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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충칭의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방문하여 옛 임정 요인들의 포즈를 본따 남긴 기념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젖어 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섰던 많은 임시정부 요인들도 오늘을 굽어보며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해서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여사의 이야기를 옮겨볼까 합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한 김자동 선생의 모친이시기도 한 분이죠. (물론 그분이 직접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1인칭으로 구성한 그분의 삶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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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이 인사조차 어색할 만큼 평안치 못한 시대를 사는 여러분께 이리 인사드리는 것이 미안하오만 나도 꽤 험한 인생을 산 이로서 여러분께 이리 인사드릴 자격은 있을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안녕들 하십니까. 내 이름은 정정화라 합니다. 아마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꽤 많은 관객을 모았던 영화 <덕혜옹주>를 빌어 내 소개를 해 볼까요? 나는 극중의 등장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영화 중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이 있어요.

영화 속에서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탈출 작전이 나오는데 영화적인 설정일 뿐이지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영친왕의 탈출 계획을 세운 적은 있었지만 영친왕 스스로 일본 탈출을 시도한 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의붓형 의친왕의 경우는 달랐어요.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고 임시정부에 알려 왔고 국내 탈출을 결행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이때 의친왕의 탈출 작전을 주도한 이는 동농 김가진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대한 제국의 대신을 두 번씩이나 지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남작 작위까지 선사한 분으로 조선 땅에서는 평생 떵떵거리며 지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1항쟁 후 상해로 망명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의 허울을 폭로하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죠. 나는 그 며느리였고 그 분의 장남 김의한의 아내였습니다. 조선에 남아 있던 저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친정아버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친정아버님의 말씀은 지금도 쟁쟁하군요,

“생활이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섣불리 먹은 마음이 중도에 유야무야될까봐 그것이 근심스러워 이르는 말이다.”

그때 내 마음은 단단했고 튼튼했지만 그 후 이어질 내 삶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정아버님의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버님께 하직 인사 올린 뒤 나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상해로 망명합니다. 그 후 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25년이라는 세월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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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건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저 몇 명의 명망가들이 깃발만 들고 있었던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별 같고 범 같은 사람들이 만나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으며 그 꿈 하나로 뭉치고 부대끼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던 역사의 장이었어요. 일제와 투쟁하는 동시에 하루 세 끼 밥벌이와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챙겨야 했던 나는 참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성재 이시영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석오 이동녕 , 우당 이회영 선생 등 크나큰 존함들부터 후일 자신의 이름도 까먹고 ‘가야마 미쓰로’로 불린 친일파 이광수, 후일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상록수>를 쓴 심훈, 비운의 혁명가 김원봉 등등 이름을 주워섬기자면 몇 밤을 새도 모자랄 사람들을 겪었고 그들의 겉과 속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겁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야 더 말할 것이 없는 우리 역사의 거목이시겠지만 나는 그분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영웅을 낳은 여걸 중의 여걸이라 여깁니다. 참 키가 작으셨어요. 얼굴이 빡빡 얽으셨고 외람되지만 어떻게 저리 못났나 싶은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 작은 키에는 세상의 어떤 거인들도 밟지 못할 용기가 넘쳐났고 백범 같은 거목을 능히 품어낼 국량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언젠가 그분의 생신 때 제가 동료들과 함께 비단 솜옷을 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뒤라 중국인들이 우리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이러저한 중국인 귀빈들도 종종 찾을 때라 어머님 위신을 세워 드리려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는 비단옷을 집어던지면서 호통을 치셨어요.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의사의 핏값이야. 피 팔아서 옷 해 입게 생겼나? 당장 물려 와.”

머리에 화로라도 인 것처럼 부랴부랴 옷을 물리려 뛰어가던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왔습니다. 돌아가신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였지요. 고부간에 사이 좋은 건 착한 왜놈보다 찾기 어려울 일이지만 최준례 여사와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어느 어머니와 딸보다도 의가 좋았고 죽이 척척 맞으셨어요. 백범 선생이 부부싸움이라도 하거나 아내에게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먼저 불호령을 내렸으니까요. “네가 네 처에게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이놈아!”

