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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10. 월요일

김재홍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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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소백과사전]프롤로그



[공지]딴지 Books 1탄 '박정희소백과사전' 전격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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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E-Book

(App) 프로젝트의 시작인 '박정희소백과

사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앱스토어에 발행 

되었음을 독자제위덜께 알려드리는 바임다.


게다가 한시 특가 $2.99에 구독할 수 있다는

기가막힌 소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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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욕망을 100% 해소함과 동시에, 

개성과 재미를 듬뿍 때려넣은 딴지 E-Book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친일. 박정희


김재홍 주제가 친일인데, 친일의 기준부터 세우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일제 하에 금융조합의 직원이나 간부 할 수도 있죠. 그게 친일이냐. 소학교 교사 했던 것이 친일이냐. 군 장교 했던 게 친일이냐. 분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박정희는 알다시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뜻한 바 있어 만주군관학교로 혈서를 쓰고 지원하지 않습니까. 어디부터 친일이냐는 것이죠.


일제 치하에서 중시한 분야를 크게 몇 가지 꼽는다면, 군국주의 체제였으니까 군을 제일 중시했죠. 지금 북한도 선군정치를 하고 있는데 선군은 영어로 하면 Military First, 혹은 Army First라고 하는 거예요. 일제야말로 군국주의의 원조인데 그래서 군 장교로 들어간 것 부터가 진짜 친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소학교 교사 월급이 25원 됐더라고요. 그 당시 면서기 월급이 20원이었어요. 일제가 군국주의지만 관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면서기도 지방에서 굉장한 유지였어요.


면서기 월급이 20원인데, 소학교 교사가 25원을 받았으면 꽤 괜찮은 것이었고, 물론 평생 직장도 보장이 돼 있었고, 훈도(선생)로서 존중도 있었는데 그것을 일거에 버리고. 만주군관학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나이였으니까 혈서를 쓰고 들어간 것이고요.


처음에는 군관학교에서 거절했는데 나중에 혈서를 써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보고 입학 허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왜 그렇게 군인의 길을 원했느냐. ‘긴 칼을 차고 싶었다’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긴 칼을 차고 싶었다’를 정치심리학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긴 칼’이라는 게 뭐겠습니까? 권력이에요. 박정희를 정치심리학으로 분석해보면 중요한 언급입니다.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냥 그 체제 하에서 그래도 괜찮았던 직업인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를 굉장히 어렵게 가고, 장교의 길을 가고. 그게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간 것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정운현 김 선배 말씀하신 내용을 제가 조금 중복이 되면서 보강을 할께요. 우선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월급은 45원이라고 합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5년제 대구사범학교를 마치니까 스무 살이 된 거죠. 교사는 3년 했습니다. 37년 스무살에 부임해서 39년 말까지 하고 40년 스물 세 살 때 만주군관학교를 갔어요. 그 무렵에 군관학교 입학 연령이 16-19세였어요. 이미 지나버렸잖아.

 

군관학교 혈서 관련 기사를 보면 박정희가 편지를 쓴 게 처음이 아니고, 편지를 두 번 보냈어요. 기사에 보면 ‘달필로 쓴 동 군(박정희)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다.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돼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력이 16세 이상 19세 이하이기 때문에 23세라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 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하게 사절하게 되었다.’ 이게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7면에 나온 기사 내용입니다. 보도된 편지가 이미 두 번째였다는 것이죠. 이게 기사에 나와있는 내용이에요.



김재홍 편지를 두 번 쓴 거예요?

 


정운현 두 번 썼다는 얘기죠.

