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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18. 화요일

김재홍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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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딴지 Books 1탄 '박정희소백과사전' 전격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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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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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앱스토어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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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욕망을 100% 해소함과 동시에, 

개성과 재미를 듬뿍 때려넣은 딴지 E-Book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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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김 선배가 궁정동 안가 얘기를 했으니까 제가 더 옛날 안가 얘기를 할게요.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쭉 나오잖아요. 대선 같은 큰 선거가 있으면 전국에 유세를 다니는데, 지방에 포스트가 몇 군데 있습니다. 부산의 온천장, 대전의 유성온천, 구미의 금오산 관광호텔 등이 인근 지역에 가면 박정희가 머무는 곳이에요. 이왕이면 편안한 숙소에 가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는 수발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알려진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시절에 지방에 있는 지방 안가 같은 거죠. 안가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런 역할을 한 곳이에요.


언젠가 선거 때 대전에서 유세를 하고 유성온천에서 하루를 머물게 됐어요. 육 여사도 유세할 때 일부는 동행하는데 대전 유세도 같이 갔었던 것 같아요. 박 대통령이 식사하러 간다고 잠깐 나갔다가 숙소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왜 안 들어오냐고 아랫사람들에게 묻자 이런저런 변명을 하다가 어디에서 쉬고 계신다고 말을 했어요. 그러자 육 여사가 그 사람을 채근해서 쉬는 곳을 찾아간 겁니다. 가서 문을 확 열어버린 거예요. 당혹스러운 장면이 나왔던 모양인지 박정희가 육 여사에게 재떨이를 던져버렸습니다.



김재홍 당당하네.



정운현 육 여사가 재떨이에 얼굴을 맞아 부었던 일도 있다고 해요. 그 시대에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와 같은 일이 더 있습니다. 지난 번 ‘용인술’ 얘기할 때 언론인 문명자 씨를 얘기한 적 있지요. 그 분이 쓴 <박정희와 김대중>에 나오는 이야기이자 제가 문명자 씨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궁정동 안가가 생기기 전에 상명대 근처에 있는 세검정 근방에 모 재벌 저택이 있었어요. 재벌의 본가 뒤에 별채가 하나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 집을 이용하게 됐어요.


‘김대중 납치사건’ 이전이라 문명자 씨가 박정희 내외와도 친해 청와대에 가서 밥도 먹고 그랬습니다. 미국에 있던 문 여사가 마침 서울에 왔다가 문제의 재벌 회장 부인과 안면이 있어서 점심 무렵에 만나서 차를 한 잔 했는데, ‘우리 집에 높은 양반이 가끔 오고 오늘도 저녁에 온다는 얘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 여사가 이 얘기를 듣고 육영수 여사에게 가서 일렀어요. ‘박 대통령이 어디 가서 낮밤으로 어쩐다는데 단속 좀 하시죠’ 이런 투로 이른 거예요. 재벌 집에 가는 시간을 대충 알게 된 육 여사가 이곳을 덮친 겁니다. 이런데 비하면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에서 운영하는 상당히 공식적인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관립’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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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관립 비밀요정’이고요. 그 비밀요정의 책임자가 사무관이었어요. 중앙정보부 산하.



정운현 ‘국립 안가’죠. 재벌 별채나 선거 때 지방 숙소는 비공식 공간인 셈인데 이런 게 시간이 지나면서 귀찮았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청와대 바로 옆에다가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았겠느냐 추측이 가능하고요.


또 하나는 육영수 여사 이야기입니다. 육 여사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내면은 잘 모르지만 후덕한 얼굴에 사람들이 ‘국모상(國母像)’이라고 할 정도로요. 자세한 것은 모르니까 더 이상 얘기를 못하겠는데 그런 면모가 있었지요. 다만 육 여사가 남편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을 잘 안 했어요. 재떨이를 각오하고 쳐들어가는 모습도 그렇죠.


돌아가신 방원철(신경군관학교 1기생) 씨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5.16 전에 만주군관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후배 부부끼리 연포해수욕장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밤에 아내들끼리 남편 바람피운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육 여사가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밤에 서울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방원철 씨는 ‘육 여사 성질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만 해도 대단하다는 실감을 못했는데, 재벌 집 급습한 것 같은 얘기를 들으니 이해가 돼요. 재벌 집에 단신으로 갔는지 누구를 대동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찾아가서 박살을 낸 거예요.



