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02. 17. 월요일

김재홍 + 정운현









지난기사


[박정희소백과사전]프롤로그

[박정희소백과사전]친일 박정희 <1>



[공지]딴지 Books 1탄 '박정희소백과사전' 전격발행


사진.PNG


딴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E-Book

(App) 프로젝트의 시작인 '박정희소백과

사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앱스토어에 발행 

되었음을 독자제위덜께 알려드리는 바임다.


게다가 한시 특가 $2.99에 구독할 수 있다는

기가막힌 소식까지...



사진 1 (1).PNG


창작자의 욕망을 100% 해소함과 동시에, 

개성과 재미를 듬뿍 때려넣은 딴지 E-Book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좌익의 흔적



index.jpg



김재홍 빨갱이라고 부르는 표현에 대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레닌이 이끌었던 혁명군을 레드아미라고 했어요. 상징하는 색이 빨간색이라 적군(赤軍)이라고 불렀고요. 우리나라에도 지하운동조직이지만 적색농조(赤色農組)가 있었고, 적기가라는 노래도 있죠.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색이 빨간색인데, 사회적으로 이들을 비난하는 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특무대와 공안 당국으로 보입니다. 좌익들이 반체제 반란운동을 일으키니까 남로당 좌익 세력을 빨갱이라는 말로 비하하는 의미로 쓰고 그랬어요.



정운현 제가 빨갱이에 대해 조사하고 쓴 글이 있는데, 옛날에는 빨갱이라는 말이 없어요. 1948년 여순사건부터 비하의 의미를 담은 빨갱이라는 말이 신문에 등장합니다.



김재홍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조선경비대 장교로 있을 때는 분명히 남로당이 불법화된 지하폭력조직이었고, 조선경비대의 임무 중 하나가 남로당 계열 좌익세력의 소탕 작전이었거든요. 남로당 지하운동과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는데, 말하자면 자기 적군의 군사 프락치를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임무를 저버린 배반행위죠. 조선경비대의 주임무가 좌익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인데, 주임무를 저버리고 적진에 프락치 역할을 한 게 문제이지요.



정운현 1948년 10월 19일이 여순사건 발생일인데, 11월 11일 김창룡이 이끄는 특무대에 좌익 혐의로 체포됩니다. 체포돼서 서대문형무소에도 잠시 있었어요. 11월 11일에 잡혀갔는데, 12월 말에 불구속으로 풀려난 채 재판을 받습니다. 몸은 풀렸지만 무죄는 아닌 상태로 재판을 받은 거죠.


1949년 2월 8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소령 직책에서 파면되어 월급이 몰수됐습니다. 4월 18일 재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과 동시에 형집행정지, 쉽게 말해 2심에서 석방됩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육군 정보국에 문관으로 근무합니다.



3316833972.jpg

박정희씨에게 무기언도



김재홍 감형과 관련해 군사재판의 구조를 알 필요가 있겠는데요. 민간 법정에서처럼 재판정에서 선고를 한다고 형이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법정에서는 2심에서 형을 확정해도 최고지휘관의 관할권으로 얼마든지 감경할 수 있습니다. 그게 군사재판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그 당시 군 수뇌부가 정일권, 백선엽, 최경록, 이응준 이런 분들이었는데, 이들이 전부 일본 육사 선배입니다. 그 선배들이 박정희 구명 운동에 앞장섭니다. 진술서를 통해 군대 내 좌익 세력을 밝혔고 이것이 도움이 됐다는 게 구명 내용인데 그게 받아들여져서 감경이 됩니다.



