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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의 첫 번째 모교는 10살에 입학한 돔 김나지움이다. 돔 김나지움의 관계자들은 니체의 뛰어난 언어능력에 감탄했다. 학교 당국은 훗날 대학자의 모교가 될 희망에 부풀어 니체를 아꼈지만 한낱 꿈이었다. 니체는 얼마 못 가 드러누웠다.


니체는 2년 만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통과 안통(눈의 통증)에 시달렸다. 이 증상은 결국 두개골 내의 압력이 높아진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혈관이다. 어릴 때부터 뇌 속의 피가 원활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니체는 여자들의 간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니체의 번득이는 두뇌는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일어권에 있는 학교들은 이 신동을 유치하기 위한 암묵적 경쟁을 시작했다.


니체는 집에서 음악을 작곡하고 50여편의 시를 썼다. 그리고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창작물을 냉혹하게 비평했다. 창작자 지킬과 비평가 하이드인가? 이러한 냉정한 거리두기는 어른들도 힘들다. 하물며 어린아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흔히 창작을 출산에 비유한다. 결과물은 내 새끼다. 거기서 벗어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니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는 '비범'했다.


니체는 2년 만에 두통과 안통에서 벗어났다. '슐포르타'가 그의 입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슐포르타는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던 최고급 사립학교였다. 독일의 민사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슐포르타는 개신교 미션스쿨이자 기숙학교였는데 미래의 엘리트 목사도 키워냈지만 명문대학 진학률도 굉장했다.


슐포르타는 니체에게 전액장학급을 보장했다. 이렇게 14살의 니체는 기숙생활을 시작했다. 교사들은 니체의 독일어 작문실력에 매료되었다. 니체의 문장은 아름답고 웅장하며 계시적이다. 그런데 뇌질환을 물려받은 니체의 머리는 금방 피로해졌다. 끈기있는 분석과 치밀한 계산은 니체를 드러눞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인지 니체는 철학자 치고는 특이하게 수학 실력이 별로였다.


공부 잘 하는 아이 반장 시키듯, 슐포르타의 교사들은 니체를 선도부장에 임명했다. 니체의 임무는 공부 안 하고 딴짓하는 학우들을 감시하고 보고서의 형태로 일러바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딴짓'은 불성실함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활동이기도 하다. 공부는 어른들의 명령에 의해서 하지만 딴짓은 주체적인 일탈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딴짓거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한다.


니체의 보고서는 그의 천재적 문학성을 보여준다.


“강당에서 깜빡깜빡하고 있는 램프들이 너무 흐려서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불이라도 빛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선생들은 경악했다. 엄숙한 보고서에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시 독일의 학교에는 구타와 기합이 흔했다. 하지만 때려봐야 몸이 약해 드러누울 거고, 남의 딴짓을 자신의 딴짓으로 보고했지만 문학적으로는 훌륭하지 않은가?


선생들은 니체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미션스쿨이랍시고 학교 안에 종교재판소가 있었던 것이다. 판결 결과는 징역 3시간에 집행유예 몇 주. 즉 세 시간 감금과 외출 몇 번 금지가 전부였다. 니체야 한가롭게 작곡이나 시를 쓰면 될 일이었다. 아마 학생들을 겁주려고 종교재판의 형식을 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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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청소년기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아버지의 부재와의 사투>. 소년에게 아버지는 군주다. 모방의 대상이자 반란의 과녁이다. 남성 모델이 없는 성장환경 속에서 니체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대체할 권위를 찾았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다. 니체가 종교를 아버지의 대체제로 선택한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기독교의 교리와 윤리학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 절박하게 도움을 요쳥했지만 그는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니체는 아버지와 사별한 쇼펜하우어처럼 기독교와 결별했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사고였지만 니체에게는 졸업이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이미 직관했다. 종교는 우상이다!


비교해보자.


피조물(크리에이쳐)이 조물주(크리에이터)를 섬기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이상하다. 니체에게 모든 종교는 토템이었다. 자신이 깎은 토템에 절을 한다. 그 자체는 참으로 기괴하지 않은가?


