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즉각 수락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확실한 건 원자폭탄은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더불어 소련군의 참전도 없었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한반도는 둘로 쪼개지지 않았을 거다(일본은 끝까지 우리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면, 1945년 7월 26일 이후의 일본은 어떠했을까? 7월 27일 포츠담 선언을 검토하기 위해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소집됐다. 외무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는 이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포츠담 선언을 두고 가장 ‘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외교성이었다. 이 당시 외교성의 판단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선 일단 노코멘트(no comment)라는 입장을 밝혀 시간적 여유를 얻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를 수락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당시 외무성 차관 마츠모토 슌이치(松本俊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27일 아침의 정례 간부회의에서 일본으로서는 결국 이를 수락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했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 자체는 언어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약 강화가 시작되면 교섭에 의해 이를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략) 따라서 포츠담선언에 대해 모두 납득한 우리들은 그 전문을 숨김없이 국민들에게 발표하되, 절대로 거부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으로서는, 이런 중요한 시점에 이를 밝히고 검토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신문에는 노코멘트(no comment)라는 말과 함께 전문을 공개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나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중략) 대신은 우리의 방침을 각의에서 밝히고 협조를 구하겠다고 했다(하략)”
7월 27일 새벽. 외무성 관료들은 포츠담 선언을 분석한 후,
“이건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이들이 주목한 건 ‘천황제’와 ‘히로히토 덴노’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점이었다. 물론, 전범재판 항목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들도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는 반응이었다. 그 나머지 영토문제, 재벌해체 문제 등등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마츠모토의 말처럼 무조건 항복은 언어적 유희이고, 강화협상을 통해 충분히 타협할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 일본이 믿은 게 ‘소련’이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 마츠모토 차관, 그리고 외교성 관료들은 이때야 말로 소련에게 중재를 부탁할 기회라 믿었다.
“소련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완화 할 수 있다.”
이때까지 소련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래도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낫다. 어쨌든 외교성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는 미국이 원했던 긍정적인 반응이다. 포츠담 선언은 연합국 이름으로 나갔지만, 이 선언의 원문을 작성한 건 국무차관 조셉 그루(Joseph C. Grew)였다. 포츠담 선언이 있기 두 달 전인 5월 28일 그루는 ‘대일성명서’의 초안을 트루먼에게 제출했다.
일본주재 미국대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던 그루는 ‘천황제’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덴노에 처벌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울러 자신의 입장이 대일성명서에 반영되길 원했다. 당시 그루는 트루먼에게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는데,
“일본인들이 열광적인 국민들로, 최후의 순간까지 그리고 최후의 일 인까지 싸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미국인들의 희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일본인들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항복에 의해 덴노와 천황제가 영구히 배제되거나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생각이다.”
그루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도 5월 중으로 이 대일성명을 발표하라고 건의했고, 트루먼은 군 지휘관들의 의견을 종합해 발표하겠다고 긍정의 뜻을 비친다. 군 지휘부는 성명 발표 시기를 오키나와 전투 이후가 좋을 것이란 의견을 냈다. 오키나와가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오키나와 전투가 너무 늦게 끝났다.
6월 18일 전투가 끝나고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7월에 포츠담 회담이 걸려 있는 거였다. 트루먼은 그루의 초안을 들고 포츠담으로 날아갔다. 연합국 정상들과의 회담 직전에 대일성명을 발표하는 것 보다는 초안을 들고 가 연합국 정상들의 의견을 취합한 뒤 발표하는 게 외교적으로 모양새가 좋다는 판단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미국으로서는 아무런 ‘실수’가 없었다. 일본 전문가인 그루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대한 일본을 ‘배려’한 선언문, 외교적인 배려, 연합국들과의 의견조율 등등 미국은 모든 정성을 다해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 거다.
미국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이 정도의 배려라면, 상식이 있다면 이를 받아들일 거라는 희망을 내비쳤다. 당시 원자폭탄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육군장관 스팀슨(Henry Stimson)의 발언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략) 우리가 현 황실과 입헌군주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 일본이 우리의 경고를 수락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경고를 발하는 시기는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데, 물론 진공작전의 개시 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일본을 정신이상자들의 자포자기와 같은 수렁으로 밀어내기 전에, 그리고 소련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경고를 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일본의 ‘상식’을 기대했다. 상식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포츠담 선언은 받아들일 거라 믿었다. 실제로 상식이 있었던 일본 외교성은 반응을 보였다.
외교성의 판단대로 일본이 움직였다면, 원자폭탄을 맞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망상, 그리고 결정적 실수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마지막 기회란 판단을 내린 외교성. 그러나 일본 전쟁지도부는 포츠담선언의 중요성에 대해서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고 외무장관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 의견에 동조하는 건 요나이 미츠마사(米内 光政) 해군장관 정도였다. 특히나 요나이 같은 경우는 포츠담 선언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며,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요나이 해군장관의 경우는 고이소 내각, 스즈키 내각에서 해군장관을 연임한 인물로 내각 안에서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인물이었다. 그는 포츠담 선언 직후, 원자폭탄 투하 직후에도 강력히 종전을 주장했던 걸로 유명하다)
이때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당시 총리였던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였다.
“연합국이 최후통첩을 내밀더라도 우리가 ‘예, 그렇습니다.’라고 넙죽 항복할 상황은 아니다.”
이 정도면 정세판단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없다고 보는 게 맞다.
7월 27일의 전쟁지도부 회의는 망상과 개념 없음의 향연이었다. 포츠담 선언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미국과 연합국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발언들도 서슴없이 나왔다. 가장 심했던 건 포츠담 선언은 적절치 못한 내용이라는 선언을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도고 시게노리는 이들과 설전을 벌인다. 포츠담 선언이 가지는 중요성을 설명하며, 외교성의 방침을 채택해 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회의에서 최종 결정된 정책 방향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되, 즉각 수락하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받아들인다.”
라는 걸로 의견조율이 됐다.
그러나 운명은 일본을 버렸다. 아니, 노망이 일본을 버렸다고 해야 할까? 회의 다음날 스즈키 총리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인터뷰가 신문에 실리게 된다. 그 유명한 ‘묵살발언’이다. 어째서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을 묵살 한 것인가? 당시 인터뷰 내용을 보면,
“나는 그 공동성명이 카이로선언의 재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아무런 중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전쟁 완수를 위해 매진할 것이다.”
일본어에서 묵살은 ‘무시한다(ignore)'와 ’보류한다(withhold comment 혹은 have no comment로 표현)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당시 이 보도를 타전한 동맹 통신사는 묵살을 ‘무시한다(ignore)'로 번역해 방송했다. withhold comment란 표현을 모른다면, 속 편하게 ‘no comment’라고 말했다면 일본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영어번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건 동맹통신사의 영어실력 수준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명백한 스즈키의 실수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고, 이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말하는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의견이 오독될 수 있다는 걸 간과했던 거다.
이렇게 예민한 시기에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묵살’이란 표현을 썼다면, 기자들에게 묵살의 뜻이 ‘withhold comment’라고 분명히 밝혔어야 한다. 그러나 77세의 총리는 국제정치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무시한다(ignore)'란 발언을 포츠담 선언의 거부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명분은 넘치게 챙길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포츠담 선언은 원폭투하의 정당성을 확보한 명분용 선언이 돼 버렸다)
“우리는 성의를 다해 최대한 일본을 배려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제 우리는 포츠담 선언에서 밝혔듯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을 안겨줄 것이다.”
스즈키의 발언이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돼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77세 총리의 노망난(?!) 한마디가 일본에 지옥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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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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