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01. 16.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

.

.

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1. 공포의 마스터플랜
<파토의 쿡찍어 푸욱>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지난 몇주 동안 당장 벌어지는 상황들 때문에 좀 급한 느낌의 글들을 썼다만, 우원은 실은 그쪽 전문은 아니고 이 코너도 시의성있는 이야기나 당장의 정치 현상을 다루자는 목적은 딱히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은 좀 차분한 쪽으로 가 본다.

 

멀고도 험한, 진보의 길에 대한 이야기.

 

파토.jpg

 

일단 진보란 뭔지부터 좀 생각해 보자.


야권성향 정치가들
, 그 지지자들, 역시 야권성향 논객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열분들의 대부분까지 특정 성향을 가진 이들을 뭉뚱그려 진보()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막상 실제 의미는 좀 오리무중인게 이 단어다. 나는 진보 좌파다, 너는 중도다, 그 사람은 합리적 보수지만 이 나라에서는 좌빨로 통한다 등등, 주변의 이넘 저뇬은 물론 나 자신조차 진보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게 실상이니 말이다. 아 물론 우원이라고 해서 이걸 통합 정리할 능력이나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개념 정리를 한번 해 볼 수는 있지 싶다.


진보라는 말에 사회주의적 의미가 자주 들어가는 건 사실이다. 그건 역사의 진보, 발전의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 주의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이전에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니, 되려 과거의 좋았던 시기 요순시대, 에덴동산 에서부터 세상은 점점 타락해 가기만 하고, 언젠가는 그 꼴을 보다 못한 신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세상은 진보는커녕 퇴보가 그 본질일 거다.

 

이런 관념을 갖고 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의 변화 속도가 원체 느려터져 개인의 일생 중에 달라지는 게 없었던 탓이 크다. 왕조가 바뀌거나 전쟁이 터지는 등의 격변이 벌어진다 한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나 세계관이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인간의 삶은 한 세대는 물론 수백 년에 걸쳐 늘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니 옛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변화, 발전하는 속성을 가진다는 건 발상 자체가 어려운 이상한 개념일 뿐이었다. 머 단지 개념이 그랬던 게 아니라 그 시절엔 실제로 세상이 그닥 진보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역사의 진보니 발전이니 하는 개념이 슬금슬금 등장한 거는 불과 2, 300년전 근대에 들어서의 이야기다. 이때부터 과학기술, 산업,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개념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조금씩 정교해져 갔고 그러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발전한 내일이라는 진보의 관점이 조금씩 성립되기에 이른다. 이걸 보다 과학적인 맥락에서, 유물론과 경제학을 도입해 하나의 역사관이자 세계관으로 정리하고 서술한 것이 마르크스의 작업인 셈이다.

 

이렇게 마르크스 같은 이름이 등장하니 봐라 결국 좌빨...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똥무식의 경지에까지 일일이 토를 달아야 하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이 근현대 정치철학과 사회구조에 끼친 영향은 어느 모로 보나 지대하고 영미 등 자본주의 사회에도 아주 많이녹아들어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일부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막시스트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종북이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특히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진보 개념의 실체는 막시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세상의 진보는 역사발전 5단계설에 의거한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의 완성 같은 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보는 이념이나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라고, 그걸 향해 한 걸음씩 가자는 거다. 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건 누구 말마따나 우리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이미 다 배운 것들이다.

 

예컨대, 옛날에 아버지의 재산을 독식하고 그 부를 바탕으로 놀고 먹으며 악행을 일삼는 못된 형과, 착하지만 많은 자식들과 가난 속에서 고통 받으며 형에게 멸시까지 받는 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는 저건 뭔가 잘못됐다는 관념이 자동적으로 생긴다. 그리고 그런 동생이 제비 다리를 고쳐줘서 복을 받고 형이 나쁜 맘으로 따라했다가 벌을 받는 결론에 이르면 다들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환호(?)한다.

 

...이런 게 상식이다.

