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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안 

 

아름다운재단이 편집부를 방문했다.

 

‘제보자들의 삶이 비참하다. 그들을 돕고 싶다‘

 

공익 위해 용기 냈던 제보자와 활동가를 돕기 위해 ‘광고하고 싶다’는 제안이다.

 

거절했다. 광고비, 어차피 많이 안 줄 거니까. 역제안 했다. 그 분들 다 만나보자. 힘들 거란다.

 

왜.

 

제보자의 용기는 사회에 득이 된다. 조직의, 사회의 변화 가져온다. 많은 이들이 혜택 입으나 그 변화에서 한 사람은 제외된다. 조직에서, 사회에서 배제된 후니까. 흔한, ‘배신자의 최후’다. 좌우 무관, 밥그릇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상사. 이윽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자. 

 

그런 경험 가진 이를 다시 불러내는 건 잔인한 일이다. 해서 더욱 예의 갖추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기록으로.   

 

그들은 왜 그런 선택 하는가, 이후의 삶은 어떤가.

 

아름다운 재단과 딴지 편집부가 조인, 감히 허락 구해보기로 했다.

 

 

1. 생존자의 짐 

 

대략 6년 전이다. '홍석동'이라는 납치 피해자가 있었다. 본지는 그의 부친과 첫 통화를 시작으로 몇 년간 필리핀 납치단을 쫓는다. 피해자는 생각보다 많았다. 가해자는 생각보다 잔인했다. 당시 사건은 한 생존자이자 제보자로 인해 급진전을 맞는다. 

 

 

 

간만에 그를 만났다. 장소는 본지 사옥. “백”이 백명주 씨, “죽”이 죽지않는돌고래 본인이다. 

 

죽: 이제 오랜 과거 같네요. 마지막 인터뷰 했던 게... 

 

백: 2012년. 최세용 일당이 본격적으로 한국 언론에 나올 때쯤, 딴지일보가 집요하게 최세용 일당을 괴롭혔잖아요. 평소대로 딴지를 읽다가 “어?”, 하고 연락하려는데...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컴퓨터 코드를 뽑았어요. 코드를 뽑으면 내가 연락을 못하겠구나하고.

 

죽: 어머니는, 휘말릴까봐.

 

백: 어머니는 보복을 두려워했어요.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 잡힐려면 벌써 잡힐 놈들이다. 어머니는 반대했고, 난 어머니 몰래 딴지하고 인터뷰를 했지요. 그땐 그렇게 반향이 커질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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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이다. 첫 만남에서 그는 말했다.

 

‘피해자는 훨씬 많다. 나를 보고 누구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얼굴을 내어도, 실명을 써도 좋다. 그래야 사람들이 용기낸다.’

 

 

죽: 지금 와서 묻는 게 뻔뻔하지만... 얼굴을 공개하고, 실명을 내고. 그 심리의 기저가 궁금합니다.

 

백: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라 나는 피해자 인데, 왜 내가 숨느냐, 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헌데 딴지일보에 기사가 나간 후에 너무 많은 곳에서 연락 와서 놀랐어요. 케이블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 까지. 깜짝 놀랐어요. 

 

김창규 기자는 계속 그거에만 매달렸잖아요. 갑자기 어지간한 언론에서는 다 연락이 왔는데 몇 군데 취재를 응하긴 했어요. 대부분 잠깐 관심을 가지고 말았는데...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 행위가 중단되는데 일조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너무 많아서... 특히 홍석동 부모님이나 윤철완 부모님도 바로 만나고 싶었는데...  그땐 너무 미안해서 못 만나겠는 거예요. 

 

‘나’는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백: 가끔 다른 생존자들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다가도 문득... 살다가... 이 일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가 너무 많아요.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성폭행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니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으니까 그랬지.’, ‘누가 밤 늦게 다니래?’. ‘니가 따라 갔으니까 그렇지’. 이런 식의 얘기가 저한테도 먹히는 거예요.

 

‘까불고 다니니까 니가 납치를 당했지’, ‘니가 그러니 어련히 알아서 표적이 되었겠니’. 이런 시각들 때문에 지나온 시간이 괴로웠어요. 그 일이 계속 나를 괴롭힙니다.

 

 

 

2. 이후의 삶

 

죽: 딴지와 인터뷰하고, 여러 매체에 나왔고. 그 뒤론 어떻게 지내셨나요?

 

백: 한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내 생활 터전이 중국에 있었으니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학교 생활을 했어요. 학교에서 일하면서 한국이랑 동떨어진 생활을 했죠. 저 스스로도 잊고 살았어요.

