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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병동 답사기 - Case 01. 애국가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아래의 사례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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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70대로 보이는 남성이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자꾸만 애국가가 들려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약 2개월 전부터, 갑자기 이유 없이 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단다. 왜 하고 많은 노래 중에 애국가가 들렸던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가령 탑골공원에서 태극기 뱃지를 달고 종북세력 청산!을 부르짖는 그런 부류의 노인은 아니었다는 거다. 애국가는 마지막 소절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무한 반복되었다고 한다. 아하, 통재라. 이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라. 그 옛날 아침 조회 시간에 한 번 듣기도 힘든 애국가가 계속해서 울려퍼진다니... 아찔하지 않은가?


<사례 2>

두 번째 사례는 같은 나이대인 한 여성 분의 이야기다. 아주 비슷하게도, 어르신은 '귀에서 자꾸만 노랫소리가 들려' 병원에 오게 되셨단다. 무슨 노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어 같기도 하고 한국어 같기도 한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진다는 것. 낮 동안 바쁘게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면 빈도가 덜하지만, 밤이 되고 사방이 조용해지면 느닷없이 귀를 맴돌며 울려 퍼진다는 거다. 처음에는 누가 집 밖에서 노래를 부르는 줄 알고 이노무 자식! 소리를 치며 문을 박차고 나가셨단다. 물론, 집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의 두 사례를 접하면서 나는 전두엽의 시냅스에 유쾌한 지적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느끼며 지극히 학문적인 탐구욕을 느끼게 되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독자들에게는 솔직하게 까놓고 진실만을 말하겠다. 정신과 의사들, 특히나 조무래기 전공의들의 경우 환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건 “Impression”이다. 임프레션이라는 건 간략히 병력 청취를 통해 환자의 임시적인 진단명을 추정해내는 것이다. Impression을 잡아야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정할 수 있고, 무엇보다... 교수님에게 보고할 게 생긴다. Impression을 못잡으면 욕을 먹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 환자의 Impression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이 두 어르신의 Impression을 뭐라고 잡아야 할까? 아니, 그보다도, 이 사람들이 경험하는 환각적 경험은 정신병적인 것으로 봐야 할까,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야 할까?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아니 차라리 유구한 정신의학의 역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신 질환은 크게 Psychosis(정신증)과 Neurosis(신경증)으로 나뉜다.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정신증은 현실 검증력을 잃은 상태이고, 신경증은 현실 검증력을 유지하는 상태다.


가령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각을 경험하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그릇된 믿음(망상)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크게 보아 정신증이다. 반대로 현실의 인지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감정적인 문제를 겪거나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등 정신적인 문제를 갖는 경우는 신경증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처음에 누군가 '환청' 때문에 왔다고 하면 정신증 쪽을 먼저 의심하고 본다. 정신증의 범주에 속하는 질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현병(Schizophrenia)’이다. 예로부터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리던 것인데, 사람들이 시쳇말로 ‘다중이’라고 하는 다중인격장애와 개념적인 혼동을 겪어 대한의사협회에서 2011년부터 이름을 개정했다. (다중인격장애는 전문적인 용어로 ‘해리성 정체성장애(Dissociative Identitiy Disorde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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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의 진단은 주로 DSM-V 체계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이에 따르면 조현병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음 증상 중 둘(혹은 그 이상)이 1개월의 기간 동안의 상당 부분의 시간에 존재하고, 이들 중 최소한 하나는 (1)내지 (2) 혹은 (3)이어야 한다.

(1) 망상

(2) 환각

(3) 와해된 언어(예, 빈번한 탈선 혹은 지리멸렬)

(4) 극도로 와해된, 또는 긴장성 행동

(5) 음성 증상(예, 감퇴된 감정 표현 혹은 무의욕증)


B. 장애의 발병 이래 상당 부분의 시간 동안 일, 대인관계 혹은 자기관리 같은 주요 영역의 한 가지 이상에서 기능 수준이 발병 전 성취된 수준 이하로 현저하게 저하된다(혹은 아동기 또는 청소년기에 발병하는 경우, 기대 수준의 대인관계적 · 학문적 · 직업적 기능을 성취하지 못함).


