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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20.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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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던 분이 해외공장 책임자로 발령 난 상황에서 수행기사로 동거동락했던 S기사님은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됐다. 수원 공장에 남자니 경제적인 부분과 함께 앞으로 맡아야 할 일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이 당시 나이도 고려해야 했다.) 수원공장을 떠나, 그러니까 아예 S社를 떠나 이쪽 관련 ‘아웃소싱’ 회사로의 취직도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이 ‘수행기사’ 업계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2번째 Y기사님이나 3번째 L기사님, 그리고 P실장님 소개할 때 자세하게 설명하겠다.(특히나 P기사님은 배차를 직접 맡으면서 운전도 하시는 분이라 이쪽 업계에 정통하시다. 그때까지 연재를 할 수 있다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대충 개략적인 부분만 설명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수행기사’의 거의 대부분, 그러니까 기업체 수행기사의 대부분은 ‘외주’로 보면 된다. 예전에는 그룹이나 회사에 소속 돼 정직원으로 생활했지만,(S기사님이 그 마지막 세대셨다. 우리사주를 받고, 보너스나 학자금 지원금 같은 것도 받았다고 한다.) 이제 이런 건 전문업체가 존재한다. S기사님은 그래서 후배들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나야 혜택 받을 거 다 받고 나왔죠. S에서 정년퇴직 했으니까요. 애들 학자금도 받았고, 보너스도 받고...우리 때는 총무과에서 기사들에게 어떤 일이 있으면, 그러니까 이사를 한다거나 무슨 집안행사가 있으면, 다 알아서 챙겨줬어요. 직원이니까요. 말 그대로 S 직원이었죠.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핸들밥 먹는 사람들이 이제 회사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사를 차리는 세상이 됐으니까, 어쩔 때 보면 후배들이 안쓰러워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진행하면서 설명하면 될 듯한데, 우리 사회에 만연된(아니,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계약직 근로나 비정규직 문제가 이 ‘수행기사’ 업계에도 부정할 수 없는 ‘작동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소개할 K기사님은 지금의 ‘업계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에(이분이 몸을 의탁한 업체가 꽤 좋은 곳이다.) 섣불리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

 

기업마다 다르지만, 수행기사가 붙는 경우는 ‘활동영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무급이 돼야 붙는다고 한다. 상무나 상무보는 예전처럼 수행기사가 붙지 않는다고 한다.(앞에 전제했지만, ‘활동영역’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한다. 직급 인플레라고 해야 할까? 대신에 OD비라 해서, 그러니까 오너드라이버비인가? 여튼 그렇게 돈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필요할 때가 되면, 혹은 개인이 요구하면 업체에서 지원이 나온다고 한다. 수원 공장 앞에도 이런 업체가 수십 군데 이상 있고, 형태도 지입의 형태도 있고 택시영업과 같이 운송 사업체 형태로도 있다고 한다.)





각설하고, 다시 S기사님에게 집중하자면, S기사님과 S社 수원공장의 대표 분은 그룹 인사발령 덕분에 헤어졌는데, 이 그룹 인사발령 덕분에 다시 만날 기회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설명을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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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20년 전에 카풀로 함께 했던 과장, 차장님들 중에서 오르고 올라 꼭대기까지 올라간 분이 나온 거예요.”


“(감탄) 대단하네요.”


“(끄덕) 대단하죠. 그분들 중에 임원도 나오고, 대표도 나오고...”


“대표면, 기사님 한 분 정도의 인사이동이야 쉽겠죠?”

 

“(웃음) 쉽죠.”

 

“그럼 그 해외로 발령 나신 분과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분한테 가면, 해외로 가신 분이 나중에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웃음) 일단 대표직함으로 계시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야 하는데 보통 2~3년 주기잖아요? 그 뒤에 절 부르신 분의 행보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래서 말씀 드렸죠. 사정이 이렇다. 2~3년 뒤에 그 분이 절 찾으면 난 다시 그분한테 가야한다. 아니라면, 그냥 수원공장에 들어가겠다. 그래도 괜찮냐고...”

 

“뭐라고 합니까?”

