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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의 진보가 대한민국의 미진한 과거청산을 아쉬워하며 모범사례로 곧잘 끌어오는 예가 프랑스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천 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수만 명을 징역 보낸 프랑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은 독일의 괴뢰국 비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페탱은 여러모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았으나 섬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사망했으며 거기에 묻혔다. 통증이 있더라도 제대로 집도를 해 '역사를 바로 세운' 프랑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진보에게는 이루지 못한 미망이자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가 성취한 수준이다.



비시정권 시절 프랑스인들이 괴뢰정부와 독일군에 놀라울 정도로 순종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절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 유럽에서도 높은 편이었던 생활 수준을 잃고 싶지 않았다. 독일의 속국이 된 일은 몹시 자존심 상하지만 일신의 안녕보다 중요치는 않았다.

 

우리로 치면 상해임시정부에 해당하는 ‘자유 프랑스’의 세력은 미미했다. 미국과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는 외국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쓴 후 거저 승전국이 되었다. 레지스탕스는 어떤가? 다소 얌체 같게도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늘어났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전형적인 경우다. 그는 젊은 시절 비시 프랑스의 하급관료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후에 레지스탕스로 전향했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2.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은 자국 청년들의 목숨을 실컷 바친 영국과 미국의 뒤통수를 치는 데 성공했다. 드골이 파리를 잽싸게 수복하자 프랑스인들은 갑자기 열렬한 애국자가 되었다. 그들은 나치독일에 순종적이었던 비루한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간발의 차로 '부역자'가 된 이들을 색출해 전국적인 마녀재판을 자행했다.

 

나치독일군과 연인관계였던 여성들이 거리로 끌려 나와 옷이 벗겨지고 머리가 박박 깎인 채 졸도할 때까지 조리돌림 당한 후 돼지우리에 갇혔다. 그 많은 사형선고는 과거로부터 단절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확실한 ‘역사 바로 세우기’라기보다는 집단적 광기였다. 근간은 비겁했고 결과는 잔혹했다.

 

자신이 적법한 사회구성원임을 확인하고픈 이들은 탈락자를 불태우고 찢는다. 중세의 공개처형에서 구경꾼은 참여자다. 그들은 피형자에게 오물을 던지고 그의 고통에 환호한다. 종전 후 프랑스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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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반민특위는 프랑스인들보다 훨씬 품위 있었다. 재판은 강제적이었지만 피고들은 열정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기도 하고, 순순히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기도 했다. 청중은 피고의 변론을 경청하고 때로는 박수를 쳐 주기도 했다. 친일행위를 하면서도 뒤로는 독립군에게 자금지원을 한 인사들은 형식적인 처벌로 원칙을 지키면서도 소정의 예우를 받았다. 가벼운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따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랑스식 과거청산과 반민특위 중 어느 쪽이 문명과 근대에 가까운 지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물론 이러한 반민특위 할동을 중단시킨 이승만은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한다. 반민특위가 권력자의 방해 없이 활동을 마치고 해산했다면 세계사에 유례없는 모범적인 과거사 정리 사례로 남았을 공산이 크다. 3.1 운동과 제헌헌법을 보면 '조선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근대적이었다.).

 

혹자들은 프랑스의 괴뢰정부 기간은 4년에 불과하고 우리는 36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독립했으니 과거 청산에 있어 훨씬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외려 식민통치 기간이 길수록 원한은 누적되게 마련이며 과거사 청산도 보다 혹독해지는 경향이 있다. 식민지 기간이 우리의 두 배인 베트남, 세 배 이상인 알제리가 그렇다.



3. 

프랑스식 과거청산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국민들이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합의한 결과다. 그 증거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바로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2차 세계대전은 단순한 강자의 승리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진보적 가치를 담보한 세력과 파시즘 이탈리아, 나치독일, 일본제국 등 극우국가의 전쟁이다. 시대정신이 시대역행을 저지한 전쟁이었으나, 정작 '승전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달랐다.

 

프랑스는 극렬한 보수 반동으로 치달았다.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점령자 앞에 순한 양이었던 과거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다른 열강들이 시대가 변했음을 깨닫고 식민지 독립 절차를 밟을 때 프랑스는 혼자서 미쳐 날뛰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저지하겠다며 프랑스 정규군, 외인부대, 아르키(북아프리카 모병)를 모두 합해 총병력 50만 명을 동원했다. 그 결과 10만 명의 전사자, 6만 명 이상의 부상자, 4만 명의 포로를 호치민에게 갖다 바치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포위 섬멸당했다. 이때가 1954년이다.


베트남의 승리뿐 아니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반동 역시 세계를 경악게 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한 마음이 되어 식민지에 집착했다. 이는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자존심이 짓밟힌 후 내부적으로 급격히 보수화된 것과도 공통점이 있으리라.



4.

베트남에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라는 큰 선물을 내주고 기가 꺾인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들의 독립 요구를 거부하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단 하나,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알제리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의 독립 요구에 함포 사격으로 응수했다. 인구 4000명이 넘는 마을에서 단 3명의 생존자만 남았다. 이때부터 강경해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은 급기야 1954년 독립국 선포, 즉 선전포고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극우적 광기는 선을 넘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삼국지 시대도 아닌 현대에 90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다(프랑스군의 만행에 지친 알제리인 프랑스 부대원 10만 명이 조국 독립 세력으로 전향한 탓에 나중에는 80만 명으로 집계된다). 프랑스군의 불법 연행, 납치, 고문은 알제리인들을 점점 하나로 만들었다. 프랑스 군부는 전쟁 기간 도중 정부가 전쟁을 그만둘까봐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1년 10월. 파리 학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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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라디오로 프랑스에 거주 중인 재불 동포들에게 조국 독립을 위해 궐기해달라고 호소했다. 재불 알제리인들 3~4만 명이 모여 파리에서 평화시위를 하던 날 밤. 파리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은 부하들에게 선언했다.