 

 

김재홍 대단한 집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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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 지원 소식을 보도한 만주신문 기사

 


정운현 기사에 보면 ‘동 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되어있는데 결국 들어갔단 말이죠. 들어가게 된 것은 대구사범학교 당시 교련 교관으로 있던 아리카와 대좌가 만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리카와 대좌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것은 문서로 된 것은 아니고 제가 군관학교 동기생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범학교의 후신은 교육대학이지만 일제 때 사범학교의 위상은 달랐습니다. 고보(고등학교)에는 소좌(소령)가 교련 책임자였는데, 평양사범, 경성사범, 대구사범, 이런 초기 3대 사범학교의 교련 담당은 현역 군인으로 대좌(대령)였어요. 그러니까 위상이 엄청난 것이죠. 학교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이고.



김재홍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박정희가 진출했던 게 만주군관학교니까 만주군 장교를 한 것 아니냐. 그걸 가지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그 당시에는 아시다시피 일본 제국주의가 대동아공영권이기 때문에 조선군, 만주군, 이게 다 황군(皇軍)이에요. 일본군과 다름없는.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워가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한 거죠. 조선군이 황군의 일원이었듯이 만주군도 일본 군대나 다름없는 거다. 일부에서는 일본군이 아니네 나중에 일본 육사로 갔으니까 좀 다른 거 아니냐 그러는데 사실상 같은 테두리에 있는 같은 체제의 황군이다. 황군 개념으로 보면 될 거예요.



정운현 방금 얘기처럼 만주군이나 일본군이 같기 때문에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에서 예과를 마친 사람 중 성적우수자 일부는 일본 육사에 편입을 한 거예요. 서로 구분이 있고 다른 집안이라면 어떻게 안 되잖아요. 그런데 같은 집안이니까 본과를 일본 육사에 유학생으로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김재홍 군 출신이 총리를 맡고 이런 식으로 하던 때니까. 정말 아까 얘기한 Military First Politics. Army First Politics. 선군정치. 군국주의 체제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 것이고요. 박정희는 그런 시대 상황,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해서 교육자의 길을 깨끗이 버리고 군국주의 체제의 일원으로 들어갔다 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죠.



정운현 박정희가 친일로 접어드는 분기점이 만주행입니다. 1939년 가을에 제자들한테 이렇게 얘기했어요. “선생님 어디가서 시험 하나만 치고 올께요. 어디 좀 다녀올께요.” 군관학교 간다는 말은 안 하고. 이렇게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하더라는 거죠. 1939년 가을에 가서 시험을 치고 왔는데, 그 때 박정희는 만주 꼭대기에 있는 흑룡강성 목단강(牡丹江) 시에 가서 시험을 쳤습니다.


박정희가 문경에서 선생으로 쭉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면,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일제 때 선생을 한 것 가지고 친일파로 모는 것은 객관적으로 가혹합니다. 아주 독특한 친일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별종으로 예외지만 보편적으로 학교에서 선생한 것을 가지고 친일파로 모는 것은 문제인데, 박정희가 만주에 가서 개장사를 했다든지 만주에 가서 식당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만주에 가서 군관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황군이 된 것이 친일파가 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박정희의 만주행을 생각해 봐야 돼요. 이 사람이 실업자도 아니고 그 당시 문경에서는 유지였단 말입니다. 면사무소, 경찰서, 보통학교, 그 외 산림조합이라든지 이런게 한 20명 밖에 안 돼요. 20~30명 정도 되는 지역의 유지 안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사범학교 교사 위상이 낮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도 사범학교 들어가려고 했고요.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에서 대구사범학교 진학 1호입니다.


같은 만주로 가도 만주에서 항일세력들이 활동하는 집단으로 갔다면 또 다른 문제고. 장준하 선생같은 분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고 6천 리를 걸어서 중경까지 가잖아요. 그러니까 극명한 삶의 대조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재홍 박정희가 군인의 길로 갔다는 것과 관련해서, 5.16 쿠데타 일으킨 뒤에 1963년 민정이양을 하죠. (1961년 5월 16일부터 1962년 말)불과 1년 반 만에 소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지 않습니까. 최고위에서 의결해서 진급을 한 것인데, 군사 쿠데타, 자신의 말마따나 군사 혁명을 했다고 한다면 군사 혁명의 지도자가 꼭 진급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육군 소장으로서 군사 쿠데타 지도하면 되는거야. 근데 기필코 중장달고 또 대장달고 그렇게 예편하고 옷을 벗고서 민정이양에 참여한 것인데, 그러면서 ‘나같이 불행한 군인은 더이상 안나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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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이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은 없도록 해 보아요. (1963. 08. 30 경향신문) 



정운현 전역식에서 한 얘기 아닙니까?



