. 피난 수도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들이 그러했듯 이중섭 일가 또한 전쟁통에 부산에 난입한 불청객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의 통과의례인 몇 가지 조사를 마치고 풀려난 이중섭은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물론 제 한 몸 뉘일 곳을 찾는 일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부둣가에서 날품을 팔고 부산 시내를 헤매고 돌아다녀도 끼니를 거르기 일쑤. 아이들은 점점 피골이 상접해 가고, 한 때 프랑스 미술 유학을 꿈꿨던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여대생 남덕은 거지꼴이 된 피난민 처지가 되었다. 이중섭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한다. 이 때 두 아들의 나이 각각 다섯 살과 세 살이었다.


제주도 생활, 가족과의 마지막 행복


제주도로 내려왔으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바닷가의 어느 마음씨 좋은 부부의 집 별채 헛간을 얻어 지낼 수 있었다. 달랑 한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만약 궁핍함에 도가 있다면 이중섭에게 피난 생활은 도를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친 것이었을 게다. 제주도에 와서도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은 주인집에서 보리밥을 한 웅큼 얻어 끼니를 해결했고, 양파 밭에서 날품을 팔고, 밭에 버려진 야채나 보리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마저도 없으면 중섭은 아들을 업고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았다. 아내의 위장 질환이 가볍지 않았으나 변변한 약을 쓸 돈도 없어 조개껍데기를 빻은 가루를 먹는 방편으로 궁색하게 치료의 구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중섭의 형 중석의 가족들 중 유일하게 중섭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 조카 영진(죽은 형의 장남인 영진이라도 남으로 내려 보내 살리고자 하는 모친과 형수의 의지였다고 한다)은 부산에서 중섭과 헤어진 후 서귀포에서 오랜만에 그들과 해후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서귀포에서 내가 숙모를 처음 뵈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숙모는 일본에서 건너올 때 입고 온 짙은 곤색 바지와 곤색 블라우스를 그때까지 입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해질 대로 해져서 누가 보아도 거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숙모의 팔을 붙들고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숙모님! 숙모님! 제가 꼭 옷 한 벌 해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울었지요.”

-『이중섭 평전』고은


비록 생활은 궁핍하였으나 제주도에서 지낸 7개월의 시간은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누린 사실상의 마지막 행복이었다. 어린 아들을 무등 태우고 해변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게나 조개 따위를 잡아 오기도 했다. 연약해진 아내가 안쓰러웠으나 전쟁의 포성도, 부산 바닥의 거친 분위기도 없는 제주에서 그나마 안빈낙도하며 살 수 있었다. 화가 이중섭은 액자 없이 남에게 그림을 내어주는 일도, 아무 그림이나 남에게 주는 일도 없었지만 제주에서만큼은 자신의 그림을 먹을 것이나 술 한 잔과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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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제주도에서 쓰던 방


넉넉하지 않은 화구로 이중섭은 제주의 곳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그후 가족과 헤어지고 난 뒤에도 이 시기의 추억을 살려 아이들과 보냈던 제주에서의 장면을 그렸다. 인간 이중섭에게나 화가 이중섭에게나 제주에서의 짧은 생활은 그렇게 적지 않은 의미를 남겼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중섭은 다시 부산에 올라올 결심을 한다. 제주 생활 고작 7개월. 사계절을  다 보내지도 않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 그림을 주고 받은, 목돈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돈을 가지고 이중섭 일가는 다시 피난 수도 부산에 상경한다.


가족과의 이별


부산에 돌아왔지만 이전에 비해 사정이 나아졌을 리 만무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피난민 수용소에 맡기고 날품팔이를 하는 생활의 연속. 신문 삽화를 그려 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제의도 거절, 제주에서 그린 그림을 80만환이라는 제법 목돈에 팔았지만 그마저 50만환은 아내 남덕이 조카 영진의 대학 등록금으로 떼어 주고-부창부수가 따로 없다- 나머지는 신세 진 친구들에게 술 한 잔씩 사주고 나니 끝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섭의 가족이 범일동 판자촌에 사는 친구 김종영에게 얹혀 살게 되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렇게는 계속 살 수 없다고 먼저 생각한 것은 아내 남덕이었다. 이남덕은 중섭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수용소에 들어가면 머잖아 일본행 배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이중섭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일본에 보내고 자신까지 머잖아 뒤따라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 세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잘못된 선택이 되었다. 이중섭이 가족을 보내고 한국에서 혼자 살아가기에 조국의 실상은 너무나 척박했고, 그것을 헤쳐나가기에 이중섭은 그만큼 강하지도, 모질지도 못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보내고, 그날 밤 이중섭은 고향 후배인 김인호와 술을 마신다.