 

근데 언젠가부터 다른 해석이 등장했다. 놀부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됐으니 오히려 본 받을 사람이고, 흥부야말로 게으른 주제에 무책임하게 애들만 잔뜩 퍼질러 놓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바보라는 거다. 허나 원작을 들여다보면 놀부는 일해서 돈 번 게 아닐 뿐더러 단지 심술장이만도 아닌 강간과 폭행을 일삼는 중범죄자다. 반면 흥부는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원체 첨에 가진 게 없다보니 늘 어려울 뿐이다.

 

따라서 문제의 주장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데, 이 이야기를 처음 만들고 퍼트린 사람들이 그런 것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상식과 순리보다 재물의 소유를 우선시하며 놀부의 각종 악행을 합리화는데, 이런 게 바로 비상식이다. 이런 주장을 옹호하는 자들은 복잡한 근거와 이론 등을 늘어놓으며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느꼈듯이 그냥 흥부는 좋은 사람이고 놀부는 나쁜 넘인 거다.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옳은 게 옳은 걸로, 나쁜 게 나쁜 걸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이 멸시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나아가 소유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과한 경쟁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사회 시스템과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히 반영되는 세상이다(물론 현실에서는 선과 악이 일도양단으로 구별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들이 많고 그런걸 판별하기 위해 여러가지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 허나 큰 틀에서의 가치는 대부분 이렇게 단순한 형태로 회귀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고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면 이데올로기나 진영을 떠나서 그가 바로 진보를 염원하는 사람인 거다. 헌법에 명시돼 있는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이해하고 지향하는 사람이면 다 진보인데, 왜냐하면 그 원칙과 이상이 아직도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기 울나라에 국한된 문제만도 아님 -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 보수라던가 중도라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의미에서는 진보라고 불러도 그만인 사람들이 많다. 반면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정통 보수라고 칭하는 넘들의 상당수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헌법의 정신, 인권과 자유의 기본을 부정하는 극우 파시스트들이거나 아무것도 모른채 그들을 따라가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암튼 문제는, 이렇듯 인간 삶의 당연한 상식을 추구하는 이 진보의 길이 너무나 멀고도 험하다는 사실이다. 인류 최초의 시민혁명이자 근대 사상이 태동하고 전파되는 계기가 된 프랑스의 혁명과 민주화 구조를 통해 이런 사실을 여실히 알 수 있다.


2.jpg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이다. 혁명의 자세한 내막은 우원이 10년 전 딴지에 연재했던 유럽 이야기나 재작년 말 발간된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에도 소개돼 있으니 생략하자. 여하튼 이렇게 발발한 소위 대혁명과 수많은 인명의 손실 속에서 구축된 공화정은 불과 15년 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제정 선포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 나폴레옹 황제 전까지의 혁명 체제를 프랑스 제 1 공화정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프랑스에 다시 공화정이 찾아오기까지는 4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1848, 초대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국왕 루이 필리프를 몰아내고 공화제를 수립한 후 대통령에 선출되면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 양반도 친위 쿠데타를 통해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어렵사리 구축된 제 2 공화정도 4년 만에 허무하게 증발하고 만다. 그리고는 나폴레옹 3세가 유배되고 다시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18년의 세월이 흐른 1870년이 돼서였다. 이렇듯 대혁명이래 왕정, 제정, 독재가 축출된 근대적 공화정이 정착되는 데 까지 장장 8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 기간 동안 공화정이 유지된 것은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 당시 프랑스인들의 관점에서 함 생각을 해 보자. 왕과 귀족을 타파하고 제 3 계급을 중심으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초기 혁명가들, 말뿐이 아니라 서슬퍼런 절대왕정을 실제로 무너뜨리고 정권까지 획득했던 그들이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장장 80년을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왕정 밑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고통받던 민중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체제인 공화정을 버리고 2대에 걸쳐 황제를 모시게 될 거라고 꿈이나 꿨을까. 그것도 압제와 강요에 의한 것조차 아닌, 국민투표라는 형태를 거쳐서 말이다.

 

3.jpg

황제의 의관을 갖춘 나폴레옹 3.

공화제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몰아내고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에 오른다.