김재홍 그렇죠.



정운현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재홍 그러니까 레토릭인데, 하나는 그거겠죠.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무능한 정치권이 있어서 내가 군의 길을 계속 가지 않고 정치권으로 나가게 됐다.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회 혼란과 정치무능이 없어져서 나처럼 군의 길을 가는 사람이 군의 길을 접고 이렇게 오지 않도록 해달라. 그런 미사여구일 거예요.



정운현 말이 되나요 그게.



김재홍 아니 그거야 뭐.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해서 만든 레토릭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욕심은 다 채운 것입니다. 군인으로서는 육군 대장까지 달았고. 군인의 길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5.16 쿠데타 때 중심 역할을 했던 김종필 전 총리가 중령 때 하극상 사건으로 옷을 벗습니다. 육사 8기 중에서 두 명이 옷을 벗는 것인데, 나중에 5.16 쿠데타 성공하고 - 성공했다는 것도 말이 좀 웃긴데 - 다시 원대 복귀해서 결국 장군이 되고 준장으로 예편한 것이지요. 장군이 된 거예요.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일단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다 성취하고서 민정이양으로 가는 것이고요.



정운현 우리나라 친일파 문제가 가장 꼬인 게 뭐냐면 인정을 잘 안해요. 변명을 해요. 사과를 안 해요. 그런데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Truth & Reconciliation Commission)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사과하고. 그런 좋은 세탁 과정을 거쳐서 필요하다면 조국을 새로 만드는 상황에서 일본군 출신들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절차를 거쳤다면.


불행하게도 우리는 임정계열이 아닌 이승만이 초대 권력자가 되면서 해방 후에 오히려 흠결있는 사람들이 더 충성하게 되니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죠.



김재홍 그래서 해방 후에 제일 가슴아픈 과거 청산 실패 케이스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 아니겠어요? 반민특위법(반민족행위처벌법)까지 만들었지만 제대로 못했죠.


그 당시 대표적인 민중 저항으로 1946년 9월 영남지방 총파업이 있었고, 10월 초에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한 추수 폭동(대구 10.1 사건)이 있었는데 좌우합작위원회가 이를 조사 했어요. 좌우합작위원회는 김규식 선생과 여운형 선생, 조소앙 선생, 안재홍 선생 이런 분들이 주도했던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노선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했을 때 첫 째 문제는 남로당의 폭력노선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 원인을 친일경찰의 권력남용과 횡포로 조사했어요. 군도 마찬가지로 친일 군부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좌우합작위원회가 조병옥 경무부장을 불러서 일종의 책문을 합니다. 과도하게 친일 경찰이 많고 그들이 국민을 탄압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 이렇게 추궁을 해요. 이 때 제가 보기엔 해방 후 처음으로 친일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져요. 조병옥 총장과 좌우합작위원회 간부들 사이에...


