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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선미가 사라졌다. 선미가 늘 있던 자리, 앉아서 뒹굴거리던 1층 위 옥상에 온종일 나타나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10월 11일


여전히 선미가 없었다. 연휴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선미에게 주려고 사 온 파우치를 들고 기웃거렸지만, 선미는 통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파우치를 뜯어 선미가 늘 있던 곳 근처에 두었다. 얼마 후 나가보니 파우치에 담긴 음식은 깔끔히 사라졌지만, 선미는 여전히 없었다.


그날 오후 선미가 나타났다. 다리가 부러진 채로. 길었던 추석 연휴에 충정로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선미 다친후1.gif



2016~2017년 초


선미에겐 원래 이름이 없었다. 아, 이름뿐 아니라 존재감도 없었지 참. 충정로 주변 다른 가게 앞처럼 벙커1 앞에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 중 먼저 눈길이 가는 건 작고 연약한 것들이었다. 흰둥이, 반달이, 점박이, 치즈... 친구들이 저마다 이름을 하나씩 얻을 때도 선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선미는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벗어난 덩치 큰 고양이였다.



2017년 봄


고양이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제법 많은 충정로에서도 가끔은 다툼이 있었다. 특히 처음 밥을 먹으러 오는 애들이 텃세에 사료 냄새만 맡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일들이. 




병풍이형.jpg


선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선미는 다른 고양이들에게 하악질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풍에 가까웠다. 작고 어린, 혹은 임신한 친구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한 발 떨어져 줄을 선 듯 가만히 기다렸다. 그 때문인지 덩치 큰 선미가 무서워 밥을 못 먹고 도망치는 고양이들은 없었다. 애들 밥 먹을 때 배경에 보이는 커다란 노란 줄무늬. 선미의 특징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다들 선미를 '큰 애' 정도로 불렀다. 


아까 '큰 애'도 밥 먹으러 왔었어요, 이 정도로.



2017년 여름



선미필카.jpg



선미(善美).


착하고 마음이 예뻐 선미로 이름을 붙였다. 커다란 덩치와 이름의 괴리 때문에 며칠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키득키득 웃었다. 선미가 (중성화된) 남자라는 건 이후에 안 사실이다.


선미는 이름만큼 마주치는 모든 생물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덩치 큰 노란 고양이'가 이 주변에서 사람을 제일 잘 따른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선미차정비.jpg

가끔 차를 정비한다는 것도(장난감 따위에 휘둘리지 않아)



2017년 여름~초가을


이름을 짓는 건 다정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특히 내일 어찌 될 지 모르는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면 감정 쓰는 날이 많아진다.



출근길.jpg



벙커1 고양이 식당 첫 손님은 늘 선미였다. 선미는 매일 아침 출근 시간이 되면 텅 빈 밥그릇 앞에 얌전히 앉아 사료를 기다렸다. 우리가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한참 사료를 기다릴 선미가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이름을 붙인 후부터였다.


그래서 가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갔다.



다시 10월 11일



선미다리.jpg



그런 선미의 다리가 부러졌다. 선미가 사는 1층 위 옥상에서 선미는 내려오지도 더 올라가지도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일자로 뻗어야 할 왼쪽 앞발이 옆으로 툭 튀어나와 부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아까 준 음식을 먹은 건 다른 고양이인 듯했다. 선미는 음식이 있는 곳까지 내려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선미다친후.jpg



선미가 늘 오르내리던 1층 쓰레기통은 추석 사이 고양이들이 오르내리기 어려운 높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이유가 그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고양이 캔을 따면 선미는 예외없이 냄새를 맡고 1층으로 내려오기 위해 쓰레기통 위로 착지했었다. 쓰레기통 위에 착지할 때 나던 둔탁한 '퉁' 소리가 그리웠지만, 아픈 고양이가 다 그렇듯 선미는 1층 옥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충정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 골절 수술 비용' 인터넷을 뒤적여보니 100~200만원 대 후기들이 보였다. 자세한 비용을 알기 위해 고양이 진료로 유명한 병원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유선상으로는 가격을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또 다른 동물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마지막 동물병원에서는 직접 데리고 와서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는 답변을 줬다. 도대체 진료비는 왜때무네 비밀인지 알 수 없다.


다만 前 견주 現 집사로서 매번 그랬듯 어마어마한 병원비가 나올거라는 슬픈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모금을 해보거나, 글로 할 수 있는 부업을 해서 치료비를 충당해볼까 고민했지만, 여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10월 12일


데려가 치료하지 않는다면 '자연치유'설 하나가 남았다. 길고양이 수명이 3년 남짓인데도 '길고양이들은 알아서 잘 산다'는 말을 믿느니, 다스가 그분과 상관없다는 걸 믿어보는 게 빠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 눈 앞의 선미는 1층 옥상으로 매일 밥을 배달하는 누군가의 호의가 계속되지 않는 한 스스로 살아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봤던 통덫을 챙겼다. 감당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선미통덫.jpg



선미야, 조금만 기다려!

통덫을 챙겨 1층 옥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비장했다.



그때까지는 이 글이 추적기가 아니라 휴머니즘이 묻어나는 따뜻한 글이 될 줄 알았다. 통덫을 놓으면 고양이가 알아서 들어가 주는 건 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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