 

“웃으시더라구요. S기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고지식하고, 성실하다고...”

 

“(웃음) 저라도 그랬겠네요.”

 

“알았다. 사정 다 알겠으니, 내일부터 내 차 몰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웃음) 그분도 해외 나가신 분 아실 걸요? 그 자리까지 오르셨다면, 그룹 돌아가는 사정 다 알테고, 면식이 있을 거예요.”

 

“(끄덕)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 두 분이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예? 그럼 토스해 준 거 아니에요? 잠시 해외 나가 있을 동안 맡아달라...”

 

“(웃음) 그런 건 아니구요. 그룹 임원들이니 서로 안면이 있는 정도였죠. 대표님 모시는 동안에도 종종 그 분 모시기도 했어요.”

 

“예? 어떻게요?”

 

“아, 해외 나가 계시다가 업무차 국내 들어오시거나, 휴가차 돌아오실 때가 있죠? 그때 마침 비번이거나 시간이 남는다 하면, 국내 체류기간 동안은 제가 또 그분을 모셨죠.”


“(웃음) 대표 두 분을 동시에 모시다니, 그것도 나름 기록이네요.”

 

“(웃음)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근데 그분이 절 참 많이 찾으셨어요.”

 

“저라도 그러겠어요. 그럼, 그 분이 해외에서 돌아오시고 나서는 바로 그 분 차를 모셨겠네요.”

 

 

이 질문을 던지자 S기사님은 몇 초간 침묵하셨다. 이제껏 슬폇슬폇 표정으로 비쳤던 ‘슬픈결말’이 현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해외근무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때 암이 발견됐어요.”

 

“아...”

 

“해외근무 평가도 좋았고, 이미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능했으니 본사든 어디든 갈 거란 건 확실했죠. 해외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마간 휴가를 받았어요. 그 사이에 S서울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한 달을 못 넘기셨죠.”


“아...”


“지금도 기억나요. 병문안 가서 이게 뭐냐? 어서 털고 일어나야 내가 형님 차 몰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분이 수술 받고 회복하면, 이제까지 못 쓴 휴가랑 연차 다 묶어서 국내 여행이나 가자고, S야 나랑 같이 좋은데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한 6개월 펑펑 놀자고, 자기가 계산해 보니까 그 정도 해도 될 거 같다고... 저도 그랬죠. 형님처럼 일한 사람이 S에 몇이나 되겠냐고? 형님은 그래도 된다고 회사서도 봐 줄 거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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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사모님이 연락 왔어요. S기사님하면서, 그 분이 이제 S기사님 차 못 타게 됐다고. 그때 제가 대표님 운행중이었거든요. 대표님이 그때 업체 관계자 분하고 점심약속을 할 때였어요. 황망했죠. 그때 그냥 뛰쳐나올까 하는 걸 간신히 참았어요. 그리곤 회사에 연락해서 후배를 불렀어요.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당시에 다음 스케줄을 알고 있어서.(씁쓸한 듯) 천상 핸들밥 먹는 놈이었나 봐요. 그 황망한 상황에서도 다음 스케줄이 생각났으니. 그리고 대표님이 나오는데, 제 표정을 보더니 딱 뭔가 왔나 봐요. 물어보시더라구요. 그래서 울먹이며 상황을 말하고, 후배를 데려왔다고 하니까 지금 뭐하냐고, 빨리 가보라고. 당신은 됐다고, 이따가 빈소 들를 테니 먼저 가 있으라고. 그 다음은 정신없었어요. 어떻게 S서울병원 갔는지 기억도 안나요. 가서 영정사진 보니까... 그리곤 울었죠. 제 평생 부모님 돌아가신 뒤로 그렇게 울어본 기억이 없어요.”

 

“그랬군요.”

 

 

내가 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신문이나 방송에 부고가 날 정도의 분이랑 이렇게 가깝게 지냈다는 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올 줄 몰랐어요. 하긴 평소에 생활 하신 걸 보면 그럴 만도 하죠. 근데 그때 오신 분들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떤 생각이요?”

 

“이 분 참 불쌍하다고...”

 

“예?”