그 때 조병옥 경무부장이 얘기를 한 게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어요. ‘친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먹고 살기위한 친일이 있다. Pro-Job. 먹고 살기 위한 것. 그것은 용인해야 한다. 그러나 친일을 했는데 정말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팽창을 위해 봉사한 친일이 있다. Pro-Jap(Japanease). 이건 용서할 수 없다.’ 조병옥 선생은 신간회 활동도 했고 민족운동을 했던 분인데 논쟁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그럴 듯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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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1894~196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나 친일파 청산에서 그런 기준조차도 적용하지 못했고 유야무야 끝나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몇 년 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냈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시민사회에서 자율적으로 한 친일문제에 관한 청산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지금 친일문제 이후에도 이미 박정희 정권, 유신권력 아래에서 벌어진 반민주 행위, 인권탄압 행위에 대한 과거사 청산 문제도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이고요.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패권과 팽창을 위해서 봉사한 친일 Pro-Jap은 이렇게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일제 하에 교사를 한 것은 Pro-Job이야. 직업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 하에 금융조합의 직원이나 간부를 했다, 이게 친일이냐. 이거 친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 체제에서 그렇게 되면 거의 많은 국민들이 친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 구분 근거는 아까 얘기한대로 그냥 일반인이 직업으로 생계 유지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Pro-Job.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를 가서 나중에 일본군 장교가 돼서 칼차고 들어와서 호령하고 이런 것. 헌병, 경찰, 이것은 Pro-Job이라고 볼 수 없다. Pro-Jap. 이건 일본 제국주의 번영을 위해서.



정운현 공무원의 경우 일제 말기에 군수를 4년 지냈던 이항녕 박사가 저와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일제 때 군수 이상은 친일파다’. 요즘은 6급도 주무관이라고 합디다만 종전의 개념으로 볼 때는 관이 붙으면 그 때부터 고급 공무원입니다. 일제 때는 공무원 직급이 어떻게 됐냐면 제일 위에 친임관(親任官), 조선에 두 명 있었어요. 총독과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정무총감. 일왕이 임명합니다. 그래서 친임관. 그 다음에 총독이 임명하는 관리 중에서는 칙임관(勅任官), 그 다음에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에요. 판임관은 7-9급 공무원. 판임관 고시라는 게 있었어요. 요즘으로는 7급 공무원 고시인 셈인데 주임관 이상을 다 고등관이라고 했어요. 주임관, 칙임관, 친임관 이거 다 고등관입니다.


이항녕 박사 얘기가 '일제 때 군수 이상은 친일파다.' 이 양반 표현이 정확하다면 그들은 군수가 뭘 하는지 알고 갔다. 지금 우리도 군수가 뭐하는지 알고 시험치지 시험치는 데 가서 보니까 군수가 이런 일을 한다더라가 아니라는 거죠. 처음부터 군수가 일선 말단 행정기관의 장으로써 정신대 차출, 근로보국대 차출, 쌀 공출, 소나무 기름(송탄유) 공출. 군수는 이런 인력과 물자 수탈의 최일선에 선 총책임자입니다. 그것을 알고서 갔다 이겁니다. 그럼 그게 친일파다 이거죠. 말단 최고 책임자 아닙니까.


공무원 중에서는 적어도 그 정도 직위를 수행한 사람이 친일파다. 예를 들자면 흔한 직업 중에 면서기라든지 주사라든지 학교 선생이라든지 급사라든지. 그런 직업들에 종사한 직급의 사람들은 Pro-Job이다. 생활인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독한 놈들이 있어요. 악질적인. 그건 예외.



김재홍 역사적으로 친일 군부 장교들이 세탁을 한달까 세례를 받아서 친일 전력이 감춰진 그런 위상을 갖게되는 계기가 뭐겠습니까? 6.25 전쟁인 것 같아요.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른바 전공을 세웠고 구국장교, 구국지휘관, 구국군부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사람들의 친일 전력이 뒤로 밀려나고. 이렇게 되면 비판하기가 어려워요. 지금도 그런 논란이 많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친일이라고 비판하면 ‘6.25 전쟁 때 그렇게 전공을 세워서 나라를 구했고 미 군부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죠.



정운현 6.25가 결과적으로 커리어세탁의 장이었다는 겁니다.