니체가 생각하는 인간은 포이에르바하 식으로 말하면 '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창조된 신은 우상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를 돕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신이자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훗날 <우상의 황혼>과 그 이름도 파괴적인 <안티크리스트(반그리스도)>를 통해 기독교 삼위일체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사슬에 풀려 자유로이 드러난 실체는 '인간 예수'다. 끊임없이 치열하게 스스로를 넘어선 한 인간이 거기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거짓의 포장지에 가둬두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최초이자 최후의 그리스도교인이다."


슐포르타를 졸업하자 라인강을 굽어보는 명문 본 대학교가 전액장학금을 준비해 두고 그를 기다렸다. '언어에 그렇게 뛰어나다며?' 본 대학은 니체를 고전문헌학과에 불러들였다.


고전문헌학은 말 그대로 과거의 학문과 저술의 참뜻을 복원해내는 일이다. 서양 근대의 모토가 '그리스 - 로마로 돌아가자'였음을 상기하면 얼마나 중요한 학문이었는지 알 수 있다. 고전문헌학, 비교문헌학 등 문헌학은 천재들이 활개치는 인외마경이다. 고문서 하나를 제대로 읽고 싶다는 이유로 3개국어를 아무렇지 않게 마스터하는 인간들이 설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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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대학에서 니체는 은사이자 당대 최고의 문헌학자인 리츨을 만났다. 리츨은 니체의 재능에 아연실색했다.


"천재란 이런 것이다"


"모든 젊은 문헌학도의 우상이다."


니체는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문헌학의 미래로 예약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문헌학의 미래'를 사창가에 끌고 갔다.


속된 말로 '총각 딱지를 떼어줘서' 어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심보는 동서고금 보편적인가 보다. 어찌어지 끌려간 니체는 매춘부를 손으로 건드리지도 않았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서 사라졌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형연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여성에게 성욕을 의탁하는 게 환멸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여성의 케어를 돈으로 사는 건데, 그는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에게 둘러 쌓여 온 삶이 항상 고민이었다. 한 마디로 지긋지긋함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결과가 아닐까?


친구들이 니체를 끌고 간 업소는 고가품인 피아노가 있는 곳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매춘부가 있고, 손님이 생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꽤나 고급 업소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명문대학 학생들의 용돈 사정이 풍족했음을 알 수 있어 재미있다. 편모가정 장학생인 니체에게, 자기들 딴에는 한 턱 쏘려는 심산이었나 보다.


사창가 도주 사건만 보면 니체가 겁장이 같다. 그런데 니체는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남성성의 결핍을 진짜 마초적인 활동으로 메우고 싶었다. 결투였다. 당시의 독일은 결투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도 주먹싸움이 아니라 칼싸움이었다.


니체는 진검 결투에 심취한 탓에 용돈이 고갈되었다. 진검은 값나가는 수제품인 데다가 관리하는 것도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돈 잡아먹는 하수구였다. 그런데 의외다. 유럽의 결투문화에서 승부는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칼에 베이거나 찔려 피가 나야 끝난다. 그런데 니체는 다쳤다는 기록이 없다. 모두 이겼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어릴 때 병약했던 이들이 격투에 뛰어난 경우가 많다. 아마도 상대를 파악하는 관찰력과 침착함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투의 세계를 겪어본 니체는 금새 흥미를 잃어버렸다. 결투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편이 자연스럽다.


결투보다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니체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다. 쇼펜하우어였다. 대학생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지적 희열에 휩싸였다.


"쇼펜하우어! 저 활기에 넘치는 어두운 천재..."


그렇다.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홀로서기이며 순간순간이 치열한 실존이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만난 적 없지만,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두 인물을 사제관계로 부른다. 운명은 예고없이 다가와 인간을 시험에 빠트린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넘어섬으로써 쇼펜하우어를 완성하는 운명과 조우했다.


인간을 국가라고 치면 운명은 미수복 국토다. 과연 니체에게는 정복자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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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편



쇼펜하우어의 삶1 : 아버지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2 : 어머니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3 : 헤겔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4 : 무명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5 : 강아지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6 : 인간의 그늘


니체의 삶1: 인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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