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9일 4시 15분. 사이판이 함락됐다. 당시 상황을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繁) 중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사이판 함락은 일본에게 있어선 사형 선고의 다름이다. 이때까지 빼앗긴 태평양의 다른 섬들과 달리 사이판이 가진 의미는 달랐다.
사이판을 함락하면서 미국은 자신의 전략 무기 2개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B-29다. 사이판에서 출격한 B-29는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게 됐다.
B-29만큼 주목 받지 않았지만, 어쩌면 B-29보다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잠수함 기지로서의 사이판이다. 이전까지 미국 잠수함들은 일본 본토에서 3,9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기지에서 작전을 시작했어야 했는데, 사이판 함락 이후 그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됐다. 당연히 작전 효율은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의 이리떼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의 주력병기는 ‘항공모함’이라고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사실이다. 잠수함에 대한 기억은 대서양 전선에서의 독일 U-보트가 다 가져간 상황. 그러나 1944년이 되면, 상황은 급반전이 됐다.
침묵의 도살자 미국 잠수함 부대가 태평양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944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불과 55척의 잠수함만을 가지고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당시 미국은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함재기를 주력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모든 걸 투자했다. 그런데, 잠수함에도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토급 잠수함을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습니다.”
1944년 1월까지 불과 55척이던 잠수함 전력이 갑자기 100척으로 불어나게 됐고, 정확히 12개월 후에 156척을 보유하게 됐다. 미국은 대서양, 태평양 양쪽에서 싸웠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제2차 대전 발발 직전 미국의 잠수함 숫자는 총 111척 이었다. 전쟁 중 177척을 건조해 총 288척을 확보했다. 이중 52척이 격침됐다.
1944년 태평양 전선에서의 잠수함 부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독일 U-보트의 활약에 그 빛이 가려졌지만,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국 잠수함 부대의 활약은 이후 잠수함 작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잠수함 부대를 가지고, 정찰, 조기경보, 특수부대 침투, 상륙작전 지원, 인명구조(대단위 해전 직전에 구조 임무를 띄고 해당해역에 대기하든가, B-29 승무원 구조에 투입돼 엄청난 활약을 했다) 등등 다양한 임무를 펼쳤다.
특히나 1944년은 기념할 만한 한해였다. 일본 본토에 가까운 전선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일본을 고사시키겠다는 ‘개념’이 서서히 손에 잡혀가던 시기. 게다가 일본 해군은 패퇴일로였다. 결정적으로 미국 잠수함부대의 발목을 잡았던 ‘어뢰’ 문제가 해결됐다(루즈벨트 대통령도 푸념할 정도로 당시 미국 어뢰는 ‘멍텅구리’였다. 이 문제가 겨우 해결된 게 Mark 23이 등장한 이후였다. 이때가 1944년 6월이었다) 미국 잠수함이 활약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1944년 한 해 동안 미국 잠수함은 529척, 약 230만 톤의 일본 상선을 수장시켰다. 태평양 저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일본에 입힌 피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다른 기록은 더 극적이었다.
1943년 중반까지 일본은 보르네오, 수마트라, 자바 등에서 1개월에 150만 배럴씩 원유를 수입했다. 그러나 1944년 11월이 되면 불과 30만 배럴로 줄어들었다. 식량과 기타 자원도 마찬가지였다. 1943년에는 1,640만 톤이었던 쌀, 고무, 석면, 석탄, 철광석, 고철, 보크사이트, 니켈 등의 수입량이 1944년이 되면 1,00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태평양 전쟁 전 기간 동안 미국이 격침시킨 일본 선박의 62%는 미국 잠수함들에 의한 피해였다.
미국 잠수함 부대는 교묘하게 병목지역을 노려 일본 함선들을 노렸다. 레이테만 해전 전후로는 루손 해협(필리핀의 루손 섬과 타이완 사이의 해협)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 해군과 일본 상선들을 사냥했고, 레이테만 해전이 끝나자 바로 타이완 해협으로 넘어가 일본 상선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44년 말이 되자 미국 잠수함 부대의 ‘목표’가 사라졌다. 일본 함선들은 전투지역을 훨씬 벗어난 한국의 황해나 동해 바다로 피신한 상황.
잠수함 부대 함장들은 ‘무료한’ 시간들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 몇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첫째, 기뢰와 암초로 둘러싸여 있는 중국 해안으로의 진출
둘째, 동해로 진입해 일본 상선을 공격
셋째, 심심하니 어뢰로 공격하기 민망할 정도의 어선이나 목선들을 부상해 기관포나 함포로 공격
넷째, 비교적 방비가 약한 일본 북방 사할린 지역에서 부상. 함포로 지상공격
다섯째, 일몰 후 특수부대를 상륙시켜 철도레일을 폭파
목표가 없었던 잠수함 부대 인원들은 이 임무들을 ‘즐겼다’. 이미 바다에는 일본 함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행위’를 일본에 퍼부었다.
이 당시, 그러니까 1944년 중후반부터 1945년까지 미국 잠수함 부대의 ‘사냥’ 활동을 보면, 일본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잠수함은 당당히 부상해 일본의 목선이나 어선들을 향해 함포를 쏘거나 기관포를 난사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미국이라지만, 목선을 향해 어뢰를 쏠 정도로 낭비벽이 심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백주대낮에, 일본 본토와 가까운 지역에서 잠수함이 부상해 기관포를 쏘고, 어선을 검문하는 것. 이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 제해권도, 제공권도 모두 잃었다는 걸 의미한다. 한 마디로,
“농락”
이었다.
