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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수능을 봐야겠다 마음 먹은 후에 재수학원 등록을 마쳤다. 한 학기를 대학생으로 살다가 이제 막 반수생이 되려던 그때, 그 학원 원장이 마침 며칠 후에 있을 모의고사를 권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 원장이 그랬다.


"너처럼 점수가 좋았던 애들은 공부하기 전에 시험 안 보려고 그래. 자기가 원래 받던 점수보다 떨어져 있는 게 당연한 데, 그간 쉬면서 떨어졌을 점수를 확인하기가 싫어서. 나는 이만큼 받던 앤데 생전 처음 받는 점수는 보기 싫은 거거든. 너도 아마 점수 떨어졌을거야. 그런데 그게 지금 현실이니까 피하지 말고 시험 한 번 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공부해."


들킨 기분이었다. 내 점수가 떨어지지 않았을 거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점수가 떨어진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을 보기 싫었다. 그치만 팩트폭행에 반박할 말이 없어 나는 며칠 후 모의고사를 봤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나한테는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남들에게 못하는 걸 보여주지 않으려는 습성을 스스로 깬 (아마도 내 인생에 몇 번 안 되는) 용감한 순간이었으니까.


그런 두려운 순간이 그때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은 늘 내 마음과는 존나 많이 다르게 흘러간다.


"시험을 당장 한 번 보고 시작하지 뭐."


어느 날 해맑은 표정의 편집장이 말했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은 회의 시간에 방긋 웃으며 다른 사람 죽이는 일이 가끔 많다있다. 엉겁결에 이틀 후 있을 시험 등록을 마쳤다.



토익 스피킹 D-1 : 엄마 나 옛날 사람인가봐


토익 스피킹 책을 샀지만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회사일이 바빠 그랬다는 직장인의 만능 핑계로 퉁쳐본다. 하여간 책을 폈을 때, 즉 시험 하루 전에 책에서 발견한 건 '신유형'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오만년쯤 전 일이기는 해도 한때는 두 달 동안 토익 스피킹 학원도 다녔으니 나름 유형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유형이 나온다니. 놀란 표정으로 신유형이 나온다는 내 말에 챙타쿠 기자는 그랬다.


언니 그게 언제적 얘긴데...


나를 바라보는 챙타쿠 기자의 눈빛에 흐르는 한심함은 애써 모른척 했지만 정말이지 옛날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날 퇴근 후에는 공부를 다짐했지만, 현실은 집에서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이 들었다. 태풍이 오기 전 하늘이 맑을 수록 다가올 태풍이 거세다던데, 그날 잠이 그랬다. 더할 나위 없었다. 시바..



토익 스피킹 D-day : 첫 시험, 한 시간 전


걸어갈 시간을 생각하고 출발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택시를 타고 시험장 옆 카페에 앉아 책을 펴고 있었다. 쫄았던 탓이다. 한 시간 동안 책을 뒤져서 써먹을 표현을 찾아야 했다. 책을 펼쳐보고야 깨달았다. 와 존나게 외울게 많은 시험이었구나. 내가 (아마도) 3년 만에 본다고 까먹었구나. 


맞아맞아 이런 표현도 있었지,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끄덕끄덕 한참 했지만, 동시에 지금 보고 있는 표현이 막상 시험장에서는 절대 기억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 토익 스피킹의 빌어먹을 시험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망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었다.



토스 시간분배.jpg
토익 스피킹 답변 시간


토익 스피킹 시험 시간은 칼같다. 이 시간은 해야할 답변이 길어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지독해지는데, 쉽게 말해 니가 얼마나 말을 잘하든 말든 정해진 시간 지나면 녹음기가 꺼진다는 의미다. 평소에 있지도 않은 비지니스 상황을 막 60초씩 말하라고? 나한테 지금 랩하라는거 아니냐. 이거 쇼미더머니냐. 갑자기 이 시험이 실제 영어 실력을 입증할만한 시험이라고 굳게 믿는 ETS와 기업의 부조리함에 어이가 사라지며 등에 땀이 흘렀다. 절대로 내가 공부를 안해서가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다급하게 외워보는 표현과 단어들은 책을 들여다 볼수록 점점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심지어 알파벳이 부스러져 날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카페에서 일어나 집에 가고 싶은 내 자아를 이성으로 꾹꾹 누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는 성적은 꼭 필요하다' 되뇌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보는 성적을 받기란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이건 아마도 모범적으로만 살아온 삶의 궤적 때문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토익 스피킹 시험 중

막상 모니터 앞에 앉으니 왠지 시험을 잘 볼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꽤 쉽게 봐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을 갈 수도 있을 거다. 대학생 때도 이런 느낌으로 시험을 봤다가 D학점을 받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하는 대로 될 지도 모르니까.

