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01. 21. 화요일

독투불패 남행열차
















제갈공명의 후출사표


"어리석은 양이 폐하(유선)께 아뢰옵니다선제(유비)께서 생각하시기를 한(漢)과 적(賊)이 양립하고 왕업이 치우쳐서 안전할 수 없음이라, 이리하여 신에게 기탁하여 적을 토벌하라 하셨습니다


작금에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대업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지금으로선 멈추어 있으나 나아가나 그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하여 후환을 없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조그마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여섯 번째 일입니다.……후략 - 제갈량의 후출사표 중에서 일부분 발췌. 


001.jpg


서기 234년. 유비에 의해 촉한(蜀漢)이 건국된지 13년 째의 일이다.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두 번째 출사표를 올리고 야심차게 조위(曺魏)를 향한 북벌을 감행했다. 비록 촉한의 전성기 시절, 제1차 북벌을 감행했을 때의 병력에는 못 미쳤다지만 병사들의 사기와 대오는 자못 엄정했고 십만에 이르는 대군은 능히 삼군을 이루었다.


젊고 유능했지만 일순 자만의 늪에 빠져 대업을 그르치고 말았던 마속을 울면서 목을 베고, 스스로 벼슬까지 깎아내렸던 와신상담의 세월이었다. 선제가 동오(東吳)와의 이릉 회전에서 참패하고 백제성으로 물러나 농성할제 설상가상으로 큰 병까지 얻어 승하한 후, 줄곧 이어오던 동오와의 적대적 긴장 관계였다. 공명의 심혈을 기울인 외교 역량에 힘입어 촉한의 대오 햇볕정책은 다시금 촉오 동맹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에 오주 손권은 공명의 한중을 통한 장안 정벌에 때맞추어 위의 합비성을 동시에 공략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선제 유비와 공명의 한(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손권이 이끈 동오의 십만 대군은 합비성 전투에서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맥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위의 명제(조예)가 친히 십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에서 합비 인근, 수춘으로 출병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위나라로서는 그 사태의 급박함과 엄중함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사뭇 달랐다. 황제의 어림군이 수춘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상황은 합비성의 수비를 맡은 만총에 의해 간단히 수습돼버렸던 것이다. 오주 손권은 주요 지휘관과 조카 손태가 적의 흉탄에 쓰러지는 걸 보고나자 더는 싸울 마음이 없었고 그 길로 머릴 싸매고 회군하고 말았다. 위의 지장, 만총의 신화에 가까운 분전이었다.


한편, 지병이(폐결핵) 도져 각혈을 거듭하던 공명은 오장원에서 둔병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 연장의 일환으로 밀교 의식을 비밀리에 치루던 중, 예상치도 못한 장수 위연의 초랑이 방정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스럽게도 불세출의 기재 제갈공명은 결국 오장원에서 하늘의 별과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공명은 자신이 숨을 거둔 후의 싸움까지도 계책을 내어 추격해오는 중달을 보기 좋게 위로 쫓아보내긴 하였다. 그러나 곧이은 위연의 모반과 내시 황호의 전횡, 각 군신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국력은 피폐되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중달의 전략 코드 



