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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YAR62Z_G6A



JTBC 교회개혁실천연대의 공동대표인 박득훈 목사를 뉴스룸에 초대하여세습 비롯한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세습도 세습이지만, 한국 교계에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있는 자정 능력이 있느냐는 앵커의 질문은 대담의 다른 구심점이 되었다. “자정능력이 거의 소진 되었다 답변과 함께, 그동안 자정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지만 너무나도 어려웠다고 소감을 밝히는 목사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사실, 지금까지 드러난 문제들만 봐도 한국교회는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교계 지도층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드러난 문제를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왔다. 이미 언급한 있듯이 목사들의 성폭력 문제, 교회 재정에 대한 사기/배임/횡령 그리고 세습 문제가 그랬다. 피해자가 있어도, 누군가의 양심 선언이 있어도, 어떤 반대에도 교계 기득 권력은 견고했다.


이러한 형태는 세월호 참사와도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다. 세월호 사건이 국민들에게 이토록 시린 상처가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무고한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이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 죽은 시신을 찾는데 1000억이나 필요하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수가 많다등의 발언으로 시작된 지도층의 무사 안일한 대처와, 진실은 숨기고 어떻게든 대충 마무리 짖고 덮어가려는 행태의 책임 회피가 화를 불러 일으켰다. (관련 기사 - 링크)


한국교회도 지난 년간,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교계 지도층은 여전히나 몰라라. ‘사랑용서 대표되는 기독교니 만큼이쯤 하면 됐으니 그만하고 덮자 분위기. 물론, 시위도 보고 토론을 통해 도출된 결론으로 성명서도 냈다. 성경적인 방법이라 하여 많은 이들이 집회다 뭐다 하며 기도회도 가져봤다. 그러나 견고히 세워놓은 기득권은 무너질 기미 조차 보이지 않았다. 촛불 시위라는 국민적 참여가 정권은 바꿨다지만, 교계에는 이렇다 견제 세력이 없는 것도 문제다. 더욱이 신도들 입장에서는 마음에 맞는 교회로 옮기든지, 교회를 나가면 그만이라 몸과 마음을 희생해가며 개혁을 부르짖을 이유도 없다. 어쩌면, 그렇게 노력을 쏟을 만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게 된지도 모른다.


하나 둘씩 쌓인 문제들은 한국교회가 수용할 있는 포용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러나 없이 많은 비난과 비판에도 각종 문제들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오히려 사건사고의 발생은 증가 추세다. 도대체 한국교회는 어디서부터 뒤틀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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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다툼: 박정희와 장준하로 대비되는 친일과 독립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박정희라는 인물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존재케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 받아 왔다. 물론 친일 행적에 대한 과오가 있음은 인정했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 등을 고려해 봤을 박정희의 친일은 소싯적 누구나 번쯤 봤을 거짓말 정도로 받아들여진 것도 사실이다. 암살이라는 그의 죽음이 연민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아직까지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박정희 기념공원, 동상 등으로 표현된 신격화는 그가 어떠한 존재였는지 말해주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현대사에는 이런 박정희 대통령과 대조적인 인물이 존재한다. 장준하 선생이다. 여전히 타살 의혹이 있는 의문사로 일찍이 생을 마감한 그는, 남긴 업적에 비해 평가 절하되거나 아직까지 대중에게는 크게 알려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활약했던 장준하 선생은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를 맡았었고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대항해 싸웠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벌어진 5.16쿠테타, - 수교협상 등에도 대한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다. (관련 기사 - 링크)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일본의 만주군 중위로서 우리 독립군을 탄압하던 박정희 대통령보다 장준하 선생이 존경을 받아야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준하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하다. 오히려죽은 장준하보다 박정희 추앙하고 기억한다. 이러한 정서는 나라를 팔아먹고 이득을 취해도 일정 정도의 업적이 있다면 용서될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물론, 공산주의와 한국전쟁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지배하려 했던 일본에 기대어 재산을 확충하고 권력을 쟁취했던 이들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친일 세력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는 전략을 펼쳤고, 그렇게 반공 의식이 한국 사회의 기반이 즈음부터 친일 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의 등용문을 통해 우리 나라에서 기득권 정치세력과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할 있었다. 박정희를 비롯해 친일 세력이 우리 나라에 기득권으로 자리매김 것은, 잘못을 해도 그것이 잘못됐다 말할 없는 사회로 전락하게 만드는 역사의 원흉이 되어버렸다.


비록 지금은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라지만, 까지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것을 보면, 수십 년간 해외로 도피생활을 해야했던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씨의 기구한 인생사는 여전히 깨지지 않은 친일과 독립의 구도가 존재함을 말해준다. (관련 기사 - 링크)




신사참배 시작된 교회의 모순


이러한 기류는 한국교회 안에도 깊숙이 내제되어 있다.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 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나 대책 없이 어떻게든 교세를 유지하고 키워보려 했던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전쟁 이후, 교회 안에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줌으로써 신사참배와 함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를 숨겨버렸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앙적 기틀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것이다.


