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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1. 27. 월요일

논설우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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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들을 접한다. 나를 찾는 여행이니 나에게로 떠나는 시간이니 하는 소리도 듣곤 한다. 우원은 이런 것들을 별로 안좋아한다. 주제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내용도 없이 겉멋에 가득찼거나 들으나마나한 뻔한 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가끔 질문이나 던지고 여행길이나 떠나면 얻어지는 게 아니라, 평생에 걸친 성찰과 투쟁에 가까운 노력 속에서 한 걸음씩 얻어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우원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은 그 투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정도의 전과만을 유지할 뿐이다. 힐링 책들의 대부분이 읽고 나면 공허한 이유는 그 그럴싸한 언어가 저자 본인에게는 유용할망정 나 자신의 치열한 분투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경험과 깨달음이 참고가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영혼의 아픔이 그런 글 몇 페이지로 치유될만큼 간단한 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우원이 할려는 이야기도 그런 쪽은 아니다. 이 글의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뭐냐’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머 과학 코너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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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성 여부를 떠나 SF적, 혹은 현대 물리학적 설정들은 일상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다. 오늘의 주제도 그런 것들 중 하나라고 하겠다.


지난 편 말미에서 무한 개의 평행우주에 흩어져 사는 파토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그 무한 파토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접근해 볼 수 있다. 근데 사실은 평행우주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한 동안 반복해서 접해 왔다.


1) 체세포 복제를 통해 또 하나의 나를 만든다

2) 그 복제된 ‘나’에게 지금 나의 기억을 이식한다

3) 이런 방식으로 나는 몸을 옮겨다니며 영원히 살 수 있다

 

혹은

 

1) 인간의 뇌를 대신할 뛰어난 컴퓨터와 기계몸을 만든다

2) 내 뇌속의 기억 등 데이터를 디지털화해서 거기에 업로드한다

3) 나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살 수 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수많은 SF영화 등에 사용됐고 실제로 이런 게 당장, 혹은 조만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도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 대중들도 과학기술만 좀 발달하면 이런 일이 진짜 실현될 거라고 많이들 생각 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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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UFO 종교단체는 인간복제와 업로드를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게 왜 안되는 건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마.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게 단지 유전공학적, 컴퓨터공학적 분야라서 그 부분의 기술적 장벽만 풀리면 금세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허나 이런 관점은 인간 존재와 자의식에 대한 통찰의 결여에서 생겨나는 순전한 착각이다.


먼저 인간복제의 기본 개념부터 이야기를 해 보자. ‘복제’라니까 열라 대단해 보이고 지금까지 없었던 무슨 프랑켄슈타인적 존재를 세상에 내 놓는 것 같지만 이게 그런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복제는 이를테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란성 쌍둥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개체가 이미 태어난 후에 그 체세포로 복제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기술인 건 맞지만, 결국 그 결과물은 나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일란성 쌍둥이의 출현인 거다.


이러니 인간복제 자체만 본다면 내가 그리 옮아가거나 영생을 사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다. 멀쩡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내 쌍둥이 동생에게 무슨 수로 내 기억을 업로드하며, 설사 그런 게 기술적으로 가능해 진다한들 쌍둥이 아닌 어떤 사람에게라도 가능할텐데 굳이 체세포 복제를 할 이유는 뭘까. 이렇듯 인간복제는 나를 확장하는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고, 관련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비인간적으로 사육해서 장기를 빼 사용하는 등 신체적, 의학적인 시도에서 발생할 윤리적 이슈들, 혹은 일부 종교적 세계관과의 충돌 쪽인 거다.


즉, ‘또 다른 나’라는 개념은 내가 나라는 의식, 즉 내 자의식이 다른 육체나 장치로 온전히 이동해 가지 않는 한 전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쌍둥이는 그게 엄마 뱃속에서 나왔던 30년 후에 나타났던 그저 쌍둥이일 뿐 이런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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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등장하는 복제인간들은 나의 지위나 재산을 빼앗고 타인들에게 철저히 내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건 타인들의 관점에서 나일 뿐, 나 자신에도 또 다른 나인 건 전혀 아니다.

 

 

머 복제인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컴퓨터라면 어떨까. 우리의 의식이 기억의 총합인지 다른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우리 뇌 속에서 움직이는 정보를 통째 디지털 데이터화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걸 컴퓨터로 옮기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자, 그래서 이제 나는 제한된 내 육체를 떠나 기계 속에서 영원히 살고, 나아가 인터넷과 연결돼서 지구 전체를 헤집고 다니면서 무한한 힘과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걸까.


마냥 좋아하기에 앞서 디지털 정보의 이동이라는 절라 익숙한 개념을 한번 들여다 보자꾸나. 우리는 하루에도 최소한 수십 메가의 디지털 정보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컴으로 기본 웹서핑을 하는 정도만으로도 그렇고, 만약 영화라도 한 두개 다운로드 받는다면 그 양은 기가바이트 단위로 늘어난다.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원의 토렌트 프로그램은 거대한 양의 데이터들을 자동적으로 누군가에게 업로드하고 있는 중이다.


