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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찌라시 한국사'는 재미난 역사적 사건을 대화체로 풀고 썰을 마구 첨가하여 남녀노소 상하좌우 친박반박까지 한국사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한 새 연재입니다.

 

찌라시만큼 흥미진진하고 쫄깃하여 찌라시인 것이지, 진짜 찌라시와는 무관하니, 맘 편히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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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오래된 미래라 부르는 이유는 역사가 끝없이 반복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들은 반복되지 않아야만 한다.

 

우리 역사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으나 실패로 기록된, 동학 혁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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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운동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슬프고 아픈 역사 이야기인 건 아는데 실상은 자세히 모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주소야. 사실 동학 농민운동이란 말 자체가 교과서나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 자체가 얼마 안 된 일이니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동학 농민운동까지 알아야 하나 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기 위해 희생된 우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알아보고 가는 시간을 갖자고.

 

100년이 지난 일이지만 세상은 별반 달라진 게 없이 우리는 오늘을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어. 최대한 쉽게 풀어 볼 테니 함께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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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동학이란 종교가 있었고, 이 동학이 농민운동과 합쳐진 건데, 저 당시 농민이라면 지금의 직장인들이야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직딩인 아니면 직장인 가족이겠지?, 도대체 100년 전 직장들이 왜 쟁기 대신 창을 들게 되었을까그럼 먼저 동학에 대해서 살짝 알아보고, 이 동학이 농민운동과 합쳐지는 과정을 살펴 보자고.

 

동학의 창시자는 최제우야. 1824년 경주에서 태어났으니, 살아 계신다면 190살이 넘으셨겠어그의 아버지가 63세에 최제우를 보았다고 하니, 아버님부터 비범하다고 봐야겠지? 선조도 이쪽으로는 상당한 능력자이신데!

 

문제는 친 어머님이 재가를 통해 최제우를 낳아서, 신분에 한계가 있었다고 해아니 무슨 서자차별은 들어봤어도, 재가를 통해 낳은 자식까지도 차별을? 조선시대 신분제의 벽은 너무나 높았어아버지가 워낙 고령이니, 최제우가 나이 10세 때 돌아가시고, 7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 최재우는 조선시대 사람답게 3년 상을 마치고, 10년간 전국을 도는 유랑을 시작해. 신분이 미천하니 열심히 공부를 해 본들 출세를 할 수도 없고,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누구 하나 책임질 상황도 아니니 구름처럼 떠난 거야.

 

최제우는 유랑을 통해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어. 10년간의 유랑 생활 중 만난 처자와 만나 초가삼간에서 달달한 신혼생활을 시작했어. 신혼집은 현재의 울산에 있는 -신묘한 느낌이 나는- '속유곡동'이란 곳이었어그러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마치 근두운을 타고 온 손오공처럼 스르르 집 안으로 스며들어왔어.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 두 부부는 깜짝 놀랐어.

 

“소생은 금강산에서 부처님을 뫼시던 중이온데, 지나가던 길에 목 좀 축이러 들어왔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스님. 빤한 살림살이라 냉수밖에 대접할 게 없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나저나 주인댁 안 곳곳에 많은 책과 수양의 흔적이 보이는데, 제가 뜻을 익히지 못한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는데, 한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냥 10년간의 유랑을 통해 얻은 생각들을 혼자 정리하고 있던 참입니다. 어찌 스님이 깨우치지 못한 책을 제가... 허나 스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이 책을 얻은 경로가 기이하기도 하고, 내용도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인지라 실은 제가 선생님 댁에 쌓여 있는 책들을 보고 일부러 물을 청하며 들어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어디서 책을 구하셨길래?

 

“제가 한 달 전 부처님께 100일 기도를 막 마쳤을 때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혼자 그것 참 기이한 일이로다 하며, 이내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제가 탑 주변을 지나다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묘한 스님으로부터 묘한 책을 전해 받은 최제우는 사흘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고, 열공을 시작했어3일 후 스님이 다시 찾아 왔을 때, 최제우는 책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였고, 스님은 크게 기뻐하셨다고 해최재우가 식사라도 대접 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스님은 사라지고, 을묘년에 얻은 비서라고 하여, 이 책을 을묘천서라고 한다고 해. 안타깝게도 이 책은 스님과 함께 사라졌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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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이 일이 있은 지 5년 후 드디어, 최제우는 서학에 맞서는 동학을 창시하게 되었어인내천 사상이라고 많이들 들어봤지하늘과 땅과 사람을 일체로 보고, 사람 하나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우며,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야. 언제나 그래왔지만 이 당시 백성들만 점점 살기가 힘들고, 빈부의 격차는 점점 커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동학의 사상은 백성들 사이에서 차츰 퍼져 나가기 시작했어.

