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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07. 금요일

정우성






“약자에게 목돈을 요구하는 사회”

 

 



야만사회, 목돈자본주의


여기 우리 세대의 비정함을 고백한다. 이 시대에 대한 자백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고발이다. 힘센 사람이 좀 더 무거운 짐을 드는 게 인간의 상식이다. 연약한 이에게 가벼운 짐을 들도록 배려하는 게 인간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그런 정의를 잊고 말았다. 강자는 짐을 내려놓고 약자에게 무거운 짐을 부린다. 강자독식의 인정머리 없는 사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야만 속에서 산다.



1) 존재에 대한 대가 : 자본주의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 이런 팍팍한 세상사는 다 아는 이야기다. 특별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인간미와 웃음이 있다. 희망과 보람과 행복도 사실 흔하다. 자본주의라고 해서 나라마다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사람 살기에 온순한 사회가 있는가 하면 서민에게 악랄한 사회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후자를 대표하는 나라다. 자본주의? 막연하다. 천민자본주의? 감정적이지만 여전히 모호한 표현이다. 대한민국이 특이한 건 ‘목돈자본주의’라는 점. 젊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임노동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개인의 노동력과 근면함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돈을 준다. 그러나 목돈자본주의는 개인에게 ‘존재의 대가’를 목돈으로 요구한다.

 

어지간한 돈이 아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크기의 돈을 요구한다. 임노동을 초월한 돈을. 결정적인 시점에 목돈을 요구한다. 대학등록금, 결혼자금, 주거보증금, 권리금, 연대보증금의 목돈은 개인의 나이와 능력과 처지를 배려하지 않는다. 배려를 하지 않으면 언제나 약자가 비명을 지르는 법. 그걸 다 알면서도 사회는 개인에게 존재의 대가를 요구한다. 이 사회는 연약한 이에게 아주 무거운 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려놓는다. 사회 자체가 돈에 환장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행해진다. 사람들은 기이하게도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긴다. 약자를 대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다. 목돈을 요구하는 사회가 이 악취와 사악함의 맨얼굴이다.



2) 목돈의 딜레마 : 수십 년간 어른들은 괴물을 만들고 키웠다. 민주화 세대는 이 괴물이 자라는 것을 외면하며 방조했다. 이 사회의 청년이라면 꼭 지나가야 하는 인생의 뻔한 진입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청년들은 성인이 되고, 결혼하여 세대를 꾸리며, 또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주거지를 구한다. 그런데 어른들이 만든 괴물은 그 길을 지나가는 대가로 청년에게 통행세를 요구한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청년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힘 없는 사람이 이 괴물의 먹이가 되어 비명을 낸다. 통행세를 낼 돈이 없으면 그 길을 막는다. 그 길을 지나야만 결혼을 할 수 있고 가족을 일구면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목돈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경제활동을 한 적이 없다. 경제활동을 했다 하여도 괴물이 요구하는 목돈을 마련했을 리가 없다. 목돈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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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임금은 문제의 겉모습 : 88만 원 세대의 비애를 폭로하는 르뽀가 있었다. 소비를 줄이고 생활을 단순하게 하며 혼자 살아갈 요량이라면 88만 원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양 가족이 없고 어디 후미진 단칸방에서 함부로 소비하거나 활동하지 않고 극히 단순하게 사는 거라면 월 백만 원의 임금으로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욕망이 있고 꿈이 있으며, 그런 욕망과 꿈은 대개 소비와 지출을 동반한다. 욕망과 꿈은 현대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저임금과 비정규직의 고단함은 단순히 임금의 낮고 많음이 아니요, 일의 안정성 그 자체의 문제도 아니다. 수입 적은 인생이 곧 불행하다거나 잘못 살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꿈이 다르고 좋아하며 추구하는 게 다르다. 심지어 능력도 다르다. 돈에 대한 평등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텍스트 안이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성정과 의지와 행위와 능력에 따라서 개인마다 다른 크기의 돈을 만지게 된다. 빈부의 차이가 생긴다. 부에 대한 차이의 탄생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이 곧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이지만 불행한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요컨대 저임금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생각보다 과장되어 있다. 그것은 문제의 겉모습이지 본질이 아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표현은 돈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며,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돈이 없어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우리는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은 꿈을 이루는 수단일 뿐 꿈을 방해하는 적이 아니다. 돈은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아편처럼 작용하지만 돈 그 자체가 개인을 핍박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형편에 맞게 욕망의 크기를 통제할 수 있다. 사회복지가 잘 갖춰져 있어서 저임금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비정규직이더라도 자식 낳아 기르는 데 견딜만 하다면 그것도 인생의 한 방편이다.

