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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1. 27. 월요일

논설우원 파토










- 지난 편에서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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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는 ‘레테’라는 강이 등장한다. 이 강은 죽은 자가 명부인 하데스로 가기 위해 건너는 다섯 개의 강 중 하나인데, 소위 망각의 강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강을 건너는 자는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잃고 번뇌도 함께 잊게 된다는 거다.

 


여기서 ‘모든’ 기억을 잃는다는 건 일반적인 기억상실보다 훨씬 전면적인 상황이다. 번뇌가 모두 사라지려면 기억은 물론 그 기억에 의해 만들어진 트라우마나 행복과 고통 등의 감정도 전부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기억상실은 아무리 심하다한들 이런 현상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이런 강이 실제로 있지야 않겠지만, 이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렇게 메모리와 감정이 포맷된 인간은 갓 태어난 후와 별 다를 게 없는 백지 상태가 된다. 근데 만약 우원이 죽고 레테를 건너서 저렇게 된다면 그 존재를 여전히 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과연 내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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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음악가였던 클라이브 위링은 바이러스 감염으로 뇌손상을 입어 과거의

기억을 상실함은 물론, 새 기억도 불과 10초 남짓밖에 저장되지 않는 상태로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과 인격은 원래 모습대로 남아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에도 비슷한 경우가 등장.

 


사실 지금의 열분들에게는 갓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던 세포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때의 열분과 지금의 열분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의 연속성을 제공하는 근거는 뭘까.



첫째는 단절되지 않은 채 이어진 삶의 궤적, 그리고 그 궤적이 남긴 기억과 인격일 거다. 두번째는 물론 생물학적 연속성이다. 비록 아기 때의 세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새로운 세포들을 나름의 규칙에 의해 만들어내 몸을 유지시킨 유전자, DNA 는 아기 때와 똑같으니 말이다. 근데 이 DNA 는 철저히 물질적인 부분이라 죽으면 사라진다.



이 말은 뒤집어 본다면, 죽은 후 기억과 인격이 사라진다면 이제 그렇게 된 열분들을 죽기 전과 이어줄 끈은 정신과 물질 양면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상태에서 ‘나는 여전히 나’라고 말할려면 뭐가 더 있어야 할까? 백지는 말 그대로 백지라 다른 백지와 변별점이 전혀 없는데도?



이런 맥락에서 ‘환생’이라는 개념도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환생의 메카니즘은 기억을 완전히 잊은 채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논리적으로 좀 이상한 ? 환생 자체의 신빙성 여부와는 별개로 - 소리다. 기억은 완전히 지워졌고 고유의 생각이나 감정도 사라졌고 육신은 썩어서 소멸된 상태인데 도대체 내 어느 부분이 다시 태어난다는 걸까. 결국 기억도 인격도 육신도 아닌 모종의 ‘다른’ 부분이 있고, 이게 면면히 이어질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존재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혼의 관념을 동원한다. 영혼은 기억도 감정도 몸뚱이도 DNA 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그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밑바탕의 핵심이 되는 ‘뭔가’ 다. 허나 이 관념은 말 그대로 관념이라서 실체는 물론 논리적인 근거나 존재해야 할 개연성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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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영혼에 실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많은 가정과 상상을 동원한다. 

인간이 죽으면 그 육신과 똑같은 영혼이 시신에서 떠오른다거나 죽는 

신체적 장애는 물론 노화에서도 해방되어 건강하고 젊은 모습이 된다는 등,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런 주장들은 실은 논리적로 

하기 이를데 없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존재는 우리가 스스로 가진 자의식, 자아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믿고 싶은 것을 상상해 만든 허상이라는 혐의가 짙어진다(머 그렇다고 우원이 아예 유물론자인 건 아니다. 과학을 알면 알 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이상한 건지, 우리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 영혼이나 내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를 탐구하기 위해선 세간에서 대충 통용되는 어설픈 신비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훨씬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만 우원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간의 다양한 감정은 자아의 개념을 깊이 고찰하는데 중요한 동력이지만 한편 이성적인 접근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는 거다. 영혼, 환생, 죽은 후의 연속성 같은 개념들은 죽음의 한계를 가진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봤듯 논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해 보이는 괴상한 질문들을 양산해 낸다.



이때,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모두 뇌의 활동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그 부분이 아주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데, 그건 우리가 기본적으로 우리 개개인의 경험과 감정들에 너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철학자 다니엘 데닛이 편집하고 코멘트한 에세이와 단편소설 모음으로, 우원이 아주 좋아하는 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지금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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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번역돼 나와 있다. 영문판과는

달리 제목이 좀 유아틱하지만 이런 주제

와 관련된 논리적 상상의 끝판왕이라고 

할만 하다.

김동광교수님의 번역도 좋음. 2권도 있다.

 

 

 

그 중 간단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자.



어떤 사람이 작고 단순한 로봇을 하나 만든다. 요즘 시판되는 로봇 청소기처럼 혼자 돌아다니는데, 청소 대신 사람이 쓰다듬어 주면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면서 밝은 불빛을 내고, 공격을 하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도록 만들어졌다. 그 사람은 친구에게 망치를 주면서 이제 이것을 부수라고 말한다.



이 친구는 이 로봇이 어떤 종류의 의식도 없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 초보적 컴퓨터와 모터, 바퀴의 집합체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망치에 맞아 슬픈 신음을 내고 붉은 기름을 흘리며 버둥거리는 로봇에게 그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못하고 팔을 내리고 만다.