최준례 여사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시다시피 임시정부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 안에 있었고 그 경계를 벗어날 경우 어느 밀정이나 일본 관헌의 손에 변을 당할지 몰랐지요. 하지만 최준례 여사의 병이 깊어 조계 밖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어요. 형편이 극도로 어렵고 당시 갓난 아이였던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의 배냇옷을 만들 천이 없어 내 헌옷을 손질하여 만들 정도였던지라 제대로 구완도 못했지요. 1925년 새해 벽두였을 겁니다. 최준례 여사 병이 위중하다 하여 달려갔더니 이미 가망이 없더군요. 꺼져가는 것이 역력한 얼굴 앞에서 나는 애타게 물었어요.

“선생님(백범)께 오시라고 할까요?” 그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겨워하던 최준례 여사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고개를 저으셨어요. 어차피 못 올 사람이라도 고개라도 끄덕여 보지, 평생 고생 시킨 남편 얼굴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고 불러 달라고나 해 보지, 최준례 여사가 야속할 정도였습니다. 시어머니 곽낙원 역사라도 부르자고 해도 도리질이셨지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조계로 뛰어갔지요.

백범에게도 소식을 전했지만 끝내 조계 밖으로 나오지 못하셨고 어머니가 오셨을 때 이미 최준례 여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셨습니다. 한글학자이자 임시정부 임정원 의원이던 김두봉 선생이 우리 글로 써 주신 묘비 앞에서 며칠을 펑펑 울었는지 모릅니다. 참람한 생각까지 들었지요. 독립이 뭐라고, 나라가 해 준 게 뭐라고 이리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고생을 하며 죽어가야 하는가. 그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왔습니다. 이세창이라는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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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몇 번 잠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신의주에는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책으로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분이 이세창씨였습니다. 그분은 저를 여동생 돌보듯 챙겨 주셨고 여자의 몸으로 위험한 일을 하는 걸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헤어지면서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내레 솔직하게 한 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시다. 독립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 같이 다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억세지만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던지는 이세창 씨의 질문을 들으면서 저는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은 우리같이 ‘귀골’로 태어난 사람들, 나라 있을 때 배 부를 만큼 부르고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 앞장서서 했어야 마땅했겠는데 이세창 씨는 대체 무슨 덕을 보았다고 ‘위험한’ 일을, ‘험악한’ 활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귀골로 산 사람들' 걱정을 하셨는가 말입니다. 그 분의 마지막 말씀에 저는 기찻간에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위인전에서 읽었던 쟁쟁한 독립투사들. 그분들 말고도 그분들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심지어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후손들의 기억으로부터도 배제된 채, 여러분이 오늘날 우리 말을 쓰고 우리 글을 읽고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자유를 위하여, 그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죽었다는 것을. 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이 일제 경찰에 붕괴되면서 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의 이세창 씨도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후손은 어떤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상해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은 만주에서 온 승전보에 열광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였지요. 일본군 수천 명이 죽었다는 이 기막힌 소식에 술 못 먹는 사람도 축배를 찾을 지경이었습니다. 기쁜 소식 뒤엔 눈물나는 얘기도 따르는 법이지요. 몇날 며칠을 먹지 못하고 싸우는 독립군 입에 주먹밥이라도 물리려고 광주리 이고 산을 오르다가 일본군 총에 맞아 죽은 아주머니 이야기, 일본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렸다는 풍물패 이야기, 그 와중에 기관총 중대장이었다는 최인걸의 이야기는 눈물겨웠지요.

