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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20. 목요일

펜더

 

 






담담하게 쓰겠다. 이 기사를 쓰면서 내 신상에 있었던 일(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상황) 몇 가지를 먼저 말해야겠다.



1) 2월 28일부터 3월 20일까지 개점휴업 상태로 글을 못 쓰고 있었다.

 

2) 나일론 끈을 살까, 마포대교로 향할까를 고민했다.

 

3) 아내와 장문의 문자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아직 한이 서렸고, 이제 파탄 났는지 안 났는지 모를 내 결혼생활을 다시금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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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며칠 전 자동차가 지나가는 도로에 큰 대자로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자동차가 다가왔을 때 일어났고, 그 자동차 운전자는 날 피했다. 그 운전자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짜증도, 분노도 아니었다. 나에 대한 ‘공포’였다.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

 

5)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소주, 양주, 맥주 가리지 않고 마셨다. 4시간 동안 양주 2병 반을 마시고 다 토해냈다.

 

6) 물경 a4 10포인트로 30매 가까이 쓴 이 기사의 프로트타입, 테스트타입, 양산 1호기 글을 3번이나 갈아엎었다.

 

7) 이 곳 작업실의 총책임자 분이 내 방에 와서 술잔을 나눴다. 아주 진지하게,

 

“ㅇㅇㅇ작가... 죽지 마. 잘못된 생각하면 안 돼.”

 

라며 내 손을 꼭 잡아줬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셨다. 이 분은 술담배를 거의 못하시는 분인데, 그 날 밤 나와 함께 싸구려 양주 2병과 보드카 반병을 마셨고, 날 위해 같이 담배도 태웠다.

 

8) 20일 동안 내가 계속 글을 써서 먹고 살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진지하게 취직을 고민하고 있으며, 원자력 발전소 경비원으로 취직할까 생각하고 있다.(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실제 고민을 하고 있다.)

 

9) 진지하게 김창규를 찾아가 죽이진 않더라도... 뺨이라도 한 대 갈길까를 고민하고 있다.

 

10) 이 와중에 우연찮게 서울에서 어머니를 뵈었다. 내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안쓰러운 듯 취직을 말씀하셨다. 설날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어머니 왈...“네가 정말 열심히 살았던 거 다 안다. 고생했다...” 라며 날 안쓰러워 하시던 모습과 겹쳐지며, 급속도로 내 ‘전직(轉職)’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됐다.

 

11) 넉 달 간 지킨 작업실 내에서의 금연 원칙이 깨졌다.

 

12) 이제껏 지켜왔던 모든 마감이 일시에 다 펑크가 났고, 난 현재 아노미 상태가 됐다.

 

13) 난데없이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어머니나 동생에게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도 부자간의 묘한 감각 때문일까? 생뚱맞게 “열심히 해라...넌 할 수 있을거야.” 란 열혈 스포츠물 대사를 들어야 했다.

 

14) 토사곽란이 이어졌다. 뭘 먹으면 그대로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15) 친구의 부탁으로 성경을 읽고 있다. 로마서를 읽고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내 방황이 끝날 것이란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경을 붙잡고 있다. 이번 주말에 교회를 갈 예정이다.

 

16) 내 스스로 내가 ‘나태’했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17) 내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술을 마셨다.

 

18) 자기연민과 자기비하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19) 여동생은 자기계발서의 좋은 글들이나 이미지들을 묶어서 카톡으로 계속 날리고 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직장을 잡는 것도 좋다며, 죽는 것보다는 그렇게 사는 것도 좋다고 위로한다.

 

20) 조울증의 극단을 오갔다. 어떤 날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다른 날은(거의 대부분은) 바닥까지 떨어져 머리를 벽에 내리 찍기 시작했다. 내 오른쪽 이마가 살짝 찢어졌다.

 

21) 힘들다고 못 쓴다고 김창규에게 문자를 보내자 이상한 문자가 왔다. 이 글 보고 싶다고, 횡설수설했다. 그 문자를 한참 내려다봤다. 다시 쓰겠다. 쓰긴 쓰는데, 이게 내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고지시켰다.

 

22) 각종 진통제와 수면제를 씹어 먹고 있다. 졸피뎀 따위는 이제 수면제도 아니게 됐다.