 

죽: 검사, 형사들이 백명주 씨 전화번호를 많이 물어봤는데. 

 

백: 잊고 살다가 검사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사건 담당이... 부산이었나요?

 

죽: 마지막에 사건이 다 부산으로 합쳐졌어요.

 

백: 부산경찰청에선 필리핀 동행을 하자고 요구했어요. 나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다니던 학교에다 며칠 휴가를 신청해서, 필리핀에 갔다 왔어요. 가족도 모르게. 왜냐하면 분명히 반대할 게 뻔하니까. 다 끝난 사건에 엮이는 거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경찰이 그렇게 말했어요. 마지막 단계에 걸려있다. 최세용 일당을 다 잡았는데, 얘기를 안 한다. 생존자들 몇 명은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끊는다든지 수사 협조를 잘 안한다.

 

죽: 그 분들 트라우마가 엄청나요. 어떤 분은 지나가는 봉고만 보이면 소름이 돋고. 어떤 분은 남자 몇 명만 모여 있어도 손이 떨리고.

 

백: 그래서,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죽: 그땐 살인에 대해선 아직 인정을 안 할 때였죠. 증거가 없으니까...

 

백: 네. 계속 부인하고 있다고 형사가 얘기 했어요. 자기네들이 납치해서 돈을 뜯었다, 까지는 얘기 하는데, 누구를 죽였네, 누구를 살해해서 유기했네, 이런 거는 하나도 인정을 안 하고 있다고. 내가 들은 것도 있는데. 다른 피해자들 가방을 본 것도 있어서 수사관들과 동행해서 필리핀에 간 거예요.

 

죽: 자신이 납치된 곳. 그런 곳을 다시 찾아가는 감정이란 게...

 

백: 그 장소를 가니까... 동네 입구에서부터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요. 정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 집을 지목했어요. 몇 년 만에 갔는데, 제대로 본 집도 아닌데, 다시 그 동네를 가니까 자석같이 확 붙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저 집이라고. 차를 세우라고, 기분이 이상해요.

 

죽: ...

 

백: 거기서 사진 찍고. 나중에 뉴스 보니까 그 집을 파고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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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장소에선 증거를 찾지 못했다. 입을 닫고 있던 납치단 막내 뚱이가 같은 교도소 재소자에게 말한 내용을 근거로 홍석동 씨와 다른 피해자의 시신을 발굴할 수 있었다. 백명주 씨는 여러 노력으로 다른 피해자 가족에게 ‘위안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생사를 모르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희망이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백: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최세용 면회를 한번 가볼까 생각했어요. 김창규 기자는 그때 어땠나요?

 

죽: 최세용이 태국에서 잡힌 후에 본인이 제가 뭘 '알고있다'고. 의미는 모르겠는데 지목해서 불렀어요. 가지 않았어요. 범인들이 다 잡히고 난 후엔... 피해자 가족 분들도 그렇게 하길 원치 않았고. 그래서 잡힌 후엔 오히려 거의 기사를 안 썼고. 그때부터는 경찰, 검찰이 할 일이니까. 잡고 난 뒤까지 나서면 개입이 되는 거잖아요. 

 

백: 그럼 그때 끝낸 건가요?

 

죽: 편지는 계속 주고받았어요. 당시엔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아서. 어느날은 탄원서를 써달라고 편지가 왔어요.

 

백: 아니, 탄원서를 어떻게 써주나.

 

죽: 나도 그 심리가 잘 이해가 안 가요. 자기가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탄원서를 써주면 좋겠다고. 아직 알아야 할 게 있으니까 고민했어요.

 

최세용, 김종석, 김성곤이라는 살인납치단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최초에 최초의 납치단 멤버였던 분이 있는데... 오랜 기간 죄값을 치루고 회사로 저를 찾아 왔어요. 이따금 한 번씩 만나는데, 이런 편지가 왔다, 제가 상의를 구했는데 그분이 연락하지 말래요.

 

혹시 이유가 있냐, 하니까. 감옥 안에서 최세용 끈이 다 떨어졌을 거다. 바깥에서 기자나 이런 사람들 연락이 오면 감옥 안에서 본인 가치가 올라간다. 잡히고 나서도 자꾸 기사가 나가면 더 그렇다. 그래서 꼭 해야할 일이 아니면 안 하는 게 좋다. 홍석동 씨 장례식 때 경찰 간부도 몇 왔는데 같은 이유로 저랑은 안 만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백: 최세용 급이 올라가는 거죠.

