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02. 18. 화요일

루저C








한국 사회의 노력 이데올로기

 

-그들이 우리를, 우리가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의 해부학

 






a0100600_4e47ae13cd668.jpg ㄹ열


 

믿거나 말거나

 

한국이 내놓는 수치 중 수십 년 동안 ‘세계 제일’을 기록하고 있는 게 있다면 아마 노동시간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부끄러운 기록일 수도, 자랑스러운 기록일 수도 있으리라. 내가 어린 시절, 열사의 땅 사우디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에게 현지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자랑스럽게 소개되던 기억이 난다.


중-장년층에게 장시간 노동은 대한민국을 과거 극빈국에서 오늘날 선진국 말석에 끌어올리기 위한 불가피한 일로 평가된다. 장시간 노동이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문화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도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노동시간만이 아니다. 학습 시간도 세계 최장이다.


미국 TV 프로그램 ‘믿거나 말거나’는 지구 각지의 기이한 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의 유사 프로그램으로는 ‘세상에 이런 일이’, ‘서프라이즈’ 등이 있다. 여기에 소개된 것을 한 번 보자.


눈의 이물질을 혀로 핥아 제거하는 여자, 얼굴과 몸 700곳에 피어싱을 한 사람, 200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되고도 살아남은 사람, 팔 다리 없이 수영을 해 호수를 횡단하는 소녀, 뇌의 절반을 제거하고 살아가는 여학생 등 기상천외하고 엽기적인 인물과 사건이 즐비하다.


바로 이 프로그램에 한국의 고등학교가 소개되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등교하여, 밤 10시까지 야자하고 하교하는 한국 학생들의 모습이다.

 

 

어릴 적부터 중장년에 이르는 수십 년의 생애 기간 동안 우리는 장시간의 학습과 노동에 시달려온다. 4당5락(4시간 수면 합격, 5시간 수면 탈락)이라는 한국적 사자성어가 명문대 입학의 필수조건처럼 제시된 지 오래다. 이런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웬만한 노력은 노력으로 치부되지도 않는다.

 

 

200611_hishcool_7847.jpg



 

‘참조틀’의 인플레이션

 

자기계발서가 롤 모델로 제시하는 인물들은 ‘믿거나 말거나’에 나올만한 경이적인 노력의 화신들이다. 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며 자기관리를 한다는 유수연 씨 등 각종 ‘미쳐라’, ‘독해져라’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급기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초인적인 인물도 자기계발서의 롤모델로 등장했다. ‘3억 5천만 원 전쟁’의 저자 이종룡 씨다. 그는 3억 5천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 하루 2~3시간만 잠을 자고 신문배달, 목욕탕 청소 등 10개의 알바를 뛰며 극한의 생활을 했다. 이런 사연으로 그는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한 이후 나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3억 5천만 원은 부동산 광풍이 일 때 버블세븐 지역에서 한 두 해 동안 오른 집값이며, 이 돈은 현재 서울 강북에서 30평대 아파트 한 채 값에 불과하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가족들과 단란하게 문화생활을 누리며 평범하게 돈을 모아서는 이러한 집을 갖는다는 것이 공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종룡 씨는 몸으로 입증한 셈이다. 가족과의 생활도 포기하고 수면까지 포기해가며 10년을 끔찍하게 살아도 사업 실패를 만회하지도 못한 채, 0원에서 겨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전율과 분노를 느꼈어야 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종룡 씨의 생활을 보며 부채 문제, 빈곤 문제 등 다양한 각도에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빚 문제에 대한 강박증과 일중독을 앓고 있는 이종룡 씨는 긴급 구제의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일중독은 성격도 강인함도 아니다. 체내에서 생산되는 아드레날린에 대한 습관적 중독 증세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사회 자체가 이미 노력에 대한 강박과 광기에 휩싸여 있는 한국에서 이종룡씨의 삶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모범이자 희망이며, 다소라도 여유를 부리려는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한다. 급기야 그는 자기계발의 당당한 증인으로 T.V 특강에까지 출연하여 시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 제시된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한국 사회는 미쳐도 너무 미쳤다.