 


4) 받을 돈이 아니라 지불해야 할 돈의 크기 : 저임금과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소득의 불만족 문제를 대폭 해결하더라도 목돈 부담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을 좌절케 하는 것은 돈의 크기이다. 받을 대가의 액수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불해야 할 액수의 문제라는 점을 명료하게 강조하고 싶다.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의 크기. 자기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돈의 크기 앞에서 인간이 좌절하고 자유와 호연지기를 잃는 것이지, 자기 능력으로 닿을 만한 크기의 돈 앞에서 좌절하거나 자유를 잃거나 꿈을 포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를테면 88만 원의 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880만 원, 8,800만 원의 목돈을, 혹은 그보다 더 큰 금액의 목돈을 어서 구해 오라고 청년을 닦달하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땅의 청년은 결코 안녕할 수 없는 사회구조다.

 


5) 목돈사회가 불러온 병폐 : 목돈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병폐를 불러왔느냐, 이것이 이 글의 첫 번째 주제다. 목돈사회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약화시키며 의존적으로 만든다. 마치 사회 자체가 개인에게서 행복추구권을 겁탈하고 빼앗는 것마냥 군다. 목돈사회는 주로 청년을 공격하며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은 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구조에 순응하게 만든다. 사회 자체가 존엄한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빼앗고 순응을 강요한다. 개인은 용기를 잃는다. 인간 정신의 세포분열은 활동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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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민주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민주주의는 본디 통치의 방식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노예제도가 있었다. 오늘날은 목돈의 노예. 민주주의 담론만으로 숭고를 떠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다. 찍소리 내지 말고 목돈을 마련해 오라는 사회, 개기지 말고 빚이나 갚으라는 사회에서는 경제민주화든 정치민주화든 공염불에 그친다. 근대 교육의 목적은 현장에 곧장 투입될 수 있는 기계 부품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좋은 시민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생각하고 잘잘못을 구별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옹호하며 사악함을 멀리하는 시민을 양성하고자 교육제도가 존재했다. 이는 개인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야 하며 자유의지를 행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목돈사회는 근대 교육제도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비범한 크기의 목돈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유의지와 순응의식이 만연하면 좋은 시민을 양성할 수 없다. 사회는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염치는 손사래를 치며 이 땅을 떠나고 상식과 교양은 매장된다.

 

목돈사회는 가족관계를 왜곡하며 갈등을 심화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국가적 차원의 목돈 게임은 단체전이기 때문이다. 목돈사회는 출산율 저하와 이혼율 증가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혼례 사치를 불러오고 투기사회를 야기한다. 목돈사회는 부의 세습을 강화하며 신분계급의 심화를 낳는다. 이렇듯 목돈사회는 사회 그 자신으로부터 활력을 제거한다.

 


6) 계산기 두드리기 : 이 글은 르뽀가 아니다. 나는 선생께 마감을 모르는 긴 대화를 요청한다. 어떻게 목돈자본주의로부터 우리 사회를 구하겠느냐,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이냐, 이것이 이 연재의 두 번째 주제다. 몇몇 사람에게 목돈 사회의 비정함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정의와 자유의 가치에 대해 말했으나 그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돈을 잘게 쪼개거나 더하곤 했다.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 세상과 겨루는 투사조차 계산기를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율계산을 하고 있을래? 무엇이 그들의 시각과 청각을 막고 숫자놀이에 몰두하게 했을까? 나는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들이 계산기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차라리 계산기 놀이에 내가 동참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 나는 앞으로 선생과 함께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질문을 던질 작정이다.







정우성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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