김재홍 6.25 전쟁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한마디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워요. 다만 친일파 문제로만 본다면 6.25 전쟁은 친일 군 간부들의 전력을 감춰주고 희석하는 그런 과정의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공을 들어서 과를 덮을 순 없는 거 아니에요. 사실은 사실대로. 과는 과대로, 공은 공대로 해야 하고요.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이러한 딜레마가 있을 겁니다. 산업화 세력은 이 땅에서 가난을 추방한 공로가 있다, 산업화 근대화 공로가 있다. 근대화도 박정희 정권 리더십이 있다고 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들, 노동자들, 여성들, 미성년 노동자들이 피땀 흘렸습니까. 그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 발 접는다 하더라도 그 공로를 들어서 반민주행위나 인권탄압이나 체제폭력에 대해서 독재권력에 대해서 공이 있다고 과를 덮을 순 없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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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시절의 기념짤(가운데가 박정희)



정운현 박정희 친일의 분기점이 만주행이라고 했습니다. 만주로 가지 않았다면 군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5.16까지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5.16이 없었다면 박정희 18년 독재도 없었을 것이다. 올라가보면 선생을 그만두고 만주로 간 거기가 분기점이다. 그러면 만주로 가게 된 동기가 무엇일 것인가를 사람들은 궁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박정희가 긴 칼 차고 군 장교가 되어서 폼 좀 재고싶다 정도는 아니고요. 구미보통학교 때 군인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되게 동경했어요. 제복입고, 절도있는 행동하고, 계급장 달고 이런 것이 보기 좋았던 거죠. 폼생폼사죠 사실은.


박정희가 만주로 가게 된 것은 여러가지, 견해에 따라서는 다섯 가지, 최소 세 가지 드는데 첫째는 군인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에 대한 열망,욕망이 하나 있었고, 두 번째는 막상 교사가 되니까 생각만큼 양에 안 찬 겁니다. 물론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배운 미술,음악 실력이 있고, 새마을노래도 작사작곡 다 했고, 그림도 곧잘 그렸어요. 그랬는데 사범학교 교사는 전인교육입니다. 국어, 영어, 미술, 체육 다 해야 해요.


박정희가 운동을 좋아하고, 군인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막상 와보니까 애들 한 20~30명 데리고 교실에서 풍금치고 데리고 나가서 글씨쓰고 이러는 게 본인한테 안 맞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불만. 자기 원초적인 불만이죠. 월급이 적거나 이런 것보다도. 하고 보니까 선생질이 나한테 안 맞다. 그런 현실에 대한 불만.


또 하나는 가정사. 아까 얘기한 대로 대구사범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강요로 결혼을 합니다. 사관생도 때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인데 휴가 나와서 집에 안가고 하숙집에 있다가 학교로 복귀해요. 그러니까 집안과 가정사에 대한 불만. 이런 것이 엉킨 데다가 그 당시 만주라는 곳이 하나의 신천지였습니다. 미개척지대.



김재홍 기회도 많고.



정운현 그래서 만주에는 군인도 군인이지만, 상인들, 부동산투기꾼들, 요즘으로 말하면 노래방, 술집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만주로 모이던 시기였어요. 신천지라고 할까. 새로운 개발지라고 할까. 동양의 서부였다. 그러니까 자기도 그런데 가서 군인도 되어보고 싶고 신개척지대에 가보고 싶은거야. 그런 복합적인 것이 겹쳐서 만주로 가게된 것이에요. 단순히 군인 하나만 딱 본다면 일본 육사로 바로 갔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김재홍 일본 육사로 바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어요? 나이로 보나 여러가지로 보나 바로 가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정운현 불가능했겠지요. 그러니까 대안으로 그걸 택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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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가능케 한 박정희 생도.



김재홍 군관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해서 편입하는 것까지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정운현 좌우간 만주행은 그런 복잡한 원인들이 겹쳐져서 박정희가 선생을 때려치고 만주로 가게 되었다. 거기부터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도 많이 있고하니 얘기 좀 하시죠.