인류 역사상 이런 넘들과 이런 비슷한 넘들은

부지기수로 많고 앞으로도 나타날 거다.

모양은 좀 다르더라도,

 

옛날 이야기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전통적 기득권층의 힘과 그 지배를 받아온 민중들에게 작용하는 앙시엥레짐의 관성, 혹은 보수 회귀의 탄력이 얼마나 강력한 건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금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는 걸 평생토록 지켜봐야 했던 선각자, 지식인, 깨어있는 시민들의 고통과 절망이 어떠했을지도 대략 짐작이 간다. 허나 만약 그들이 반복되는 보수 회귀의 책동에 굴하고 자포자기했더라면 현대적 공화제의 발상지이자 민주주의 선진국인 지금의 프랑스는 없었을 거다.

 

당시 왕정이나 제정을 지지하고 절대권력을 옹호하던 프랑스와 유럽 보수층의 속성은 지금 이 나라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힘의 분배라는 민주적 가치를 두려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지위, 돈 등의 소유물을 조금이라도 잃을까봐 무서워하며 그 공포를 해소하고 기존의 사회구조와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 금력, 폭력, 선동을 사용한다.

 

이들에게도 공익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건 아니지만 오직 시혜의 형태로 발현될 때만 의미가 있다. 즉 돈 많고 힘 있는 내가 가난하고 무력한 약자들을 불쌍히 여겨 은전을 베푸는 형식이어야 되는 거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당연한권리를 주장하는 등 나쁜태도를 보인다면 요구 조건의 내용을 떠나 받아들일 수 없고, 나아가 매로 다스려야 할 일이 된다. 이런 봉건적 심리는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족삼성의 태도나 철도파업 상황에서 최연혜 사장이 보여준 어머니의 마음따위와 맞닿아 있다.


4.jpg

강한 자가 베푸는 시혜와 은전의 세상에서는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약자는 아무 힘도 없게 된다. 시혜의 종류와 양, ,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전적으로 강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트레일러도 함 보자. 2 6일 개봉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저런 자들이 이기적임, 잔머리굴림, 욕심부림, 비겁함, 약자를 찍어누름을 보수주의라며 떠들고 점령한 시대다. 무슨 사상이나 주의인 할려면 내용과 상관없이 적어도 파렴치해서는 곤란하다. 헌데 이들은 이제 그 파렴치함을 백주에 뻔뻔하게 내세우는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썩어 있다.

 

하지만 와중에도 희망적인 것은, 지금의 이 무도한 파시스트들조차도 200년 전 왕정복고 주의자들에 비하면 사상적 면에서 진보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어느 시절에나 존재하던 보수 기득권층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은 조금씩 발전해 왔다는 증거고, 옛날에는 능지처참을 당할 반역의 사상이었던 것도 지금은 당연한 게 된 것이 바로 근대 이후 지금까지 펼쳐진 역사 그 자체다.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 또한 저들의 바램과 달리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거라는 기대는 여전히 유효하다.

 

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는 1948년부터 70년 가깝게 돼 가지만 이 나라의 실제적인 민주화 역사는 19604.19 이후니 이제 54년째다. 그런 지금 우리는 뜻하지 않게도 나폴레옹 3세의 복귀를 눈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현실이 어처구니 없지만, 한편으로 1848년 나폴레옹 3세가 독재의 야욕을 감추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프랑스 혁명 발발 후 59년이 지난 후였다.

 

생각해보면 봉건왕조의 멸망과 뒤이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때까지 어떤 민주주의나 인권, 공화국에 대한 개념도 없이 수천 년을 살아온 우리다. 그런 우리가 진짜 탄탄한 민주주의를 얻어 내려면 수십 년의 세월과 보수회귀의 책동은 필수적으로 겪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절망할 이유는 없다. 비록 느리고 오래 걸리더라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안감독님 말마따나 포기하면 진보고 발전이고 민주주의고 없이 그 순간 게임은 끝나는 거니까.

 

...다음 시간에 뵙자.


5.jpg

 

 







파토

트위터 : @patoworld

이메일 : patoworld@gmail.com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