 

하지만, 이런 사상은 저 당시 1%들에게는 자기들 밥그릇을 위협할 수 있는 사상이었기에, 최제우는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41세의 나이로 동학 창시자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어이 정도로 동학의 탄생 비화에 대해 맛만 보고, 농민운동과 어떻게 합쳐졌는지에 대해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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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폭발하여 일어난 일이지만, 시발점엔 조병갑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권력층이 있었어국민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며 국민의 세금으로 멀쩡한 강에다 보를 만들고, 그 보에 담은 물로 국민에게 다시 세금을 걷은 천하의 악질. 바로 조병갑.

 

18924월 전라도 고부 지역 군수로 임명된 인물인데, 이 인간의 악질적인 국민 피 빨아 먹기가 결국에는 동학 농민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어조선시대 내내 사회지도층은 전라도 지역에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 먹고 있었어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라 돈이 많이 도니, 어느 지방보다 풍부한 세수가 있었던 곳이지그러하니, 정신 나간 관리들이 관직에 오르면 1지망으로 발령받고 싶어하는 지역은 자연스레 전라도 지방이었어

 

현대 사회에서도 석유를 가진 나라들이 강대국의 먹이감이 되는 것을 보면, 자연의 혜택을 받은 지역이 수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나 봐조병갑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방법까지 동원해 창조적으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기 시작해.

 

지역 특성상 부자 농민들이 많은데, 이들을 대상으로 누명을 씌워서 재산을 몰수해예를 들면 불효 죄

 

“죄인 우병춘은 재산이 차고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평소 부모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넉넉하지 못한 바, 내 그 부모를 불쌍히 여겨, 죄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지역사회에 엄중한 경고를 내릴지니. 모든 자식들은 본 사건을 본보기로 삼아 부모에게 반드시 효도하여라”

 

다음은 풍기문란죄!

 

“김돌석네 둘째 딸은 평소 행실이 단정치 못하여, 동네 장정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 죄가 매우 크다. 이는 한창 추수 시기에 주요인력들의 1인당 생산량을 급격히 떨어뜨리게 되었고, 가계 경제에 극심한 피해를 입힌 바, 풍기문란죄로 애비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니, 본 사건을 본보기로 삼아, 모든 집의 부모들은 여식들의 행동거지를 단속하게 하여라.

 

이거 코미디가 아니고 진짜 있었던 죄목이야.

 

설상가상으로 지 애비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는데, 공덕비를 세운다고 백성들에게 돈을 또 거두었어. 공덕비라고 하면 요즘으로 치면 기념관 정도 되겠지. 그리고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흐르는 강물을 만들어 보를 만들었다고 해. 이유는?

 

“아니 도대체 멀쩡히 잘 흐르는 강물을 멋하러 막는다고 지랄이랴 지랄이?

 

“입 조심혀. 그러다 걸리면 다 죽어야. 문제는 보에 있는 물을 농수로 사용할 때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더 문제여. 참말로 이제 더는 못 살것다.

 

조커보다 더한 악당이 나왔으니, 슈퍼히어로가 이제 나올 차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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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그는 바로 전봉준이야이름은 많이 들어들 봤지? 구전으로 전해지는 아래 노래의 주인공이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가락이 구성지고 슬픈 이유는 조병갑으로 대표 되는 사회지도층에 피 빨린 농민들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겠지.

 

전봉준의 가족이 마침 조병갑 동네에 살고 있었어전봉준의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농민들을 위해 조병갑을 찾아가. 물에 대한 세금은 천부당만부당 하며, 그 외 각종 악질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정식으로 항의를 했어. 일반 농민들은 아마 만나 주지도 않았을 거야. 전봉준의 아버지가 지역 유지이고 하니 만나 준 건데, 돌아온 대답은 곤장 형 도중 사망.

 

녹두처럼 작고 볼품없다고 해서 붙여진 어린 시절 별명 녹두장군. 전봉준은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고 해. 김만덕은 겹눈이었는데. 지금 거울로 자신의 눈을 다시 확인하는 건 나뿐인 건가전봉준은 대의를 위해서도 봉기할 타이밍만 찾고 있던 중 이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개만도 못한 조병갑에게 맞아 죽으니, 호랑이 눈을 가진 녹두장군이 가만히 있었겠어?