002.jpg

중달 사마의


위나라 입장에선 촉의 거듭된 침략이 커다란 근심거리긴 하였으나 사마 씨 삼부자의(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활약으로 그때 그때 큰 위기 없이 이를 물리쳐냈다. 사마의는 위나라에서 공명의 온갖 계교와 천변만화하는 기만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사실 공명을 상대함에 있어서 그가 시종일관 견지한 전략 코드는 오로지 '안전제일'이었다. 적보다 압도적이다시피한 병력과 물자를 확보한 상태에서 얼핏 생각하면 철저하게 응전하여 분쇄함이 타당할 듯 싶지만 중달은 그런 전술은 애초에 구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여 멀리서 달려온 적을 맞이하였지 적극적으로 밀고나간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멋 모르고 섯불리 나섰다가 개망신 당하고 스스로 노숙자의 길을 걸어간 하후무의 전철을 밟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공명의 심기막측한 전술 구사에 있었고 둘째로는 적군의 상세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진령 산맥과 검각이라는 지리적 장막에 의한 수년 간의 단절은 중달에게 오직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만을 요구했다. 셋째로는 선대 조조의 동물적인 감각에서 오는 경계와 홀대로 인하여 오랫동안 음지에서 숨을 죽여야 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기인한다. 또 여전히 감시와 의심의 눈초리로 견제를 게을리 하지 않는 조 씨 일가와 원로 군신들이 틈만 나면 조정에서 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바로 이 세 번째 이유가 중달로 하여금 철저한 지구전을 택하도록 한 실질적 이유이기도 했다. 수시로 조정에 올리는 군령장은 자못 비장했고 전투 상황 보고는 늘 일관되게 아군의 선전을 강조하는 한편, 산발적인 국지전에 불과한 것을 짐짓 급박한 사태인 양 부풀려 보고하기 일쑤였다. 군영과 전장에 이르는 물자와 식량 보급은 항시 넉넉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중달은 끊임없이 조정에 표를 올려 병력과 물자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른바 묻지마식 전황 부풀리기였다. 또 이러한 중달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요인 중 가장 큰 하나는 동오에서의 침략이 의외로 일찍, 싱겁게 끝나버린 탓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실로 기가 막히는 지난 세월이었다. 일신에 지닌 능력은 온당히 평가받지 못했고 그의 진정성은 늘 감시와 견제의 시선으로 훼손당하기 일쑤였다. 오랫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그의 과거가 암울했던만큼 그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게 보급과 전력, 양면에서 우위를 점한 중달로선 공명과의 교전에서 적극적일 필요가 없었다. 먼길을 달려와 덮쳐오는 촉군은 속전속결을 원했지만 중달은 늘 한 발짝 물러서서 전투를 철저한 소모전으로 끌어갔다.


 위, 촉, 오, 삼국 중에서도 단연 세력의 으뜸인 위였지만 나라의 접경, 각기 다른 두 군데에서 동시에 발생한 촉과 오의 침략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다. 이렇게 국가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두 군데에서나 생기니 이는 실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기로에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런 차에 제국의 동남쪽 변방에 크게 일어났던 한 적(동오)이 일찍 물러가버리니 위나라로서는 커다란 짐을 덜은 셈이었고 이는 곧바로 서북 전선에의 중달을 향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다.



사마의와 조조의 조우


003.jpg

맹덕 조조


일찌기 중원 하남성 하내 땅에서는 사마 씨 가문 팔형제 중 사마의의 재주가 가장 빼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고 그 소문은 조조가 황제를 모시고 있는 허도에까지 퍼졌다.


"박학다식하여 견문이 넓고 특히 유가에 정통하다."


가형 사마랑은 이미 조조의 눈에 들어 벼슬을 하고 있었다. 조조는 수 차례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에게 벼슬을 제의했지만 왠일인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 막하에서 벼슬하기를 마다했다. 짐짓 풍을 맞은 듯이 자리보전하고 누워 꼼짝하지 않은지도 석 달이 되어감에도 조조 측에서 보낸 밀정들은 감시의 눈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


"만약에 끝까지 병을 핑계로 집에서 나오지 않거든 목을 비틀어 잡고서라도 끌고 오라."는 조조의 명에 의해 조조 발 앞에 끌려나오자 사마의는 목숨을 보전키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조가 내리는 벼슬을 받았다. 이렇게 사마의는 조조의 무섭도록 집요한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뿐인 황제, 헌제를 끼고 도는 조조의 세도는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과연 조조의 매와 같은 눈이 정확했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입증됐다. 조맹덕의 막하에 든 후에 사마의가 조조에게 제안한 정책은 둔전제였다. 중국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는 둔전제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둔전제 시행은 전에 없던 군사와 사회 전반에 걸친 혁신을 가져왔다(그리고 이것이 동아시아사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동북방의 오환·선비 같은 오랑캐도 문제였지만 실로 큰 근심은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고구려였다. 해마다 고구려에 귀한 공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애걸해야 했다. 최강의 적, 원소를 꺾고 거머쥔 새 땅의 민심을 안돈시키기에도 벅찬 마당에 혹여 고구려와의 관계라도 어긋날까 전전긍긍하던 조조였다. 그러던 것이 중달의 계를 받아들여 저 둔전제를 시행하니 적과 대치한 전방에서는 자급 자족이 이루어져 보급이 수월해졌고 동북 변방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질구레한 근심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러한 중달이었지만 조맹덕의 타고난 직관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혀온 의심병 때문인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언제부터인가 조조는 중달을 똑바로 보지 않기 시작했다. 그 표면적 이유는 중달이 자신과 같은 '낭고의 상'이라는 것이였다. 앉은 자리에서 정면을 바라고 있으면서 동시에 뒤를 살필 수 있는 눈이라는 얘기다. 하긴 누가 보더라도 맹덕과 중달의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매는 실제 놀랍도록 닮은 데가 있긴 했다.