 

23) 휘영청 둥근 달을 보며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24) 모 소설가 선생님은 이 글을 쓰지 말라고 했다.

 


대충 이 정도 일을 겪었다. 믿을 사람은 믿어도 좋고, 믿지 않을 사람은 안 믿어도 좋다. 내가 어떤 각오로 이 글을 마주하고 있는지 말할 뿐이다. 딴지에 첫 글을 올린 게 2000년이었을 것이다. 15년? 그 정도 됐을 것 같은데, 이제껏 쓴 글들 중 날 이만큼 힘들게 했던 글은 없었다. 아니, 내 인생을 통틀어 이정도로 힘든 글은 없었다. 이 기사를 쓰는 와중에 난 정리하려고 한다. 내가 글에 가졌던 미련들을 말이다.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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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퇴고(推敲)’란 걸 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대로 된 ‘글쟁이’라면, 글을 완성하고 기본적으로 한 번 소리 내 ‘읽는다’ 그렇게 비문과 오탈자를 걸러내고, 다시 수정을 한다. 문맥도 고쳐 보며, 글을 완성시켜 나간다.


“작가란 끊임없이 고쳐 쓰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난 작가가 아니다.

 

실제로 내 스스로를 ‘작가’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002년 딴지일보 2대 편집장이었던 최내현이 내게 붙여준 별명 “글자판기”, 이 말이 날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말일 것이다.

 

(이 별명이 난 썩 마음에 든다. 그게 바로 내 인생이다.)

 

난 “속필(速筆)”이다. 내 유일한 장점이다. 원래부터 글을 빨리 썼는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 빨리 쓰게 됐는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확인해 줄 수 있는 건 ‘꽤’ 빠르다는 것이다. 얼른 감이 안 올 것이다. 일례를 하나 들겠다.

 

“O작가, PD수첩 봤지? 2편 나오기 전에 원고 뽑아내자. 황우석이 한참 달아오를 때 일주일 안에 원고 뽑고, 바로 인쇄 넣으면 10일 안에 책 깔 수 있어. 우리 이거 하자 응? 이거 쓸 사람 O작가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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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황우석 VS PD수첩> 사건. 그 당시 모 출판사(꽤 탄탄했던 중견 출판사다)의 사장이 내게 직접 원고청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이 통화내용을 옆에서 듣던 최내현 편집장과 함주리(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레전드), 카오루(역시 레전드) 등등이 황당한 듯 날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의뢰’는 정중히 거절했다.

 

실감이 안 가는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

 

10일 만에 책 한 권을 찍어 낸 적이 있다. 회사에서 리프레시 휴가 일주일을 줬는데(그 당시 2달 가까이 회사에서 침식을 하며 커다란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당시 내 소원이 ‘목욕’하는 것이었다. 하루 수면 3~4시간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기에 무급 휴가 3일을 붙였다. 10일 간 달렸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찍어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내 이름으로 나간 책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필명’으로 나간 책이다.(펜더 말고도 출판용으로 쓰는 ‘필명’이 하나 더 있다.) 사전에 원고에 대한 방향설정이나, 컨셉 같은 걸 정해놓은 적도 없었다. 돈이 꽂혀서 썼다. 그 뿐이다. 원고의 질은 어느 정도 담보를 했던 것 같다. 대만과 일본에서 판권 구매의향을 보였고, 실제로 대만에서 이 책의 판권을 가져갔으니 말이다. 아, 혹여 ‘문고판’을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덧붙이자면, 신국판 사이즈로 300페이지가 너끈히 나왔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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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이런 패턴으로 살아왔다.

 

내 글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 중 한 명인 최내현 전(前) 편집장이 내게 진지하게 이런 충고를 한 적이 있다.(그가 술 마시고 충고한다는 건 정말 ‘진지’하다는 소리다.)

 

“펜더, 딱 3개월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작품 하나만 쓰지 그래? 그럼 뭐가 나와도 하나 나올 텐데.”

 

그때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 사정 뻔히 알잖수.”