사이판 함락 막전막후
사이판 함락 전후로 일본 정계, 특히나 덴노를 둘러싼 비둘기파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이때 주목해 봐야 할 사람이 덴노에게 상주문을 올렸던, 고노에 후미마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족 내각 총리를 지낸 인물) 등등이다.
이들은 일본 국민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면서도,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건 ‘천황제 유지’였다. 당시 이들은 도조 히데끼가 사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왕 이렇게 된 것 도조가 계속 수상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도조가 유럽 전선의 히틀러와 같은 위치를 유지하기 바랬던 거다.
1941년 12월 8일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도조는 2년 8개월에 걸쳐 수상, 육군장관, 내무장관, 문부장관까지 겸임했고, 1944년 2월부터 퇴임하던 1944년 7월까지는 참모총장 자리까지 겸했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태평양 전쟁은 도조가 일으키고, 도조가 끝낸 ‘도조의 전쟁’이 될 수 있었다.
즉, 도조가 현직에 있으면 모든 책임은 아돌프 히틀러의 그것처럼 도조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덴노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도조는 현직에서 물러난다.
1944년 7월 이후 일본 기득권층, 특히 왕자들을 중심으로 한 황족들은 ‘천황제’를 어떻게 유지할까에 대한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 쇼와 덴노의 첫째 동생),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 : 쇼와 덴노의 둘째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崇 :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등등 왕자들 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과 해군에 적을 두고 있는 황족들이 서로 모여 회의를 하게 된다.
황족들의 사적인 회의. 그것도 사이판에서의 패전 이후의 회의라면, 그 회의 주제가 뭐였을까? 이들은 ‘최선의 종전 방법’을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곧 히로히토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왕자들이 국사에 관여할 권리는 없다! 이건 모반으로 간주 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나 왕자들은 뜻을 거두지 않았다. 히로히토의 둘째 동생인 타카마츠는 형 앞에서 바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히로히토는 분노해 소리를 쳤지만, 타카마츠는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 말했다. 현재 전황과 황실의 미래, 일본 국민들의 실태 등등 그러나 히로히토는 화를 낼 뿐이었다. 이야기가 계속 평행선을 달리자 타카마츠는 폭탄 발언을 한다.
“폐하께서 계속 이런 식이면, 저를 포함한 황족 모두는 황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평민으로 돌아가겠다.”
협박이었다. 히로히토는 대노했고, 동석했던 히사시쿠니의 중재가 없었다면 황실 역사에 기록 될 유혈사태가 벌어질 뻔 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당시 황족들의 ‘계획’들이다. 나쁘게 본다면, ‘천황제 유지’를 위한 꼼수라 폄하 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평화적이고, 가능성이 있는 ‘종전방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바로 황족들이었다. 이미 희망 없는 전쟁에서 일본 국민들을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패를 쥐고 있는 이들. 그렇다면, ‘천황제 유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때 가장 활발히,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대안을 들고 나온 이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였다.
황족들의 움직임, 이후의 구체적인 대안 제시, 실행력 등등을 봤을 때 고노에 후미마로의 행동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고노에는 전쟁은 이미 졌다는 전제하에서 최대한 빨리 종전을 하는 쪽으로 정책노선을 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도조 히데키가 사임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구체적으로 도조를 쫓아낼 방법도 구상했다), 종전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을 모색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도조가 사임하는 즉시, 차기 수상은 황실 가족 중에서 맡아야 한다. 그리고 새 내각은 곧바로 적대 관계의 종식을 선언해야 한다.”
여기서 차기 수상으로 고노에가 점찍은 이가 바로 타카마츠 왕자였다. 당시 왕자들 중에서 가장 실행력이 있다고 믿었던 거다. 황실 가족을 총리에 앉힌 역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다(지금까지도 단 한 번 뿐이다). 덴노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고, 황실이 국가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는 거다. 아울러 ‘천황제 유지’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황실 가족 중에서 총리를 내세운 다음 바로 ‘적대관계의 종식 선언’을 하면, 종전으로 갈 수 있다고 고노에는 생각했다. 이 당시 고노에가 생각한 종전 방식은 크게 세가지였는데,
첫째, 인도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전쟁을 ‘일방적으로’ 끝내는 방식
둘째, 일본의 목표가 달성되고, 서방의 일본 고립화가 해제됐다는 점을 내세워 종전을 선포
셋째, 덴노가 일본 국민들의 의미 없는 희생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워 종전 선포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안은 말 그대로 ‘정신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대로 나갔다면,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의 덴노의 종전 선언의 명분도 바로 세 번째였다. 더 놀라운 것은 종전 선언문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고노에가 1944년 사이판 전투 전후로 준비하고, 보고했던 내용이 들어갔다는 대목이다. 더더욱 놀란 건 패전 후 일본은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인 ‘황족 내각’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고노에의 평화전략에 대해서 히로히토는 고민했지만, 수용하지는 않았다.
고노에는 이 상황에서 ‘천황제 유지’를 위한 방법들을 계속 고민했다. 우선 히로히토는 덴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인 아키히토를 덴노 자리에 올리고, 섭정 체제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했다(당시 히로히토의 첫째 동생인 지치부는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 가급적이면 연장자인 지치부가 맡는 게 좋았으나, 그는 자신의 건강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황태자인 아키히토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치부는 1953년에 사망한다).
만약,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고노에는 최악의 ‘수’도 고민하고 있었다.
1부
2부
외전
3부
4부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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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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