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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06.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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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1. 공포의 마스터플랜

<파토의 쿡찍어 푸욱>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파토의 쿡찍어 푸욱> 4. 시대와 진보에 대한 단상

<파토의 쿡찍어 푸욱> 5. 사회의 품격(1)

<파토의 쿡찍어 푸욱> 6.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지난 편에 영국 예 딱 세 개만 든다고 했었는데, 두어 개만 더 들어보자꾸나.


영국에 가서 실망한 것도 많지만-그 부분은 우원이 출연한 <탁PD의 여행수다> 영국 편을 들으면 자세히 아실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서 놀란 것도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장면이다.


1.jpg

이건 웹에서 퍼온 독일. 운전하면서 찍기는 어려워서 

수십 번 겪었지만 사진으로 남은 건 없음.


요즘 우리나라도 일종의 이슈가 된 것 같은데, 영국에선 소방차와 구급차가 일단 뜨면 홍해의 기적이 벌어진다. 소위 선진국이란 나라에서는 대개 예외가 없는데 우원이 살던 영국도 물론 그랬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경이로왔고, 우원도 금방 여기에 익숙해졌다.


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운전자들은 즉시 그 소리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신경을 쓴다. 반대 편이 아닌 뒤쪽에서 오는게 파악되면 구급차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이미 구석으로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야 구급차가 가급적 속도를 줄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구급차 몇 십 미터 전방은 항상 뚫려 있다고 보면 된다.


신기한 건 공간이 절대 나올 것 같지 않은 좁아터지고 막힌 상황에서도 모든 운전자들이 어떻게든 이걸 해낸다는 거다. 여건에 따라서는 아예 멈춰 서거나, 차체 등에 약간의 손상을 각오하고 경계석 쪽으로 한 바퀴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차길이라는 게 모터웨이(고속도로)를 제외하면 갓길은 고사하고 한 차선에 차 한 대 가기에도 꽉 차는 경우가 흔한데-위 사진은 독일이라 여건이 상당히 좋은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주는 거다. 이건 이들에겐 단지 ‘에티켓’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노력의 과정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왜겄냐. 사람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지.


이 관련해서 우원이 20대 후반이던 90년대에 개인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어쩌다가 삼촌 차를 얻어 탈 일이 있었는데, 삼촌이 나이도 많고 돈도 좀 있는 옛날 분이라 당시 운전 기사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기사분이 운전하는 차 앞 좌석에 타고 가는데 뒤에 구급차가 나타났다. 근데 이분이 양보를 하기는커녕 되려 차선 경쟁을 하는 거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우원이 말했다. 저, 구급찬데 좀 보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분이 대답하길,


“아, 요즘 저런 거 다 가짜에요. 저거 연예인들이 방송 안 늦을려고 탄다잖아요.”


이런이런. 머 그 분의 지적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때 당시는 그런 연예인들이 실제로 문제가 됐었던 때고 아마 지금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부의 개념 없는 짓거리가 내 행위의 준거로 작동하도록 놔둬도 되는 걸까?


쉽게 말하자. 아니면 어쩔 건데?


의심대로 정말 연예인이 타고 있었다면-확인은 불가능하겠지만- 길을 터준 우리는 약간의 늦음과 속은 듯한 찝찝함 정도를 경험하게 되는데 사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만약 진짜로 시급을 요하는 환자가 타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의심과 고집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일의 가능성이 나로 인해 현실화돼서는 안되는 거 아니냐는 거다.


물론 그 기사분 생각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 불신이 애초에 시작된 건 일부 몰지각한 연예인들 때문이고 거기에 대해선 그들에게 분명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 불신을 재생산해서 나의 각박함의 근거로 삼아 행동으로 표출하고, 그 결과 누군가가 생명이나 건강에 큰 지장을 입는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 즉 그런 일을 함으로써 나는 구급차가 제 시간에 병원에 닿을 수 없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한 축을 담당하고 마는 거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건 이렇게 쉬운 일이다. 조금만 넋을 놔 버리면, 조금만 자기 합리화를 하다보면 우리는 순식간에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상태로 남 욕만 하면서 살기도 한다.