 

사실이다. 3개월을 노는 순간 내 가정은 무너진다. 마쓰모토 세이초처럼 걸으면서 구상하고, 밤잠 설쳐가며 한줄한줄 완성하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낮에도 머리를 쥐어짜내 글을 쓰고, 밤에도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시도를 해 봤는데, 난 세이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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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

41살에 등단해 700권이 넘는 책을 써냈다



“...이제 그만 내려놓자.”

 

란 말로 대신 할까 한다. 아내란 여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학대’해 가며 글을 쓰진 못했을 것이다.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너무 건방져 질까봐 핸디캡으로 내 옆에 붙여준 여자가 바로 내 아내일 것이다. 신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술에 취하면 했던 소리다. 한때 내가 내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동력원이 바로 이 아내에 대한 ‘증오’였다. 지금은 애증으로 수위조절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다. 그 증오가 200자 원고지 80,000 매를 쓸 수 있었던 힘이 되어줬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아내에 대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도 이렇게 되고 싶어서 했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또한 남편이란 작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풍족하게 해주지 못했던 문제이니... 어쩌면, 아니, 내 탓이다.)

 

(카와카미 미노루를 보면서 ‘나도 인간인쇄기’로 업그레이드 해볼까란 망상도 해 봤다.)

 

...하루하루 생활비의 압박과 ‘빚과 이자의 추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난 쓰고, 또 쓰고, 썼다.

 

(그렇다고 많이 번 건 아니었다. 그저 글쟁이로 겨우겨우 4인가족의 생활비를 맞추는 수준이었다. 떼돈을 벌거나 한 건 아니었다.)

 

덕분에 난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을 쓰게 됐고, 그 와중에 하나의 결론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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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X놈이 가져간다.”

 

뭔가를 ‘원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약자이다. 내 지난 15년 글쟁이 인생은 약자로 시작해 약자로 끝이 났다.

 

 



1. 두려움의 결론

 

“그래서 지금 써야한다.”

 

라는 사실을 확인케 해줬다. 얼마 전 작업을 위해 끌려갔다가,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과장도 푸념도 아닌 ‘사실’이다. 의외로 담담했다. 2주 만에 상업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뽑아낸다는 게 이렇게 힘에 부칠 줄 몰랐다. 작년부터 몸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슬슬 몸이 말을 안 듣는데? 이러다 2007년 꼴 나는 거 아냐?”

 

란 말이 튀어나왔다. 2007년... 2007년 10월부터 이듬해인 2008년 봄까지 난 거의 죽음을 맛봐야 했다. 갑자기 글이 안 나왔다. 모니터가 새까맣게 보이기 시작했고, 글이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국내에 출시된 모든 종류의 키보드를 다 사서 끼워봤지만, 결국 글이 안 나왔다. 나중에는 모니터, 모니터 보안필름, 컴퓨터까지 다 바꿔 봤지만 결국 글이 안 나왔다. 거의 8년 가까이 글에 치여 살았던 후유증이었다. 이때 쉬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내는 갑자기 6천만 원 가까운 돈이 필요하다고 내게 말했고, 난 괴성을 지르며 책장을 내 머리로 찢고, 주먹으로 책장을 박살냈다. 뒤이어 전동 바리깡으로 내 머리를 밀었다.

 

...다음 날 영화사와 출판사를 찾아가 계약서 몇 장에 사인을 하고, 돈을 받았다.

 

(지금 기억으론 그걸 다 메꾸지 못했던 기억이다. 결국 다음 해에 드라마 팀에 합류하고, 선금 받은 걸로 메꾼 거 같다. 어쨌든 메꾼 거 같다. 아니라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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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빚”이었다. 글이 나오지 않는데도 당장에 돈이 필요했기에 여기저기에 계약서를 남발했고, 선금을 땡겼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박수건달이었나? 아니면, 다른 뭔가의 시나리오 초고를 뽑다 말고, 화장실에서 밤새도록 토했다. 사흘째 되는 날 영화사에서 잡아 준 호텔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도망갔다. 물론, 감독님에게 정중히 사과했고, 돈도 토해냈다.(다음 날 바로 돌려줬다.)