아녀자들 비녀와 애들 돌반지까지 팔아 마련한 단 6정의 기관총 가운데 하나를 맡았던 그는 아예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묶어 버렸다고 합니다.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고 총에 맞더라도 죽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각오였겠죠. 그리고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집중 사격의 대상이 되어 돌아갔다고 해요. 우리는 그 이름만 들었지, 그가 어디 사람인지 나이는 얼마인지, 후손은 남겼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왜 죽었을까요.

김구 선생이 안중근 의사 가문과 사돈을 맺었고 안중근 의사 가문 사람들이 임시정부에 많았기에 나는 안중근 의사를 둘러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슴 아팠던 분은 안병찬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구한말, 정말 팔도를 탈탈 털어 몇 없었을 변호사였습니다.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들은 그는 폐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원천리 뤼순으로 달려와 변호를 자청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비롯한 외국인 변호사들의 변호를 일체 불허했고 안병찬 변호사는 이에 거칠게 항의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재판 때마다 참석하여 공판을 지켜 보았고 소송 기록을 열람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공판을 낱낱이 기록하여 역사에 남깁니다. 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인 “동포에 고함”은 그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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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을 세상에 알린 이로서 안병찬 변호사는 그 의미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법조인으로서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을 변호하였고 그 뒤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러시아까지 가서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을 받아 오던 그는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마적의 습격을 받아 외로운 피를 뿌리며 사라져 갔습니다. 대한제국 천지에서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곤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3대가 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던 변호사의 선택은 망명객이었고 독립군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요.

세계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역사 교육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일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어떤 고난을 무슨 용기로 극복했으며 그 투쟁에서 빛났던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정도를 알고 계신가요.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피를 토하여 대륙의 흙먼지를 적시며 살아갔던 그 허다한 사람들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물론 그분들이 여러분더러 자신들을 알아 보기를 바라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돌아간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이 열린 적이 있지요. 중국 정부의 호의와 도움 속에 근근히 유지됐던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기억하는 이로서 매우 감개무량한 순간이 돼야 마땅했으나 시진핑 국가 주석이 우리 대통령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땅을 치고 울 뻔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나 봤더니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디다. “한국의 유명한 지도자인 김구 선생님께서 저장(浙江)성에서 투쟁 하셨고, 중국 국민이 김구 선생님를 위해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시진핑은 우리 대통령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정말 그랬다면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슬몃 의심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가 회담을 했던 절강성 항주에서, 호남성 장사 찍고 광동성 광주 지나, 광서성을 거쳐 사천성 중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어보기는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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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떠납니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역사적 DNA로 후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나 가끔은 슬플 때가 있답니다. 과연 이 유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지요. 언젠가 어느 학자라는 작자가 “중국인 김구, 미국인 안창호가 만든 임시정부”라는 망발을 토해 낼 때 나는 그를 응징하고 싶었습니다. 연약한 여인의 손이지만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싶었습니다. 내 눈으로 보았던 흐드러진 꽃망울 같던 사람들, 그들이 뿜어내던 불길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어찌 이런 망발을 지껄이느냐. 이 독한 짐승들아 외치고 싶었습니다. 

2017년 12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에 오셨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옛 임정어른들이 사진을 찍던 그 대열로 요인들과 함께 사진도 남기셨군요. 아마 그분들도 이 모습 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실 겁니다. 그분들의 팔도 사투리로 감회를 털어놓으시겠지요.

“야 아주 잊혀진 거는 아니구마니.”, “어데 뭐 기억될라꼬 독립운동했능교.”, “보기 좋아유. 아주 보기 좋아유.” “대통령 얼굴 참 훤하지비. 그 부모님들은 우리 함경도 출신이라 했재이요.”, “참말로 짠하구만이라. 한국 대통령 온 게 시방이 처음인 게 맞소? 한중수교허고도 25년인디.”, “말하면 뭐해니. 내 가슴이 마이 아파.”


P.S. 정정화 여사와 임시정부의 이야기는 정정화 여사 아드님인 김자동 선생의 <임시정부의 품안에서>에 보면 상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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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017]
석정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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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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