 

“아닐 말로 사모님 하고 두 따님 계시는데, 사는 건 걱정 없어요. 그 분이 남긴 재산이 얼만데.”

 

“하긴요.”

 

“아마, 그때 들어온 부조금만 모아도 어지간한 직장인 2~3년치 연봉이 돼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 봐요. 거기에 S전자 주식에다 회사에서 나온 것들, 그 동안 받은 연봉이며 성과급, 그 사이에 투자한 것들.”

 

“아, 그렇겠네요. 못 잡아도 백억 대는 넘지 않을까요?”

 

“잘은 몰라도 세 모녀 사는데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물론, 그분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슬픔이란 게 지나면, 현실이 남잖아요?”

 

“그렇죠.”

 

“그 현실이 막막하지는 않을 거란 거죠.”

 

“에이, 막막한 게 아니라 쨍쨍하겠죠.”

 

“그러니까요. 그분들 중에서 새벽에 신갈 인터체인지 앞에서 서성이던 그분 모습을 보신 분이 있을까요?”

 

“아”

 

“제가 상무 때부터 그분 모셨잖아요. 그분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고 있어요. 그분 정말 일만 아시던 분이셨어요. 휴가 나와도 안 쓰고 공장으로, 연구소로 가셨던 분이거든요. 퇴근 후에도 일이셨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사셨어요. 집, 공장, 술집, 집, 공장, 술집. 행사 있거나 무슨 사안이 있으면 그룹 본사 올라갔고, 해외라고 나가면, 거의 대부분이 일 때문이었어요. 그분 인생이 뭘까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돈이 많으면 뭐하나, 지위가 높으면 뭐하나, 남들이 다 부러워하면 뭐하나, 남들은 돈 많으면 오입질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없어요. 아니, 그런 임원들 별로 없어요. 제가 아는 한 그런 분 못 봤어요. 그거 아세요?”

 

“예?”

 

“회사에서 제일 빨리 출근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사장이에요. 그 다음이 임원들, 부장들. 맨 마지막이 사원이죠.”

 

“그렇군요.”

 

“그만큼 일을 많이 하죠. 특히나 임원분들은 성과를 보여야 하잖아요.”

 

“그렇죠. 성과 없으면, 다음에 어찌 될지 모르죠.”

 

“물론, 그분은 그게 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제대로 자기 인생을 누려보지 못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분이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하고, 똑똑하면 뭐해요. 결국은 바쁘게 일만 하다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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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돌아가시고 나서 저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하긴 뭐 생활도 많이 바뀌었죠.”

 

“어떻게요?”

 

“우선, 회사를 그만 뒀죠.”

 

“왜요?”

 

“S 경비 대표님에게 죄송하기도 하고(웃음), 그리고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으니까요.”

 

“세상이 바뀌다니요?”

 

“(웃음) 이제 외주업체가 만들어져서. 더 이상 회사에서 저희들을 고용하지 않게 됐어요. 저야 S에서 정년을 맞았으니 저는 복 받은 거죠.”

 

“그래서 저랑 만나게 된 거군요?”

 

“(웃음) 아닙니다. 그렇게 S를 나온 뒤에, 좀 쉬다가 (웃음) 택시를 하게 됐죠.”

 

“(폭소) 생각이 바뀌셨다면서요?”

 

“(웃음) 바뀌었죠. 예전에는 저도 무조건 일이었는데, 요즘은 짬이 나면 아니, 짬을 내죠. 일주일에 하루라도 시간을 내서 산을 타요. 가까운 뒷산을 갈 때도 있고, 소백산이나 지리산 같은 높은 산도 가요. 갈 때 소주 한 병을 사들고 가요. 가서 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입구 쯤에서 소주 한 병을 마셔요. 그리고 그늘에 누워서 살짝 낮잠을 자죠. 그렇게 한잠 자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죠.(사이) 가끔 제 처한테 이런 말을 해요. 지금 내가 달에 2백 벌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맞춰서 살자. 지금 이 나이에 더 욕심 부려 뭐 하냐고. 다행히 자식들 거의 다 키웠고, 우리 가족 중에 특별히 어디 아픈 사람 없고, 다리 뻗을 집 있고, 가끔 나도 산에 오르며 숨 고르니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구요.(사이) 그분이 마지막으로 제게 준 교훈입니다.(웃음) 제가 그분 속은 다 모르겠지만, 그분 지금 살아계셨다면, 가끔은 옆도 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란 말씀을 하셨을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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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던가?

