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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컴플렉스는 무서운가 보다. "너만 없으면 내가 전교 1등이야" 외치며 1등을 밀어 떨어뜨리는 2등의 서사는 괴담의 형태로 많이 유포돼 있다. 나는 1등도 2등도 없어서 모르겠다만. 1 니체에게는 그의 뒤를 시기 어린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2등이 있었다.


울리히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 1848 . 니체의 4 후배다. 어려서는 신동, 자라면서는 천재로 각광받던 그는 하필이면 니체가 다녔던 사립 슐포르타와 대학을 차례로 입학한다. 그도 머리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천재다"


하지만 같은 학교였던지라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겪어본 이들이었다.


"... 그런데 니체만큼은 아니네."


하필이면 묄렌도르프의 재능도 고전문헌학에 있었다. 4 많은 니체의 뒤만 쫓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분석하고 정리한 내용을 니체는 마디 문장으로 해결했다. 니체는 그에게 닥친 절벽이었다. 차라리 묄렌도르프가 천재가 아니었다면 니체를 사랑하고 따랐으리라. 절대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2인자는 행복할래야 행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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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에게 1등은 세계이자 전체다. 하지만 1등은 2등을 신경쓰지 않는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이라는 학계는 물론 기독교, 유럽, 근대문명, 인간 이성의 뿌리를 적으로 설정했다. 묄렌도르프가 니체라는 늪에 빠져 홀로 허우적거리던 니체는 홀로 출사표를 던졌다. 기념비적인 비극이 탄생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니체는 대학 시절부터 고전문헌학의 성격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문헌학 족속들. 두더지 같은 것들. 그들은 인생의 참되고 시급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니체에게 있어 학문은 지금의 삶을 밝혀내야 하는 도구인데, 주객이 전도되어 삶을 바쳐 과거만 파고 앉았으니 종종 견딜 없었다.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도 현재를 위해 행해져야 하는 아닌가? 단지 과거의 몇몇 구절에 사로잡히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의미는 있다. 학문은 전체가 거대한 분업 시스템이다. 쪽에 '두더지' 있어야 채굴할 수가 있고 다른 쪽에서 활용할 수가 있다. 하지만 니체는 두더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책을 통해 철학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비극의 탄생>, 니체의 철학 저술이자 마지막 고전문헌학 저술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고전문헌학의 형식으로 철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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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야, <비극의 탄생> 명백한 철학서임을 안다. 그러나 당대 고전문헌학의 1인자가 책은 고전문헌학 서적으로 오인받을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의도적으로 엄밀한 고증과 분석을 흐트러뜨리고 그리스 고문서의 구절들을 편의에 맞게 짜집기했다. 물론 오류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문장만 봐도 명백하다.


"예술의 진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통찰하는 그치지 않고 직관에 의해서 확신할 수만 있다면, 미의 학문에 대한 많은 것을 얻게 것이다."


<논리적으로 통찰하는 그치지 않고 직관에 의해서 확신할 수만 있다면세상을 관찰해 특정한 에센스를 추출해내고, 그걸 위해 밖의 것을 뭉개버리는 것은 시의 방식이다. 그가 태생적으로 시인임을 보여준다. 또한 서문을 통해 니체는 책을 학자가 아닌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학계의 반응은?


마디로 " 말을 잃었습니다."


스승 리츨 아니라 모든 학자들이 아연실색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적 차원에서는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비판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틀렸어야 집어 비평할 아닌가? 니체를 고전문헌학의 세계로 끌어들였지만 그를 놓쳤던 대학에서는, 니체의 학우였던 우세너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이와 같은 것을 사람은 누구든지간에 학자로서 끝난 셈이다.”


만년 2 묄렌도르프. 그는 니체가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는 모두가 읽다가 던져버린 <비극의 탄생> 탐독했다. 이거 틀렸잖아? 그는 <비극의 탄생> 조목조목 비판하는, 그리고 훨씬 두꺼운 책을 냈다. 어차피 틀린 틀렸는지 하나하나 논증해야 하니 양이 불어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다른 학자들처럼 비평할 가치도 없다고 하면 모를까, 그걸 구절 구절 모두 논증한 것이다.


묄렌도르프의 작업은 외침이었다. "고전문헌학 원로님들, 여기 묄렌도르프가 있습니다! 니체는 잊어주십시오!" 이렇게 고전문헌학계의 1인자이자 유일한 천재가 되는 성공한다. 성공은 하는데, 사실은 니체가 비켜준 거였다. 물론 자기가 쟁취했다고 주장할 있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비극의 탄생> 비판한 거겠지만.