이런 희망에 똥물을 끼얹은 건 ETS의 바뀐 시험 규정이었다. 각자 모니터 앞에서 본인확인을 하는 중에 웹캠으로 사진을 찍는 절차가 있었다. 대리 시험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어차피 본인 확인 중이므로 아주 대충,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 다음 내가 대면한 건 내 수험증용 증명사진과 방금 내가 찍은 사진이 나란히 크게 띄워진 모니터 화면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험을 봤을 땐 그따위 비인간적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생전 처음 보는 거였지만 그건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토스 사진.jpg
좌) 증명사진 / 우) 현실의 나


아니...나는 그게 그냥 서버에 업로드 돼서 본인 확인하는 건 줄 알았는데...(눈물) 

503이 말한 혼이 비정상 드립을 내 평생 이해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혼이 비정상이 되는 기분이었다. ETS의 수험자 멘탈 흔들기였다면 그건 정말이지 존나 성공적이었다. 본인 확인이 끝날 때까지, ETS의 시각 능욕을 고스란히 참아야만 했다.  


토스 시험공간.jpg
하필 시선을 둘 곳도 없는 이런 공간에서...
(토익 스피킹 시험 공간은 레알 이렇게 생겼습니다)


토익 스피킹은 파트 6, 총 11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내가 늘 자신 없었던 건 파트 2(사진 묘사)와 파트 6(자기 생각을 근거 대고 말하기)였는데, 신유형이 출제되는 건 파트 3과 파트 5였다. 

...? 야 그럼 파트 1,3 빼고 다 못 본다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긍정적으로 보면 파트 1과 3은 잘 할 수 있다는 뜻이 되면서 희망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파트 1은 지문 두 개를 자연스럽게 읽는 것인데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란 적절한 끊어 읽기와 사람다운 어조, 명확한 발음 정도가 되겠다. 사실 나의 오랜 취미는 영어책을 소리내서 읽고 오디오북과 비교해보는 것이라 사실 파트 1에는 매우 자신이 있었다.

다만 내가 잊은 것이 있다면, 파트 원이 시작되자마자 온 사방에 칸막이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들이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소리를 내는 시험이라 잘못하면 내 답변이 명확히 녹음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학원에서는 꼭 우렁차게 말하라고 가르친다. 강사에 따라서는 남는 시간에 똑같은 것을 계속 읽으라는 지령도 내려준다. 이런 시험 전략이 짬뽕되면 남는 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와와와와와왕!!!!!!!!!!!!!!!하고 짖는듯한 서로의 발성 다툼이다. 오랜만이라 도통 적응이 되지 않은 나는 파트 1 녹음이 시작되자마자 울리는 사자후에 영혼이 나갔다. 파트 1에서 그렇게 버벅인 건 처음이었지 싶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서 진돗개 몇 마리가 한꺼번에 짖었을 때를 빼고 이런 혼미함은 오랜만이었다.

설상가상 모니터 왼쪽 상단에 아까 내가 본인 확인차 찍은 사진이 시험 끝나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진 속 나는 존나 화가 나 있었고, 따뜻하게 바라봐줘도 모자를 판에 내가 나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건 마치 나는 나와 싸운다.sibal 같은 느낌이었다. 파트 1부터 6까지 총 11문제를 푸는 동안 사진 의식 →답변 버벅→왠지 사진 눈치 봄(?)→정신 혼미 의 과정을 딱 11번 밟고 나니 시험이 끝났다. 망했다. 차라리 저 사진과 증명사진의 괴리를 보고 ETS가 이건 본인이 아닌 것같다고 결론을 내려준다면 기쁠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났다

집에 오면서 곱씹어보니 어떤 건 말을 하다 말고 시간이 잘렸고, 어떤 건 버벅였으며, 어떤 건 조금 이상한 답변을 한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가 학원 다닐 때 배웠던 '공식'들이 찬찬히 기억나기 시작했다. 학원을 다닐 땐 거의 툭 치면 뭐라도 답할 수 있게 답을 외우고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몇 년이나 지나서 그딴 걸 기억할 리가 없다. 영혼이 탈탈 털린 기분으로 걸었다.



토스 순례자.jpg 
욕을 하고 싶고, 할 욕도 준비되어 있으나, 욕을 할 수는 없는 상황


첫 시험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만점을 받고 끝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대체 뭘 국영수 위주로 하라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딱 한 가지 예감은 들었다. 내 평생 처음 편집장을 때릴 수도 있겠으며 맞는 점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맞다, 그래서 첫 시험 점수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토스첫시험성적.jpg
레벨 6, 점수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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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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