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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사이판 함락 전후로 일본 황족들은 천황제 유지와 가장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종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히로히토 덴노의 양위와 황태자인 아키히토의 등극, 이어지는 섭정 체제였다(섭정은 타카마츠 왕자가 맡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 때문이다.


사이판을 함락한 미국은 B-29를 띄워 올렸다. 그러나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고고도 폭격의 정확도는 떨어졌고 일본 정부와 국민들은,


“공습이란 게 별 거 아니네?”


고노에가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공습이 시작됐고, 그 위력도 대단하지 않았다. 사이판이 함락되면, 일본의 목줄이 뜯겨 나갈 줄 알았건만, 계속 버틸 만 하다는 계산이 섰다.


도조 히데키가 물러났지만, 아직 내각과 육군성, 해군성에는 강경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조의 뒤를 이은 고이소 구니아키는, 레이테에서 이기면 최종적으로 일본이 이긴다며 분위기를 띄웠고, B-29 폭격을 대비한 도쿄의 방화벽 설치작업을 독려했다.


“사이판이 함락 됐다고 끝난 게 아니다. 미국도 지금 모든 걸 쥐어짜내 싸우고 있다. B-29가 날아와 봤자 별 위력은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 다 봤지? 조금만 더 버티자!”


이 정도면 순진한 착각이라고 해야 할까? 도쿄 상공에 처음으로 B-29가 뜬 날이 1944년 11월 1일이었다. 이 때도 어떤 폭격의 목적이 아니라, 폭격을 위한 사전 예비조사 격의 항공 촬영을 위해서였다. 이걸 본 일본인들은 별 거 아니란 생각을 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뜬 B-29 폭격기 3대를 낙오기로 본 히로시마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다 불벼락을 맞았던 걸 보면... 어딘지 비슷하다)


낙관주의라고 해야 할까? 사이판이 함락되고 난 후 일본인들은 레이테에서 승리하면 된다고 희망의 끈을 이어나갔다. 쇼와 덴노도 이런 낙관주의에 몸을 실었다. 현실부정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미군이 잘못했다.”


사이판 함락 이후 곧바로 불벼락을 떨어뜨렸다면, 히로히토가 고노에와 황족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이판 함락 이후에도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 일상 속에서 이들은 ‘설마’하는 기대에 몸을 실었다. 이는 전쟁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마음도 비슷했다.


1944년 7월까지 대본영과 정부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며 절대방위선(絶対防御線)이라 외치던,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투라 말했던 사이판 전투가 패전으로 끝났다면, 어렴풋이 패전에 대한 생각을 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물론, 당시의 보도통제를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쟁은 언제나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정부와 군대에서 집집마다 개인호를 파라고 말했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미국의 ‘시시한 폭격’을 지켜보며,


“우리 집은 나무상자 같아서 쉽게 불탄다. 불이 붙으면, 대피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불길을 잡아주는 게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라는 지극히 안이한 생각들을 했다. 드문드문 미국의 B-29가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이걸로 큰 피해는 없었고, 가끔 불타는 남의 집을 보면서 불구경이나 하자며 느긋하게 폼을 잡았다. 실제로 이런 초창기 공습에 의해 불타는 집들을 보며, 도쿄 사람들은 ‘에도의 꽃’이라 부르며 불구경을 즐겼다.


미군의 명백한 잘못이다. 커티스 르메이를 좀 더 빨리 보냈어야 했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절대방위선이 무너졌지만, 레이테를 믿었고, 레이테가 무너지자 본토결전과 결호작전(決号作戦)를 준비하며, 최후의 승리를 믿었다. 이 정도면, 희망고문이다.


그리고 이 희망고문에 히로히토 덴노도 같이 올라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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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최후의 카드


1945년 1월 16일 도쿄에 폭격이 있었다. 이날 공습으로 7,500명이 사망했고, 가옥 5천 채가 파괴됐고, 민간인 20%가 도쿄를 빠져나가 피난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945년 1월 18일. 히로히토 덴노와 그의 비는 일상생활을 이어나갔다. 서예 강습과 중국문화와 예의 범절에 관한 철학강의를 듣고, 전자파 무기(레이더)에 관한 전문가들의 설명도 들었다(야기 우다 안테나를 진작 채용했다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됐을텐데). 덴노의 비도 마찬가지였다.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 편지를 쓰며 일과를 보냈다(숫자가 너무 많아 결국 ‘국가에 대한 봉사에 감사한다’는 말과 덴노의 문장을 찍는 것으로 대체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폭격 현장을 방문했고, 위로 편지도 보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전쟁의 진짜 무서움과 미국의 힘을 애써 무시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를 외면했다.


1945년 1월 26일 교토를 방문하고 돌아온 타카마츠(高松宮 宣仁) 왕자를 고노에가 방문한다. 그리고 자신의 구상을 말한다.


“이미 전쟁은 끝났다. 일본이 패배했다.”


타카마츠는 그대로 들었다. 맞는 말이다. 상식이 있는 자라면,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일본은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시간문제일 뿐 패전은 확실하다.


“문제는 덴노다. 종전이 된 상황에서 덴노가 그대로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전쟁 발발의 책임을 생각한다면...”


“양위하라고 건의하는 겁니까?”


“양위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어 체포되는 일은 없어야겠죠. 아니, 없습니다. 다만, 여생을 민간에서 보내면 안 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참회 청문승(懺悔聽聞僧)이 되는 겁니다.”


“!!!”


고노에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은거(隱居)에 관한 전통을 들어봤을 거다. 일선에서 물러나 말 그대로 은퇴를 하는 거다(물론, 뒤에서 섭정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여기에 한 술 더 떠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다.