중달의 재주를 익히 알고 아꼈던 맹덕이었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가 죽는 날까지 중달을 병권까지 아우르는 요직에는 중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마의는 세상에서 잊혀져가는 듯 싶었다. 제갈공명의 침략 전까지는…….


그러나 세상이 영웅을 내팽개쳐 두는 법은 없다. 적당한 때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초야에 은둔하며 학문과 벗하고 살리라는 사마의의 소박한 꿈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명은 서서히 중달과 그의 두 아들을 위나라 조정과의 피로 점철된 처절한 대결 구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제갈공명에 의한 촉한의 첫 번째 대규모 침공에 고 위왕 조조의 부마 하후무(본래는 하후돈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나중에 하후연의 양자로 들어갔고 조조의 부마까지 된다.)가 큰소리 뻥뻥 치며 보무도 당당히 나섰다. 그러나 하후무가 공명의 농간에 휘말려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신에게 쥐어줬던 오만에 이르는 군사는 만추에 추풍낙엽들처럼 전장에서 흩어졌고 스러져갔다. 하후무는 수치와 울분으로 서북방 오랑캐 강족의 땅에 스며들어 종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태산같던 조 씨 일가가 사마의를 바라보는 오만방자한 눈은 처음에는 업신여김이었다. 그러나 곧 눈 밝은 자, 화흠의 강력한 추천으로 사마의가 병권을 다시 쥐게 되자 조 씨 일가의 눈은 곧바로 음해와 질시로 바뀌었다.


중달은 공명과의 전투를 최대한 길게 끄는 것만이 자신과 일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맹덕의 죽음


004.jpg


돌이켜보면 표독한 맹덕의 막하에서 벼슬길에 오르기가 죽기만큼 싫었지만 조조의 집요한 압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 길이었다. 초야에 묻혀 서책과 벗하여 군자연하던 그였지만 이왕에 들어선 길,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삶이나마 편케하리라는 포부로 심혈을 기울인 끝에 둔전제(屯田制)를 조조에게 제안했다. 당시 그가 제안한 둔전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민둔(民屯)이었다. 오랫동안 황건란을 위시한 대륙에서의 크고 작은 변란과 전란 때문에천하 곳곳에 유랑하는 무리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천하의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관찰해왔던 중달은 합리적인 토지의 점유와 개간이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방책을 낸 것이다. 갈 곳 없는 유민들을 구제하면서 동시에 나라의 살림도 살찌우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 조조에게 둔전을 건의했던 것이다. 눈 밝은 조조는 무릎까지 탁 치며 기쁘게 중달의 계를 수용했지만 이후 조조가 주도해서 둔전을 실행해 나가는 양상은 애초에 중달이 의도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민둔은 대폭 축소되어 형식적인 선에서 그치고 말았고 오로지 군둔(軍屯)에만 치중하여 실시하는 것이었다. 크게 낙심한 중달이었지만 그로서도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005.jpg

이 빨갱이 섹퀴덜! 날래날래 하라우~


위왕 조조는 말년에 이르러 오랜 지병으로 괴로워했다. 아무 때고 엄습하는 두통 때문에 특히 밤마다 편하지 못했는데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헐떡이다 그의 나이 66세에 낙양 위왕부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료들과 나란히 시립하여 맹덕의 최후를 지켜보던 중달은 그의 숨이 멎는 순간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를 보필해왔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전장을 누빌 때면 서릿발같은 군율과 신속한 용병으로 적들에게 가차없는 패배를 안겨주었고 전장에서 나와 정사를 돌볼 때엔 추상같은 엄정함으로 관료들의 허실을 훤히 꿰뚫어보던 인물이었다. 어쩌다 중달이 회의감이 들거나 나태한 마음에 빠져들 때면 조조는 그 특유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쏘아보아 일순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확실히 조조에겐 사람의 마음을 뱀 같이 파고드는 데가 있었다.