 

그렇게 전봉준을 필두로 민초들이 촛불, 아니 햇불을 들고 일어났어. 한 번 붙은 불은 들불처럼 바람을 타고, 정읍, 태안, 부안 등 다른 지역으로까지 순식간에 번졌고, 오합지졸 상태의 정부군은 창과 낫을 들고 일어난 동학 농민군에게 밀려, 광주시청 아니 전주성까지 내주게 되었어.

 

각 장관, 국회의원 아니 대신들이 자기 돈 해쳐먹느라고 정신이 없으니, 군이 제대로 유지가 됐겠어조선행정부는 뒤로는 청나라에 병력파병을 요청하고, 전주성에선 동학 농민군에게 화해를 요청해. 이 때 맺은 조약을 전주화약이라고 해.

 

이때 동학 농민군이 정부에 요구한 사항들을 간단히 살펴 보면,

 

- 탐관오리, 부당이득을 취한 부자, 권력 남용한 양반을 처벌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라

- 신분제를 폐지하라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계층간 차별정책 폐지)

- 남편이 바로 죽은 과부는 재가를 허가하라

- 농민들의 부채를 전액 탕감하라

-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라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있고 부당한 요구가 있나? 이 와중에도 여성의 인권을 챙기는 센스라니. 너무나 앞선 생각에 경외감마저 일어나이때가 1894년이야. 우리 동학 농민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자신들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기 자식들에게만 승마교육을 시키며 이웃아이들은 급식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도 나 몰라라 세상을 꿈꾸지는 않았을 꺼야. 과부도 행복한 나라, 농민이 행복한 나라, 신분제가 없는 나라를 꿈꾸었어. 그 꿈이 희미하지만 손에 잡힐 듯한 나날이었어하지만 이런 꿈 같은 시간은 몇 개월이 못 가고, 11월 초겨울과 함께 청나라 군대에 일본군대까지 동학 농민군을 향해 숨통을 조여와.

 

조선정부는 동학 농민군에게 밀리니 오른손으로 화해의 손을 내밀고 탁자 아래 왼손으로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어조선정부의 요청을 받고 6 청나라 군이 조선땅에 발을 디디니, 구원병을 요청하지도 않은 일본군까지 10 조선땅에 도착을 . 머시라?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아니 되무니다. 청나라에 조선을 넘겨 없스무니다. 우리도 즉시 출동이므니다.” 나라 내부의 문제를 해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외세의 침입에 속수무책 밖에 없어.

 

조선은 마치 뼈까지 발라진 생선처럼 도마 위에 누워 있는 이니, 나라와 일본이 발정 고양이 마냥 우리의 땅으로 기어들어 거야명분은 조선정부를 도와 악질적인 반정부 세력인 동학 농민군을 제거하기 위해서야.

 

그런데 말이야.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 임진왜란과 거의 일치하는 노선으로 이동하면서 병참기지를 하나씩 구축하면서 올라오는 거야. 이건 누가 봐도 들의 검은 속셈을 알아차릴 있었어. 일본은 마치 전쟁 예행연습을 하듯이, 자신들이 필요한 군사시설을 구축하면서 북진을 했어. 이토히로부미의 특명을 받은 일본의 19대대는 경복궁을 기습해.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인질로 잡았어. 부대가 후에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

 

이때 지휘자 잃은 조선군은 놓고 앉아 있었고, 나라를 지켜야 관리들은 친일 임시내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자기 목숨을 연명했어무정부 상태보다 못한 나라 꼴을 보고, 우리의 동학 농민군이 분연히 일어났어. 좌표 잃은 정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땅을 침범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출동 준비를 거야. 정부는 백성을 배신했지만 백성들은 우직하게 다시 정부를 지키기로 결정을 거야. 이런 조상들을 생각하면, 이민이나 가야지 하는 삼가 해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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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버지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세금을 걷고, 온갖 명목으로 추가 세금징수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백성들을 때려 죽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동학 농민군. 같은 범인의 식견으로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아. 그저 대단하신 들이란 생각 밖에.

 

동학교주 최시형이 호랑이가 집에 들어왔는데 앉아서 죽을 없다.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는 선언과 함께 불처럼 일어났지만, 무기가 진짜 몽둥이랑 밖에 없었다는 것이 함정이야일본은 조선이 최종목표가 아니었어,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아시아 전체를 포함한 제국을 향한 야욕을 품고 있었지. 그런니, 하얀 삼베옷을 입고 몽둥이, 창을 들고 있는 동학 농민군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상대였지.

