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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따지고 보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거의 20년이 되어감에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나라의 어떤 사건이든 인간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지역의 문화, 사회, 역사적 배경이 결합되는 것이 따로 있는데, 이걸 분리해내는 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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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위의 장면은 본인이 제1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소리다. 프랑스나 미국 출신의 남편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혹은 그 나라의 처자와 결혼한 한국인 남자들이 배우자의 친척들로부터 저런 이야기, 하루에도 수십 번은 듣는다. 뭐 일정 정도는 교양의 문제지만, 상당부분은 거기나 여기나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니다보니, 남의 일들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도 없고.


일반적으론 이런 거, 문제 될 일이 없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의 배경이 되는 흐름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일인데 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역적 특성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지난달,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이 한동안 화제였다. 작가, 혹은 시민이 해야 하는 일과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다르니 그 글을 갖고 벌어졌던 논란의 반복은 사양한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한강이 그 글에서 자신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준비했던 경험 부분이다.


그는 인류가 왜 타인에게 잔인하게 피해를 끼치는지 알고 싶어 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내전과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등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Subhuman)”로 여길 때 잔혹한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국적과 인종, 종교,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여길 때 참극이 발생했다는 것.


Genocide, 즉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현장에선 한강 씨가 지적한 이 일이 공통적으로 벌어진다. 심지어 이거,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기억의 정치.


미얀마의 로힝야족 난민 사태와 관련해서 먼저 봐야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이름과 위치만 다른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길 하려면 잠깐 194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의 동유럽부터 갔다와야 한다.




1. 기억의 정치(Politics of Memory)


요즘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럽 나라들 중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있다. 몇 년전 꽃보다 땡땡의 배경지였다는 게 그 이유. 그런데 이 나라들은 1991625일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한 나라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핼 체고비나에 두 개의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로 이루어진 꽤 큰 국가로 지도상으론 이탈리아 크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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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Јосип Броз Тито, 189257~198054)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했을 때, 그는 아주 적극적인 민족융합 정책을 펼쳤다. 무엇보다 이들 나라들은 상호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전기와 천연자원 대부분을 연방 내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공급받고 있었고, 유럽과 이어지는 물류의 대부분은 슬로베니아가 담당하고 있었다.


1991년에 발발한 내전은 지금의 국경선이 정리되기까지 무려 8년 이상을 끌었다. 최소 추산 14만에서 20만이 목숨을 잃고 약 75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 발발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은 슬로보단 밀로세비치(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1941820~200631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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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엔 구치소에서 세상을 뜨는 그는 세르비아 패권주의자였다. 이 인간의 특성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부터 드러난다. 1987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주민이 알바니아계 경찰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때 그는 조사단으로 참여해 이런 발언을 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상과 후손들 때문에 (이 굴욕을 당하고도) 이 땅에 있어야 합니다. 아마 당신들의 조상이나 후손들에게 수치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하지만 난 당신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인내하라고, 참으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반대입니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이 상황을 바꿔야 합니다, 모든 진보적인 인민들과 함께 세르비아와 유고 슬리비아에서 말입니다.


나에게 혼자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르비아와 모든 유고슬라비아가 함께 바꿀 것입니다. 어쩌면 코소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세르비아의) 민족적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떠나는 (세르비아인들의) 탈출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집에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코소보의 경제적 기회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7424일 연설 - 원문링크)


말만 들어보면 영락없이 박해받는 소수를 대변하는 선지자 같다. 하긴 14세기 경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가 다수였는데, 20세기 즈음에 코소보의 세르비아계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가들의 발언이라는 건, 그 발언을 앞에서 듣는 사람들을 향해 하는 것들이 아니다.


밀로세비치는 이 연설로 박해받는 세르비아계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다음 다음해인 1989년 유고연방의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 1987424일의 저 연설은 코소보 지역에서의 소수자를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유고연방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연방 내 다른 민족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한 것이 74년 헌법에서 보장했던 자치주들의 자치권을 뺏는 것으로, 제1 타깃은 코소보였다.


그와 동시에 밀로세비치와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계에게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협조했던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선동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Ustae) 정권은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의 1/3은 죽이고, 1/3은 추방하며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겠다고 선언했었다.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신자들이었거든.


그런데 우스타샤 정권의 이 말도 안 되는 선언은 실제로 실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때 우스타샤 정권이 살해한 세르비아인들은 33만에서 39만 정도이며 최대 100만이 넘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사실만 놓고보면 밀로세비치와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했던 크로아티아인들이 우리를 학살했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주장했던 것이 일면 설득력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사소한(?!) 문제만 있을 뿐이다. 밀로세비치의 전임자였던 티토는 바티칸의 집요한 겐세이에도 불구하고 처벌할 놈들은 거의 대부분 처벌했다.