김재홍 아무리 남편이 정치적으로는 절대 권력자라 하더라도 퍼스트레이디가 견제하지 않으면 사생활이 타락하기 때문에 그런 면이 필요한 겁니다. 육 여사의 시샘을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10.26 당시 술자리 풍경이 알려지면서 중요한 대목은 그 때까지 많은 여인들을 불러다가 술자리 행사를 가졌던 것입니다. 박선호 의전과장의 증언에 따르면, 한 달에 열 번 정도, 사흘에 한 번 꼴이거든요. 자기는 1년 365일 내내 명절도 공휴일도 없이 일했다고 그랬어요. 그것을 두고 박정희 신봉자들은 ‘육 여사 돌아가시고 부인이 없으니까 너무 외로워서, 국정 스트레스는 많으니까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근데 지금 정 국장 얘기처럼 육 여사 돌아가기 전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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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직후의 궁정동 안가의 연회장 사진. 오른쪽 위가 차지철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육 여사가 청와대 막료들 중에서 제일 싫어한 사람이 경호실장이었어요. 항상 박정희와 함께 다니기 때문에 그렇죠. 부부싸움을 하면서까지 경호실장을 견제했는데요. 나중에는 청와대 사정수석을 시켜서 경호실장의 소문이 안 좋다고 사재 조사를 시킵니다. 경호실장이 나중에 이를 알고선 화가 나서 사정수석실에 엽총을 들고 뛰어들어 ‘네가 내 뒷조사한다며’라며 방아쇠를 당긴 일이 있었어요. 물론 사람을 향해 쏜 것은 아니고 천장을 향해 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박정희의 이런 행위가 퍼스트레이디가 없었기 때문에 외로워서 한 일은 아니었다는 거죠.



정운현 제가 토를 달아 이어간다면 육영수 여사 사후에 아내가 어떤 이유로든 곁에 없고, 박정희가 노인도 아니고 50대니까 그런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푸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정식으로 재혼을 한다든지 하면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박정희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남자고 자연인이니까. 물론 대통령이 결혼하는 것이 쉽진 않았겠지만 권력을 앞세워서 그렇게 한다면 합리화가 될 수 없죠. 


또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 때가 벌써 4~50년 전이니 당시 남자들은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전 권력자로 이승만 대통령도 있고, 같은 정도의 권력은 아니겠지만 윤보선 대통령도 있고, 장면 총리도 있었죠. 이들은 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는 거죠. 역대 대통령이 전부 그랬다면 유독 박정희만 비판하는 것은 심하다고 할 만 하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에게만 그런 얘기가 있지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통령 시절에 이런 얘기가 없습니다. 물론 YS나 DJ가 야당 정치인 시절에 요정에서 어쨌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것이 권력을 앞세운 것은 아니라는 거죠. 몰라요. 물론 요정에서 야당 유명 정치인들도 권력자로 비춰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안가를 만든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들이야 나이가 더 많아서 대통령이 됐고, 또 사회가 많이 투명해진 점도 있지만 유독 박정희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박정희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옛날 일이니까 ‘남존여비’나 또는 ‘허리 아래 얘기는 안 한다더라’ 이렇게 치부할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훨씬 이전에 권력을 가진 사람도 권력을 성폭력의 도구로 휘두를 사람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원인과 책임을 박정희에게 따져야 한다는 겁니다.


박정희가 경제 건설을 했다는 이유로 이런 것까지 도매 급으로 상쇄될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게 바로 공과 과입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공을 깎을 이유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 냉정하게 봐야지 옛날 영감들 다 그랬다 이렇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는 거죠.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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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제가 박정희에 대한 비판 기사를 많이 쓰고 발언도 하니까, 어떤 분들은 그 배경을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직접 물어보기도 해요. 저는 이렇게 설명하지요. 첫째, 박정희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두환·노태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그들이 한국현대사에서 32년 동안이나 반민주적인 군사권위주의 통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달렸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이 다수 한국인의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고요. 그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고 역사 문제라는 겁니다.

 

 

둘째, 잘못 신화화된 박정희 숭배 증세가 후대에 미친 악영향과 왜곡된 정치적 유산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제 자신이 박정희와 전두환 치하에서 고통당하고 살았던 직접 체험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후배 세대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책무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박정희 독재 아래서 서울대 학생간부로 반독재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1971년 위수령 때 캠퍼스에서 체포돼 경찰과 중앙정보부에서 일주일 이상 고문 조사를 받은 후 학교에서 제적당한 채 강제 입영됐습니다. 이 때의 동지들이 ‘71동지회’를 만들어 함께 해오고 있고, 서울대 민주동문회인 ‘자하연’이 최근 1970년, 80년대 민주화운동 그룹으로 결성됐지요. 전두환 치하에서는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5.18광주시민항쟁을 보도하기 위한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가 강제해직 당해서 그 후 8년 간 해직기자로 지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가 결성되어 있습니다. 그 때 모교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했지만 장래가 불투명하고 암울한 기간이었지요. 자연스레 한국 정치를 전공하면서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1987년 6.10 시민항쟁이 승리한 덕택에 기자 복직을 했지만 언론 상황은 전과 질적으로 달라진 모습이었고요. 그래서 박사학위 해 놓은 것도 있고 해서 대학교수로 전업하고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대통령선거 후 정당개혁 운동이 벌어질 때 자문 역할을 하다가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 4년간 의정활동을 하며 언론개혁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또 공안당국과 악연이 닿았습니다. 2013년 2월부터 6월 초까지 서울중앙지검과 서울 동작경찰서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새누리당이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일 직전에 고발했더군요. 이 책의 대본인 ‘그것은 알기 싫다’ 내용 중 어느 작은 부분인데요. 그것이 박근혜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부인 김호남 씨에 관한 얘기였는데, 별것도 아니고 많이 알려져 있는 얘기를 소개한 것입니다. 경찰 진술조서를 쓰는데, ‘나는 한국현대정치사를 전공하고 강의하는 대학교수로서 학문의 자유에 바탕을 둔 활동이었다, 프리랜서 언론인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 시민으로서도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한다’ 등등의 방어 논리를 폈습니다. ‘2012년이 대통령 선거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해가 유신쿠데타 40년이라는 사실이고, 이는 전공학자 뿐 아니라 국민 누구나 한 번 되짚어 봐야 할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2년 전인 2011년은 5.16 쿠데타 50년이어서 그 때도 나는 ‘5.16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여러 학술대회를 주관했고 토론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말 구차하고 굴욕적으로 진술하고 해명했고 결과는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4~5개월 동안 무척 기분 나쁘고 찜찜해서 언론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시민단체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될 때 합류해서 처음엔 자문위원으로, 그 후 공동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그 때 팟캐스트로 방송된 것을 보완·재정리해서 전자책으로 출간하게 된 이유도 바로 5.16 쿠데타와 유신 쿠데타에 대한 역사 평가 작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요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데 일조가 되기 바랍니다.