 

죽: 그 말이 기억에 남아요. 계속 연락하고 기사 쓰면 다 불행해질 거다. 그래서 연락 안 하는 게 맞겠다. 일리가 있는 거예요. 안에서 10년쯤 있던 사람이니 저보다 심리를 잘 알겠죠. 그래서 저도 연락을 끊었어요.

 

백: 안에서 자꾸 위상이 올라가죠. 거기선 계속 주목받고 있는 사람이 대장이니까. 그 안에서는. 끈이 떨어지면 정말 청소해야 되고. 그럼 이제 다 밝혀낸 건가요?

 

죽: 윤철완 씨는 못 밝혀냈습니다. 아직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윤철완 씨 부모님과는, 백명주 씨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간상, 백명주 씨는 윤철완 씨가 사라진 직후에 납치된 피해자다. 

 

아직 윤철완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3. 낙인

 

죽: 오늘은 계속 힘든 질문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일이 가장 괴로웠나요?

 

백: 일종의 낙인이예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관계자라는 낙인. 그거인 거 같아요. 난 피해자인데도 그 사건에 관계되었던 사람이다. 사람들이 나를 정면으로 보지 않아요. 째려보는 거 같아요. 가깝게 오지 않아요.

 

죽: 납치를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 협조했는데... 그 일들이 백명주 씨의 삶에 약점으로 작용했다는 말인가요? 

 

백: 저로선 결단을 내린 거였는데. 어느 순간 제가 손가락질 같은 걸 받고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이 그 사건 피해자였대. 마치... ‘화냥년’ 이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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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여성은 약 50만명. 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으로 환향녀(還鄕女)라 불렸다. 사람들은 고생한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대신, 적지에서 성노리개 노릇하고 온 더러운 계집이라 욕했다. 그들은 적지에선 적에게, 고향에선 가족에게, 죽을 때까지 수모당했다.

 

죽: 죄송한데 지금 하는 일을 밝혀도 될까요?

 

백: 교육 쪽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런 사람이 무슨 교육계에 접근을 하느냐는 거죠.

 

죽: 이해가 안 되는 게, 납치 피해자가 그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냈는데, 이걸 비난한다, 라는 거지요?

 

백: 저는 나쁜쪽으로 포장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운동선수 출신, 한국 최초의 ‘섹스샵 사장’, 그리고 해외를 떠돌며 사람을 무차별로 납치하고 살해했던 이들과 있었던 사람. 교육적인 거하곤 연결이 하나도 안 되는 거지요.

 

누군가에게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야구선수 출신의 입시 상담가’가 아니다. ‘공부는 안 하고 운동만 해서 자격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그는 ‘콘돔 편집샵으로 대박 낸 청년 사업가’가 아니다. ‘아이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섹스샵 사장’ 이다. 누군가에게 그는 ‘살인범들에게 납치당했음에도 살아 돌아와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뛴 사람’이 아니다. ‘당할 짓을 했기에 당한 사람’이다.

 

백: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나쁜 로또에 걸린 거라고. 확률적인 거지요. 누구나 납치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작정하고 나를 타겟으로 삼으면 누구든지 납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최세용 일당한테 납치된 사람들은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언론에 그나마 이름이라도 나온 분들 중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공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윤철완 씨가 있고 홍석동 씨도 성실하게 일하던 직장인이었어요. 고인이 되신 분들, 피해자 분들은 다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그냥 그 사람들이 타깃을 잡으면, 납치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납치된 게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이쪽에서 사람들이 그런 시선을 가져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고, 떠들어 대요. 내 과거가 재미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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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다 

 

죽: 새로 일을 시작한 후에 가장 힘들었던 건 뭔가요. 백명주 씨가 일하는 웹 사이트에 들어가서 악플은 쭉 봤는데... 살인범들과 호형호제한 사람이 교육계에 있을 자격이 되는가... 라는 글부터. 

 

물론 훨씬 다양하고, 악의적인 어투, 상당한 양이었다.   

 

백: 그 사실을 약점 잡아서 나를 공격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람이 다른 상대를 비난하는 데는 정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누군가는 편하겠지만 누군가는 그거 때문에 죽을 수 있어요. 굉장히 간단하게. 실제로 그 대상이 돼 보니까 울화통이 터져요.

 

그때 알았어요. 일부의 사실과 대부분의 허위를 섞었을 때 정확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마치 전부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누군가 논리적인 것처럼 글을 쓰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요.