토렌트 말이 나왔으니 그걸 예로 들어 보자. 우원의 하드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의 하드로 전송되고 있을 때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머 기술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건 의미없는 일이니 이 주제와 관련해서 하나만 확인해 보자.


내 컴에 있는 데이터는 사라지고 모든 게 그쪽의 컴퓨터로 옮겨지는 거냐...?


만약 그런 식이라면 토렌트 파일 공유라는 게 가능할리 만무하다. 디지털 파일 공유라는 건 내가 그걸 여전히 가지고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남에게도 나눠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러 내 파일을 지울 수는 있겠지만 그건 전혀 다른 활동이다.


마찬가지로 생각하자. 내 뇌 속의 정보를 전부 디지털로 다른 컴퓨터에 전송했을 때, 그건 과연 ‘내’가 옮겨가는 걸까?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 뇌와 육체 속에 있고 카피된 정보가 컴퓨터로 복사되는 거다. 기술적으로 완벽하다면 그 컴퓨터는 나의 기억과 정서, 습관을 가지고 타인들에게는 나와 마찬가지로 비칠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나는 그것이 내 카피본일 뿐 내가 아님을 안다.


그럼 만약 내가 이 ‘이중파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오리지널 버전을 없애 버린다면 어떨까? 그거야말로 똥멍청이짓이고 본체인 인간 파토는 그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 뿐이다. 의식이나 영혼의 이동도 없고 영생도 없다. 영생은 그 컴퓨터와 그 속에 복사된 파토가 살 뿐이다.


'나'는 이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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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 개봉하는 조니 뎁의 새 영화 <트랜센던스>.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하고 놀란의 촬영감독인 

윌리 파이스터가 감독한 이 영화는 컴퓨터로 업로드된 인간의 의식을 소재로 다룬다.

아직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이 글에서 지적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작품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그럼 인간이 기계로 옮아가서 사는 건 정녕 불가능한 걸까. 그렇지는 않을지 모른다. 단 우리 의식을 기계로 복사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고 기계가 우리에게 옮아와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뇌를 들어내고 대신 컴퓨터를 집어넣는 따위는 아까와 같은 결과가 나오기 땜에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우리의 뇌는 천억 개의 뉴런으로 구성된 거대한 생체 컴퓨터다. 그 전체적 구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기계로 바꾸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0만개 정도의 뇌속 뉴런을, 같은 역할을 하는 집적회로로 교환한다고 가정하자. 이런 작업 정도는 전체 뇌와 뇌 속의 기억, 성격, 의식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다. 기왕에 존재하는 컴퓨터의 극히 일부 기판만 교체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스스로 멀쩡한 걸 확인하고 같은 작업을 뇌의 다른 영역에서 또 벌인다. 이런 식으로 뇌를 한걸음씩 기계로 바꿔 가는 거다. 물론 길고 지루하고 위험한 작업이지만, 각각의 기판이 원래 뉴런의 역할을 정확히 커버할 수만 있다면 데이터 카피나 전송작업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식과 자아의 변동도 없이 자연스럽게 뇌는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또 한가지 방법은 뇌와 컴퓨터를 특수한 인터페이스로 연결하는 거다. 이 상태로 장기간 생활하게 만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뇌와 컴퓨터를 함께 사용하는 데 점점 익숙해 진다. 세월이 지나 뇌가 노쇠하고 기능을 잃어갈 수록 컴퓨터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컴퓨터가 충분히 강력하고 인터페이스가 효과적이라면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기능이 컴퓨터로 이전될 수도 있다. 그럼 담에는 언젠가 생물학적 뇌가 죽고 나서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컴퓨터는 이 사람의 뇌로 구실할 지도 모른다.


물론 가정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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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뇌에 대해 아는 것은 아직 너무 적고,

과연 컴퓨터와 효과적으로 연동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우원은 최근 뇌가 개별적인 컴퓨터가 아니라 일종의 터미널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 나는 대체 뭘까.


나는 내 기억인가, 내 느낌인가, 내 감각인가, 아니면 내 유전자인가. 나는 뇌속에 있나, 심장에 있나, 몸 전체에 퍼져있나. 나아가 나는 내 몸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 가능한 걸까, 아니면 육체를 떠나도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만약 전생 같은 것이 있다면, 육체도 기억도 전부 바뀌고 지워진 지금의 내가 전생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결 고리는 어디에 있을까. 한편으로는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한들 내 손을 바라보며 이건 내 손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주체는 뭘까.


이것을 과학은 자의식이라고 부르고 종교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어느 쪽의 개념이 맞는 건지 우원이 대답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건 내가 어디로 업로드 되던 복제되던 간에 지금 이 자의식이 연속성을 유지한 채 소재하는 곳, 그 곳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무슨 조화에서인지 그게 설사 꼴뚜기나 강아지, 바퀴벌레의 모습이라 한들.



- 다음 시간에 좀 더 이야기해 보자꾸나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