이런 것을 대략 몽매함이라고 부른다.


2.jpg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프란시스 고야, 1799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번 모든 행위를 각성과 성찰 속에서 해낼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 사회의 관습이라는 게 필요해진다. 이건 이미 모두가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릴 때 부터 당연하게 익숙해 지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라 행동하는 속에서 조금식 저절로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이런 게 선진국 사회에서 홍해의 기적이 당연스레 벌어지는 배경이고, 법이나 처벌 같은 걸로 강제해서 된 일이 아니다.


영국의 또 한 가지 훌륭함은 횡단보도 문화다. 우원은 영국 살다 한국 돌아와서 무심코 횡단보도를 건너다 몇 번이나 차에 치일 뻔 했다. 영국 생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3.jpg


위 사진이 전형적이 영국의 횡단보도다. 우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양 쪽에 흑백의 기둥이 있고 그 위에 노란 공이 올라가 있다. 저 공에는 밤이면 불이 켜진다.


이게 괜히 폼으로 있는 게 아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저 기둥과 공 때문에 횡단보도가 멀리서부터 눈에 확 띈다. 영국의 길들은 사진처럼 좁은 곳이 많기 때문에 저게 없다면 못 보고 지나치기 일쑤일 텐데, 특히 밤에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저기는 좁지만 꽤 넓은데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도 많다(사실 영국은 저런 좁은 길에도 교통량이 많은 경우가 흔하다).


울나라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가 나서서 주변을 잘 살피고 차가 안 올 때를 틈타 후딱 건너야 된다.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았기 땜에 보행자도 운전자도 이게 당연한 줄 안다. 하지만 함 따져보자. 그래야만 하는 거라면 대체 횡단보도는 왜 있는 걸까? ‘보행자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차 안 올 때 후딱 건너야 되는 거라면 무단횡단하고 무슨 차이가 있냔 말이다. 이런 의심이 든 적이 없다면 열분들도 옛날의 우원처럼 울나라의 후진한 교통 문화에 넘 익숙해져 있는 거다.


반면 영국에서는 어떠냐. 내가 걸어서 저 횡단보도에 가까이 가면 양 쪽에서 오던 차는 무조건 정차한다. 즉, 사람의 접근이 자동으로 차에게 빨간불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내가 횡단보도를 완전히 지나서 인도로 올라갈 때 까지 양쪽에 서 있는 차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저 사진보다 훨씬 긴 횡단보도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의 끝까지 지나가도 반대 편의 차조차 안 움직인다. 4년간 살면서 수백 번 횡단보도를 지났지만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러니 보행자는 길을 건너면서 차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고 되려 운전자들이 보행자의 눈치를 봐야 된다. 그런 관념 때문인지 무단횡단도 많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들이 서 주고 시내 한가운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재촉도 잘 하지 않는다. 이건 차에 비해 사람이 ‘약자’이기 때문에 생겨난, 마차 시대 때부터의 양보 문화다. 따지고 보면 길이란 건 원래 사람을 위해 생겨난 거고 이후에 차가 보행자의 권리를 뺏으면서 비집고 들어온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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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횡단보도에는 이런 화살표 표시가 잘 붙어있다. 

우리와 차길 방향이 반대기 때문에 이 화살표들은

영국 생활 초창기 우원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흥미로운 건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도 

이게 써져 있다는 점인데, 결국 빨간불에 건너도 괜찮다는 걸 함의한다.

애당초 교통 문화가 보행자 위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이다.


이런 역사성들이 녹아들어 보존되면서 약자에 대한 양보,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함께 작동하고 있는 예가 바로 영국, 혹은 대부분 선진국의 횡단보도 문화라고 보면 된다.