 

 

“저도 와 닿는데요? 그런데 택시 모셨다면서, 왜 지금 다시 수행기사 생활 하시는 거예요?”

 

“(웃음) 강사님도 끈질기시네.”

 

“(웃음) 이런 건 좀 끈질깁니다.”

 

“(웃음) 그러니까 S 그만두고 이리저리 있다 보니, 일을 안할 수가 없더라구요. 평생 핸들밥 먹는다며 이리저리 쏘다닌 놈이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자니 그것도 좀이 쑤시고. 그리고 돈이 필요했어요.”

 

“아”

 

“둘째 놈 대학을 가는데, 대학 등록금이 좀 비싸야죠.(웃음) 지방대 다니는데 큰 놈은 얼추 졸업해서 일자리 찾는다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고, 작은 놈은 이게 돈이 좀 많이 들어야죠. 등록금을 다 내줄 순 없어도 얼추 구색은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어느 순간부터 자식이란 ‘돈 먹는 하마’가 됐다. 아니, 나 조차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나도 조만간 이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그렇게 택시 하는데...제 자랑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얘기가 들려와요.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라고. 한 번은 택시 손님을 모시는데, 장거리였어요. 강사님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제가 좀 친절하게 보였나 봐요.(웃음)”


“친절하세요!”

 

“그렇게 좀 있으니 그분이 제 명함을 가져가서는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어요. 자기 수행기사 해 주면 안되겠냐고.”

 

“그래서요?”

 

“고민하다가 정중히 거절했어요.”

 

“아니 왜요? 택시가 더 편해서요?”

 

“(웃음) 편하긴요. 그때 택시 그만두려고 이리저리 고민하던 때였어요. 택시일이 벅차요. 저 같이 나이 든 사람한테는 힘에 부치죠. 벌이도 제가 시원찮아 그런진 몰라도 생각만큼 많이 벌 수도 없구요.”

 

“그런데 왜 거절하셨어요?”

 

“제가 그분을 모르잖아요.”

 

“예?”

 

“(씩 웃으며) 이 나이 되니까 어떤 감이 오더라구요. ‘합’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분이랑 내가 오래 탈 수 있겠다, 아니다 그런 거요.”

 

“그런 게 있나요? 건조하게 보자면 기사님은 앞에서 운전을 하시고, 타시는 분은 뒤에서 다른 델 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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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어떻게 설명하긴 그런데, 같은 공간이잖아요. 움직인다 뿐이지 방이랑 같은 거라 볼 수 있잖아요? 냄새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제가 주변을 봐도 그래요. 지금이야, 업체가 들어와서 어제 모신 분 다르고, 오늘 모신 분 다르고 그런 경우도 많고, 예전처럼 한 사람 오래 모시는 경우가 드물지만. 짧게 모셔도 그렇고, 길게 모셔도 그렇고, 기사와 모시는 분이 합이 안 맞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오래 못 가요. 강사님이랑 저는 오늘 합이 맞으니 이렇게 두런두런 얘기도 하면서 즐겁게 올라가고 있지만, 아닌 경우엔 6시간 내내 한마디도 안하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어요. 서먹서먹하거나 어디가 맞지 않는 사람 둘이 좁은 방에서 멍하니 바라보면 어때요? 분명 틀어져요.”

 

“아... 맞지 않는 분이랑 있으면, 오래 못 간다는 말씀이군요?”

 

“(웃음) 이것도 서비스업이라면 서비스업인데, 핸들 잡은 사람이 맞춰야 하는 게 아니냐란 소리도 듣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맞지 않는 사람하고 만나면 틀어지고, 골치 앓고 그래요.”

 

 

(이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Y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엔 ‘진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Y기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S기사님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그분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신 거네요?”

 

“연락을 받고, 가만히 그분하고 있었던 시간을 곱씹어 봤는데, 아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죠.”