C. 장애의 지속적 징후가 최소 6개월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6개월의 기간은 진단기준 A에 해당하는 증상(예, 활성기 증상)이 있는 최소 1개월(성공적으로 치료되면 그 이하)을 포함해야 하고, 전구 증상이나 잔류 증상의 기간을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전구기나 잔류기 동안 장애의 징후는 단지 음성 증상으로 나타나거나, 진단 기준 A에 열거된 증상의 2가지 이상이 약화된 형태(예, 이상한 믿음, 흔치 않은 지각 경험)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외에도 D,E,F 등의 필요한 진단 기준이 더 있기는 하지만 간단한 이해를 위해 이 정도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중학교 시절 우리 수학 선생님이 누누이 말했듯이, 뭐든지 정의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는 법.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환각’의 정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사람이 ‘잘못된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환각(Hallucin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착각(Illusion)’이다. 둘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외적 자극 요소가 실재하느냐’다. 외적 자극이 실재하는데 그것을 오인해서 지각하는 경우 ‘착각’이 된다. 반면 외적 자극이 실재하지 않는데 무언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환각’이다. 가령 여친이랑 쇼핑을 나갔는데, 여친이 “오빠, 나 저 힙쌕 사고 싶어!”라는 걸 듣고 “응! 나도 쎅스하고 싶어!!”라고 반응한다면 이건 착각이다. 반면 한여름밤 자려고 누웠는데 산속에서 자꾸 가녀린 여인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건 환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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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인들의 사례로 돌아와보자. 그렇다면 ‘노랫소리’라는 환각적 경험을 한 이들을 조현병으로 볼 수 있을까? 문제는, 이들의 경우 조현병의 다른 기준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그들은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한다”든지,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나를 조종한다”는 등의 망상을 보이지도, 남들이 보기에 ‘괴상하다’고 느낄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도 않으며, 인간관계에 미숙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현병은 대부분 거의 20대에 발병하기 때문에, 만약 이들이 조현병이라면 어린 시절에도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어야만 한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봤을 때, 환청이 들린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올바른 현실검증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을 정신증으로 분류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각을 동반하는 노인 질환은 드물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대부분 기질적인 원인을 갖는 질환들인데, 가령 레비소체 치매(Lewy Body Dementia)의 경우 초기에 환시와 같은 환각 증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찰스 보넷 증후군(Charles Bonnet Syndrome)에서의 경우 시각 장애를 겪는 노인이 생생한 환시를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와 유사하게 청력에 장애가 오는 경우 이에 대한 보상으로 환청이 발생하면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 노인들은 청력에 이상이 있지도, MRI상 특별하게 이상한 소견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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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이 치매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치매 중 가장 흔한 게 알츠하이머 병인데, 이 병의 골자를 이루는 게 바로 ‘기억력의 문제’다. 그런데 이분들에게서 기억력의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옛날 우리 옆집에 살았던 김씨 할머니처럼 자꾸만 집열쇠를 숨긴다든지 옆집 이웃에게 쌍욕을 하는 일도 없었단다. 다른 문제가 전혀 없이, 다만 ‘노랫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치매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라. 손예진이 자꾸 정우성 얼굴을 잊어먹어서 문제지, 애국가가 들린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잖은가?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이 심한 경우 환각적 경험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분들은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단다...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우울한 일이 없을 수 있겠나 싶어 우울증의 진단 기준에 좀 ‘끼워맞춰보려고’ 노력을 해보기도 했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고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하아... 난제로다. 진정한 아포리아(Aporia :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로구나. 진단을 못 내리면 정신과 전공의로서의 내 명성(?)에 흠이 갈 뿐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다 싶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 계속 같은 노래가 ‘반복적’으로 재생된다는 데에 착안해보자. 강박증 혹은 강박성 성격 장애는 아닐까? 나는 어르신에게 혹시 하기 싫은 생각이나 손을 씻고 싶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지, 혹은 집안 정돈이 안 되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지 물었다.


“왠걸요. 이노무 양반이 집안을 하도 어질러 놔서 내가 살수가 없구만요” 


정색하는 아내 옆에서 말없이 머리를 긁적이는 할아버지의 머리에서는 새하얀 비듬이 벚꽃마냥 흐드러지고 있었다.


마지막 한 줄기 희망마저 잃게 된 나는 힘 없이 진단명을 넣는 칸에 ‘환청’이라고 써넣었다가, 그래도 어딘가 너무 없어보이는가 싶어 ‘Auditory hallucination’이라고 영어로 고쳐 써넣는다. 아... 이러려고 여태까지 공부하고 수련받은 건지 자괴감이 든다.


다행히 진단을 못 내렸다고 교수님께 혼나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질문이 남는다. 그때 그분들의 증상은 도대체 무엇으로 봐야 할까? 왜 그런 증상들이 나타난 것일까? 이것은 어쩌면 아직 개념화 되지 않은, 아니 차라리 개념화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의 실재는 아닐까? 이것을 기존의 개념에 욱여넣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개념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


그래, 이 간극을 성급히 메꾸려 하지는 말자. 열어두자. 그대로 열어두자꾸나. 혹여나 이 현상에 대한 문헌을 발견하거나, 이에 대한 단초를 발견하신 분들은 도움 주시라.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리겠노니.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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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