인호 형(이중섭은 자신보다 어린 동생에게도 곧잘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필자 주), 나는 남덕이를 버린 죄인이야. …… 남덕이를 보내다니…… 남덕이는 이쁜데.”


나는 죄인이야……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로…… 마누라와 새끼를 굶겨 죽인 죄인이야…… 세상을 속인 죄인……이야. 나 같은 것을 누가 용서하겠어. 인호 형 안 그래.......”


피난! 흑흑, 헤헤, 피난! 한이 너무 많아!”

-『이중섭 평전』, 고은



철없는 남편


원산에서 모친과 헤어진 데 이어 부산에서 처자식과 생이별을 한 중섭은 그 때부터 며칠이 멀다하고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편지를 부친다. 글의 서두에 편지의 제목을 옮긴 것과 같이 애정과 그리움이 넘치는 내용으로 편지를 가득 채운 이중섭은 편지지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직접 그린 은지화를 동봉하기도 했다. 이중섭은 자신이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모든 애정 표현을 편지에 담았다. 아내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반드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부가 때로는 너무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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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편지


남덕과 아이들이 일본에 당도했을 때, 그 때는 이미 그녀의 친정까지 가세가 기운 상태였다. 노모와 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남덕은 삯바느질로 한 푼, 한 푼 돈을 모아 나갔다. 이 모든 게 다 남편 중섭과 함께 살날을 고대하며 감수한 고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덕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터진다.


남덕은 빚까지 져가면서 돈을 만들어 그 돈으로 일본 서적을 대량 구매한다. 일본 서적은 당시 한국에서 꽤 값을 쳐서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본에 있는 이중섭의 오산 시절 후배 마 씨에게 건네주어 한국에서 팔 요량이었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다. 마 씨가 잠적한 것이다. 졸지에 남덕은 27만엔을 빚지게 되었다. 거금이었다.


이중섭은 그래도 자신만만하다. 편지로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곧 마 씨를 잡아 돈을 다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친다. 실상 마 씨를 잡을 뾰족한 방법도, 잡는다 해도 그 돈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이 돈을 가지고 일본을 돌아갈 거란다. 당시 이중섭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허세에 가깝다.


남덕은 타들어 가는 속을 부여잡고 삯바느질로 하루를 보냈을 게다. 어려운 살림에 빚까지 져가면서 마련한 피 같은 돈을 떼이게 생겼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남덕은 당시 건강마저 악화되어 이중, 삼중의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중섭은 편지로 아내에게 왜 자주 편지하라는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보챈다. 우표값이 없어서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는 남덕의 말에 중섭은 그마저도 제대로 믿지 않고 되묻는다. ‘남덕만이 살아가는 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오? 모든 사람도 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거요라며 아예 훈계조로 아내를 다그친다.


철부지도 이런 철부지가 없다. 처자식을 현해탄 건너에 보내놓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울부짖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그저 사흘에 한 번 편지를 보내달라 애원했는데 그걸 들어주지 못하냐며 보채는 철없는 남편 이중섭만 남아있다.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 마련한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누가 맘 편히 편지로 사랑타령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후 결국 마 씨를 붙잡았지만 받아낸 돈은 27만엔 중 8만엔 뿐. 그 와중에도 중섭은 편지로 남덕에게 기한 내에 잔금을 다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쳤지만, 그 뒤 마 씨에게서 받아낸 돈은 한 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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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이남덕과 아들 태성, 태현이 일본에서 찍은 사진


같은 해인 1953 7, 중섭은 절친한 친구인 시인 구상의 도움을 얻어 일본행 배에 몸을 싣는다. 구상이 지역 국회의원에게 변통하여 중섭의 선원증을 발급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구상에게 여비까지 받은 중섭은 제법 거나하게 지인들과 송별회 자리까지 갖고 일본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다. 당시 이중섭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기뻐하고 들떠있었다 한다.


그렇게도 그리던 가족과의 해후는 이중섭이 예상과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장모의 집에 살고 있는 처자식을 만나러 한달음에 달려간 이중섭을 기다린 것은 장모의 냉대였다. 당연히 그도 그럴 것이, 기껏 시집 보낸 딸이 반 거지 꼴이 되어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일본에서도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그 어느 어미가 사위라는 사람을 반길 수 있겠는가. 결국 중섭은 처가에 피곤한 몸을 뉘지도 못한 채로 아내가 집 근처에 얻어다 준 이웃의 방에 며칠을 기거하게 된다.