김재홍 그 사이에는 일본 육사에서 열심히 했고, 임관해서 만주군 소위가 된 것이고, 1945년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죠. ‘일본 제국주의의 항복’. 이것을 박정희가 안 시점은 8월 17일이라고 그래요. 아까 얘기한 만주 지역 허허벌판에 어느 변방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그 얘기를 이틀 뒤에 듣고 무장해제 당한 뒤에 부대를 이탈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하고선 베이징으로 오는데요. 한국 광복군이 중국과 만주 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을 규합해서 10만 군대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거길 찾아가는 거예요.



정운현 해방 후 광복군이지요.



김재홍 사람들과 상의를 할 때 다음 대책이 뭐냐. 이제 고향에 돌아가기도 어렵고 그럼 뭐냐. 이 지역에서 조선인들을 규합하는 곳이 광복군이다. 그래서 들어간 거예요. 김구 선생이 나서서 광복군을 조직했고, 이범석, 지청천 이런 분들이 함께 했는데, 사실상 임시정부의 역량만으로는 10만 군대를 조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거기에 묻혀서 광복군에 들어갔다고 되어있고, 나중에 광복군과 함께 귀국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도 많은 조선 청년들이 몰려들고, 임시정부의 방침은 10만 군을 빨리 만들어서 중국과 함께 연합군에 들어가야 되겠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구분하고 선별할 수는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평생 악연이랄까 하는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에 대해서 반대했다고 그래요.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원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하고 반대를 했고. 그래서 나중에 귀국해서도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만 보면 어떻겠어요.


장준하 선생은 학도병으로 갔다가 일찍이 탈영을 해서 중경까지 6천리 길을 걸어서 광복군 독립운동을 한 것이고 박정희는 일본 조직이 망한 뒤에 들어온 것인데, 장준하 선생만 보면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작용했다는 것이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같은 언론 잡지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하니까 이건 정말 어떻게 해서든지 없앨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의 암살 의혹을 규명하는 데에도 광복군에 들어온 뒤의 정치적인 관계를 배경에 깔고 조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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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군 박정희(좌) / 광복군 장준하(우)



정운현 친일 얘기가 나온 김에 몇가지는 제가 조금 구체적인 것을,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참고가 되게 간략하게 팩트를 몇 가지 소개해 드리죠.


예과 2년은 만주군관학교에서 마치고 본과 2년은 일본 육사를 다녀 1944년 4월에 일본 육사 57기와 동기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만주로 와서 소련 만주 국경지대인 치치하얼이라는 곳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서 견습사관을 합니다. 임관하기 전에 견습사관 3개월 하고. 그래서 44년 7월 1일 날 소위로 정식 임관합니다. 이듬해 45년 7월 1일 날 중위로 진급하고요. 박정희는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박정희가 임관하고 난 뒤에는 중국 열하성(熱河省) 남부 성덕이라는 곳에서 만주군 보병8단. 우리로 치면 연대급입니다. 단장이 대령이에요. 이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서 조선인 장교가 4명 있었습니다. 신경 1기 방원철, 신경 2기인 박정희와 이주일, 신경군관학교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5기 신현준. 이 4명이 근무하다가 해방이 되고 나니까 무장해제 당해요. 이 4명 중에서 방원철은 북한으로 가고 나머지 3명. 이주일, 신현준, 박정희 이 3명은 다 집이 남한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북경으로 가서 광복 후 광복군 잠편부대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데. 신현준을 제가 만나보니까 ‘우리는 그 때 광복군이 있는 줄 몰랐다, 광복군의 존재를 몰랐다.’라고 말해요. 이 사람들이 일제 말기에 군인이 되었거든요. 광복군은 중경에서 창설됐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거리가 멀어요. 이 사람들은 저 먼 동네에서 광복군 존재를 몰랐다고 그래요. 오다가 보니까 거기가면 조선 사람들 광복군이 있다, 우리도 군인이니까 거기 들어가서 뭔가 기회를 모색해 보자 이렇게 해서 들어가게 됐다고 해요.