옛적 적벽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곁에 봉효(곽가)가 없음을 한하며 퇴각했어도 이후로 그의 범 같은 기상은 전혀 위축되는 법이 없었다. 그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금새 평정심을 되찾는 맹덕이었다. 서기 220년, 조조 맹덕이 숨을 거두는 순간, 사마중달은 알 수 없는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당시 중달은 그 해방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중달의 복권

 

문제(조비)가 즉위하자 중달에겐 봄이 오는 듯했다. 한때나마 조비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관계로 조비와 중달은 서로 이심전심 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을 끔찍히도 사랑했지만 지나치게 술에 탐닉했던 문제는 보위에 오른지 불과 7년도 안돼 병상에 눕고 말았다. 진군, 조휴, 조진과 함께 사마의를 불러들인 조비는 아들 조예(명제)와 함께 후사를 도모하도록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문제가 숨을 거두는 순간, 중달은 자신에게 불어닥칠 혹독한 시련을 뼛속 깊이 예감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밀서랍시고 주고받는 공공연한 친목 쪽지질이 사마의의 눈에 선했다. 대도독 조진과 대사마 조휴 이후로 진취적인 기상도, 남다른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굶주린 야수의 욕심만을 물려받은, 피도 눈물도 없는 조 씨 일가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관중을 지키던 대도독 조진은 자신과 마주한 한중 땅에서 불어오는 서남풍만 쐬어도 몸서리를 쳤다. 그도 그럴것이 간적 제갈량의 제1차 침공 때, 마속을 격퇴시켰던 일을 제외하면 줄곧 열패감에 시달린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속을 격퇴시켰을 당시엔 군중에 탁월한 지략가 중달이 참군을 맡고 있었다. 허나 그 이후로는 패전의 연속이었다. 말년에 조진은 촉군의 승상기만 눈에 띄어도 절로 이를 갈았다. 조정이 사마의를 전장에서 불러들여 한직으로 내쫓은 건 크나큰 실수였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조진이었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간특하기 짝이 없는 공명의 수작에 놀아나 연전연패하던 조진은 겹치는 울화에 그만 홧병이 들었다. 이때 결정적인 공명의 악랄무비한 악플이 날아들었다. 조진은 군막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멋 모르고 날뛰는 무식한 애송이, 관중의 꼰대들을 어찌 얼굴들어 대하려는고?"(연의의 구라)


대장군 조진이 죽자 조정에서는 태위 화흠의 헌신적인 로비를 받아들여 사마의를 복권시키고 병권을 맡겼다.


한편, 동오와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동오의 간헐적인 도발이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대사마 조휴가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조진이 죽기 삼 년 전의 일이다. 서기 228년, 지나치게 패기만만했던 조휴는 동오를 토벌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조정에 표를 올렸다. 이에 명제는 군사 십만을 주어 보냈다. 조휴는 보무도 당당히 오 땅에 발을 들였지만 육손 휘하의 파양 태수로 있던 주방의 거짓항복에 속아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가 곧 시름에 잠겨 병들어 죽었다. 조진과 조휴가 죽고나니 원로군신들 외에 위나라 조정엔 쓸만한 젊은 인재가 귀했다. 중달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점이었다.


조휴와 조진, 조 씨 가문의 중추 격인 이들이 세상을 뜨자 조진의 뒤를 이어받은 것은 조상이었다. 허나 그는 형편없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별다른 능력도 없었고 특출한 재주도 없었고 이유없이 남을 시기하여 헐뜯고 모함하기를 즐겼다. 그저 권력과 허명만 좇는 돼지같은 자였다. 