아마 이 포인트에서 놀라실 분들 많을 게다. 교황청이 크로아티아 전범 처벌에 겐세이를 놨다니? 믿지 못할 분들이 꽤 있겠지만,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그 Vatican City는 티토의 전범처벌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아니, 아예 대놓고 전쟁범죄자들을 빼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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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과 독일 나찌 옆에 앉아 계시는 목자는

당시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교구의 스테피나치 대주교다.


이건 현대 카톨릭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교구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189858~1960210)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신부들은 우스타샤 정권이 자행한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집시들의 학살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일부 사제가 이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다음에 춤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히틀러와 정교협약을 맺었던 당사자기도 했고. 이 즈음에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사제들만 상태가 이랬던 건 아니다. 스페인의 사제들 상당수는 프랑코 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도 한 장면 나오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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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사제들 중에서 전범처벌을 받은 대표적인 인간은 미로슬라브 필리포빅(Miroslav Filipovic-Majstorovic 191565~1946)이다. 이 사람, 크로아티아에 만들어졌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서 학살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독일군(!)’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 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인종청소 하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었던 그 독일군들이 체포할 정도였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나 하시겠나?


여튼 1945, 유고에서 나치 독일이 물러서자마자 티토는 세르비아 학살사건 조사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재판에 세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수괴급들은 바티칸의 지원을 받아 다른 나라로 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티토 정부는 결코 포기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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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이 학살극을 지휘했던 안톤 파블리치(Ante Paveli1889714~19591228)는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로마로 숨어들었다가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그리곤 후안 도밍고 페론의 대통령 자문역으로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땐 뭐 어떻게 하질 못했지만 1955년 군사쿠테타로 페론이 실각하자마자 유고정부는 아르헨티나에 안톤 파블리치의 송환을 요구한다. 그러자 이번엔 역시 군부독재 국가이자 카톨릭의 세가 강한 칠레로 도망간다. 유고 정부의 추적은 거기서 끊겼지만 후일 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톤 파블리치는 파라과이의 군사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를 위해 한동안 일하다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의 도움으로 1958년부터 스페인 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크로아티아 해방운동(!)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곱게 죽은 것은 아니었다. 숱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195749일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던 블라고예 조보비치(Blagoje Jovovi, 1922~199962)가 아르헨티나에서 암살을 시도했는데 그때 총 맞은 곳이 탈 나서 19591228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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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우스타샤 정권의 내무부와 사법체계를 만들었고, 수십만을 죽인 학살수용소를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학살수용소로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집시들을 보내는 법안을 만들었던 것은 안드레아 아르투코비츠(Andrija Artukovi, 18991119~1988116)였다. 그도 종전 즈음 스위스 여권을 갖고 미국으로 날랐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457월 전쟁범죄자로 기소했고 미국에 그의 송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LA 카톨릭 교구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40년간 추방되지 않았다. 기고만장했던 그는 19841114일 미국의 반대쪽인 뉴욕에 여행 갔다가 거기서 체포된다. LA처럼 카톨릭 교구의 세가 강하지 않았던지라 체포된 후 2년만인 19861111일 유고로 추방된다. 유고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자그레브의 병원에서 세상을 뜬다.


물론 우스타샤 전범 추적 과정에서도 정치적 고려는 있었다. 티토는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사제들이 엄청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바티칸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분쟁이 커지니까. 예를 들어 티토는 우스타샤 정권이 벌인 학살의 총책급임에도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전범으로 기소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기소하기 전에 교황청에 대주교 교체를 요구한다.


만약 교황청이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스테피나츠 대주교는 바티칸으로 돌아가서 잘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바티칸이 이걸 씹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전범재판에서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을 선고받자 비오 1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해버린다.


여튼,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티토는 우스타샤 전범들을 꽤 철저하게 처벌했다. , 스테피나츠 대주교 기소건으로 바티칸과 힘겨루기를 한 이후부턴 재판장에 세우면 시끄러울 것 같은 인사들은 비밀경찰을 보내 조용히 암살해 버렸다.


사실 우스타샤 정권의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 처벌 받지 않고 떵떵거리고 산 이들은 성공적으로 남미로 도망간 이들 밖엔 없었다. 유고연방 국경 안에서 살았던 이들 중에 전범인데도 처벌 안 받고 산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러니까 1991년에 밀로세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지도자들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이 세르비아인들에게 했던 학살을 기억하라라고, 저 놈들 때려잡아야 한다고 선동한 건 언어도단이었다. 처벌한 사람들은 다 처벌했는데 그때 처벌 받지 않은 무고한 크로아티아인들을 잡아 죽이자고 했던 거니까.