 

“그럼,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웃음) 등록금이 포도청이라.”

 

“(폭소) 아놔. 명언이네요.”

 

“알고 지내던, 뭐 다 알죠. 지금도 수원 공장이나 S社 들어가면, 제가 전부 알고 지내던 후배들인데요. 다들 핸들밥 먹던 시절에 알게 된 후배들이죠. (웃음) 그러고 보니 제가 제일 고참이네요.”

 

“아, 동기나 선배가 없어요?”

 

“(웃음) 동기는 원래 없었고, 선배들이야 한참 전에 퇴사했죠. 그렇게 알고 지내던 후배가 있는데, 이 녀석이 S 인력개발원 차를 몰고 있었어요. 물론, 업체 소속이지만.”

 

“아 인력개발원.”

 

 

S 인력개발원. 감히 말하지만, 업계 TOP이다. 강연 프로그램이나, 강사섭외, 관리, 기업 강연에 있어서는 이 분야 최고다. 여기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그대로 다른 기업들의 강연 프로그램이 되고, 여기서 발굴한(?) 강사들은 이미 S에서 한 번 검증됐다는 이유로 다른 기업에서 그대로 섭외한다고 한다.(이건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후배가 개인적으로 일이 생겨서 1년 정도 운전을 못하게 됐어요. 자리가 난 거죠. 그래서 이렇게 강사님하고 만나게 된 거죠. (웃음) 그때 그 후배 녀석 안심시키느라 술도 많이 했어요. 내가 너 돌아오기 전까지만 한다. 너 돌아오면 내가 미련 없이 너한테 돌려준다구요. 요즘 같은 시절에 이런 자리 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녀석도 불안해하죠. 그래도 다른 사람 주느니 제가 들어와서 이렇게 있는 게 그나마 안심됐나 봐요.”

 

“경쟁률이 치열한가 봐요?”

 

“(웃음) 뭐 좋은 곳은 사람들이 몰리고, 아예 차를 사서 지입으로 들어가는 곳은 쉽게 들어갈 수도 있고. 저야 운이 좋은 경우죠. 덕분에 둘째 놈 등록금에 얼마간은 보탤 수 있으니.”

 

“(웃음) 아드님이 운이 좋은 거죠. 이렇게 좋은 아버님 밑에 태어났으니 말이죠.”

 

“아뇨. 좀 더 배운 아비 밑에 태어났으면,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을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신데.”

 

“(웃음) 뭐 훌륭한 거 까진 아니어도, 그럭저럭 굶기진 않았고, 공부는 시켰으니 나쁜 아비는 아닌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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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S기사님과의 동행은 끝이 났다. 산청까지 왕복 6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산청엔 2번 갔는데, 처음 만난 기사님은 너무 과묵하셔서. 쿨럭;) 만약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기사님도 퇴근을 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S기사님을 생각하면, 눈가에 촘촘히 새겨진 주름이 떠오른다. 그 주름 하나하나가 세월의 더께이며, 웃음이었다. 눈웃음 질 때마다 어느 게 눈이고, 어느 게 주름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순박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성실’을 말하고, 뒷자리에 앉은 나이 어린 내게 ‘존칭’을 잊지 않는 부분에서는 ‘프로’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그분께선 내가 많이 배웠고, S가 부를 정도면 ‘뭔가’가 있다며, 그 정도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진 모르지만, 금방 털고 일어날 거라며 ‘보증’한다는 말을 계속하시던 기억이 난다. 빈말이라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묘한 아우라 같은 게 있었던 분이다. 하긴 그분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자체로도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S그룹이 날 보증한다는 말은 동의할 순 없지만, 그분이 날 ‘믿겠다’란 말은 동의할 수 있을 거 같다. 그 6시간의 대화 속에서 많은 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2시간 강연을 하러 가서 6시간짜리 강연을 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운행을 하고 있을 S기사님의 무운장구를 빌며 갈음할까 한다.

 

 

첨언 : 다음번에는 ‘의전’에 대한 각별한 철학(?)을 가지신 Y기사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물론 글을 쓸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이다.

 


 

 

 

 



 

 펜더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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