1009.jpg



로버트 프랭크는 극소수의 수퍼 리치(super rich)의 소비형태가 사회 전반적인 소비수준을 상향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고 한다. 가령 수퍼 리치가 200평의 집을 살게 되면 그에 약간 못 미치는 계층은 150평 정도를 욕망하고, 그 아래 계층은 마찬가지로 100평 짜리라도 구입해야하는 압박감을 가져온다. 언젠가부터 중형차는 평범한 차가 되어버렸다. 수천 만 원에 이르는 핸드백이 즐비한 사회에서는 수백 만 원 정도의 가방이라도 갖추어야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다. 5백만 원이 넘는 과외비를 지출하는 부자들은 월 100만원의 사교육비도 평범하게 만들어 놓았다. 슈퍼리치의 소비는 ‘참조틀’로 작용하여 이렇듯 소비의 규모를 연쇄적으로 크게 확산시키게 된다.


슈퍼리치의 소비행태가 ‘참조틀’의 변화를 가져오며 물질적 소비를 주도해간다면, 루저에서 벗어나기 위한 슈퍼 노력파들의 분투기는 인내의 ‘참조틀’로 작용한다. 한 달에 한두 번 코피가 터져줘야 이제 노력을 했다는 대접을 받는다. 하루 10시간 노동은 그 이상의 중노동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 되어버린다. 3000만 원 짜리 중형차 소유자도 1억 원에 육박하는 고급차 오너에 비견되면 소박한 생활인이 되듯이, 일일 8시간의 공부와 노동도 그 이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면박거리가 될 뿐이다.




 


공산주의 노동 영웅과 자본주의 노력 영웅

 

스탈린 시대 소련의 탄광노동자 스타하노프를 생각해보자. 당시 6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1인당 평균 석탄 채굴량은 6.5톤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동안 스타하노프는 무려 102톤을 채굴하였다. 14배가 넘는 양이다. 거기에 그친 게 아니다. 이후 그는 175톤으로 다시 한 번 기록을 갱신했고 심지어 227톤의 신기록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공산당 정부의 조작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쨌든 스타하노프는 단박에 노동영웅으로 떠오르며, 노동착취를 고조시키는 훌륭한 선전감이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스타하노프 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다른 나라의 공산당 정부도 인민들의 노동을 수탈하기 위해 비슷한 운동을 벌였다. 북한의 천리마 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이 그 일환이다.


스타하노프.jpg



우리 시각에서 보면 공산당 정부의 그런 행태는 너무나 조악하고 유치하다. 비웃음과 조롱을 넘어 기괴하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다. 실제로 학창시절 윤리 교과서에 제시된 ‘반공을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새벽별 운동과 같은 공공연한 노동 수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북한의 노동 수탈을 조롱하는 한국 사회가 정작 ‘천 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조차 무색한 극한적 인내와 노력의 광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공산권 국가의 ‘노동 영웅’과 한국 사회에서의 ‘노력 영웅’은 완벽히 조응한다.


북한과 구공산권 같은 곳에서는 정부가 강압적 캠페인을 주도한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노력 이데올로기는 광고의 형태로, 자기계발의 미명으로, 사회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된다. 노력 이데올로기는 각 개인의 내면에 독가스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심리적 저항감을 무너뜨린다. 그 점에서 스타하노프 노력 동원 캠페인보다 훨씬 무섭고 소름끼친다.

 

 

IMF로 4억에 가까운 빚을 진 이종룡 씨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10여 년 동안 하루 2~3시간만 잠을 잔 채 열 개의 알바를 하는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강변하기를 사업에 실패하고, 빚에 허덕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삶이 본받아야 될 귀감으로 떠오른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그가 구술한 책(<3 억 5천만 원과의 전쟁>)에 대한 감동적인 감상평 몇 개를 보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일깨워주는 이종룡씨! 삶을 바라보는 태도, 일을 바라보는 태도, 빚을 바라보는 태도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36시간으로 알뜰하게 쪼개 쓰는 그 앞에서 긴 하루 나태하게 흘려버리는 나를 반성하게 된다.” - (꼬마악마)

 

“이종룡씨는 하루 7개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해 3억 5천만원의 빚을 갚은 사람이다. 취업 걱정,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 등 수 많은 근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 (owen20)

 