목사들이 사기를 치고, 성범죄를 저질러도,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헌금으로 개인 재산 불리는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떳떳하게 당당할 있는 이유는, 잘못한 것에 비해 기여한 것이 크다는 거짓된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교세를 확장하고, 부자교회로서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각종 사업 선교에도 도움을 주었으니, 넘어갈 있는 넘어가자는 심리가 있다. 이러한 작태의 시작은 다름아닌 신사참배와 친일에 있다. 신사참배도 넘어가는데 정도는 용서해 있지 않느냐는값싼 은혜 대한 기대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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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및 관련 기사 - 링크



1. 배경: 굳음 심지의 초기 한국교회


사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감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5 이후부터 실시된 일본 미나미 조선 총독의 한국교회 말살 정책으로 한국의 교회 연합단체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단체인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해체되고, ‘조선기독교 청년회’(YMCA)일본 기독교청년회 조선연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성서공회역시도 1940년을 기점으로 선교사들이 이사진에서 제외되고, 심지어 1942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최초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성을 띠 것이 아닌 단순한 일제의 민족적 전통의례로서 국민의례 정도로 이해할 있는 것이라고 하며 교계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일제와 한국은 민족도 다른 데다가 기독교의 경우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특성이 강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독교 대표들과 당시 서구의 선교사들 또한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신사참배를 단순 국민의례 정도라고 이해시키기 쉬운 학교나 병원과 같은 기관들부터 신사참배를 실시토록 했다.


이후에는 교세가 작은 교단들을 시작으로 하여 당시 가장 교세를 갖고 있었던 장로교회까지 악질적인 파괴공작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교세가 작아 신도수가 많지 않았지만, 3.1운동 각종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많아 일제로서는 반드시 정복해야만 하는 단체였다. 그래서 일제는 신사참배를 위해 교계와  교회는 물론 개인까지도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이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는 등의 공포 정치를 이어갔다. (관련 기사 - 링크)

 

이렇게 일제는 행정적으로는 기독교단체들에 대한 ()수술을 감행함으로써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없도록 했고, 신앙적으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 자긍심 마저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2.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반대


이러한 일제의 강요 아래 상대적으로 교세가 크지 않았던 감리교와 천주교회 등은 신사참배에 대해서, 이는 종교라기 보다는 단순한 국가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회에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없다고 선언하고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와중에도 가장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파는 최대의 교세를 가졌던 장로교회였다. 대부분의 교계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에 대해 매우 단호히 거부했고, 일제의 명령에도 계속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일제는 아주 용의주도하게 장로교 내에서의 신사참배 강행을 위해 움직였다. 1938 9 조선장로교 총회가 열리는 것을 대비하여 전국 각지에 있는 노회(장로교에서 입법·사법의 역할을 담당하는 중추적 기관)별로 신사참배 결정을 강요했다. 1938 2 19 평북노회를 비롯해 전국의 23 노회 17개의 노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가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8 9, 결국 27 조선장로교 총회에서는 일제의 계획대로, 사전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포섭하거나 검속하는 방책을 사용해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의지가 무력에 의해 꺾이고 후에는 하나 둘씩 일제의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고, 결국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사에 가서 절을 하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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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사참배 친일행적과는 어느 정도 구분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토’(일본의 민속신앙)신사’(제사를 드리는 종교시설) 참배하는 일본의 종교의식이 당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차별 없이 강제 요구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시개명을 당시의 모든 우리 국민들이 친일이라고 단정지을 없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신사참배 자체가 친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신사참배에 가담하는 것은 신앙을 삶의 최우선으로 여기는 종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저버리는 가장 위반 행위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친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에게 있어신사참배 일제에게 힘을 실어주고 교계를 움직일 있도록 권한을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에게 교회의 고유한 권한을 도화선이 것이다.



3.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한 교회의 : 친일


번은 쉽지만 번은 쉬웠다. 가장 교세였던 조선장로교회는 신사참배 이후 철저하게 일제에 부역했던 단체로 전락했다. 그렇다. ‘신사참배 친일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사참배 가결 , 장로교회는 1938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전장의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는 돈)17 2천원, 기관총 구입비 15 317 50전을 거두어 조선총독부에 바쳤다. 당시 가마니의 가격이 20, 학교 교사 월급이 60원이었음을 감안했을 , 조선장로교회가 총독부에 바친 국방헌금 158만원은 현재 단위로 환산할 경우 500억원에 달하는 액수이다.


이렇게 각종 헌금 명목으로 거둬진 대금은 일본군이 비행기와 기관총을 구입,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일본해군성에서는 조선장로교회의 헌금으로 구입된 비행기 명칭을 '조선장로호' 붙이고, 1942 9 20 경성운동장에 80여명의 장로교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감사장과 수납서 비행기와 기관총의 사진을 전달하는 행사를 치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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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1942 9 23일자 기독교신문은 "의미 깊은 항공일에 빛나는 해군기 명명식, 장로회 헌납 해군기 조선장로호로 명명"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육군성에서도 그해 11 17일에 용산연병장에서 경기도 내에서 헌납한 비행기 55대와 함께 명명식을 갖고조선장로호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장로교회는 단순히 헌금을 가져다 바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운장구기도회 8,953, 일본 찬양 시국강연회 1,355, 전승 축하회 604, 군부대 위문 183 등을 가지기도 했다. 미국과 싸워서 이겨 달라는 일본식 신도 의식도 거행했다. (위와 같은 통계는 1942, ‘조선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갖고 마지막으로 열린 31 총회의 회의록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뚝이 무너지고 났더니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없었던 걸까. 국민의례 참여 정도로 끝날 같았던 신사참배는 친일 아니라 성경의 원리 마저도 무너뜨렸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수단인기도 일본의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장로교회는 권력의 요구에 맞춰버리고 신앙도 저버리는 친일 단체로 전락하게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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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도 믿었던 천동설과 지구 나이 6천 년의 이유(?)

2. 삼박자 축복론, 그리고 한국사회의 부패

3. 성범죄는 왜 교회에서 자주 벌어질까

4. 한국식 목사는 왜 이따구인가에 대한 고찰

5. 종교인 과세, 개신교는 왜 반대할까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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