남덕은 오히려 남편을 모질게 대한 어머니를 나무랐다고 한다. 그렇게 모친과 남편을 오가며 중재한 끝에 모친의 화는 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섭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사위이자 남편으로서, 그리고 두 아들의 아비로서도 영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지 한국으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 다시 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게 중섭은 1주일 만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송별회까지 하며 영 이별인 줄만 알았던 중섭의 친구들이 돌아온 중섭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중섭이 생전 가족들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이중섭이 당시 일본에 약 1주일 간 머물다 다시 돌아온 것을 두고 한국에서는 위에 소개한 것과 같이 이중섭이 자의로 한국에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인 이남덕 여사는 그녀의 나이 70세가 넘어 진행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중섭이 자의로 한국에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당시 선원증을 내주었던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배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이라 증언했다. 어차피 일본에서 명망 있는 화가로서 활동하려면 그러한 오점을 남겨서는 안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덧붙이며 그들이 중섭의 다짐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설령 이남덕 여사의 기억이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당시처럼 밀입국이 횡행하던 시기에 이중섭이 그러한 다짐을 그렇게 꼭 지켰어야 했냐는 것이다. 어머니마저 북녘에 남기고 남으로 내려온 이중섭에게 아내와 자녀가 갖는 존재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렇게 그리워 마지않던 아내, 사흘에 한 번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릴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했겠으나 점점 한국인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이 녹록하지 않아갔던 당시의 정황을 비추어 보면 선뜻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이중섭은 남덕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량한 우리 네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남 한둘쯤 죽여서라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이중섭은 그렇게 한국땅으로 돌아왔다.


늙어가는 어린아이


이중섭의 인생에 있어 한 가지 축복이라 할 만한 것은, 그의 주변에 그를 돕고자 하는 지인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상처럼 이중섭의 평생에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던 인물도 있고, 부산이나 통영, 대구, 서울에 머물 때마다 그를 사랑하는 혹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돕고자 직, 간접적으로 애써왔던 것이다. 통영에서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 책임자인 유강렬도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유강렬은 기술원 한켠에 이중섭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하였으며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때로는 소규모 개인전이라도 열 수 있도록 돕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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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전후 어려운 생활상에도 불구하고 중섭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통영의 한 갑부는 중섭에게 자신의 딸과 혼인하면 저택도 지어주고 작업실도 마련해주는 등 평생 그림에만 몰두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하겠노라고 제법 통 큰 제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가 있는 중섭은 이를 거절했지만 말이다.


중섭의 곁에서 그를 돕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는 딱 그만큼, 한편으로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이롭기는커녕 해롭기가 독과 같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딱히 이중섭에게만 해당되었던 일이 아닐 것이다. 전쟁이란 본래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내기 가장 쉬운 환경이니까. 전쟁이 끝난 후의 폐허에서 타인을 대할 때 온전한 선의만을 갖고 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법이다.


이중섭 개인에게 있어 불행은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은 곁에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내칠 정도로 그가 약지도 모질지도 세상 물정에 밝지도 않았다는 것일 게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내치는 법이 없다.


중섭은 가족을 일본에 두고 한국에 돌아온 뒤, 작품 활동에 열의를 다하기도 했다. 돈을 벌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노라 약속했던 것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중섭의 그림은 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외국인들도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볼 만큼의 가치가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그러한 중섭의 작품을 알리고자 노력했던 지인들이 있었다.


비록 늘상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의 그의 작품은 꽤 좋은 가격에 그의 예술적 경지에 비하면 아주 합당한 가격이라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팔리기도 했다. 이중섭이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자 할 때는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지원을 받아 적지 않은 돈을 전해 준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중섭은 제대로 돈을 모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목돈이 이중섭의 수중에 긴 시간 머문 적이 없었다. 이중섭이 돈을 들고 나타날 때면 온갖 사람들이 중섭에게 달려들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섭이 빈털터리 일 때 철저하게 외로웠던 것은 아니나 꼭 주머니에 돈이 두둑할 때면 유독 장삼이사들이 이중섭의 주위를 둘러쌓다.