 

반박을 제대로, 제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습니다. 왜 반박하지 않느냐, 고 물어보기도 해요. 저는 너무도 당연히, 사람들이 다 이해할 거라고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나를 바라보는 반감 갖는 시선들이 늘어나니까 내가 나서서 계속 아니다, 라고 말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죽: ...

 

백: 난, 어쩌면 이런 경험들이 어떤 정신적인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어려움을 함께하고, 상담해 주는, 지금의 일에 바탕이 된다고. 적격이라고 생각해요.

 

백명주 씨는 현재 한 어학원의 원장으로, 재외국민특례 입시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백: 굉장히 고민 많았던 아이가 나하고 얘기 하고, 뭔가 돌파구를 찾은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짓거나 자신감을 찾을 때,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 그러면 큰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거고,

 

제발 사람들이 나를 별도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희한한 일을 몇 가지 겪었을 뿐이예요. 나는 그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용기를 내서 그 일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게 했던 것에 일조했던 사람이기에 난 사람들이 격려해주고, 수고했다는 응원의 말도 내심 바랬어요.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일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죽: 혹시 부모님은 그때 얘기를 하시나요?

 

문득 그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의 부모에 대해서, 나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백: 얘기를 안 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는 게 보여요. 필리핀 얘기만 나와도 언급을 잘 안하려고 해요.

 

죽: 그 이후에, 혹시 사건 관련 외에 필리핀을 가보셨나요?

 

백: 몇 번 가기도 했었는데, 학교 일이라든지, 학부모 설명회라든지... 필리핀에 내리면 스스로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껴요. 나도 모르게 동물적으로 변해요. 초조해지고, 와선 안 될 곳에 온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필리핀 자체가 나한테는 긴장되는 국가예요. 그때 이상의 나쁜 기억이 내 인생엔 없으니까.

 

 

5.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죽: 혹시 피해자 분들과 따로 연락해 본 적은 있나요?

 

백: 지금 생존자들 중에 나한테 메일 온 사람이 있었어요. 몇 년 되었네요. 어떻게 사냐고 나보고. 어떻게 그런 인터뷰를 하냐고. 안 무섭냐고.

 

죽: ... ...

 

백: 내용을 보면... 여자분인 거 같아요.

 

죽: 신고를 안 하신 분 중에 한 명이겠네요.

 

백: 그걸 물어봤어요. 내가 나올 때 뚱이(납치단의 막내) 노트북을 봤다고 했잖아요. 한국 여자들이 강간당한 비디오를 최세용이가 찍은 걸, 내가 봤다고 했는데, 그거 진짜로 봤냐고 나한테 메일로 물어봤어요. 내용상 자기가 찍힌 거 같다고. 진짜로 봤냐고. 영상을 제가 제대로 본 건 아니라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어요. 유출되는 건 우리나라가 우습게 유출되니까... 그게 궁금해서 나한테 보낸 거 같아요.

 

최세용 일당은 사람을 데려와 납치 피해자와 억지로 성관계하는 동영상을 남겼다. 신고를 막기 위해서다. 당시, 최세용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던 이는 내게 노트북과 가짜 여권을 건네겠다고 태국으로 오라 했다.

 

가짜 여권 등의 기록만 사진으로 건네 받고 노트북은 경찰이 할 일이니 받지 않겠다 했다. 최세용 검거 이후 몇 달간 연락 주고받다가, 경찰과 타 언론에 자료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안 그는 '믿었는데 왜 그랬느냐'며 연락을 끊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최세용이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백: 최세용은 나한테 여자가 여러 명 있었다고 했어요. 더 쉽고, 잡고 나면 참여도가 높다고. 다른 사람들 포섭하는데 도와주고, 여자들이 오히려 자기를 풀어주고 돈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제의하기도 한다고.

 

죽: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인간적인 딜레마를 주는 것도 모자라서...

 

백: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건 무어라고 말을 못할 것 같아요. 저도 갈등이 있었잖아요.

 

죽: 그렇죠.

 

당시, 백명주 씨는 수배자였다. 

 

1990년대 중반, 청년 사업가였던 그는 콘돔 편집샵으로 대박 난다. 개장 이후, 5개월 만에 60개 이상의 체인점을 연다. 젊은 나이, 전 세계의 콘돔을 모아 판다는 이유로 화제 되었으나 지금이라면 웃고 넘길 단속에 대처할 법적 지식이 없었다. 많은 대리점을 관리할 경영능력도 없었다. 계속되는 단속과 재판에 지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을 떠난다. 그렇게 15년간 수배자 신세가 된다. 납치는 그 생활 중, 막바지에 일어난 일이다. 