밀로세비치와 그 일당들은 애저녁에 벌 받았어야 할 놈들은 이미 처벌받았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상태에서, 세르비아인이 과거에 그들로부터 박해받았다고 하는 기억만 선택적으로 기억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 기억을 조작했던 것. 이를 두고 ‘Politics of Memory’라고 한다. 바로 기억의 정치다.


밀로세비치의 전쟁범죄는 또 다른 반작용도 낳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그 잔혹함에 치를 떨었던 우스타샤가 크로아티아에서 다시 세를 얻고 있다. 세르비아인 학살의 책임자들 중 하나였던 스테피나츠 주교는 복자(로마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 대상이 된 사람. 준성인[準聖人])로 추대되어 자그레브 성당에 모셔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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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은 바본가? 이런 걸 믿게?


기억의 정치의 핵심은 한 지역 내에서 한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역사적인 사실들을 교묘하게 섞어서 일부만 기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선 이런 질문이 나올만 하다. 아니, 저 사람들은 바본가? 저런 걸 다 믿게? 하지만 이거, 지능이나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이 분만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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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서울대학교 화공과 나오셨다. 거기다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1978년에 검사생활을 시작하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머리가 나쁠리가? 정보가 모자라서 저런 이야길 할 것 같은가?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좀 나라 같은 꼴의 나라가 된 것은 얼마 안 된다. 대한민국은 저 영감님이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1981년만 하더라도 어린이 날에 맞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만화책을 불태우던 나라였다. 포르노 만화 같은 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그런 게 많이 나올 리가 없잖는가? 뭔가 거대하게 쌓아놓고 불을 질러야 사진이 나오지. 그래서 대본소 만화 가져다 태웠다.

저 분이 등장했던 영화에서처럼 저녁 6시엔 사이렌과 함께 전국민이 동작을 멈추고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희안한 소릴 전국민이 외워야 했던 나라기도 했다.

이런 이상한 나라가 이상한 상태에서 존재하려면 이상하고도 뻔뻔한 짓거리들을 폭력적으로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아주 많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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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를 복사해 달라니까 ‘photocopy’를 했던 이 분 같은.

어느 나라나 간첩은 그 나라의 최고위급에 집어넣는다. 유명했던 스파이들 모두 그랬다.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04~1944117)는 열성 나찌당원이자 일본통인 주일 기자였다. 역시 소련이 포섭했던 가장 유명한 스파이들인 케임브릿지 5인방도 영국의 핵심부에서 국가 기밀을 수집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저 인간도색 전문가들이 활약하던 시절에 간첩이라고 잡혔던 이들은 국가 기밀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고기 잡는 어부가 간첩이 되고,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로 모국이 너무 궁금해서 한국에 와서 공부하던 이들이 간첩이 되었으며 유럽에서 활동하던 음악가가 간첩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다른 나라의 간첩들과는 사뭇 다른 간첩들을 체포했던 이들이 주로 때려잡았던 것은 자신들에게 월급주는 정권에 맞서는 사람들이었다. 스파이의 역사를 둘러보면 간첩을 다른 나라의 야권, 혹은 재야세력에 집어넣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거기에 필요한 정보가 있을리가 없잖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냈던 이야기들은 먹혔다. 본인들을 애국자라고 포장했던 이 인간도색 전문가들의 호시절은 1997년 그들이 평생에 걸쳐 빨간색 칠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던 한 분이 대통령이 되면서 끝나는 것 같았다. 디스크를 복사해 달라니까 ‘photocopy’를 했던 분이 당시 야당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던 것도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사람 빨갛게 칠하는 것이 전부인 분들이 직장에서 내몰릴 것 같자, 본인들이 접근 가능한 정보들을 갖다 바쳤기 때문 아닌가.

어떻게 보면 안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나서 벌어졌던 일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들이었다. 인간도색전문가들의 귀환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20131011일 뉴스타파는 국정원의 전방위 여론전쟁에 대한 보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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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사람이 빨간색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것 갖고 밥 먹고 살아오셨던 분이 책을 한 권 썼고, 그 책의 내용을 안보강연이라고 하고 다녔단다. 제목부터 좀 깬다. 반대세의 비밀. ‘대세란 저 책에선 대한민국 세력을 의미한단다. 그러니까 반대세란 대한민국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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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병신 같은 이야기들인데, 이 존나 병신 같은 강연을 군에서 그렇게 많이 했다는 거다. 문 대통령이 국방부장관 결정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가 막 이해되고 그렇지 않냐? 저런 병신 같은 소리를 강연씩이나 청해서 들었다니 말이다. 거기다 저 책 저자, 심지어 교수였다. MB503 시절에 저런 인간들 한 둘을 국민 세금으로 밥 먹였을 것 같은가?