고평릉의 쿠데타


006.jpg


"삼가 폐하께(애제:조방-명제, 조예의 태자로 서기 239년 즉위했다) 아뢰옵니다. 소신의 재주 모자라고 천하기가 이를 데 없음에도 태조(조조)의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입조하여 오늘날까지 견마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사옵니다. 태조로부터 폐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입은 큰 은혜에 비하자면 제가 세운 공은 턱없이 작아서 그 은혜의 보답은 만분지 일도 못되어 폐하를 뵙기조차 두려울 따름입니다... 중략.


아뢰올 말씀은 옛적 문제(조조의 아들 조비)께서 일도양단의 기개로써 서촉의 역적들을 물리치실 때에 조진을 어여삐여겨 대도독으로 중히 쓰시다가 그의 굳건하고 날랜 기상과 충직한 성품을 기뻐하시고 대장군에 이르게 벼슬을 높이셨습니다. 다만 애석한 마음은 저 가증한 역적 공명의 간계로 대장군 조진이 진중에서 분사하고 말았음에 이제 그의 아들 조상이 유지를 이어받아 폐하를 보필하였지만 작금의 조상은 옛적 아비의 권세는 능가하면서도 정작 아비의 옛적 기상과 성품은 물려받지 못한 듯하옵니다. 이러한 때에 오만한 조상은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교만하고 방약무인해져서 이제는 폐하의 근엄마저 업수이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참람함을 감히 제 입으로는 발설하기조차 두렵습니다. 허나 신하된 몸으로 가만히 두고본다면 이는 만고의 불충이자 씻지 못할 큰 죄라고 할 것입니다…… 후략" -고평릉의 정변을 일으킨 후 중달이 애제에게 올린 조상 탄핵 주청서 중에서.


서기 239년, 공명의 죽음으로 물러갔던 촉군은 한동안 조용했다. 한중을 마주한 관중에서 수비를 맡고 있던 사마의는 조정으로부터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서둘러 입궐했다. 명제의 병이 깊어 죽음을 앞두고 후사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새롭게 보위에 오를 조방(애제)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다. 명제는 대장군 조상과 함께 사마의에게 조방을 잘 보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조진의 지위를 물려받은 대장군 조상에게 사마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허나 작금의 조정에서 사마의의 명망을 능가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숙적 촉의 대대적인 침공에 맞서 끝까지 물리쳐내고 공명도 죽은 마당에 이제 사마중달은 위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었던 것이다. 조상은 중달과 함께 나라의 큰 권세를 쥐고 있었으나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특출한 능력도 없는 자신이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음에도 권력을 더욱 움켜쥐고픈 욕심은 끝이 없었다. 황가의 종친이라는 신분 하나로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조상이었다. 못된 꾀를 궁리하던 중 쾌재를 부른 조상은 어린 황제에게 간하여 사마의의 벼슬을 태부로 높혔다. 그러나 말이 매끄러워서 태부였지 실은 아무 실권도 없는 그저 허울 뿐인 벼슬이었다. 자신의 심복 하안과 등양을 요직에 앉히고 동생 조희에겐 어림군을 거느리게 하고 조훈에겐 일부 군권을 나누어주어 사마의의 권한을 하나하나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뜻이 올바른 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마음 속으로 중달을 따르고 있었다.


중달은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늙어 병이 드니 정사를 돌보기 곤란함을 호소하며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요양하기를 청했다. 이렇게 조정에서 물러난 중달은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 안에만 머물렀다. 중달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차도가 없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나중엔 사람의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루종일 멍하게 앉아서 침을 질질 흘리는가 하면 어쩔 땐 미친듯이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마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영락없이 풍을 맞은 미친 늙은이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조상은 미심쩍은 생각에 마침 형주 자사로 부임하러 떠나는 측근 이승을 불러 은밀히 중달의 형편을 알아보게 했다. 임지로 떠나기 앞서 원로 대신에게 인사를 하는 건 상례이니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중달을 방문하여 대면한 이승이 가만히 중달의 기색을 살피니 그의 중풍 증세가 듣던 것보다 더 악화돼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번에 형주로 발령을 받고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태부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나이가 들어 귀가 어두우니 알아듣기도 힘드네그려. 그래 병주로 간다고 했던고?"