 

호구조사가 끝난 최세용 일당은 같이 사지에 몰린 처지라 생각해 ‘안전’하다고 판단한 백명주 씨를 납치단의 일원으로 섭외하려 했다. 백명주 씨는 그들에게 ‘섭외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든 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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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팔레스 호텔 커피숍에서 O여사랑 같이 커피 한 잔 마시고 차에 태우기만 하면, 내 돈을 빼준다고 했지요. 굉장히 갈등했어요. 정말로, 갈등했어요.

 

타겟이 된 여자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한국에서 부도내고 온 여자고, 악질 사업가고... 진실은 모르겠지만 이유를 나름 만드는 거겠죠. 

 

그 여자 태우고, 커피 마시고... 뭐, 그렇게, 최세용이 시나리오를 줬거든요. 중국 가서도 김종석(필리핀 납치단의 일원. 2012년 10월 8일, 필리핀 경찰청 납치사건 수사단 내 유치장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테 전화가 왔었죠. “한 2주 있다가 홍콩에서 만나자. 그러면 너에게 새로 만든 전자여권을 주겠다.” 그럼 미국 빼고 다 갈 수 있다고. 정말 갈등을 많이 했어요.

 

그는 납치단의 일원이 되는 대신 한국행을 택했다. 

 

 

 

6. 최세용, 인생의 아이러니

 

백: 전 납치 당하기 이전에 호주에서도 생활하고, 일본에서도 잠깐 생활하고, 대부분 중국에서 생활 했고. ‘이젠 한국에 들어가서 정리를 해야 되겠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최세용과 마주친 거예요. 납치를 당해서 죽음을 눈앞에서 겪고 나니까 ‘내가 대체 왜 이러고 다녔나.’ 그래서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한국으로, 가자.

 

죽: 이게 참 인생의 아이러니 같은, 오히려 최세용 때문에. 아니, 최세용 때문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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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세용. 2013년 10월. 

인천공항 입국장을 통해 임시 인도 방식으로 압송된 직후>

 

백: 최세용 덕분에 내 인생이 바뀐 것도 되죠. 전 어린 나이에 재판이 계속 되니까 친척 여권을 도용해서 외국으로 갔잖아요. 십 년 넘게 외국생활을 했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모든 걸 각오했지만 난 굉장히 큰 처벌을 받을 줄 알았어요. 남의 여권을 썼으니까.

 

출입국 관리법이라든지, 여권법 위반이라든지. 여러가지가 걸릴 거라고 알았는데, 검사가 나를 기소유예 시켰어요. 처벌하지 않았죠. 어머니가 그 결정문을 받으러 갔는데, 그때 검사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사업가한테 영장을 네 번이나 넣어 괴롭혀서 한국을 떠나게 했다. 참 고생 많이 하셨다."

 

고 했답니다. 그래서 엄마가 엉엉 울었대요.

 

그렇게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공권력이, 대한민국 공권력이 나를 용서해 주니까 이게 또 아이러니한 거죠. 그렇게 나쁜짓을 했던 최세용이 내 인생의 방향을 틀었고, 그렇게 괴롭히던 검찰은 나를 용서해주고. 기분이 묘했어요.

 

죽: 납치 피해자인 것도 영향을 끼친 건가요?

 

백: 이 사람이 비록 여권을 도용해서 해외 생활을 했지만 이걸로 처벌을 내리는 것보다 더 큰 고생을 해서, 검찰이 나를 한 번 봐준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대학원생이자 청년 사업가였던 백명주 씨는 스물 일곱에 한국을 떠나 마흔이 되었을 때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7.  

 

그와의 인터뷰는 여기까지다.  

 

당시 필리핀 납치사건을 하던 기자가 노련한 사람이었다면, 경험 많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지난 6년간 괴롭지 않아도 되었다. 얼굴 내지 않고, 실명 내지 않고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자가, 한국엔 많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기록이 그에게 조그마한 예의가 되었으면 한다. 

 

 

 

 

 

편집부 주 
 
 
본 이너뷰 기획 시리즈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한다. 
사회를 위해 용기냈던 분들을 딴지 기자들이 돌아가며 
찾아갈 예정이니 독자분들도 추천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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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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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어 및 기사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

kimchangkyu1201@gmail.com

Profile
딴지일보 편집장. 홍석동 납치사건, 김규열 선장사건, 도박 묵시록 등을 취재했습니다. 밤낮없이 시달린 필진들에게 밤길 조심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가족과 함께 북극(혹은 남극)에 사는 것이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