거기다 저 책은 선거 때마다 어르신들 단톡방에 자주 올라가는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이게 어르신들이 바보라서 그런 걸까?

사실 국가권력이 사기치기로 작정하면 안 속을 방법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세기의 스파이로 알려진 마타하리(본명 Margaretha Geertruida Zelle, 187687~19171015)의 전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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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마타하리의 전설은 "그녀의 치명적 유혹에 빠져 우리가 늪으로 끌려들어갔다는 거다. 남자를 홀리는 세기의 스파이라고. 그런데, 이 분의 스파이 행각은 좀 깼다. 본인이 수집한 모든 비밀들을 암호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편으로 발송하셨던 분이다. 그러니까 독일이 프랑스에 보냈던 수많은 간첩들 중에 한 명이긴 한데, 멍청해서 처음부터 프랑스의 방첩조직에 걸려들었던 분이다.

스파이와 범죄 분야의 전문기자로 이 분야에서 꽤 많은 책을 썼던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당시, 현대적 스파이 교육을 창시했던 독일의 여교수(Mademoiselle Docteur)’ 엘스베트 슈라그 밀러(Elsbeth Schragmüller, 188787~1940224)1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 다. "... 너무 멍청해서 내가 짤랐어."

사실 프랑스 방첩조직이 잡았던 것은 여교수가 다른 스파이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흘렸던 단서들이 었다. 그래서 마타하리를 심문하던 이들은 그녀가 실제로 이런 일들을 했는가에 대해 상당히 의심을 했지만, 그들의 상관은 이유 불문 모든 것을 그녀에게 몰아버렸다.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전쟁을 일으켰던 책임자들은 그 전쟁이 1주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큰소리들을 쳤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전쟁은 5년을 끌었고 독일과 러시아에서 각각 170만명이, 프랑스에서 136만명이, 오스트리아에서 120만명이, 영국에서 90만명이, 미국에서 126천여명이 죽고 나서야 끝났다.

전쟁을 일으켰던 윗대가리들에게 절실했던 것은 오판에 대한 책임을 질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희생양이었다는 이야긴 이제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전 영국의 BBC진짜 마타하리는 누구인가?”라는 기사가 나왔었는데, 그 기사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마타하리는 전쟁을 일으켰던 프랑스와 영국의 윗대가리들이 만든 신화라고 말한다. (그 기사 링크)

이런 사례들이 한 두가지일 것 같은가?



3. 그럼 미얀마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도대체 뭔가?

영국이 식민지 시절에 소수민족을 등용해 다수민족인 버마족을 핍박했다고, 지금 로힝야족이 당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시절의 업보라고 우기는 분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사소한 문제들이 좀 있을 뿐이다. 일단 영국이 중용했던 소수민족은 로힝야족이 아니라 카렌족이 중심이었다는 것이 하나. 두 번째는 미얀마는 1960년에 군부가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었고, 버마족이 주축인 미얀마 군은 자신들에게 반하는 이들은 정말 처참하게 밟아왔다는 것이다. 남아시아 불교국가들에서 스님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런 스님들이 앞장섰던 2007년의 샤프란 시위도 처참하게 밟혔었다. 그랬던 군부가 1940년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지금까지 보복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보복을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

복수를 60년쯤 묵혔다가 하면 더 통쾌한가? 쟤네들이 내 할아버지를 죽였으니까 난 쟤네 손자들을 죽일꺼야 라고 하는 게 타당한 이야기인가 말이다.

영국의 원죄를 들먹이면서 로힝야족이 강제 이주됐다는 썰도 도는데, 그 분들은 그 지역 지도는 보고 계시는가 모르겠다. 로힝야족이 살고 있는 지역, 방글라데시랑 접경지대다. 그리고 그 양반들, 8세기 경부터 그 동네에 살던 분들이다.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 탄압은 영국 식민지 시절과는 아무 상관없다. 로힝야 족에 대한 탄압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이 탄압의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은 2012년부터의 일이다.