중섭은 그럴 때 마다 술값으로 돈을 탕진했다. 이중섭의 경제 관념은 평전의 저자 고은의 말을 빌리면 거의 백치에 가까운 것이어서 500원어치 술을 먹으면 천 원을 계산하고 나오기도 하고 그 이상을 지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돈이 수중에 머물 리 없다. 이중섭의 주변인 중 어떤 이들은 중섭의 돈을 빌린다는 명목으로나 도와달라는 명목으로 뜯어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꿈에 그리는 가족과의 상봉을 위해 작품에 몰두했다가도 어렵게 얻은 돈을 이런 식으로 탕진해버리니 한 동안 손에서 붓을 놓는 일도 잦았다. 이중섭을 잘 아는 이가 말하길 그에게는 늘 매니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 스스로 돈을 모을 줄도 하다못해 있는 돈을 지킬 줄도 몰랐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어머니도, 아내도 없었다.


세상 물정에도 어둡고 경제 관념도 없는 데다 살아 오면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돈 관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다. 그러니 가족과 함께 살고자 돈을 모으겠다는 다짐을 수백 번은 했을 그가 실상 전혀 다른 행동과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그를 의지박약의 인간으로 내모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이중섭은 그저 늙어가는 어린아이'-고은의 표현을 빌렸다- 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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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작품전 목록 표지

 

마지막 기회, 미도파 화랑 개인전


1955 1 18일부터 1 27일 까지. 이중섭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형 개인전을 연다. 서울 미도파 백화점의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전에서 그는 자신의 유화 41, 연필화 1, 은지화 등의 소품 10여 점을 전시했다.


성황이었다. 전시회 기간 내내 화랑은 인파로 붐볐다. 전시된 작품에 판매 예약이 되었음을 알리는 붉은 딱지가 26점에나 붙었다. ()후 폐허가 된 서울의 암담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한 성과였다. 이에 이중섭도 적잖이 고무되었다. 그 돈이면 아내 남덕의 빚도 갚을 수 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들의 자전거도 사줄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이제는 큰 사이즈의 대작을 그려낼 작업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 되었다. 꿈에 부푼 이중섭은 벌써부터 친구들과 술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때 이른 자축은 성급한 것이었다. 이중섭은 미리 알지 못했다. 스물 여섯 작품에 붙은 붉은 딱지의 상당수가 허수(虛數)였다는 것을. 허영심 많은 자들이 전시회 분위기에 휩쓸려 붙인 공허하고 붉은 약속이 액자에 붙어있다는 것을.


이중섭은 액자 속에 자신의 예술성을 담아낼 능력은 출중했으나 예약된 작품을 관리할 능력도, 받아내야 할 대금을 거두어들일 능력도 모자랐다. 그의 친구 몇이 함께 발품을 팔며 수금을 위해 돌아다녀도 전시회장에서 호기롭게 작품을 예약한 사람들은 이미 그때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전시회 기간, 이중섭은 어쩌면 처음으로 푸른 꿈을 꾸었을 테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다. 이중섭의 꿈을 이루어 줄 것만 같았던 미도파 전은 오히려 이중섭의 오랜 악순환의 종지부를 찍을 기세로 중섭을 허물어버렸다.


아내와 헤어지고 난 뒤 이미 정신분열의 기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던 이중섭이었다. 혼탁한 정신을 붙들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그는 이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듯 했다. 빈털터리가 된 이중섭은 구상의 권유로 팔지 못한 그림을 안고 대구로 내려간다. 대구 모처의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중섭은 같은 해 5월 대구에서 다시 한 번 개인전을 열지만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실망과 분노만이 남았다.


실망과 분노, 정신분열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이중섭은 분노와 증오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주도 피난민 시절, 함께 술을 마시던 이가 취해 이 피난민 새끼라고 욕을 퍼부어도 그저 소주잔을 따뜻하게 응시하다가 헤에하고 웃고 마는 사람이 이중섭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의 천진함은 오히려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먼 친척 뻘 되는 위상학은 촌수와는 상관 없이 이중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 또한 화가였으나 미군부대 내에서 초상화를 그려 큰 돈을 벌었다. 중섭이 서울에 기거할 때 하루는 위상학이 자신의 저택에 이중섭을 데리고 와 밤새 술을 마셨는데, 중섭의 빈천한 삶이 아무래도 그를 자극했던 것 같다. 큰 돈을 모으긴 했으나 예술가로서의 죄의식을 늘상 가지고 있었던 위상학은 이중섭과의 술 자리가 있은 지 한참이 지난 후이긴 하나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것이 꼭 중섭과의 일과 상관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중섭과의 그날 밤, 위상학은 부끄러웠을 게다. 이중섭의 천진함은 그를 대하는 사람에게는 거울을 마주하게 하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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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자화상


보통의 마음씨 여린 어린아이가 밖에서 누군가에게 몹쓸 말을 들으면 아이는 자신을 모욕한 상대에게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앞서 눈물을 보이고 만다. 그렇게 엉엉 울면서 아이는 곧장 집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엄마! 내가 정말 주어 온 자식이야?” 몹쓸 소리를 들은 아이는 몹쓸 소리를 한 상대에게 증오와 분노를 표출시킬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부모에게 달려와 확인 받는 것이다.