정운현 제가 쓴 <실록 군인 박정희>에 있는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박정희가 자기 조직원을 불었다’로 알려져있는데, 그 생생한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쓴 소설이 아니고, 초기 공화당 의장이자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정렬 씨가 93년 쓴 회고록에 나와있습니다. 김정렬 전 총리는 일본 육사 54기로 박정희 3년 선배입니다. 박정희 1심 재판이 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1949년 2월, 육군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가 창설되고 내가 교장으로 부임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날 밤, 관사 문을 요란히 두드리길래 나가봤더니 직속부하인 박원석 교수부장이 건장한 장정 서너명에 둘러싸여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숙군 수사팀에서 그를 빨갱이라 하여 수사하러 왔었다. 이튿날 수사팀이 일러준 명동 수사대 건물로 갔더니 김창룡 소령이 왠만한 사람의 키보다 큰 차트를 펼쳐보였다. 알고보니 그게 남로당 군사 조직표였는데, 박원석 대위는 맨 하단에 이름이 올라있고, 그 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박정희도 살리고 박원석도 살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채병덕 육참총장 집으로 찾아갔다. 채 총장이 내게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더만.’이라며 한가닥 실마리를 암시했다. 그래서 ‘그 길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니 ‘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열 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추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박정희를 살리기로 방향을 정한 이후에 명분이나 업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박정희를 풀어주고 다른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한거죠. 그렇게 하면


“첫 째,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협력할 것이오, 둘 째, 설사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열 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확실히 전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이 일에만 협력한다면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명동에 있는 수사대로 가서 김창룡을 만났다. ‘박정희 소령이 뭐라고 합니까?’묻자 ‘협력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것보시오. 빨갱이가 아니잖소. 그래도 열 번이나 해야겠소?’ 그러자 김창룡이 ‘그래도 해봐야지요.’ 그 후 박정희 소령은 열 번 동안 공산주의자 체포 현장에 나가 체포에 협조했다고 한다. 이 일이 끝나자마자 김창룡은 요식행위이기는 하지만 박정희를 석방시키기 위해서 보증서가 필요하다고 채병덕 총장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채 총장은 참모들에게 적당히 보증서 문안을 만들고 이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런 요식 행위가 끝나자 마침내 박정희 소령이 풀려났다. 박정희 소령이 풀려나자 당연히 그 밑에 있던 박원석 교수부장도 돌아왔다.”


이게 회고록에 있는 내용입니다. 숙군에 관여했던 분들 이야기로는 박정희를 앞세우고 특무대 사람들이 따라가면 박정희가 턱으로 사람을 가리키고 특무대가 그 사람을 잡아왔다고 합니다. 잡아온 사람은 어김없이 좌파였고, 그렇게 해서 국내 주요 좌파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75_2217_1259.gif

좌파를 향해 쏴라!



대표적인 우파인 김정렬 총리가 회고록에서 부하를 구제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박정희가 묻어나온 거예요. 사람 키보다 큰 차트 본 이야기도 있고. 근거없이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증언들을 바탕으로 더 정확한 이야기로 지적하고 논평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까 말한대로 남로당 인맥을 다 불고 그 공로로 구명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의 중범이 목숨을 구한 예는 없습니다. 박정희는 살아남았지만 일본 육사·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은 전부 처형됐어요.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산 선배들과 친분이 있는 인맥들로 인한 행운이죠. 그 이후 박정희는 승승장구했습니다.


풀려난 이듬 해에 한국 전쟁이 나지 않습니까. 좌익 편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전쟁이 친일·좌익 경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전력을 세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박정희도 한국 전쟁이 발발한 다음 달인 50년 7월에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복귀해서 한국 전쟁에 참여하고요. 11월에는 전부인 김호남과 협의 이혼을 하고, 12월에 대구에서 육영수와 결혼을 합니다. 52년 2월에 박근혜가 태어나고 53년 11월에, 전쟁이 끝난 후 별을 답니다.


군 내부에서는 박정희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좋았습니다. 아까 말한 11월 준장 진급한 후에 5년 뒤 소장으로 진급해 7사단장,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같은 6관구 사령관을 지냈고요. 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됩니다.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사령부로 간 것은 계급은 그대로지만 권력으로 볼 때 좌천된 것인데, 좌익 전력 때문입니다. 60년이면 4.19가 끝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입니다.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는 전력이 있지만 괜찮은 사람이다, 능력이 있으니 귀하게 쓰라’고 중용을 건의했어요. 장 총리는 미국하고 가까운, 굳이 따지자면 친미파입니다. 그래서 매그루더 주한 미8군 사령관에게 박정희에 대해 물어봤어요.