이렇게 짧게 적어놓으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작품을 읽으면 주인공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음, 나라도 저건 힘들겠다.. 는 공감이 생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무척 인간적이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지성과 감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가 로봇을 부술 수 없었던 것은 생명의 본질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이 로봇은 SF 에 흔히 등장하는 ‘생명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기계와는 전혀 다른 청소기 수준의 물체고 우리의 이성은 명백하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로봇이 보이는 의인적, ‘의동물적’ 태도에 스스로가 감정이입된 나머지 그 이성은 여지없이 무력화되고 마는 거다.



사실 자의식이란 건 자기 자신에게만 진정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우원은 열분들이 우원처럼 자의식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 모른다. 위에 나온 로봇의 예처럼 열분들도 그런 척 흉내를 내고 있는 건지 알게 뭐냐는 거다. 이걸 명백히 확인할 방법이라는 건 과학에서던 의학에서던 철학에서던 없다. 다만 열분들이 나와 같은 생물 종이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걸로 말미암아 그럴 거라고 미뤄 짐작할 뿐이다. 반대로 열분들도 우원이 열분들처럼 자의식을 가진 존재인 지 확인할 수 없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고로,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저 소설에 나오는 발명가의 친구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야만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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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I 의 한 장면. 저러니 이렇게 생긴 기계를 대하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언젠가 실제로 기계에 생명이 깃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관념의 상당부분은

우리의 의인화적 감정의 투사일 가능성이 크다.

 

 

 

이야기가 좀 복잡해 졌는데, 암튼 자아, 자의식, 내가 나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개별 존재 각각에 고유하고 독립적인 거다. 그래서 지난 편에 살펴봤듯이 ‘나’는 인간복제나 컴퓨터 업로드 같은 걸 한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뭔가가 아닌 거다. 이 옮길 수 없는 자의식이 나를 나로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건 육체도 정신도 아니다.



그럼 뭘까? 확신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총합 아닐까. 아주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대략 4,5살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기억상실에 걸렸던 것도 아니고 그때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만큼 의식이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조직화되지 않았던 상태였을 거다. 하드웨어로서의 뇌와 소프트웨어로서의 운영체제나 정보가 둘다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진 복잡미묘한 자의식이 성립되지 않았던 거다. 그때도 의식은 존재했겠지만 강아지처럼 자극에 대한 본능적 반응에 가까운 거였다.



그러다가 몸이 성장하고 뉴런의 연결이 많아지고 정보가 쌓이면서 의식은 점점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성장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와 행복감 등 다양한 감정들이 타고난 유전적 특성과 섞여 개인의 특질과 성향을 만들어간다. 그러면서 적당한 때가 되면 나는 나, 라는 명확한 인식이 콘크리트처럼 생겨난다. 여기에는 그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경험적 특성들이 분리 불가능하도록 함께 녹아들어가 있고 그 상태에서 세월이 지나면서 총체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자의식, 자아는 영혼처럼 이미 어디에선가 존재하고 있다가 육신의 껍데기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육신의 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거여야 마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것은 아마도 육신의 소멸과 함께 사라질 것이고, 애당초 몸과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따로 떼서 어딘가에 업로드 되거나 이전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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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다는 발상의 바탕에는 정신이

  육체와 완전히 분리돼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오래된 관념이

  깔려 있다. 하지만 생물은 육체와 정신의 통합체로서만 존재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동전의 앞뒷면을 날카로운 칼로 

  라내면 남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두 개의 반면짜리 동전들

  뿐 아니냐.

 


이제 두 편에 걸친 긴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인간복제나 컴퓨터 업로드를 통해 영원히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바램은 실은 과학기술에서 구원을 바라는 태도다. 그래서, 21세기 과학의 탈을 썼을 망정 실제로는 인류가 지난 수천년간 되풀이해 온 수없이 많은 구원론과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우리를 만든 조물주의 자비를 통한 구원을 바란 반면, 이제는 우리가 만든 피조물인 기술에 의존해 구원받으려고 하는 점이다. 어떤 경우이던 뭔가에 의존해 구원을 희구하는 태도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고 우원은 생각한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뿐이고, 거기에 영생이 전제 조건이 될 필요는 없다. 이런 우원의 주장은 반 종교적이지도 않다. 우원이 아는 여러 훌륭한 종교인들은 구원받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육체도 영혼도 아니고,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아니다. 그런 것들을 구별하며 논하는 건 신기루같은 이야기다. 137억년의 우주, 45억년의 지구, 그리고 그 속에서 진화를 거듭해 온 생명의 모든 경험과 시행착오와 선택이 나, 그리고 열분들에 녹아들어 있다.



물론 과학은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점점 넓고 깊게 만들어 줄 거다. 하지만 스스로의 존재와 마주 섰을 때 우리의 느낌은 수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먼 미래나 별 다를 게 없을 거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신기한 존재인지, 한편으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놀라면서 살게 될 거다.



아 씨바, 쓰다보니 너무 철학스런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끝.

 

 


 


편집부 주


본 연재물의 필자 '파토'가 진행하는 본격 과학토크!!


‘과학과 사람들’과 벙커1이 함께하는 공개 과학토크

 

<과학같은 소리하네>

 

제 9회 : <영화 속의 ‘과학적’ 구라 >

 

초대 손님 : 김명진 (<할리우드 사이언스> 저자)

 

일시 : 2월 17일 월요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벙커 1

 

참가비 : 없음


<관련기사 링크>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