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485_1.jpg



니체의 연애와 성생활은 어땠을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사창가를 찾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결국 정신병으로 커리어를 마감하는데, 매독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어서 그랬다.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현재는 정설이 바뀌었다.


니체는 어쩌면 동정일 수도 있다. 그는 바그너의 부인에게 사랑에 빠진 적도 있는데 남편의 음악 활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플라토닉한 감정에 가깝다. 직접적인 성욕과는 거리가 있다.


니체는 32살 때 갑자기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네덜란드 여인에게 청혼하는데 이유가 가관이었다. 이때쯤 친구들은 당연히 다 결혼한 상태가 되는데, 당연히 와이프 눈치에 집에 묶여 있었다. 홀로 바에서 맥주를 들이키자니 고독감에 못 이겨, 그의 표현대로라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청혼을 한 것. 당연히 잘렸다.


열차여행을 하다가 객차에서 만난 발레리나에게 청혼하기도 했다. 니체는 발레리나를 즉석에서 여자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괜찮은 신분에 언변으로는 세계 제일이었고, 카리스마 있는 외모를 자랑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열차가 멈추기도 전에 난데없이 청혼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순서란 게 있는 법이다. 먼저 연애편지도 주고 받고 공연에 가서 꽃다발도 주고 했었어야지.


스위스에 이름을 아는 모든 여자들에게 죄다 청혼 편지를 돌렸지만 결과는 당연히 전멸이었다.


a85ace2817d335a36ad139cef598d4f1.jpg


32살의 니체는 고독해지기로 결심했는지, 바그너와 의절하고 말았다. 그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보고 나서였다. 이 때는 1886이었다. 팽창을 거듭하던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수립한 지 5년이 된 후였다. 니체의 눈에 <파르지팔>은 독일 제국과 기독교에 대한 아부였다. 바그너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열심히 해명했지만 니체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니,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넘어서게 된 지점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니체는 점점 고독해진다. 35세가 되자, 몸은 점점 더 약해지고, 머리는 더 아파왔다.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다가 죽으려면 더 이상 대학교 강단에 묶여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좋은 바젤대학교 정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철학 저술 활동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니체는 야인으로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정신과 몸이 온전할 때에는 여행을 다니고, 아플 때에는 요양을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는 여행하는 철학자다.


니체 나이 38세 때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였던 폴 레에게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21살이었고 지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다들 미쳤다고 하는 니체의 철학책을 읽고 이해한 데다가 매료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이름이 루 살로메라는 것.


nietzsche-love-triangle.jpg


루 살로메가 누구인가. 근대 유럽 제일의 팜므파탈이자 뮤즈, 수많은 남자들에게 실연의 상처를 안겨준 마성의 여자가 아닌가! 니체는 루 살로메에게 첫 만남에서부터 반한다. 이성에 매료되고 사랑에 빠진 유일무이한 순간이다.


“어떤 운명적인 힘이 우리를 만나게 하였나요?”


그러나 이때쯤 니체는 이미 심신이 몹시 불안정해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순간도 많았다. 치질 때문에 10분에 한 번씩 앉은 자세를 바꿔야 했기에 남자로서 매력을 느끼기는 힘든 상대였다. 나이도 17살 차이나 났다.


루 살로메는 자유연애주의자에다가 프리섹스주의자였다. 그녀는 연인들을 '육체파'와 '지성파'로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 섭렵했다. 지성파 연인과는 사귀기만 할 뿐 육체관계는 맺지 않겠다는 게 살로메의 철칙이었다. 당연히 니체는 지성파였다.


니체와 사귀며 지적 욕구를 채우기 시작하자, 정작 폴 레는 니체 앞에서 하찮아졌다. 그녀는 폴 레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니체는 결혼을 하기 위해 친구 레를 청혼의 뜻을 전달하는 큐피트로 임명해 루 살로메에게 보냈다.


레 역시 살로메 없으면 죽을 양반이 되어 있었다. 레는 니체의 편지를 전해주는 대신 자기가 청혼한다. 그리고 당연히 거절당했다. 이때 살로메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우리 셋이 동거하며 철학적 토론을 하는 삶을 살아봄이 어떠한지요?"


이미 철천지 원수가 된 니체와 레는 대경실색했지만 살로메의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그녀와 한 집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Ce3-xfhWQAA4Eda.jpg


그러나 니체와 레는 차례로 청혼했다가 차례로 차였다. 레는 결국 살로메와 철학에 대한 대화를 했던 절벽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후로도 살로메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차는 자살 도우미(...)의 삶을 산다.