반면 울나라에선 신호등이 있던 없던 횡단보도가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마저 악용되고 있다. 우원은 교통질서에 열라 관심이 많아서 2006년 귀국 후부터 면밀히 관찰하는 중인데 가카 시대부터 ㅂㄱㄴ 정권 들어 이런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수법도 더욱 가관이다. 거짓과 반칙을 일삼는 위정자들과 그들의 천민적 세계관에 사회의 기본 바탕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


몽매함이란게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님.


쓰다보니 교통 관련된 이야기가 주종이 돼 버렸는데, 기왕 이렇게 흐른 김에 제안을 하나 해 보자.


요즘 같은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락가락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흔들림 없는 정의라고 믿고 추구했던 민주주의 가치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개념마저도 흔들리는 중이니 말이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일부 구석쟁이의 군시렁거림이 아니라 일베 같이 큰 커뮤니티는 물론, 실제로 권력을 가진 주류의 실세들에게서 퍼져 나가는 미친 시대다. 나아가 그런 것을 무슨 객관화, 선진화라고 착각까지 하고 있으니 실로 할 말이 없는 우리 역사의 대암흑기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 뭘 해야 될까. 머 우리 모두가 투쟁의 전면에 나서서 이 말도 안되는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여러가지 현실적 조건이나 개인적인 사정들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


그럼 할 수 있는 건 뭐냐.


바로 몇 가지 작은 원칙이라도 세우고 그것만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하는 거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세상 바꾸는 거하고 관련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매일 같이 점점 더 치사하고 각박해지기만 하는 사회, 단순히 무한경쟁 뿐 아니라 천박한 방법으로라도 밟고 이기는 것만을 독려하는 개쌍것들의 세상을 버티면서 우리마저도 조금씩 물들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 가능한 뭐라도 고수하는 거는 열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걸 위해서 오늘 이야기 한 교통문화 같은 게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10초 먼저 갈려고 정지선 넘고 클랙션 누르고 급차선 변경 하고 횡단보도 무시하는 마음 속에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옮아온 천민자본주의적 욕망의 성급함이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열분들도 김대중, 노무현 시대보다 지금 길에서 알게 모르게 거칠고 성급해 졌다는데, 우원은 ㅂㄱㄴ의 머리카락 한 줌을 건다.


근데 이거 솔직히 쪽팔리는 일 아니냐. 그래서 다른 건 못하더라도 운전석에서만은 우리 모두 함 선진국민이 돼 보자는 거다. 이건 세상이 아무리 좆같아도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운전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데는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이 나라 문화가 원체 그쪽에 후진하다 보니 못돼서 안한다기 보다는 몰라서 못 하는 경우가 다반수다. 그 중 한 예가 방향지시등, 즉 깜빡이 사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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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깜빡이는 왜 켜는 걸까. 아마 뒤에 오는 차에 내 차선 변경을 알려 주는 거라는 정도 평소 생각들 하고 있을 거다. 근데 실은 그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주변의 차와 보행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게 이넘이고 그만큼 중요하다.


아래의 그림을 통해 함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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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1번 차의 가능한 진행 경로는 직진과 우회전, 두 가지다. 만약 우회전을 할려고 하는데 깜빡이를 안 넣고 온다면 2번 차는 1번 차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게 된다(이런 상황에서 깜빡이 안 넣는 차 절라 많음).


허나 깜빡이를 진작에 넣어 우회전 표시를 해줬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2번 차는 1번 차가 직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우회전이나 좌회전(좌회전은 3번차량이 지나간 담에)을 할 수 있다. 즉 눈치 보면서 기다릴 필요 없어 긴장감이 덜어지고 일찍 의사를 교환했기 때문에 안전하고 그 결과 교통흐름도 원활해지는 거다.


선진국에서는 누구나 당연히 하는 상식적인 일이라 설명할 필요도 없는데 울 나라에서는 이때 왜 깜빡이를 넣어야 하는지 이유도 잘 모르고, 고로 실행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된다. 원칙대로 하는 습관만 들면 열라 간단한 일이다. 특히 1번 쪽에 차가 그림처럼 한 대만 오고 있다면야 지나가고 나서 가도 그만이지만, 여러 대 줄줄 올 때 2번이 그 길로 우회전해 들어가야 하는 경우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그냥 손 한번만 까딱하면 되는 일이다. 이런 정도 배려가 그렇게 귀찮은 걸까.


