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여름. 마리아나 제도가 미군에 의해 점령됐을 때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전 기간 중 가장 상식적이고 효과적인 ‘공습대책’ 하나를 내놓게 된다. 바로 학생들의 피난이었다.
약 4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시골로 대피시킨 것이다. 도쿄 한 곳에서만 25만 명의 학생들이 주변 12개 현으로 분산 수용됐다. 그러나 ‘상식’은 여기까지였다.
폭격을 막을 수 없었던 일본
B-29의 폭격에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란 나라의 국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너무 허무하게 당했다. 이유가 뭘까? 여기에는 일본의 ‘실수’가 함께했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조기경보체계의 미비.
1940년 영국 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 당시 영국 공군의 보유 전투기는 590여대 남짓. 이에 반해 독일 공군은 1,300여대의 전투기를 자랑했다. 이 숫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영국 전투기 조종사의 엄청난 감투정신과 홈그라운드의 이점, 괴링의 실수(Bf-109는 그때까지 낙하식 연료탱크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더 덕분이었다.
미사일과 제트전투기가 날아다니는 현대전에서 조기경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다. 음속으로 날아다니는 전투기는 전쟁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행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시작이 된 전쟁이었다.
적이 날아오기 전에 미리 적의 공격을 대비한다는 것. 이건 모든 군인이 꿈꾸는 이상적인 전장환경이다.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견하는 ‘눈’이 필요하다. 바로 레이더다. 당시 일본군은 제2차 대전 주요 참전국들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선진 레이더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일본에게는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6년 영국에 유학중이던 야기 히데츠구(八木 秀次)와 그의 조수였던 우다 신타로(宇田 新太郎)는 레이더의 원형이 되는 기술을 최초로 개발해 낸다. 소위 말하는 야기 우다 안테나다(실제론 조수인 우다가 다 개발했지만, 그의 담당교수였던 야기가 이 특허를 가로 챈 거지만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은 다 이런가 보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군부는 이 레이더의 채용을 반대했다.
기습에 의한 일격필살을 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던 일본에게 있어서 전파를 쏴 아군의 위치를 알리는 기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였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조기경보체계 구축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당시 일본군은 사람은 많은데 물자가 귀한 상황이었다. 인간을 갈아 넣으면 될 문제에 돈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인간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훈련을 통해 시력을 발달시키면 조기경보체계는 완성된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의 모든 안경점은 망해야 할 거다.
일본은 자신들이 개발한 우수한 조기경보체계를 버렸고, 이걸 주워간 이들이 바로 연합국이다. 뒤늦게 레이더의 성능을 확인한 일본군은 레이더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기술격차는 엄청나게 났고, 투입할 물자도, 인력도,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지리적 위치다. 도쿄를 비롯해 일본의 주요 도시는 태평양에 접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기 경보체제 완성을 위해 레이더 기지를 세우고 싶어도 적당한 위치가 없었다. 이오지마가 함락된 이후 일본은 논스톱으로 뚫린 고속도로처럼 B-29를 코앞에서 확인해야 했다.
둘째, 요격능력의 부족
B-29가 날아왔다 하더라도 이를 요격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유럽전선에서 독일 본토 폭격을 했던 B-17, B-24 폭격기의 피해율을 보면 알 수 있는데, 1943년까지 이들의 1회 폭격 시 피해율은 5%에 이르렀다. 5%가 별거 아닌 거 같지만, 20번 폭격하면 모두 격추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우선 요격기가 없었다. 일본이 그렇게 자랑하던 제로센은 B-29를 추격해 올라가다가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기 일쑤였다(물리적으로 동체가 부러졌다!) 총 중량의 10만분의 1까지 관리했던 제로센이기에 강도에 문제가 있었다. 신형기를 투입해도 별 성과는 없었다. 하야테(疾風)같은 신형기를 투입했지만, 일단 숫자도 적었고, 대전 말기가 되면 일본 공업생산력이 급락하면서 품질관리도 되지 않았다. 카탈로그만으로 보면 충분히 대적할 만 했지만, 공업생산력과 품질 문제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B-29에 호위기인 머스탱을 붙이자 요격은 더 힘들어졌다.
요격을 할 수 없으면, 대공포로 발라버리면 안 될까? 이 역시도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대공포가 부족했다. 아니, 대공포 자체를 등한시했다.
“신주불멸(神州不滅)”
해석하자면, 신들의 나라인 일본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란 뜻이다. 태평양 전쟁 전까지 일본은 본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언제나 외국에 나가 전쟁을 치렀다. 이러다보니 본토방어에 대한 개념, 그것도 대공무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 신주불멸이란 엉뚱한(?!) 생각까지 더해지면서(무사안일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들은 대공화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나마 쓸 만 한 대공무기라고 해봤자 독일 대공포의 복제품이 고작이었고, 이 마저도 거듭된 공습에 소진됐다.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B-29를 올려다 보는 게 고작이었다.