그때만 해도 박정희가 두각을 나타낸 장군은 아니니까 매그루더도 잘 몰랐고, 그래서 육군본부에 신원 조회를 요청합니다.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이 ‘박정희는 좌익’이라고 보고를 하자 매그루더가 장면에게 ‘어떻게 그런 사람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앉혔느냐, 문제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좌천됐습니다. 박정희가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 면도 있지만, 이런 전력이 문제가 되기도 한 거지요.


좌익 경력은 본인에게도 컴플렉스지만 미국이 볼 때에도 늘 불안 요인이예요. 젊어서부터 좌익 배경에서 성장을 했고, 초임장교 때에는 깊이 관여하다가 갑자기 돌변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진짜 바뀐 것인지 처세를 위해 일시적으로 바뀐 것인지 불안한 것이죠. 그래서 이후락을 감시자로 앉혀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후락.JPG

감시를 부탁해 (이후락<좌>)



김재홍 박정희 군인 경력 중에서 중요한 보직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입니다. 이게 매우 중요한 자리거든요.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을 한 것은 4.19 혁명 덕분인데요. 4.19 혁명이 일어나자 육사 8기생들을 중심으로 ‘정군(整軍)’이라고 하는 군 내 정화운동이 벌어졌어요. 육사 8기는 중령이 다수였고 7~8명의 1차 대령 진급자가 있었는데, 육사 8기의 임관은 1,350명이나 되니까 아주 많죠. 그래서 이들은 진급과 장래가 아주 불안정한 상황이었어요.


정군 운동을 주도한 육사 8기생들이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추대했고 최경록 육참총장이 박정희를 작전참모부장으로 기용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해 오고, 박정희가 좌익에 연루된 기록도 있고요. 군 내의 인사권을 박정희가 갖겠다고 하니까 과도한 요구라서 최 총장이 이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그 과정을 자세히 보면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한 정군파가 4.19 혁명 후 세워진 장면 정부에게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의 조건과 자질을 서면으로 전달합니다. 처음에 이들은 장면 총리실을 찾아갑니다. 육군 중령·대령들이 당시 내각책임제 아래서 사실상 국정 최고책임자인 국무총리를 면담하자고 한 것이지요. 당연히 비서실에서 만나게 해 줄 리가 없고요. 정군파는 ‘새로운 국방장관은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 같은 것을 전하고 옵니다. 정부가 그것을 존중하겠습니까. 군 출신이 아닌 민주당의 중진 현석호 의원이 국방장관에 임명되지요.


그러자 이들은 국방장관실에 찾아가 "육참총장은 이러한 장군을 임명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전달합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이 군사 쿠데타에서 볼 수 있는 패턴입니다. 정치학적으로는 ‘집정관적 조정형 군부’라고 하는데, 군부가 민간 정부에 요구조건을 내밀고 관철시키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군부가 직접 정부를 장악해 버리는 단계로 그것을 쿠데타라고 합니다. ‘집정관적 지배형 군부’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5.16쿠데타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요.


4.19 혁명 후 송요찬, 최영희, 최경록, 장도영이 육참총장을 하는데요. 모두 일본군 출신인데 박정희를 작전참모부장으로 기용한 사람은 최경록입니다. 4.19 혁명의 와중에 정군파가 나서니까 여론의 추이를 무시할 수 없는 최경록이 정군파의 지도자격인 박정희에게 작전참모부장을 맡깁니다. 그런데 이들 정군파가 사사건건 군내 인사와 관련된 요구를 하고, 또 합참의장 최영희에게 대드는 하극상 사건을 일으키니까 박정희를 몇 달 만에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시킵니다. 장면 총리가 장도영을 육참총장으로 발탁하자 박정희를 2군으로 보낸 최경록 총장은 2군 사령관, 그러니까 박정희의 직속 상관으로 가게 됩니다.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5.16쿠데타를 준비하지요.