현역 육군 대령으로 대구에 살고 있는 이기련은 이중섭의 술 동무 중 하나였다. ‘포대령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어느 날 중섭과 술을 마시다 예의 그 짓궂은 폭언을 중섭에게 날린다. “너는 왜 구상처럼 해방 직후 월남하지 않았지? 너 빨갱이지?”


중섭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포대령의 말에 상처를 받은 이중섭이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다음날 대구 경찰서 사찰계에 자진 출두한 것이다. 그리고는 사찰계장에게 대뜸 한다는 말이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주시오였다.


경찰서를 발칵 뒤집은 이중섭이 친구 이름을 대라는 경찰의 말에 꺼낸 이름은 구상이었다. 구상은 당시 대구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던 터라 경찰에서 즉각 연락을 취해 오래잖아 구상이 경찰서로 찾아왔다.


중섭! 이게 왠일이야?”


“……”


웬일이야?”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 좀 밝히려고 왔어. ……포대령이 나더러 자꾸 빨갱이라고 해서……”


<중략>


이 사람아, 그렇다고 여기까지 자진해서 올 것은 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 친구인 포대령조차 나더러 빨갱이라고 하는데.”


가세. 빨갱이가 안 되는 술 한잔 하세.”


그래. 헤에.”

-『이중섭 평전』, 고은



이중섭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다면이중섭을 정신분열에 이르게 한 그 실망과 분노는 무엇인가.


사람의 정신이 허물어지고 찢어지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가치를 모두 놓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내적 갈등이 정신을 갈라놓기도 한다. 닿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지나친 나머지 그렇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도 사람의 정신은 무너져내린다.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의 칼날이 스스로를 겨눌 때에도 사람의 마음은 부서진다.  


이중섭의 모성편집이 유별났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모성의 전이가 자연스럽게 아내 남덕에게로 향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중섭의 인생에 있어 그의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정신분열적 병인이 내재되어 있던 중섭이 모성 편집의 원초적 대상이 되었던 어머니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고, 그 후 그것의 전이 대상인 아내와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면서 더 이상 내재되어 있는 병인을 억누를 방법이 없어졌다. 자신은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고자 하지만 그것이 번번히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이중섭의 실망과 분노가 점점 응축되어 갔던 것이다. 


이중섭은 자신을 공격하는 그 어떤 대상, 그것이 사회적 현실이 되었든 특정한 누군가가 되었든 그로 인해 상처는 받을지언정 그것을 증오와 분노 같은 공격적 감정으로 치환시켜 되갚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점차 응축된 실망과 분노의 감정이 칼날이 되어 겨누는 대상은 오직 하나, 이중섭 그 자신이 된다.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은지에 아들 태현과 태성의 그림을 그리며 겨우 달래왔다. 급기야 중섭은 밤 중에 홀로 아내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자신이 남덕이 되어 대답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중섭 스스로 태현이나 태성이 되기도 했다.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스스로를 겨누는 분노와 증오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져 갔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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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이중섭의 무능력함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이중섭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도록 유복한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제 손으로 돈을 굳이 벌 필요도 없이 살아왔던 이중섭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해방 이후의 고난으로 인해 이중섭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다. 그것을 되찾고자 나름의 발버둥을 쳐봐도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어리숙함 때문에 언제나 다시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왔다. 그런 이중섭을 보는 이들은 답답해 미칠지경이겠으나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그 자신은 오죽할까. 차라리 분노의 일정 부분을 타인과 현실에 돌렸다면 이중섭은 자기 정신을 좀 더 온전하게 붙들었을 수도 있겠다. 


갈망하는 꿈이 있다. 그 목표에 닿고자하는 노력이 실패를 거듭한다. 그 실패를 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못난 자기 자신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멀쩡한 사람도 쉽게 버텨내기가 어렵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대구로 내려간 이중섭은 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갑자기 이유없이 불안 증세를 보이며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며 숨기도 하고 어느날은 포대령이 자신을 잡으로 온다며 경찰서로 숨어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뜬금없이 친구에게 정신 이상에는 죽은 사람의 해골이 특효이니 그것을 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만 얻어먹고 공술만 얻어 먹고 놀았어.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지.