고노에의 생각은 간단했다.


“패전에 앞서 히로히토 덴노가 사임한다. 차기 덴노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맡는다. 그리고 타카마츠 왕자가 섭정을 맡는다. 이런 조건이라면, 종전 이후 연합국 앞에서도 할 말이 있다. 협상의 여지를 만들 수가 있다.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고노에는 히로히토를 승려로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했었다. 교토 인화사(仁和寺 : 우다 덴노가 888년에 창설한 절. 헤이안 시대부터 황실과 인연을 맺은 유서 깊은 절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의 39대 원장인 오카모토와 협의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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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 자리에서 물러나면 인화사로 들어간다는 거다. ‘유닌 호오’라는 법명도 준비해 뒀다. 남은 건 타카마츠의 결심과 히로히토의 결단이다. 타카마츠는 거절했다.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연합국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이번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는 건 덴노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만약 덴노가 절로 들어간다면, 나 역시도 절에 들어갈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연합국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 않는가?”


“이미 해군성 장관인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과 前 수상인 아카다 게이스케도 찬성했다.”


9시간의 설득 끝에 타카마츠는 고노에는 의견에 찬성하게 된다. 고노에는 2월에 이 계획을 황궁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타카마츠도, 히로히토의 측근이었던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 : 덴노의 옥새를 담당했던 옥새관이다. 전쟁기간 동안 작성한 일기인 ‘기도일기’로 유명하다)도 난색을 표했다. 당시 이들이 고노에의 계획에 난색을 표했던 이유는 이러했다. 우선 타카마츠 왕자의 경우는,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기독교를 믿는다. 이들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우리만큼 없다. 덴노가 승려가 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적 차이를 말한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도 고이치는 좀 더 실질적이다.


“만약 덴노가 속세를 떠나면 그에게는 더욱 위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연합군은 덴노의 그런 행동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덴노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종교로 피신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고노에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1944년 7월의 고노에의 계획도, 1945년 1월의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고노에의 생각이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1945년 8월 15일 보다 좀 더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히로히토 덴노가 선택했던 종전의 방식이었다. 1944년 7월 고노에가 내놓았던 종전방식(종전선언문의 내용까지 포함)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거의 비슷하게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1년만 일찍 고노에의 의견을 들었다면, 일본의 역사는 크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능동적으로’ 선택했던 종전계획은 1945년 6월 8일에야 역사에 드러났다(1945년 8월 15일은 ‘피동적으로’ 선택당한 종전이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옥새관 기도 고이치가 내놓은 종전계획이다. 바로 시국수습대책시안(時局收拾對策試案)이다.


1945년 6월 6일... 불과 한 달 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참호에서 자살을 했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이제 추축국으로 남은 나라는 일본 하나. 오키나와 전투도 거의 승패가 판가름 나던 시점에서 최고전쟁지도부는 전쟁지도기본대강(戰爭指導基本大綱)을 채택했고(내용은 별거 없다.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싸우잔 내용이다), 이틀 뒤 어전회의에서 덴노의 재가를 받았다.


“소련과의 협상이 중요하다. 앞으로 일본이 나아갈 길은 소련과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최대한 이익을 보장받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과의 외교에 관해서 잠시 첨언하자면, 고이소가 내각 총리가 된 시점에서 그는 패색이 짙은 전쟁에서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화평공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난징대학살은? 추정치에 대해 다르지만, 2,300만 명 가까이 희생당한 중국 민간인들을 앞에 놓고 화평이라니... 일본은 이때쯤이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황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일본의 외교력은 유치원생 수준도 되지 못했다. 이미 얄타 회담을 통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약속 된 상황이고, 이걸 몰랐다 하더라도 흘러가는 국제정세를 본다면, 소련이 망해가는 일본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기도는 육군이 종전. 그러니까 평화적인 방식으로의 종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제했다. 쉽게 말해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 육군의 반발을 잠재우는 게 종전의 첫걸음이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덴노의 각오였다.


“덴노께서 직접 육군의 반대를 잠재우십시오. 아무리 막 나가는 육군이라도, 덴노의 권위에 저항할 순 없을 겁니다.”


육군의 반발을 정리한 다음 연합국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전쟁 당사자였던 영미와의 협상은 어렵기 때문에 소련을 통한 중재를 추진하는 게 옳다는 의견을 상신했다. 이때 필요한 게, 히로히토 덴노의 친서.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의 일본 점령지 포기와 해외 주둔 일본군의 철수, 그리고 일본군의 ‘부분적인’ 무장해제였다. 이를 조건으로 명예로운 평화를 보장 받는다는 계획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예의 강화’였다.


당시 기도는 6월 8일 이 계획을 히로히토에게 건넸고, 히로히토는 즉시 이 계획을 추진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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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 당시 매파나 비둘기파 모두 생각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들이 원하는 건 국체호지(國體護持)였다. 강화나 종전의 이름으로 포장된 외교활동의 주목적은 천황제의 유지였다.


그러나 그 마저도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너무 늦었고, 너무 현실을 몰랐다.


1년 전이었다면, 이 계획은 먹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몰 직전의 일본의 말을 들어 줄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미국, 2차대전에 뛰어들다

전통이란 이름의 살인, '무사도(武士道)'

맥아더의 오만, 태평양전쟁 필리핀 전장

일본, 필리핀의 물가를 100배로 만들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을 이용한 방식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의 등장

일본의 비명이 종말을 재촉했다



5부

B-29, 지옥이 시작된 일본

불의 도시, 파국으로 향하는 일본

본토결전

세계 질서를 정리한 회의

덴노를 보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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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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