정운현 그 배경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고, 매그루더한테 ‘박정희는 좌익이다’라고 한 김형일은 5.16 이후에 옷을 벗습니다. 옷을 벗고 탄압도 왔습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야당 국회의원이 됩니다.


이제 박정희 좌익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언론인 중에서 박정희에 대한 관심을 갖고 관련 저서를 많이 낸 사람으로 조갑제 씨를 들 수 있습니다. 조갑제 씨에게 박정희는 취재 대상이었다가, 현재는 푹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전제하더라도 조갑제 씨의 정치지향성과 관계없이 박정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책에 대한 공은 폄하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갑제 씨 책 가운데서도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간 데 대한 나름의 배경과 상황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고 싶은데요. 박정희에 푹 빠지기 전, 기자가 바라본 박정희에 대한 평가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구사범 재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만군장교 시절, 해방 뒤인 청년장교 시절에 걸쳐 일관되게 발견되는 박정희의 성격은 현실에 대한 불만, 기성질서에 대한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박정희에게 남로당은 하나의 유혹이었다.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반외세를 상징하고 있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박정희의 사상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그의 기질에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저는 조갑제 씨의 이런 평에 일부 공감합니다. 그래서 사상적인 빨갱이라기보다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주변 정황, 불만의 표출 방식으로 보이고요. 그런 측면에서 좌익에 빠졌다고 보는 결론에 동의하고, 이런 내용으로 박정희 좌익 이야기의 대미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조.JPG

박정희 덕분이다



김재홍 저는 조갑제 씨의 분석 중에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고 본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정희는 변신과 기회주의적 처신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존 질서가 무엇인가, 시대의 주류가 무엇인가를 보고 편승해 온 행태를 보였어요.


아까 얘기한 것처럼, 해방정국은 좌익이 주도한 정국이었어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면 군 내부에서 동기생인 이한림처럼 주류 장성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인사 불만도 있고, 그 때부터 주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같은 것으로 군사 쿠데타를 계속 얘기했지, 조갑제 씨가 얘기하는 것처럼 기성질서에 대한 반항이나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를 가져서 좌익 연루나 남로당 가입을 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박정희가 소학교 교사 이후 5.16쿠데타까지 걸어 온 길을 잘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도 우리 현대사를 보는 관점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군국주의 일제강점기에 교사에서 군 장교로,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에서 광복군에 가입하고, 귀국해서 조선경비대 장교를 하다가 적대진영인 남로당의 군사 프락치로, 특무대에 체포된 후 전향해서는 반공주의 좌익쳑결주의자로 또 변신을 했고요, 이렇게 상황과 시세에 따라서 입신양명과 생명보존을 위해서 변신을 거듭한 것 아닙니까. 이것을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의식이나 개혁의지로 본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5.16쿠데타 이전 박정희의 삶은 개인적인 진급 불만은 잠깐 가졌겠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보다는 현실 추종적이었고, 기성질서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것에 편승해 출세하려는 무리한 몸짓들이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정운현 저도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은 그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듣는 분들이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친위대 하나회



hnh.jpg

빠진 멤버를 Ctrl+V에 넣은 하나회의 꼼꼼함



정운현 박정희의 다른 것은 차치하고요. 성격이나 품성. 그런 것 중의 하나를 관찰한 바에 의하면 박정희는 아주 소심한 사람입니다. 겁도 많고요.


5.16 전 날 집에서 나와서 6관구 사령부에 가는 길에 청진동에 내려서 술기운을 빌리고자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김재춘 표현을 빌리자면 ‘술 냄새가 나더라’. 큰 일을 앞두면 누구나 긴장은 하겠지만 그런 모습이 있고요.