 

이토히로부미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몰살 지시를 내렸어(이토야! 목숨이 하나라 아쉽구나. 앗아간 우리 백성 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지만, 목숨 하나만큼은 결국 우리 형님 중에 분이 거두어 간다. 기다려라)

 

우리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선 싸운 상대는 거지 같게도 같은 동포 조선군이었어. 조선을 지키겠다고 일어선 농민들을 조선의 군인이 공격하는 상황이야. 여기에다 보상금을 노린 보부상들도 동학 농민군의 경로를 관군에게 알리고, 부자와 일부 양반들이 자기들의 이권을 노린다며 민병대를 조직해 동학 농민군 토벌에 합세를 했다고 . 욕지거리가 나올 없는 상황이야. 나라가 없어져도 바로 앞에 자기 그릇과 포상금이 중요한 거지!

 

외로운, 너무나도 외로운 상황에서도 우리 동학 농민군은 조선관군 민병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쳐조선관군이 공주 일대를 중심으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동학 농민군의 성패를 좌우할 우금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일본군이 합세를 .

 

동학 농민군이 삼베옷을 입고 손에는 창을 들고, 능선에 길게 늘어서니 길이가 30~40리에 이를 정도였다고 , 수적 우위를 적에게 과시하기 위해 도열을 거야이때 일본의 19대대는 신식무기를 갖춘 전문 전투원들이지만 숫자가 700여 명에 불과했고, 우리 동학 농민군은 4만을 헤아렸어. 얼핏 보면 해볼 만한 전투라고 보이지만 화력의 압도적인 차이가 결국 엄청난 패배를 불러오고 말아.

 

우선 우금치에서 일본군은 우리 동학 농민군을 아래로 내려다 유리한 지형조건 속에서 전투를 시작해. 안산에서 정충신이 이괄군을 상대한 것처럼 말이야.

 

일본군은 기관총에 영국식 소총 스나이더, 무라마 소총이란 가졌는데, 1분에 40 발의 연사 가능한 총이었어반면 우리 동학 농민군은 구식 총도 정밖에 없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우금치를 향해 위로 올라가야만 했어. 1 1총도 아닌데 구식 총은 1발을 쏘고 나면, 다시 재장전하는데 1분의 시간이 걸렸다고 . 설상가상으로 고지를 향해 진격하는 와중에 장전을 반드시 일어나서 해야 했어. 일어서서 장전하는 동안 일본군의 쉬운 타켓이 밖에 없었지. 거의 사격 연습 수준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또한 일본군 총의 사거리는 800미터가 넘지만, 우리의 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이니, 사거리까지 가기도 전에 우리 동학 농민군의 태반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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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도 되는 조건 속에서도, 동학 농민군은 40~50차례 저돌적으로 돌격을 하게 되는데, 쌓이는 일본군의 탄피 숫자와 비례하는 우리 백성들의 시체뿐이었어. 차마 뜨고 없는 완패였어우금치전투를 기점으로 동학 농민군은 도망자 생활을 시작하고, 이토히로부미의 명을 받은 19대대의 끔직한 학살이 시작돼일본군은 마을에 가서는 동학 농민군에 협조한 무구한 양민들까지 무참하게 학살을 했어.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작전에 참가한 일본군 장교는 후에 정신병을 앓아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고 .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일본군은 총알이 아깝다고 농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창을 사용하여 살상을 하기도 했어. 그리고 농민들이 농사 만든 60센티 길이의 짚단을 머리에 씌우고, 불을 붙여 화형을 시키기도 했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이야.

 

또한 4인 1조로 묶은 , 4번째 농민이 앞에 농민들의 머리를 작두로 자르게 하고, 4번째 사람은 일본군이 죽이게 하는 인간이 상상할 없는 만행을 저지른 거야왕조교체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같이 평등하게 살아 보자는 저 당시 99% 동학 농민들의 조선 프랑스혁명은 조선군이 아닌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어.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려 주자면, 동학 농민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전라고부 사또 조병갑은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직했어. 전형적인 패턴이지. 일단 시끄러우니 잠시 몸을 숙이고 있다가 돈을 쓰거나 권력을 이용해 다시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이 자는 승승장구하다 고등법원 판사가 되었고,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게 . 정의가 세상에 있기는 한 건가? 조병갑의 증손녀는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 조상의 행적으로 현재의 그녀를 탓하거나 하고 싶지 않아.

 

다만, 작두에 잘리고, 볏짚 죽은 동학 농민군들의 자손들은 아직도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으로 지내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내가 오지랖이 넓고 4 산업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너무 과거에만 집착하는 걸까? 하지만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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