“좌절에 빠져 희망이 없는 사람들, 일상적인 매너리즘으로 게으름이 몸에 찌들어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사람들, 점점 좀비화가 되가고 있는 사람들, 핑계와 변명으로 오늘을 살았고 내일을 살 사람들, 지탱할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아 조금 지나면 망할 것 같은 사람들 그리고, 새 집과 새 차를 위해 대출을 받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 (hksfree)

 

“또한, 그가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잠시 일하는 곳이 아니라 '직장'이라고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 것.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할 때, 신문판촉을 할 때 등 자신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면 갈수록 실업자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에 이 책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일자리가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적성에 안 맞아서... 끊임없이 핑계만 대고 있는 배부른 사람들과 나약한 마음들에게 필요한 꼭 책이 아닐까.” - (providefor)

 

 

우리들은 극단적 노력파들과 비교하며 약간의 휴식과 안락함의 추구도 게으름과 나태로 변환시키고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이는 마치 기독교 원죄 의식에 버금갈 정도의 신앙적 형태로 굳어진다. 우리는 노력의 신 앞에 선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스스로 자본주의판 스테하노프가 되어간다.

 


14_163442549.jpg


 


 


자아비판이 일상화된 사회

 

시장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는 열등한 학벌, 사업 실패, 빈곤한 삶 등이 전적으로 개인의 몫과 책임으로 인식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스테하노프적으로 내면화된 규범은 자아성찰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그 기준에 미달되는 자신에 대한 일상적 자학이 생활화 된다. 이는 북한식 자아비판의 남한 버전이다. 북한에서는 소수가 시스템의 눈 밖에 난 대가로 자아비판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구성원 절대다수가 시스템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기 위해 자아비판을 한다.


타인의 실업과 빈곤, 체념, 히키코모리 생활 등은 나만큼 고생할 각오가 없고 나만큼 노력하지 않는 한심한 루저들의 행태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처지는 그에 합당한 형벌이다. T.V 프로그램 <동행>을 보라. 너보다 더 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열심히 살지 않느냐, 불평불만 늘어놓을 시간에 알바라도 한 개 더 할 생각이나 해라...


루저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인민재판은 이렇듯 언제나 주변 곳곳에서부터 열린다. 타인에 대한 손가락질만큼이나 자아비판도 내면화된다. 남이 나만 못한 게 그들의 책임이듯, 우월한 남보다 못한 나의 모습은 나의 잘못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노력을 해야 성공 혹은 루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준은 없다. 태양을 향해 무모한 비행을 하다 밀랍 날개가 녹아버린 이카루스처럼 저 높은 이상향을 향해 끝없이 도전해야한다는 명제만이 남을 뿐.


인간은 24시간 1년 열 두 달 내내 전력 질주할 수 없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적절한 휴식과 여가는 필수불가결하다. 기계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명문대 진학을 위해 10대의 삶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20대의 삶을 포기하고, 결혼과 주택구입을 위해 30대 생활을 포기하고, 노후와 자녀를 위해 40대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자기계발서의 채찍질을 보노라면 스테하노프 운동을 주창한 스탈린조차 혀를 내두를 것 같다.


다른 선진 국가에서 일벌레, 공부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노력을 경주한다 해도 한국에서는 아주 평범한 수준이다. 때문에 웬만큼 노력을 했다손 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노력을 탓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될 수밖에 없다. 왜 열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을까?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모자랄 판인데... 원하던 점수를 못 받았다면 방학 때 다소 나태했던 자신을 자책하기 바쁘다.

 


17c9d6de99e1985fe94492fab7d8572a.jpg





 

이데올로기에서 종교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제는 노력의 양 뿐만 아니라 질도 문제시된다. 아무리 노력을 쥐어짜도 하루 24시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노력을 대하는 태도까지 중요해졌다.


종교의 교리 뺨치는 황당무계한 이론을 설파하<시크릿>은 출간 8개월 만에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시크릿>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단순 황당 명쾌한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실패한 것은 부정적인 의심이 들어서이고, 성공하려면 무조건 잘 된다는 신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4년 동안 시크릿을 추종했던 한 블로거의 증언을 들어보자. (원문 : 링크)

 