 

(아까운 아이템이었다. 뭐 그래도 최소한의 내몫은 했고, 나중에 정산할 때 날 챙겨준 감독님과 PD님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 다음으로 이어서 쓴, 아니 처음부터 다 쓴 작가님, 아니, 감독 작가님이 워낙에 잘 뽑아내서... 아마 내게 될 게 아니었나 보다.)

 

이제는 알게 됐다. 내 몸에서 ‘신호’를 보낸다는 걸. 당연한 것일 게다. 기계도 한계란 게 있는데,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 ‘데려가는’ 이들에게 난 ‘기계’이다. 얼마 전 날 데려간 영화관계자가,

 

“너 같은 ‘기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참기름처럼 짜면 나오니 말야.”

 

란 말을 했다. 잠시 멍해졌다. 난 그런 존재였구나.(물론,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그분이랑은 정말 호형호제로 친한 사이다. 예민해지다 보니 좋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이제 한계가 온 거 같다. 기름이 나오는 ‘속도’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 덤으로 몸 상태도 많이 나빠졌다. 두려움을 직시하기로 했다. 더 이상 이런 속도를 낼 수도 없고, 냈다가는 지난 2007년 겨울 상태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단 두려움. 이 두려움에는 ‘생명’도 포함돼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날 정리하기로 했다. 이 글이 그 정리의 과정 중 하나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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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서 작가란 직업군의 ‘수명’을 조사해 봤는데, 거의 대부분 60세를 넘기기 힘들었다. 60세 이쪽저쪽이었다. 작가 직군들 중 시인의 수명이 제일 짧았던 걸로 기억된다.)

 

 


2. 얼마나 썼나?

 

우선 내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지부터 말해야겠다. 지금부터 말할 내 ‘글 인생’에 등장할 ‘작업의 양’은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글들만 나올 것이다. 그 기준이란,

 

 

① 경제적 대가, 즉 ‘고료’를 받은 것

 

② 대가를 받지 못했지만, 정식 계약서를 작성해 계약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썼던 글

 

③ 어떤 형태로든 ‘독자’에게 선을 보였던 글

 

 

즉, 경제적 대가를 받고 쓴 글, 혹은 경제적 대가를 약속 받았지만, 대가를 받지 못하고 납품한 글, 그리고 그 글이 책, 영화, 연극 혹은 기타의 다른 형태로 독자에게 보여줬던 글만으로 한정한다. 여기서 제외되는 글은 습작기간에 썼던 글과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수도 있는(혹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글은 제외하겠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지만, “인터넷 댓글 알바” 같은 저열한 수준의 글이 아니라 제대로 묶여져 나올 만한 분량의 글이며(또한 제대로 묶여져 나왔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계약서’ 혹은 ‘용역계약서’를 작성한 후 작업에 들어간 글도 있다. 이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글은 내가 이제껏 써왔던 글의 전체 분량에서 15% 정도를 차지한다.

 

(변호사들의 조언을 붙이자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가 적용될 소지가 있는 글들이다. 어떤 경우는 미국과 연관 된 글‘들’도 있다. 미국법정에 설 수도 있는 ‘글’이었다. 이런 글들은 논외로 치겠다. 아마도 이게 공개되면 꽤 시끄러워질 것이다. 계약서상에 명시 돼 있는 ‘신의信義’ 조항과 거래에 대한 내 철학이 있는 한 무덤까지 안고 갈 일이다.)

 

(동영상 대본 역시 제외하겠다. ‘공정한’ 법적 절차를 밟아 정부 납품을 한 ‘글’을 포함해 그렇지 않은... 그러니까 ‘일반인’ 혹은 ‘한없이 공무원에 가까운 일반인’이 의뢰한 글들 역시 제외하겠다.)

 


■ 2003년부터 2014년까지 내 이름을 박고 출간된 책만 16권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필명’(펜더 말고, 다른 ‘멀쩡한’ 필명이 있다.)으로 나간 책이 몇 권 있다.(이중 1권은 대만과 일본에서 판권을 사가려고 했었고, 1권은 대만에 팔렸다.) 내가 썼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간 책이 3권 있다. 정식으로 고스트라이팅 계약을 해서 쓴 책이 최소한 1권 이상 있다.(나머지는 계약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자비출판의 경우를 포함한다면 수많은 인물들의 자서전, 회고록 등이 내 손에서 나왔다. 이는 제외하겠다.)