박정희는 검은 안경을 쓴 사진이 많습니다. 박정희가 시선 처리를 잘 못하기 때문이에요. 상대방 눈을 쳐다보고 기싸움을 해서 제압하거나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어요. 통 큰 리더십은 없었다고 봐요.



e68d0157bfbc99b5b7fe015ede76bd3b.jpg

시선처리 은폐의 또다른 예



아까 얘기했던 반혁명사건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5.16 때 본인이 주모자임에도 2인자인 척 하면서 장도영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 세웠단 말이죠. 박정희는 부의장을 하고. 그로부터 20일 후에 장도영이 의장 직을 사임합니다. 그건 본인 의사가 아닙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혁명 주체 안에서도 장도영 밑에 있던 평안도파가 있고, 박정희나 김종필 밑에는 영남파가 있어요. 이 사이에서 갈등이 있는데 엄연히 혁명 주체는 박정희니까 영남파가 기세등등하죠. 5.16 주축 세력은 육사 5기와 8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5기는 김재춘, 박치옥, 문재준 이런 포병 인맥들인데, 이들하고8기 김종필을 위시한 인맥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 나오냐면 ‘박치옥 등이 장도영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7월 3일 새벽 2시에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 이런 소문이 납니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갈등이 일어난 거죠. 이 소문 때문에 43명이 체포됩니다. 이른바 반혁명사건입니다. 군사혁명재판에 회부돼서 장도영에게는 사형이 선고되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됩니다.


이듬해 62년 5월 2일, 10개월 만에 장도영을 무죄가 아닌 형 면제로 풀어주고 장도영은 미국으로 도망가죠.


또 다른 사건으로 5.16쿠데타, 당시 혁명 세력은 2년 후에 원대복귀를 하기로 공약을 내걸었어요. 그 내용은 혁명공약 6항에 있는데, 63년 5월이면 2년이 되니까 원대복귀를 해야 합니다. 63년 2월, 만주군관학교 선배이자 5.16을 같이 한 김동하, 박임항 이런 사람들이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원대복귀를 해야한다고 압력을 넣습니다. 박정희는 조건부 민정불참을 선언했고 김동하, 박임항은 민정이양을 안 지키면 자기들은 빠지겠다고 합니다. 3월 12일,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김동하, 박임항을 반혁명사건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장도영도 끌어내리고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도 끌어내려서 완전히 권력을 차지하게 됐고, 이북세력 중심이던 군이 영남세력 중심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하나회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죠. 장도영은 평안도, 김동하와 박이만은 함경도 출신으로 북쪽 출신입니다. 알래스카가 미국 서북부에 있는 것을 빗대 이 사건을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표현합니다.



김재홍 그것은 5.16 비사인데 그런 것을 다루려면 끝이 없고요. 용인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김종필, 옥창호, 신윤창 이런 8기 쿠데타 주체 중에는 영남 출신이 없습니다. 아직 '하나회'를 결성하기 직전인데 하나회 세력들이 육사 8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자기들에게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거사를 진행한 것에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들이 영남 출신 선배인 박정희 장군을 보위하는 친위대로 가기 위해 하나회를 결성합니다. 초기에는 오성회였다가 칠성회, 일심회, 하나회로 확립되는 게 62~3년이고요. 박정희는 62년 말에 전두환 대위를 불러 민정이양을 앞두고 국회의원 출마를 종용합니다. 당시 국회의원 출마라는 것은 지역의 지지와 경제 기반과 명망가 집안이어야 하는데 전두환은 그런 처지가 못 됩니다. 후에 박정희를 만나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못한다고 하자 “국회의원 출마하지 못할 게 뭐가 있어? 차지철(대위)도 출마하는데!” 라고 하니까 전두환이 “각하! 군부 내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가 가만히 들으니 군부에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정계 진출 권유를 안 하죠. 그 때부터 전두환은 군부 내 박정희 친위대로서의 하나회를 키워가는 거예요.



ㅇㄹㅇㄹㅇ.JPG

우리는 한가족. 