구글에서 'Al Jazeera Myanmar Genocide Agenda'라고 쳐 보면 20151026일 방영된 알 자지라의 탐사 보도를 볼 수 있다. (그 기사 링크) 이 탐사보도의 앞 장면 중에 하나가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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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족은 2대 이상 합법적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미얀마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 자지라의 탐사취재가 시작된 저 즈음부턴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 한 단계 올라가 합법적 체류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서류 발급을 거부했던 것이다. 심지어 군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로힝야족 출신의 국회의원 조차 공천을 받지 못했다. 20152월 중순부터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 족의 모든 신분증들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참고기사 링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이건 2008년 제정된 미얀마의 헌법을 뜯어보면 감이 좀 온다.

지금 현재 미얀마의 헌법은 2008년에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헌법, 골때린다.

일단 2008년 미얀마 헌법은 누가 절대로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커스터마이즈 되어 있다. 배우자와 직계존비속에 외국인이 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조항이 있거든. 아웅산 수찌의 남편은 영국사람이었고, 아들들도 영국 국적을 갖고 있다.

미얀마는 국회가 상하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원은 'Amyotha Hlutta'라고 부르며 총 224석으로 12개 광역대표를 포함해서 168개 지역에서 선출한다. , 그런데 숫자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직접 뽑는 게 168석인데 총 의석 수는 224 라니? 그건 56석이 군부꺼라서 그렇다. 하원은 'Pyithu Hluttaw'라고 하는데 총 440석이다. 그 중에서 직접 선출하는 의석은 330석이고 나머지 110석은 역시나 군부꺼다. 둘 다 25%는 무조건 군부가 가지도록 되어 있는데, 이거 조금 밑에서 보면 왜 25%로 만들어 놨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군의 총사령관은 부통령급으로 군의 통수권을 행사한다. 군 통수권을 대통령이 행사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군 총사령관은 국방장관, 내무부장관, 국경장관을 지명한다. , 경찰과 군, 국경수비대는 대통령이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군 총사령관의 임명은 어떻게 하느냐... 국방안보위원회에서 제청하고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럼 도대체 국방안보위원회는 뭐냐. 대통령, 부통령, 각부 장관으로 총 11명이 구성하는데, 이들 중 여섯 명은 군인이어야 한다. 거기다 개헌을 하려면 국회에서 75%가 넘게 찬성을 해야 개헌 발의를 할 수 있다. 미얀마에 민족 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만 정당으로 있는 것도 아니니 물리적으로 75%를 넘길 방법은 아예 없다.

이거 뿐만 아니다. 헌법 제40(C)항엔 '반란'이나 '폭력'으로 국가주권 붕괴 상황이 올 경우 '국가 안보''국가 통합'을 위해 "군총사령관이 권력을 인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정치인들이 하는 게 맘에 안 들면 군이 언제든 쿠테타를 헌법을 중단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련기사 링크) 뭔 이야기냐면, 미얀마는 알맹이는 군이 다 갖고 있는 껍데기만 민주국가인 나라다.

1988년의 대규모 시위, 그리고 2007년의 샤프란 시위까지 짓밟아 버렸던 미얀마 군부였지만 국제사회는 물론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변화에 대한 압력을 이기진 못했던 것이다. 대놓고 과반을 차지하면 군부독재의 연장이라는 비난을 들을 것이 뻔하니 핵심적인 25% 지분 알박이를 해 놓았던 것이다.

이 모양이었으니 2008년에 만들어진 헌법에 따라 처음 치러진 선거에선 선거 몇 달 전에야 군복을 벗은 테인 세인(Thein Sein, 1945420~)이 낙승했다. 그리고 이 일들이 벌어졌던 2015년은 정권이 민족민주동맹으로 넘어갈 것이 거의 확실시되던 시점이었다.

정치권력을 이렇게 갖고 있으면 경제권력은 어떨까?

2014522일 유엔아동기금(UNICEF) 미얀마 지부에서 보도자료를 하나 낸 적이 있다. 제목은 'Rising costs in Myanmar put strain on UNICEF’s resources in Yangon(링크)', 미얀마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빨리 증가하고 있어서 UNICEF의 운영이 힘들다 는 이야기였다. 843평의 사무실을 임대하는데, 9만달러의 월세를 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던 이 보도자료는 한동안 외신을 뜨겁게 달궜다. 왜냐...? 저 사무실이 가난에 시달리는 미얀마 농민 소유의 빌딩이겠는가? 군부, 혹은 군부와 결탁한 이들의 소유이겠는가?

뻔하잖는가? 군부, 혹은 군부와 결탁한 재벌 소유지. UNICEF가 그들에게 월 1억씩 꽂아주면서 활동을 그 지역에서 하는 게 맞는가라는 논쟁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800평에 월 1억이면 거의 강남 땅값 아닌가?

이런 나라가 연평균 7~8%씩 성장한다고 해서 그 성장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돌아갈까?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Samuel 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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