묄렌도르프의 욕망은 너무나 투명해서 보는 사람이 창피할 정도다. 니체를 비판한 책의 제목이 <니체 비판> 아니라 <고전문헌학(혹은 고전철학) 미래>. 제발 자기가 미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제목으로 쓰고야 말았다.


“(니체가 말하는 의미에서라면)나는 기꺼이 디오니시우스의 제물이 되겠다.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 욕의 대명사라 한다면, 나는 욕을 기꺼이 듣겠다.”


자기가 자기한테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이라니. 거기다 문장은 묄렌도르프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적이 아니라 서양문명의 원류를 뜻하는 상징일 뿐이다.


묄렌도르프의 바람과 반대로 니체는 그와 투쟁한 적이 없다. <비극의 탄생> 기점으로 이미 니체는 철학으로 넘어갔다. 니체는 묄렌도르프를 의식하지도 않았고 언급도 했다. 이미 관심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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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


니체는 1900년에, 묄렌도르프는 1931년에 죽었다. 니체가 요절할 때쯤 그는 이미 인류 정신의 미래로 제시되고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죽을 때까지 30 넘게 니체가 고전문헌학 정도가 아니라 서구 정신문화의 미래가 되어가는 모습을 길게 바라보다가 죽었다.


니체는 정신병에 걸릴 때까지 유럽 사회가 자기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좌절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사실 자신도혹시?’ 하는 기대만 있었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알고 감수한 고독이란 말씀. 실제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이해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략 년으로 계산했다.


그런 면에서 니체의 결단은 실존적이다. 이미 알고 있는 무시와 몰이해, 고독 속에 자신의 삶을 던져버렸다. 주체적으로 선택한 비극이랄까.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 어떤 책인가?


책은 서구문명의 뿌리깊은 도그마를 어떻게 파괴할 선언한 출사표다. 서양문명은 이원론에 입각해 있다. 기독교로 보면 완벽한 하나님 나라와 지저분한 인간세상, 철학적으로 보면 형이상학의 세계와 물질세계로 나뉜다.


형상과 질료, 이데아와 그림자세계, 천국과 현실, 영혼과 육체, 이성과 비이성, 원인과 결과, 존재근거와 인식근거, 말씀과 실천, 로고스와 비로고스, 원의 수학적 개념과 현실에서는 어쩔 없이 약간은 비뚤비뚤 그려진 불완전한 원형...


그러나 인간의 존재와 삶도 이원론으로 설명될 있을까? 비극은 부조리다. 내용도 그렇거니와 관객에게 슬픔과 스트레스를 준다. 인간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쌓아올린 것을 파괴하고픈 충동 역시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러한 사실을 선선히 인정하고 예술을 직시할 비극은 탄생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원론의 틀을 뒤집기 위에 어쌔신 크리드가 되기로 결정했다. 암살을 위해 과거로, 과거로 추적해 들어갔다. 타격 대상은 그리스 삼인방. 바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였다. 물론 원죄는 1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있다.


모든 것은 메타포다. 니체의 암살은 사실 소크라테스를 부정하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서구정신사상의 이원론적 프레임이 놓친 것을 복원하려는 작업이다.


니체의 궁극적 목푠는 '인간성 회복'이었다.


여기다 대고 묄렌도르프는 소크라테스 욕하지 말라며, 자기는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겠다고 으름장을 놨으니 니체 입장에서는 아웃 오브 안중일 수밖에... 하지만 묄렌도르프의 행동도 니체의 제목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니체는 점점 과감하게 경구가 가득한 시적인 문장의 책들을 내놓게 된다. 그에게는 철학도 예술이어서, 세상에 던지고 나면 뜯어서 해석할 사람은 널렸다. 실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20세기 프랑스 철학은 니체가 던진 돌에 옹기종기 달라붙은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니체가 정신이 나갔다고 믿었지만 그는 여전히 바젤대학교 정교수였다. 문제는 두통과 안통이 엄습하는 날이 잦아진 .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부쩍 쇠약해졌다. 정신을 놓는 순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픈 머리 때문에 이해할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니체가 시적인 문장으로 철학적 분석을 대체한 것에는 건강 문제도 있다고 본다. 니체의 머리는 금방 피로해졌다. 그럴수록 직관과 확신, 그리고 타고난 문학성으로 철학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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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삶1: 인간의 탄생

니체의 삶2: 남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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