이 연애사건에는 오빠를 독점하고 싶던 여동생 엘리자베스도 끼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정을 다 알게 되었으면서도 니체에게 사실은 레와 살로메가 오빠를 속이고 붙어먹는 사이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다. 심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니체는 그 말을 믿고 레와도 절교하고, 두 사람 모두를 비난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후로는 평생 독신을 결심한다.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바였다.


엘리자베스는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여자로 성장했다. 그녀의 첫 번째 우상은 다름아닌 니체였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베른하르트 푀스터. 직업이 교사였던 이 남자는 상태가 몹시 안 좋았다. 반유대주의자에다가 극우 독일민족주의자였다. 훗날 나치즘에도 영향을 끼쳤다. 순수 아리안 혈통이니, 유대인은 독일의 기생충이니 하는 나치의 수사를 이 사람이 먼저 만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니체는 분노했다.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외려 반유대주의자를 보면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차별주의자를 경멸했다. 그런데 하나뿐인 여동생이 저런 인간과 결혼을 결심했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1889년, 45세가 된 해에 니체는 튜린을 여행하고 있었다. 걷고 있을 때만은 멀쩡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보더니, 갑자기 말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졸도했다.


깨어난 니체는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다. 이 순간이 사실상 니체가 요절한 날이다. 생물학적으로는 11년을 더 살다 죽지만 철학자 지체는 말을 끌어안으며 사망했다. 다음은 이날 정신이상자가 되자 마자 쓴 편지의 일부다.


"나는 인도에서는 붓다였고, 그리스에선 디오니소스였소.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는 나의 현현이었으며 셰익스피어와 바콘 경도 마찬가지요. 근래의 나는 볼테르였으며 나폴레옹이었고 어쩌면 리하르트 바그너이기도 했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무적의 디오니소스이며 지상에 축제를 불러오는 자요."


friedrich-nietzsche.jpg


니체의 정신병의 원인은 뭘까? 독일 의학계는 2003년에 매독 설을 뒤집고 뇌종양 설을 제시했다. 2004년에는 <텔레그래프>지에 연구 내역이 발표되었다. 뇌종양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뇌의 혈관 문제다. 현재는 뇌종양에 의한 발병이 정설이며, 매독 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상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 니체가 정신이상자가 되고 나자, 그의 철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스로 예상한 백 년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죽을 때쯤에는 그의 사상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니체 본인은 성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니체는 언제 와장창 잃을지 모르는 건강 때문에라도 더 치열하게 사유하고 썼다. 1881년 기오 브란데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남기기 위해 뇌종양에 맞서 얼마나 처절히 사투했는지를 알려준다.


"수년 간 지속된 만성 두통이 어느 해에는 200여 일간이나 지속되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쓰디쓴 담즙을 연발적으로 구토하며 2~3일 동안이나 ...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완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나의 특기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정신병원에 있다느니, 혹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을 떠들지만... 나의 정신은 혹독한 시간에 성숙해왔습니다."


"믿기지 않는 고통을 겪으며 <서광>을 집필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젊을 때 돌아가셨는데, 당시의 연령이 바로 내가 사경을 헤매는 때의 연령이었습니다. ... 나는 오늘도 꽤나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운명이라면 인간은 그런 운명 속에서도 실존을 확보해야 한다. 질병을 대하는 니체의 당당함은 감동적이다.


"질병은 나를 해방시겼고 '나 자신'이 되는 용기를 복돋아 주었습니다. ... 나는 용감한 동물도, 심지어 군인도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철학자인지 물어보셨죠? 내가 철학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그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다. 하나의 '인간'으로 고통과 부조리 속에 내던져진다. 그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초인이되 인간적 초인, '위버멘쉬'가 되는 길이다.


니체는 1900년에 사망했다. 20세기 정신의 창조자가 죽은 해 치고는 너무나 공교롭고, 또한 계시적이다.


Nietzsche_Olde_11.JPG


다음 편 <초인의 탄생>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아참, 웹에 니체가 의무병이었다느니, 일반병이었다느니 하는 잘못된 정보가 눈에 띕니다만 니체는 포병 장교였습니다. 정확히는 프로이센군 야전 포병 기마장교였지요.




쇼펜하우어 편



쇼펜하우어의 삶1 : 아버지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2 : 어머니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3 : 헤겔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4 : 무명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5 : 강아지의 그늘

쇼펜하우어의 삶6 : 인간의 그늘


니체의 삶1: 인간의 탄생

니체의 삶2: 남자의 삶

니체의 삶3: 철인의 탄생

니체의 삶4: 비극의 탄생





필자가 진행하는 방송


126677493.jpg


팟빵 : https://t.co/lIoFGpcyHW 

아이튠즈 : https://t.co/NnqYgf5443


트위터 : @namyegi



필자의 신간


185155653.jpg


이미지를 누르면 굉장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필독

트위터 @field_dog

페이스북 daesun.hong.58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