정운현 고생하신 김 선배에 비하면 저는 거의 ‘춘삼월 호시절’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 때 이렇다 할 학생운동을 한 적도 없고, 그래서 구속당한 적도 없습니다. 대학 입학으로 치면 78학번인데요. 박정희 정권 막바지에 대학을 다녔고, 신문사 입사는 84년이어서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도 비껴간 셈입니다. 이런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박정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친일, 친일파 문제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 97년 봄, 당시 저는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에 소속돼 있었는데요, 회사 차원에서 ‘실록 박정희 시대’ 장기 연재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 팀이 주도하고 정치부 기자 2명이 합류해 6~7명이 연재를 진행하는데요. 저는 박정희의 전반부 인생인 출생부터 5.16 직후까지를 맡았어요. 그래서 출생지인 경북 구미에서부터 시작해 대구사범학교, 만주군관학교, 육군사관학교, 5.16쿠데타 까지 취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와 인연을 맺은 각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게 벌써 17년 전의 일이 돼 버렸는데 그 때 만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작고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박정희 관련 증인들을 마지막으로 인터뷰 한 셈인지도 모르겠어요. 특히 박정희의 친일이나 좌익 분야를 증언해 줄 사람은 거의 다 사망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그 때 입수한 자료나 증언은 박정희 연구에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김재홍 해직 이후에는 모교인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신제 박사과정 1기로 들어가 학생신분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대학 재학시절 학생간부일 때 알았던 교수님들이 고위 보직을 맡고 계셨고, 저를 신임하셔서 대학신문 편집책임자로 임명해 주셨어요. 학교 내에 일자리를 얻어 공부하는 행운이었지요. 나중에 학위를 마치고 동아일보 원래 제자리에 복직했습니다. 직접 탄압을 당했던 기자로서 역사의식도 작용해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파헤치는 기사를 많이 썼고 그것을 책으로 냈더니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어요. 책이 많이 팔렸어요. 그 때만해도 비화를 언론에 마음대로 쓸 수 없었는데 그것을 다룬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정운현 그 때 동아일보에 김 선배가 연재했던 ‘군軍’ 기사하고 다른 분이 했던 ‘남산의 부장들’. 이것은 중앙정보부 비화를 연재한 것인데 그 무렵에 언론계?신문업계에 상징적인 연재물이었죠. 이 연재물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힘이 됐을 거예요. 그 정도 되니까 책도 많이 나갔겠죠. 그런데 제가 쓴 <실록 군인 박정희>는 왜 안 팔렸을까요?



김재홍 지난번에 잠깐 얘기했지만 내가 너무 우회적으로 얘기했나? 책 제목을 ‘군인 박정희’가 아니고 ‘정치군인 박정희’라고 했으면 많이 팔렸을 수도 있을 텐데.



정운현 앞에 ‘정치’를 안 넣어서 그랬군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실록’으로 쓰다 보니 좀 정직한 제목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판사에서도 그렇게 요구를 했고요.



김재홍 그럼요. ‘군인 이종찬’은 맞아요. 그러나 ‘박정희 군인의 길’, 이런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군인이 아니에요. 권력욕 때문에 선생 자리 버리고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군으로 간 것이죠. ‘군인 박정희’는 박정희 정체성에 맞지 않는 제목입니다.



정운현 김 선배 지적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저는 취재를 통한 실록이다 보니 쉽게 <실록 군인 박정희>라고 한 것입니다. 책이 나오고 난 후 당시 박근혜 의원에게 한 권 보내줬어요. 그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면모도 있겠지만, 딸이라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만주 시절이나 대구사범 시절을 어떻게 소상히 다 알겠어요. 다른 뜻은 없고 아버지에 대한 실록이니 한 번 살펴보라고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책을 받았다는 연락도, 고맙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아마 내용 중에 엉터리가 있다면 진작 소송을 걸어왔을 텐데 여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딱히 틀린 내용은 없나 봅니다.


아무튼 이번에 새로 풀어서 펴내는 <박정희 소백과사전> 책이 박정희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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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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