"아니 병주가 아니오라 형주이옵니다."

"아, 빙주우~!!! 그래 펴언하게 있써. 헤헤헤..."

'-_-ㅋ'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상은 만면에 희색을 띄고 더 이상 중달을 경계하지 않았다.


007.jpg

사마소


가평 원년 정월 새해가 밝았다. 서기 249년이었다. 애제 조방은 전례대로 고평릉(명제 조예의 무덤)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조상과 조희, 조훈 등과 함께 금군 삼천을 이끌고 떠났다. 사마의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조정에서 물러났으되 두 아들만큼은 낙양부에서 여전히 벼슬을 하고 있는 몸이었다. 급히 두 아들을 불러 중풍든 칠십 노인네라고는 믿기 힘든 일을 하나하나 지시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낙양 일대를 점거하더니 곧바로 고평릉에 가있는 소제에게 대장군 조상 이하 권속들을 탄핵하는 주청서를 올렸다. 주청서는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던 조희에게 전달됐고 보고를 받은 조상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했다. 실로 번개 같은 중달의 용병술이었다.


조상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바보천치가 아닌 마당에 자신을 탄핵하는 주청서를 황제에게 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숨긴다면 이 또한 대역죄인에 해당하는 형편이고보니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해 안달이 났다. 태생부터 아둔한 터에 정작 큰일이 닥치면 우유부단함으로 매번 일을 그르쳤던 조상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사마의로부터 보내온 타협안이 왔다. 조상은 그것이 자신을 낚는 미끼인 줄도 모르고 덥석 물어버린다. 타협안이란 주청서에 적시한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할 것, 그리고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는 그대로 유지하게 될 터이니 다만 모든 관직에서만 물러날 것이었다. 한심한 조상 일가의 심복들 중에서 그래도 앞을 내다볼 줄 알았던 자는 환범이었다. 환범은 옛적 조조가 허도에서 헌제를 모셨던 예를 들어 애제를 데리고 허창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둔하기 짝이 없는 조상에게 그러한 기개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자신의 부귀영화를 고스란히 누리게 해주겠다는 데야 그로선 더 바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학문을 닦아 관직에 올랐단 말이오? 우리가 황제를 모시고 농성만 하면 각처에서 의병은 자연히 몰려올 것이오. 군량은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내가 대사농의 인장을 지니고 있지 않소이까!"


조상 무리들은 학문을 닦거나 스스로 노력해서 관직에 오른 환범 같은 자와는 완전히 격과 유를 달리하는 자들이었다. 과거 진군이 조조에게 계를 올려 시행했던 구품관인법의 폐해라는 걸 알 턱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고지식하기만 했던 환범은 이로 인해 화가 닥치자 나중에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조진은 훌륭했으나 그 아들들은 짐승에 불과하구나. 내가 어쩌다가 이들과 엮이어 멸족돼야 하는가?"



사마 씨 가문의 득세


008.jpg

진무제 사마염


고평릉에서의 극적인 정변을 일으켜 다시 실권을 장악한 중달은 이후로 몇차레 위기를 겪었다. 그의 정변 소식을 들은 왕릉이 최초로 반기를 들었으나 중달은 칠십이 넘은 노구라고 믿기 힘든 전광석화 같은 용병으로 왕릉을 손쉽게 제압했다. 그외 여기저기서 반짝하고 일어섰던 자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사마의의 발빠른 행마에 허망한 이슬로 사라졌다. 사마의가 죽자 그의 장자 사마사가 유지를 이어받았다. 그는 아버지보다도 더 큰 권세를 누렸고 이에 애제 조방이 그를 제거하려 하자 이를 먼저 적발하여 그것을 빌미로 애제를 폐위시켰다. 이후 사마사가 요동에서 관구검의 난을 평정하다 얼굴에 혹이 터져 전장에서 사망하자 차남 사마소가 뒤를 이었다. 사마소의 둘째 아들 사마염이 위의 원제에게서 천자의 자리를 선양받아 새로이 진(晉)왕조를 열었다. 서기 280년, 사마염이 동오를 토벌하여 굴복시키니 마침내 천하는 진으로 통일이 되었다.