거기 있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에 중국 천진에서 미군 LST(Landing Ship Tank), LST는 수송보급선입니다. 여객선이나 전투함이 아니고. 이걸 타고 부산으로 옵니다. 부산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죠. LST를 타고 올 때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씨. 이 양반이 중국 만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회고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가 LST 타고 오는데 오다가 뱃전에 보니까 키 자그마한 군인이 긴 군도를 차고 뱃전에 있더라. 나중에 보니까 그게 박정희였다. 회고록에 나와있습니다.


신용호 씨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분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인터뷰 신청을 했습니다. 그 당시 분위기를 인터뷰하려 했는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에게 듣지는 못했지만 회고록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그 때 보니까 박정희 뿐 아니라 그 누구든 이미 패잔병 아닙니까. 개선군이 아니잖아요. 복장이 좋았겠습니까 가진 돈이 있었겠습니까. 좌우간 패잔병의 몰골로 LST로 귀국하는 박정희를 봤다. 그런 증언이 있어요.



김재홍 그 다음에 친일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박정희가 군에서 오랫동안 끝까지 살아남아서 소장까지 된 배경은 일본군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는데요. 왜 그러냐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광복군 출신들을 다 거세했어요. 왜 그랬겠어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임정(임시정부)계열이기 때문이지요. 김구 선생 암살당했죠, 신익희 선생 등 이런 임정 세력들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기 때문에. 그쪽과 연결이 되어있다고 생각한 중국군 출신이나 광복군 출신들을 다 거세하고 일본군 출신들을 중용했죠. 일본군 출신이 창군 이후에 군 수뇌부를 형성했고, 예를 들면 정일권, 백선엽, 최경록 이런 분들 국군 창설 때에 조직에 참여했고, 나중에 군 수뇌가 돼요. 그리고 박정희를 구출해주기도 하고 사지에 있을 때 복직시켜주기도 하는 그런 역할을 했던 선배들이 다 일본군 계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승만이 군과 경찰 전부 친일군경을 중용한 겁니다. 그래서 경찰도 일본 경찰의 고문수법을 다 이어받은 거고요. 군부도 일본군 출신들, 중국군이나 광복군 대체시키면서 일본군을 중용해서. 그 그룹의 일원으로 박정희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장군까지 됐고, 다음 시간에 할 것이겠지만 심지어 남로당의 군사 프락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육군소장까지 돼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렇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친일 군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배경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운현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군의 세 핵심간부에 광복군 출신이 딱 한 명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부장관을 겸임했던 이범석 장군 이외에는 박정희 정권 때까지 국방부장관, 육참총장, 합참의장 전부 일본군 계열이었어요. 그게 우리 현대사의 군부에서 핵심 보직 출신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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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장교 중용의 아이콘 이승만. 그가 쓴 독립정신(?)



김재홍 나중에 야당정치인이 됐던 김홍일 장군이나 약산 김원봉. 이 분은 사회주의 계열로 오해를 받은 측면도 있는데요. 민족주의자이거든요. 의열단 출신이고.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정통좌파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이론 투쟁을 벌였던 사람인데 그런 분들도. 예를 들면 조선인민공화국 초기에 군사부장에 이름이 오른 김원봉 장군. 이런 분들 다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청천 등 중국군이나 광복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입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지 못하고 거세 당했고 나중에 야당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친일군경을 중용해서 자기 정치 권력의 도구로 삼았죠.



정운현 만약 반대로 초대 대통령에 김구가 됐다고 상상해 봅시다. 가정해보면 상대적으로 군책임자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훨씬 더 많이 진출해서 책임자를 맡았겠죠. 물론 해방 직후여서 과연 광복군 출신 중 지도자급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논쟁을 해볼 수 있겠지만. 필요에 따라서 일본군 출신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정을 거쳐서 새정부의 국가 건설을 위해 참여하겠다는 절차와 과정을 거쳤다면 필요에 의해서 쓸 수는 있다고 봅니다.

 

 

 

 



다음회에 계속...

 

 





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