“필자는 2009년부터 4년 동안 시크릿과 끌어당김의 법칙을 열렬히 추종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번번히 실패했지만 언젠가 이뤄질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살고 싶은 집과 원하는 연봉, 자동차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매일 보면서 소원이 이뤄진 모습을 상상했다. 실패가 반복될 때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책들을 더 구입해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하지만 ‘소원이 왜 이뤄지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그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고, 소원이 이루어지려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시크릿은 정말로 종교와 비슷하다. 종교인들은 병에 걸린 신자가 병에서 나으면 그들이 믿는 신 덕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병이 낫지 않아서 신자가 죽으면 신자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의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크릿도 마찬가지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면 시크릿 덕분이지만,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독자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퇴행하는 한국인들,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우리

 

시크릿 열풍이 불자 그에 편승하여 ‘긍정의 힘’류의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문제가 사회화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섬뜩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의제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부로 해소되지 않는 분노는 자신의 몸을 찌른다. 우리는 자학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우리가 자학적이라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한윤형, 최태섭 등이 공저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 소개된 박카스 광고 류의 ‘열정 팔이’를 보자.

 

 

“중소기업에 취직한 청년이 출근을 하며 ‘작은 회사에요’라고 말하자 ‘가서 크게 키우면 되지 뭐’라고 담담하게 대꾸하는 구멍가게 아저씨, 제비뽑기로 당직에 당첨되자 ‘그래 내가 아니면 회사는 누가 지키냐!’라고 말하며 멋지게 박카스를 따는 여사원, 외국 거래처와 통화를 위해 꼭두새벽까지 회사에 남아 있다가 옆 건물의 야근자에게 ‘힘냅시다!’를 외치는 오지랖 넓은 신입사원 등이 추가로 광고에 등장했다. 오리엔테이션을 떠나는 대학생을 부럽게 바라보며 의지를 다지는 재수생...”


“박카스의 광고들이 다룬 사안들은 하나같이 민감한 것들이었다. 청년실업, 장시간 노동시간, 여성노동, 학벌 사회, 불안정 노동 같은 문제들은 그저 ‘힘내자’라는 말로 얼렁뚱땅 무마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열정’, ‘젊음’, ‘도전’과 같은 이 행사를 수식하는 단어들의 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행사를 통해 얌전히 ‘길들여진다.’ 열정은 넘치지 않아야 하고, 도전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젊음은 무모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열정의 대상으로 허락되는 것은 더 이상 세계나, 사회, 혹은 타인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 뿐이다. 그래서 심화되는 ‘자기 혹사’의 몸짓들은 치열하게 살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개인들을 양산한다.”

 

 

‘열정’, ‘젊음’, ‘도전’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동기의 실체는 내면화된 자아비판이다. 이는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의 독재적 권력에 순응하고 열광했던 피학적 모습보다 더 퇴행적이다. 시스템의 좁은 우리에 갇힌 한국인들의 습관적 자학은 피학적이라기보다는 자폐적이다. 계속해서 철창을 핥는 기린이나 끝없이 좌우를 반복해 걷는 여우 등 동물원 환경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동물들의 ‘정형행동’과 비슷하다. 부정적 상태를 긍정하는 것은 긍정이 아니라 속임수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산다.


iStock_000019470171Small.jpg



비상구가 없다?

 

오로지 개인의 경쟁과 노력, 열정의 광기가 사회 구성원들 삶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한국 사회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지독한 냄새가 밴 공간이라도 오랫동안 머무르면 후각이 무뎌지고 불쾌감을 못 느끼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미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 적응이 되어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미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 후세대에 못할 짓이다.


이 대목에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말한 명언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정상적인 것은 미친 것과 같다. 그리고 가장 미친 짓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만 보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는 보지는 않는 것이다” - (돈키호테)

 

 

시크릿의 영성 캠프에서 영성을 시험한다고 뜨거운 한증막에서 2시간 동안 의식을 치르다가 3명의 남녀가 목숨을 잃었다. 박카스 국토대장정에서 한 젊은이는 열사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하루 두 시간만 자며 10개의 알바를 하던 극한의 노력 영웅 이종룡씨의 죽음은 1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219181705_a67550ffc717d04d9b22c0a334fa0124a5352ca98c8b1482.jpg



 

...to be continued 




추신 : 댓글은 샅샅이 읽고 있다. 일일이 댓글을 달 수 없는 상황이라 안타깝다. 제기된 문제 의식, 의문점 등은 기사로 한큐에 몰아쳐 정리하겠다.    

 

 

 

 


루저C


편집 : 꾸물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