사마중달이 약관의 나이에 위에서 벼슬길에 오른지 어언 오십여 년, 장구한 세월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의 무제(사마염)가 사마의의 시호를 선제宣帝로 추존하였고 그의 묘호를 고조라 하였다.


여기서 잠시 그의 전 생애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그의 내면 세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던 본 글쓴이의 어리석은 생각을 짤막히 풀어내자면, 조조를 섬기던 때의 사마중달의 내면이 융융히 흐르는 대하(大河) 같았다는 것이다. 문제(조비) 이후로 하후 씨 및 조 씨 일가들과 암투를 벌여야 했던 중달의 내면은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대해(大海)였다. 이렇게 거대하게 성장한 중달의 내면은 그가 숱한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고 후에 제갈공명과의 건곤일척의 대결에서도 자신과 그 자아를 굳건히 버틸 수 있게 해준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평생에 걸쳐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자는 단 두 사람, 조맹덕과 제갈공명이었다. 서기 251년, 중달 사마의는 짧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낙양 자택에서 평온하게 끝맺었다. 향년 74세였다.



※후기: 삼국지를 읽다보면 책을 세 번 집어던진다는 말이 있다. 관운장, 유현덕, 제갈공명, 이 세 인물의 죽음은 그만큼 독자들로 하여금 분통으로 책을 집어던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원말 명초, 나관중의 눈부신 문학적 승리인 셈이다. 나 또한 한참을 연의의 환상에 빠져있다가 어느덧 정사와의 괴리를 깨닫게 되었고 그러면서 연의가 가진 태생적 허구성에 심드렁해진 게 사실이다. 허나 단서가 붙었었다. 다른 건 다 건드려도 '제갈량만은 안 돼!'였다. 제갈량 마저 사마중달 따위에게 폄하 당해야 한다면 그동안 내가 몰입해서 읽고 사랑했던 삼국지연의가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었다. 가끔씩 기웃거리는 삼국지 까페같은 곳에 올라오는 포스트엔 요즘 유행하다시피하는 기존의 제갈량까기가 성행하고 있었고 그것들을 대한 내 솔직한 심경은 별 감흥이 없다는 거였다. 그련 유의 글들을 읽어보면 대부분 하나같이 사료라고 근거를 대고 있긴 하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그저 지엽적인 팩트에 불과한데 그런 한두 가지 소소한 요소로 자신의 전체적 사관의 담론으로 구성하는 것은 또다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 그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선 얼마든지 이렇게든 저렇게든 정 반대의 관점으로도 삼을 수 있는 역설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사실, 사마중달이 애초부터 조조에게 발탁되는 걸 극히 꺼렸다는 대목에서 내 생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 단서는 사마중달, 그가 본디 유학자였다는 점과 그에 의해 시행된 둔전제였다. 그래서 나는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한 정사의 자료들을 들이대느니 차라리 사마중달의 내면에 관하여 세밀하게 조명하고 이를 통해 보다 설득력 있게 사마의를 묘사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는 현존하는 숱한 삼국지물이 대동소이하겠지만 특히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두드러지는 제갈량 사후에 나타나는 황량함이었다. 마치 썰물 빠져나간 자취의 그 쓸쓸함이라니…. 그래서 이런 말도 있는 모양이다. "삼국지 안 읽어 본 놈 없고 삼국지 끝까지 다 읽어 본 놈 없다." 

 

나름 정성을 쏟아서 서술해보았는데 읽어주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공감과 재미를 주고 싶은 소박한 소망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노파심에서 말미암은 잔소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의 천재성과 진정성은 오늘날 현대에 와서도 양면으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로인해 한때나마 번영을 구가했던 촉한의 역사를 들 수 있겠고 또 한가지는 당대의 귀재 사마의를 쩔쩔매도록 몰아부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시적 시각과 거시적 시야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에 바람직하고 올바른 견해가 형성되는 법이지 않겠는가. 







독투불패 남행열차


편집 : 꾸물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