 

"우리 프랑스인 1명에 놈들 10명이다. 열 배로 죽여라. 적을 처단하라. 내가 책임진다."

 

아연실색한 상식적인 경찰들은 정직당했다. 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연행되었으며 총격과 몽둥이에 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죽거나 실신한 이들을 파리의 낭만으로 유명한 센느 강에 던져버렸다. 백구가 넘는 시신이 센느 강 하류에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어린아이가 포함된 일가족 전체도 있었다.

 

파리 학살을 신호로 알제리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에 학살의 바람이 불었다. 알제리 여성들은 발가벗겨진 채로 끌려 다니며 죽을 때까지 강간당했다. 산채로 태워지고 묻히고 목이 잘린 알제리인들의 처참한 모습은 구글 이미지 검색만 해도 끝없이 나온다. 프랑스군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프랑스는 전쟁 기간 중 총 200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학살했다. 알제리라고 가만있었을까.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무려 9만 명의 프랑스 본토 정규군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1962년, 알제리 독립으로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진보의 시대에 혼자 추태를 부린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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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은 후에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비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였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파리 학살 역시 한 악마적 개인의 만행에 불과한 걸까? 파퐁은 1961년의 파리 학살 당시에는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신분세탁에 성공한 상태였다. 즉 파퐁 개인은 악당이겠으나 사회적으로 그는 레지스탕스였다. 파리 학살은 자랑스러운 레지스탕스 출신 공직자의 활동이다.

 

알제리 전쟁 기간 중 대통령이 된 샤를 드골은 후에 모리스 파퐁을 중용했다. 파퐁은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콩코드 제트여객기 개발을 책임졌다. 이는 그의 악행이 정치 권력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받았음을 의미한다.

 

훗날 과거가 드러난 모리스 파퐁이 재판정에 섰을 때 알제리인 학살은 죄목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의 죄는 '유럽인'인 유대계 프랑스인을 해친 것이었다. 프랑스는 아직도 알제리가 요구하는 진실과 사과에 미온적이다. 아니 미온적인 정도가 아니라 몹시 귀찮아하며, 이 분야에서는 일본과 동일한 수준이다.



5.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똘레랑스. 프랑스는 화장을 잘하는 나라지만, 이 나라의 메이크업은 생각보다 얇다. 민낯과의 거리도 멀다. 프랑스식 과거청산을 동화적으로 바라보는 좌파들의 순진무구함은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발견되는 감동과 결은 달라도 정도는 비슷하다.

 

프랑스 극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현재진행형이다. 막말과 극우주의로 트럼프 둘째가라면 서러운 르펜 가문이 번영하고 허구한 날 테러가 터지는 이유다. 프랑스의 보수 반동적 일면은 나치 부역자 처단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식 과거청산은 결연한 의지가 아닌 광기의 표출이었으며, 그 결과는 시대착오적 제국주의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현재 똘레랑스의 가치를 담보한 국가가 있다면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이나 캐나다를 거론해야 한다.



6. 

왜 진보는 틈만 나면 프랑스 이야기를 꺼내는가?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잘 된 나라가 있다. 
못 된 나라가 있다. 
 

이것으로 사회의 불완전함과 사람들의 불행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이 사고관은 세계를 이해하는데 몹시 단순한 틀을 제공한다. 복잡다단한 인과를 파악하는 데 있어 귀찮기 이를 데 없는 사유와 공론을 피하게 해 준다.

 

"우리나라는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므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비록 결말이 비극적이라 그렇지, 완전히 이해했다는 느낌은 인간에게 만족을 준다. 이 만족엔 선민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해방 후 첫 단추가 보기 좋게 잘 꿰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저 명제로 한국 현대사의 이해를 끝낸다면 그 다음 순서는 사고의 화석화, 퇴행이다. 그래서인가. 한국처럼 좌파의 사고가 경직된 곳도 없을 것이다.

 

경직된 사고는 필연적으로 우경화를 부른다.



7. 

과거청산을 못 한 우리나라
과거청산을 잘 한 프랑스

 

이 사고 프레임에서 도출되는 필연적 결론은 우리도 프랑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면과제는 지금이라도 가급적 빨리 '내부의 적'들을 쓸어버리는 일이다. 요즘엔 이러한 통쾌함을 일컬어 ‘사이다’라고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는 파시즘이다.

 

이명박, 박근혜 뽑은 어르신들은 답이 없으니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게시물이 소위 진보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추천을 받는다.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 역시 일베와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지길 바란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우리 사회를 퇴행시키는데 본인들도 일조하고 있었음을 알고 인정하는 것. 나는 이것이 진정한 진보의 품위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자칭 진보는, 자신들이 '충'을 적발하고 색출하는 자경단원인 줄 믿는다. 그 완장은 누가 채워주었는가?

 

분명, 어떤 면에서 우리 진보는 거꾸로 서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적이려면 맛본 적 없는 사이다의 맛을 공상 속에서 음미할 게 아니다. 전후 프랑스의 집단적 광기와 같은 태도로부터 의식적으로, 되도록 멀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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