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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쯤 전

 

이력서 제출을 해야 하는데 사진이 없었다. 이메일을 뒤지면 언젠가 찍어뒀던, 나같지 않은 취업용 증명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쓸까 말까 고민하다 마감 한 시간 반 전에 겨우 쓰기 시작한 이력서라 사진을 찾아 컴퓨터 폴더를 뒤지고 나면 마감 시간을  넘을지도 모른다. 포토샵으로 만들어버려 이제와서 사진 없는 버전으로 만들려면 100% 마감 시간을 넘길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 그림 폴더를 열어서 제일 첫 사진으로 무조건 내는거야.’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이런 고민할 시간에 폴더를 뒤졌다면 이미 사진을 찾을 수도 있었을거란 번민이 머릿 속을 어지럽혔지만, 굳게 마음을 다잡고 무조건 첫 사진을 이력서에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여행지에서 일어나자마자 팅팅 부은 얼굴로 바나나 주워먹다 찍힌 사진을 제출했고, 합격했다. 친언니가 개그맨 시험 지원서냐고 물어봤던 그 사진을 내고도 합격할 수 있었던 건 딴지가 사진 제출을 의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잘난 탓인 듯 하)다.


 

딴지 입사 전

 

정작 취업할 때는 필요 없었지만 취업 전, 그러니까 내가 딴지 외에 다른 곳에 지원하고 있을 때는 항상 만료되지 않은 어학 점수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걸 위해 토익시험 주관사인 ETS에게 갖다바친 돈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대학생 때는 혹시 모를 인턴 지원을 위해, 그 후에는 정규직을 위해 언제나 ‘신선한’ 어학 점수를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여기에 숟가락을 얹은 건 토익 스피킹이다. 토익이 필수던 시기를 지나 몇 년 사이 스피킹이 중요해지면서 말하기 시험 점수를 요구하는 기업도 많아졌다. 기업은 면접 때 자체적으로 영어 인터뷰를 하는 대신, 취준생에게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입증할 것을 떠넘겼다. 가뜩이나 없이 사는 취준생들에게는 4만원이 넘는 토익 시험비에다, 8만원에 가까운 말하기 시험비까지 ETS에 지속적으로 뜯기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시험 점수는 필요하고, 점수 취득을 위해 시험공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물론, 스피킹 시험 점수가 업무를 감당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고 기업도 알고 우리집 고양이도 안다.


 

토익스피킹 만점에 도전해보겠습니다

 

“저, (쓸모없는) 토익스피킹에 도전하겠습니다.”

 

구성원의 자기계발과 쓸데없는 짓을 환영하는 딴지 편집부에서 실제 영어 말하기 실력과 하등 관계가 없는 토익스피킹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촘촘한 회의를 거쳐 정한 나름의 룰은 다음과 같다.

 

- 주경야독의 정신으로 독학한다

- 단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공부 과정은 니가 알아서 하고 만점만 받아왔!’으로 들린다면 오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곱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자. 간단한 룰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학원 가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대신해 독학으로 토익스피킹 만점을 받는 모습을 공유함으로써 취업과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꽃길을 깔아보자’는 것이었을 게다.



 

시험 전, 자기 객관화의 시간

 

딴지에 덜컥 입사하고 나서 잊고 지낸 사이 내가 취업을 위해 준비했던 토익과 토익스피킹은 스르르 만료되었다. 만료되기 전, 약 3년여 전 쯤 봤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익스피킹 점수는 레벨 7, 점수로는 180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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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 스피킹 점수 분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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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 토익 스피킹 평균 점수와 평균 레벨



20점만 올리면 되니까 별 것 아닌 것 같겠지만, 나는 그 전에 봤던 토익 스피킹에서 한 번도 만점을 받지 못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토익 스피킹을 빨리 끝내고 취업하려고 학원을 두 달 다닌 적이 있었는데 거기 학원 강사도 미치려고 했다. 10점만 더 오르면 레벨 8인데 왜 안 오르지?????????,라며.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췄다. 내 목표는 만점이 아니라 그냥 취업할 때 발목은 안 잡는 점수를 따서, 취업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는 취업이 안되어 망했다).

 

그 이후로 2년의 기간이 지나 눈물의 만료를 몇 번 겪으며 시험을 더 봤을 때도 마치 한 우물만 팔려고 했다는 듯 늘 레벨 7, 180점을 고수해왔다. 물론 이때는 야매 독학을 했었다. 신기하게도 레벨 8은 성역이었다.

 

실제 말하기 능력의 문제가 아닐까 의문을 갖는 이들을 위해 말하기 능력과 토익 스피킹의 연관성은 다음 짧은 에피소드로 대신 보여드리고 싶다.

 

어학연수를 막 끝내고 돌아온, 쉽게 말해 영어력이 피크를 찍고 있던 학교 선배와 같은 시험장에서 토익 스피킹을 본 적이 있는데, 시험 시작 전에는 웃으면서 수다 떨던 선배가 끝나자마자 육성으로 ‘시바'를 외치며 시험장을 떠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선배는 그 후로 다시는 토익 스피킹 시험장에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응, 연관은 1도 없어. 실제 말하는데 아무 문제 없던 그 선배가 왜 시바를 외쳤는지는 앞으로 차차 설명하겠다.


 

이게 바로 권고사직입니까

 

사실 토익 스피킹이 실제 영어 구사력과 큰 관계가 없는데 굳이 도전할 필요가 있을까 망설였다. 시작도 하지 않은 아이템 따위 엎으면 그만이니, 조심스레 편집부 회의에서 의견 개진을 해보았을 때 죽지않는 돌고래 편집장(이하 죽집장이라 하자)이 전에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랬다.

 

“뭐든 인지니어스 앞날에 도움이 되는 거면 의미가 있지.”

 

… 무슨 앞날? 뭔 의미? 아마도 나의 이직을 강요하거나 암시하거나 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아닐거야… 죽집장의 (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전폭적 지지와 따스한 축복을 본 건 입사 후 처음이란 생각에 마음이 자꾸 찜찜해졌지만(이게 바로 권고사직입니까), 나는 왠지 모를 축복에 홀리듯 토익 스피킹 점수를 취득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저녁, 퇴근하자마자 달려간 서점에서 표지에 Lv.7-8이라고 적혀있는 책만 추렸다. 그 중에서 얇은 단기완성 책으로 정했다. 몇 권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왠지 몽롱해져, 결국은 책 두께를 보고 결정했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니 믿어줬으면 좋겠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규칙에 따라 책을 가방에 넣으며 독학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즈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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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면 맥이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이미 책은 샀고, 아무래도 강제 이직은 시작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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