하나회는 영남 출신 장교들의 비밀 결사였고, 구색맞추기로 비영남권을 한 두명씩 껴줬어요. 기수별로 11명 정도로 하나회를 결성하면서 영남일색으로 가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니 한 두명 정도 넣었죠. 그렇게 하나회가 된 사람이 장세동(전남), 고명승(전북) 등인데요. 전두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선후배였고, 근무를 같이 했죠. 그런 영남 군벌 하나회가 군부 내에서 박정희 친위대로 있을 수 있던 배경은 5.16 쿠데타 세력의 주축인 육사 8기에 영남 출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빈틈을 파고든 겁니다. 말하자면 동향 선배이고 모셔야 할 상관이니까 그 틈을 파고들어서 군부 내 친위대가 되었고, 이 하나회 집단이 끝까지 강력한 친위대 역할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용인술 첫 번째는 알래스카 토벌작전을 벌인 것이고, 두 번째는 육사 8기들을 일부 중용했지만 톱리더인 김종필 권력의 움직임입니다. 그 때만해도 김종필은 권력 2인자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2인자의 위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과정으로 가는 게 용인술로 볼 수 있습니다. 2인자의 자리에 영남군벌 하나회를 친위대로 키워놓습니다. 대체세력으로 키워가는 것이죠. 그 하나회가 10.26 이후에 자신이 모셨던 보스의 죽음에 대해 보복적인 수사와 처리를 한 것 아니겠어요. 보복 수사와 처리가 아니었다면 김재규가 전광석화처럼 처형당하기는 쉽지 않죠. 정승화 수사도 그렇고.


박정희의 친위대노릇을 하고,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의 주모집단이 바로 하나회입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시작된 세력으로 박정희의 용인술과도 직결돼 있지요. 육사 11기는 1952년 경남 진해에서 입학하고 55년10월에 졸업합니다. 11기부터 13기가 진해에서 입학하고 졸업한 '진해세대'지요. 6.25전쟁 중에 위험한 전선을 피해 후방 사관학교에서 공부했고 전쟁이 끝난 뒤 임관했습니다. 전쟁 중에 사병으로 있다가 육사에 들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노태우, 정호용이 그 케이스입니다.


육사 생도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하는 학구파와 그와는 다른 부류인 운동파로 나뉘는데 하나회는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영남 동향 출신 운동파가 모태입니다. 이들은 육사 재학 때 5성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육사 내 구매점이나 주말 외출외박을 함께 다닙니다. 그런데 졸업 임관 때 5성회 멤버 중 한 사람인 박병하가 같이 졸업하지 못했고, 그 후 7성회로 개편합니다. 이때는 엄연히 군 장교이므로 비밀 사조직은 군복무규정에 위배되는 행위지요.


7성회 때부터 장교들의 사조직 냄새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7성회 멤버는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인데요. 대위 계급이던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실권자가 영남 동향출신인 박정희 소장으로 드러나자 7성회는 연속적으로 사조직 모임을 갖습니다. 주로 전두환의 거처에서 모였는데, 당시 전두환은 서울 이규동 장군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7성회가 모임을 갖고 토의한 주제는 첫째로 자신들의 인사문제였고, 둘째는 세칭 ‘4대의혹사건’이었어요.4대의혹사건은 군사혁명과 육사 8기 민정참여파가 공화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자금 비리사건입니다. 그러면서 7성회가 다시 10명으로 확대하고 명칭을 한마음회, 일심회로 바꿉니다. 7성회는 기존 멤버에 더해 박정희 소장의 당번병을 하다가 육사에 입학한 박갑룡과 남중수, 노정기를 보태서 개편하고요. 12기 이하 후배 기수에서 각각 9~11명 씩을 선발하는데, 그 후 명칭을 하나회로 고정시키게 됩니다. 11기 하나회는 노정기를 제외하고 전원이 대구 지역과 부산, 마산 등지의 영남 출신이었어요. 완전히 영남 일색으로 하는 것이 안 좋아 보이니까 전두환이 당시 최고회의 경호실에 근무하던 노정기를 추천했는데 그는 전남 장흥 출신이어서 유일한 타지역이었던 셈입니다. 후배 기수도 그런 방식으로 비영남권인 호남이나 충청권에서 한두 명씩 끼워넣어서 구색맞추기를 한 것입니다.

 

 

  

 

 

 다음회에 계속...

 

 





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