그럼 이제 1번 차량이 없다고 생각하고 3번의 입장에서 보자. 만약 2번 차가 우회전하려고 한다면, 깜빡이를 넣고 있으면 3번 차량은 맘편하게 좌회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안 넣고 있다면 2번 차가 우회전할 건지 좌회전 할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봐야 한다. 이런 순간순간이 길에서는 스트레스이자 사고의 가능성이다.


이번에는 2번 쪽 길에 사람이 건너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1번과 3번이 깜빡이를 넣지 않고 오고 있다면 원칙적으로 보행자는 두 차량이 다 직진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양반은 2번 차만 신경써서 건너면 되는 거다. 근데 울나라에서는 이런 원칙이 안 지켜지기 때문에 차들이 갑자기 회전해서 들어와 버리고, 건너던 사람은 깜짝 놀라거나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머, 아 내가 이런 상황들에서 깜빡이는 당연히 넣지, 하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요게 다가 아니다.


이제 밤이라고 가정하자. 1번과 2번 차는 없고 3번 차가 좌회전하려고 한다. 3번 차를 운전하는 열분들은 평소에는 깜빡이를 잘 넣는 편이라도 지금은 주변에 차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그냥 좌회전해 들어간다.


근데 실은 2번 쪽 길을 건너려는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그 위치에 누군가가 있다면 열분들의 헤드라이트가 그를 비추는 것은 차가 거의 다 회전한 이후고, 자칫 사고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라도 깜빡이를 켜줬다면, 열분들은 설사 그 사람을 못봤어도 그 사람은 열분들의 차가 돌아 들어온다는 걸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길을 건너려 하지 않았을 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깜빡이는 주변에 차가 있건 없건 사람이 있건 없건 큰 길이건 작은 길이건 무조건 넣어야 된다.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운전의 기본 원칙인 거다. 이유는 앞에서처럼 우리가 주변 상황을 늘 완벽하게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깜빡이를 넣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내 상황 판단의 한계를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고, 타인의 불편과 모두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단 말씀이다.


깜빡이 하나를 예로 들긴 했지만 정지선이나 횡단보도, 주차 등등 다 마찬가지다. 이런 원칙들이 몸에 완전히 배어있는 수준이 돼야 진짜 선진국 수준의 교통 문화에 도달한다. 사실 이 정도는 맘만 먹으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수고롭지도 않은데 그래야 할 이유를 잘 모르고-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이 사회에선 자연스레 깨달을 기회도 없으니까- 중요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거다.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합리적인 생활 습관과 원칙의 고수는 대통령 선거나 공약 같은 것에서만 작동하면 되는 게 아니다. 사소한 약속들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거대한 원칙들이 지켜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말마따나 생각하는 대로 사는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걸 잘한다고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독립유공자가 대우받으며 복지가 실현되고 교육문제가 해결되고 통일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거대한 일에는 우리의 손길이 바로 미치지 않으니 이런 세상 살면서 정신줄 놓지 않기 위해서, 길에서라도 선진국민 되기 함 해 보자는 거다.


7.jpg

그래, 국격


머 이렇게 썼으니 짐작하시겠지만 우원은 저런 것들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편이다. 근데 사실 우원도 옛날에 비해서는 꼼수를 부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 분명히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무력한 와중에 이런 것 하나라도 지켜가려고 신경을 쓰고 사는데, 이런 작은 노력이 우원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분명 있다.


사실 울나라 같은 사회에서 운전이던 뭐던 우아하게 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매일매일 겪는 작은 것들이라도 하나씩 다잡는 노력이 계속된다면 나중에는 결국 큰 가능성으로 돌아올 거다.


기본이 안 갖춰진 이 사회를 언젠가 품격있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챙겨야 하는 건 어쩌면 이런 것들인지도 모른다.


다음 시간에 뵙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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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