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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을 보았다. 혼자 보기 두려워 동생과 소주 각 1병을 하고 같이 봤다.


대단하다.


이 영화는 파괴적인 망작이다. 그런데 게르만 서사시에서나 볼 법한 장렬한 비극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 이 압도적인 실패작을 대작으로 만드는가. 단언컨대 김수현과 그의 사촌형님(이사랑 감독)은 한국의 구로사와 아키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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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 <란>과 <카게무샤>를 보고나서 어안이 벙벙했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아니 씨바 내가 뭘 본건지 모르겠는데, 왜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본 것만 같은 아련한 확신이 드는가! 왜놈들이 지들끼리 싸우다 뒤졌는데 이순신장군의 후손인 내 가슴에 왜 이다지도 묵직한 돌땡이가 임플란트 되는가! 왜 일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 주공아파트 거실에서 대우비데오카셋트 플레이어 앞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느낌적 느낌이 드는 것인가!


두 영화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군사들은 파멸을 위해 성난 파도처럼 달려간다. 여기서 조총(텟포)은 정해진 멸망의 방점을 찍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등장한다. 조총전열부대는 불을 뿜으며 형형색색의 군사를, 트로피컬 주스처럼 갈아내고 한 컵의 핏물로 만들어버린다. 군사는, 아니 영화 전체가 조총의 십자포화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어느 순간을 넘어가면서부터 파멸은 정해진 숙명이 되고 숙명은 수차례에 걸쳐 반복되다가는 급기야 아름다워진다.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진다. <란>에서 성은 불에 탄다기보다는 불을 내뿜는다. 파멸당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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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니뽄노 주모 여기 사케 한 사발 추가데스...


그 모든 희노애락이 몰락으로 갈무리되고 나면, <카게무샤>에서 대영주 다케다 신겐을  흉내냈던 영무자 도둑은 시체가 남긴 깃발 하나를 붙잡기 위해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다.


그래서 두 영화를 왜 봐야 하는 건데?


재밌냐?


뭐 남는 게 있냐?


재미없다. 남는 거? 교훈이나 인생의 팁 따위가 있을 리가.


그저 미천한 나 따위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는 구로사와 아키라 센세의 사랑의 매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분의 미학의 채찍에 후두려 쳐맞으면서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 같다고 자백하는 수밖에 없는 거시다!


생각해보면 <란>은 포스터도 끔찍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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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이지 끔찍하다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음따.


<리얼>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한국 버전이다. <리얼>은 한 컷 한 컷, 시나리오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조총이다. 이 영화는 백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홀랑 말아먹는 파멸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성난 파도처럼 달려간다. 망작이 되지 않으려 하는 일말의 시도조차 없다.


그냥 달려가는 거다.


<란>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매몰되어 필연적인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리얼>은 그 자체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기 위한 실험예술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예술가이고 싶은, 혹은 자칭 예술가라 착각하는 장사꾼들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모두 투명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뭘 하면 각광받을 거라 생각(착각)하는지.

어떻게 팔리고 싶은지.

얼마에 팔리고 싶은지.

뭘 했다고 큰소리치고 싶은지.

뭘 따라하고 싶은지.

뭘 자랑하고 싶은지...


영화는 전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할 최소한의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일관되게 똥폼을 잡으며 세고 거친 수컷을 보여주고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벗긴다.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캬 화면빨 죽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리얼>은 레알이다.


1차원적인 욕망만 있고, 욕망을 정당화할 개연성도 없거니와 그딴 걸 애써 삽입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영화는 십 분만 지나도 박근혜 정권의 한 달처럼 바로 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백억을 어떻게 화면에 쏟아부어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있는지 부끄러움 하나 없이 보여준다. 반만년 도도히 흐른 한강물처럼 정말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간다.


김수현은 똥꼬에 힘을 주고 무게를 잡다가 나중에는 괄약근이 파열돼 미쳐버린다. 정말 아팠는지 고함을 치다가 광인처럼 웃는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응가를 할 수 없는 고통을 춤으로 승화한다. 농담 아니고 진짜다. 주인공이 현대무용으로 적들을 쓰러트리며 당신의 삶도 이 영화처럼 덧없이 시작되어 사라질 것임을 잔혹하리만치 투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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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은 어설픈 쓰레기가 아니다.


쓰레기로 철저히 일관함으로써 관객을 숙연케 한다. 의지의 승리다.


개그를 잘 해서 웃긴 사람이 있고, 사람 자체가 우스운 사람이 있다. <리얼>을 만든 사람들은 본인들이 선망하는 그림을 그려낸 끝에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고로 <리얼>이 아니라 이 영화의 창작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작품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현대미술이며, 그 중에서도 설치미술이다. 이딴 영화를 찍고도 목을 매거나 해외로 도피하지 않고 언론시사회 무대에 걸어서 등장할 수 있는 그들의 용기가 작품의 실체다. 심지어 개명신청을 한 사람조차 없다고 한다. 이 정도 스케일의 수치플레이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소라넷이 오르지 못하고 스러진 고지를 밟았다.


더욱이 그들은 수컷의 바닥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에 참여하지도 않은 나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바로 김수현은 비운의 예술가로, 설리(최진리)는 살색 물감으로 마케팅하는 행태다.


그들 자신은 설리의 전라에 의존했고, 마케팅 포인트가 그것밖에 없으면서 설리는 시장통의 성난 여론에 불쏘시개로 던지고 김수현은 챙기겠다는 염치에 내 염통이 다 오그라진다. 여배우가 자기 인스타그램에서 벗고 다닌다고, 자기들도 그녀를 벗겨서 굴리면 장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예술혼’에 고개와 전립선 근육이 절로 숙여진다.


여배우의 알몸을 일용하는 것도 모자라 영화가 망할 것 같으니 김수현은 비운의 예술가로 진지방어하고 그녀는 언론과 여론의 떡밥으로 던져주는 짓거리가 ‘예술’이고 ‘문화산업’이더냐.


김수현이 이 영화에 관여한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만약 세간에 들리는 이야기대로 그의 목소리가 상당했다면 동료 배우인 최진리를 이런 식으로 착취하고도 스스로만 이 참화에서 빠져 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있는 가오 다 잡은 모습과는 반대로 고추 떼... 아 아니 정중한 표현을 써야지, 중성화수술을 추천한다. 부디 실상이 그렇지 않기만을 빈다.


<리얼>을 본 사람 중에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을 못 봤다. 내용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봤던가? 장렬하다. 비아냥이 아니다. 정말 어떤 의미로 미학적이다. <리얼>은 성공했다. 설치미술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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