금붕어에 집착한 일본인
커티스 르메이가 일본을 불태워 버리겠다며, 연일 맹공습을 하던 그때 일본 민간인들이 믿고 의지했던 유일한 희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금붕어다.
폭격에 의해 무너진 집에서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온 부부가 있었다. 10만이 넘어가는 사망자가 나온 도쿄에서 이는 기적이었다. 이 부부는 자신들이 살아나온 이유를 두 마리의 금붕어에서 찾았다. 불타버린 집 폐허에서 발견된 두 마리의 금붕어. 이 부부는 자신들의 키우던 금붕어가 자신들을 대신해 죽었다며, 자신들의 생명을 금붕어가 살려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죽은 금붕어 시체를 가까운 절로 가져가 매장했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졌고, 도쿄에 있는 금붕어란 금붕어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급기야 붕어를 금붕어처럼 칠해 파는 상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가짜 금붕어들도 엄청난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일본인들이 의지할 것은 고작 금붕어가 다였다.
이 상황에서도 폭격은 계속 이어졌다.
① 3월 9일 도쿄 공습 : 10만 이상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 전소
② 3월 11일 나고야 공습 : 도시면적 5.3 ㎢ 전소
③ 3월 13일 오사카 공습 : 도시면적 21 ㎢ 전소. 사망자 4000여 명, 행방불명자 500여명
④ 3월 16일 고베 공습 : 도시면적 18 ㎢.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⑤ 3월 18일 나고야 2차 공습 : 도시면적 7.6 ㎢ 전소
1945년 3월 한 달 동안 일본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는 동안 커티스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뿌리는 여유와 함께 한달 간 개점휴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폭탄의 재고부족(그동안 너무 뿌려서), 일본 해군의 지원요청 등등에 의해 잠시 쉬어갔다. 그 대신 일본 항만 도시에 1만 2천 개의 기뢰를 촘촘하게 깔았다. 일본을 아예 ‘굶겨’ 죽이겠다는 ‘기아작전’의 시작이다. 섬나라인 일본은 해상으로의 수송이 막히는 순간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기뢰 덕분에 일본은 백만톤이 넘어가는 수송선단이 침몰했고, 원자재 수입량은 80% 이상 감소했다.
그 사이 일본 민간인들은 살기 위해 요코하마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도쿄 남쪽에 위치한 요코하마는 미군기가 뿌리는 폭격 명단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 대도시가 하루에 하나씩 사라져가는 사이에도 요코하마는 무사했다. 일본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일본 민간인들은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왜 미국은 요코하마를 폭격하지 않은 걸까? 당시 일본인들은,
“미국이 상륙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도크가 필요하다. 미군은 요코하마로 상륙한다. 그러기 위해 요코하마를 폭격하지 않은 거다!”
이런 ‘망상’이 퍼져나갔고, 급기야 요코하마로 들어가는 국도는 민간인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이 망상은 곧 깨진다. 1945년 5월 29일 B-29가 요코하마를 폭격했다. 요코하마의 반이 재가 돼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민간인 사망자는 5천 여명에 불과하다는 정도?
역설적이게도 그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는 ‘도쿄’였다. 6차례에 걸친 폭격으로 도쿄에는 더 이상 목표로 할 만한 게 없었다.
여름이 되면서 모든 상황은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7월까지 미국은 9만 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다. 총면적 330㎢의 26개 도시를 초토화 시켰고, 건물 약 250만 동이 소실됐다. 일본 산업계의 총 생산량은 1944년 최고 생산량의 40%로 떨어졌고, 석탄 생산은 반으로 줄었으며, 석유 정유량은 15%로 떨어졌다. 전쟁 수행에 필수인 군수품 생산능력은 더 참담했다. 항공기 엔진 생산은 25%, 포와 화약의 생산량은 45%, 항공기 생산에 필수적인 알루미늄 생산량은 9%로 떨어졌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더 참담했다. 7월까지 약 50만 명의 일본인이 폭격으로 사망했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집을 잃은 이들이 결핵, 영양실조, 혹은 다른 질병으로 죽은 것은 통계에서 빠졌다.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도쿄의 인구변화였다.
전쟁 전인 1940년 도쿄의 인구는 400만 명이었으나, 이때가 되면 250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은 개울가나 샘, 철도역, 그리고 도시 외곽의 불타지 않은 지역에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그때까지 정부가 ‘작동’되던 국유철도망을 통한 ‘배려’였다. 일본 정부는 이재민들에게 그들이 가고 싶은 곳까지 갈 수 있는 무료승차권을 주는 게 고작이었다. 일본은 파국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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