"내가 도쿄에 그림 그리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야. 남덕이와 어린것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

"나는 이 세상에 죄송해. 죄송하고말고. 나는 쓰레기야."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이중섭의 공격 대상은 언제나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이 거식증의 양상으로 발현되어 주변 사람이 아무리 권해도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그나마 친구의 아내나 여관 아가씨 같은 여성이 잘 도닥이며 밥을 떠먹여줘야 그제서야 한 숟갈을 목에 넘겼다. 그렇다. 아무리 못나고 못난 놈이라도 어머니만은 자식을 품에 안지 않던가. 중섭에게 밥을 떠먹이는 여자들은 정신을 놓아버린 중섭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대구에서 친구 최태응의 집에 머물렀던 이중섭은 최태응과 그의 아내 사이에 끼어 잠자리에 들기도 했는데, 그 때면 태응의 아내가 이중섭의 등을 두드려주며 자장가를 불러줘야 중섭이 겨우 잠들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이중섭은 정신 이상으로 대구의 성가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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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1956년 가을


대구의 병원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중섭은 1955년 여름, 다시 서울에 돌아온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친지들이 이중섭을 데리고 올라왔다. 


이중섭은 서울에서도 정신 이상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수도육군병원과 성 베드로병원을 전전하며 반복되는 거식증과 음주로 인해 강건했던 그의 몸은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생기를 잃어갔다. 1956년이 되면서 정신과 육체의 상태가 모두 악화되자 내과에서는 정신병 환자를 왜 내과에 입원시키느냐며 거부하고 정신과에서는 간염이 위중하니 내과 치료가 우선이라고 거부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섭의 간염은 그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그 해 여름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다시 입원한다. 그리고 9월 6일, 이중섭은 병실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눈을 감고도 3일이 지난 후, 친구 김이석이 이중섭을 찾아왔다가 알게 되면서였다. 병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남긴 것은 밀린 병원비 18만 원. 병원비를 반으로 깎아 장례식장에서 모금한 9만 원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나를 건져올릴 사다리는 어디에 있는가


아주 오래전 옛날, 이중섭이 평양의 외가에서 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형 이중석이 공부를 게을리 하는 중섭을 나무란다. 꾸지람을 들은 중섭은 공부를 하지 않고 혼자 집 밖에서 엉엉 운다. 함께 사는 외가 친척이 왜 우느냐고 묻자 어린 중섭은 '형이 속상해할까 봐 운다'고 대답한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이중섭 전시회장. 자신의 그림을 예약하는 사람 앞에선 이중섭이 정중히 인사하며 아직은 그림이 많이 모자라니 이 다음에 그림이 나아지면 꼭 새 것으로 바꾸어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이중섭의 진심이 담긴 그 말에 예술가로서의 자존감과 책임감이 드러난다.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이중섭은 곧장 뒤에 모여있는 친구들에게로 돌아와 킬킬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또 한 명 업어 넘겼다. 이렇게 속여 먹는다." 장난기 가득한 그 말로 이중섭은 예의 그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모습을 되찾는다.


그렇게 한 평생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한편으로는 어리숙함이 되어 자꾸 제 발목을 잡는 것에 전전긍긍했던 여린 심성의 소유자.


<찌질한 위인전>에서 소개한 첫 번째 인물이자 이중섭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밑바닥을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에게서 자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고 똑바로 다시 서기에는 여리고 약했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런 모습이.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이 천진하고 어린아이 같이 철없고 어린아이 같이 어리숙한 모습이 이중섭을 이중섭이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인간 이중섭의 찌질함은 화가 이중섭의 예술성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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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예술은 삶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중섭은 스스로의 찌질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수영의 찌질함은 이중섭의 찌질함과 다르다. 김수영의 삶은 이중섭의 삶과 다르다. 그리고 김수영의 예술은 이중섭의 예술과 다르다. 때문에 누구의 삶이나 예술이 더 나은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여전히 내 발목을 스스로 걸어 넘기는 나의 찌질함을 마주하면서 생각해 본다. 김수영은 나에게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럼에도 바라볼 수 있는 저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중섭이 내게 보여준 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찌질함 속에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면에 가장 빛나는 부분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반복되는 찌질함의 굴레가 깊게 패인 구렁텅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사다리 또한 그 구렁텅이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찌질한 위인전, 이중섭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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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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