(이 책 분량은 신국판 사이즈 300쪽 이상을 기준으로 한다. 즉, 서점에 깔린 책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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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쓴 책의 일부 / 편집부 주 



■ 중앙스포츠 일간지 3군데와 무가지 1군데에서 7년간 일일연재를 했다.(주 5일인 경우도 있었고, 주 6일인 경우도 있었다.)

 

 영화시나리오, 연극, 드라마 대본을 썼다. 영화의 경우는 1작품이 작가로, 1작품이 각색으로, 1작품은 ‘기획참여’의 형태였다. 영화판을 보면 알겠지만, 이 정도 하려면 최소한 열 배 이상의 글을 써야 한다. 중간에 엎어진 영화까지 치자면 끝도 없고, 한 작품의 경우는 수정 50고까지 간 적이 있다.(역시 작품이 들어가지 못했다.) 연극의 경우는 문광부에서 지원금을 받아 대학로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한 작품이다.(연장공연도 했다.) 드라마의 경우는 드라마 외주제작사에 들어가 정식으로 계약금과 고료를 받고 작품을 썼다.(50분 물 9회 대본까지 썼다.) 문제는 외주사 사정과 방송사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편성이 엎어졌고, 드라마는 취소됐다.

 

 지방 방송사 라디오 프로의 “영화 소개코너”에 1년간 게스트로 참여하게 됐다. 30분 분량으로 주1회였는데, 대본은 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했다.

 

 23분, 26화 짜리 국내제작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페이’ 문제로 포기했다.

 

 대본소 만화(김성모 만화를 생각하면 된다.) 스토리를 썼다. 12권 한 질짜리 하나만을 ‘증명’할 수 있기에 그 한질만 카운트 하겠다.(몇 년 전 이걸 다시 재판으로 찍어냈다. 2000년에 나왔던 책이 재판으로 다시 나온 느낌이 새로웠다. 얼마 전 우연히 들른 만화방에 이 책이 꽂혀 있던걸 확인했다. 이것만 카운트 하겠다.)

 

 각종 기업체, 공공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글들(제안서 제외), 각종 학회지와 기관지, 사보, 딴지일보를 비롯한 ‘언론기관’에서 썼던 각종 칼럼, 기타 등등의 글들을 총합해 보면... 가늠하기 힘들다. 편의상 계산을 해 보자면 2010년 모 업체에서 내가 이제껏 썼던 칼럼, 기사들만 모아서 “재활용(업계용어로 ‘우라까이’를 할 수 있는 것들)”이 가능한 것들만 모아 보니(여기서 말하는 재활용이란 ‘기업체’에 납품할 수 있는 글이다.) 한글 2010 문서통계로, A4 3,258쪽, 200자 원고지 기준 25,407.2장이 나왔다.(태백산맥 10권 한 질의 양이 원고지 10,000매다. 즉, 태백산맥 25권 분량의 글을 재활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 ‘양’ 비교다. 조정래 선생님이 피고름을 찍어 완성한 이 역작의 발뒤꿈치 때만큼도 못한 단순한 ‘잡문’이기에 그 질은 형편없다고 보면 된다.)

 

재활용 불가(不可) 글을 포함한 경우 200자 원고지 50,000매는 얼추 넘는 것 같다. 이는 2011년까지의 기록이다. 2011년 이후에 썼던 글까지 포함하면... 모르겠다. 2011년 이후 카운트를 포기했다.

 

굉장히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 “이야기”를 제외한(즉, 영화시나리오, 드라마 대본, 만화 스토리, 연극 희곡, 애니메이션 스토리, 소설 등을 제외) 상황에서 내가 외부 매체에 기고한 글은 50,000매 정도로 본다. 여기엔 “책”이 포함됐다.(다시 말하지만, 굉장히 보수적인 카운트다.)

 

 은근 이것저것 많이 글을 썼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던 시기 앱 개발 광풍이 불 때 내 글을 가지고 상업적으로 앱을 만들었던 적도 있고, 최근의 몇몇 스마트폰 서비스에 내 글을 납품한 적도 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은 카운트에서 제외하겠다.

 

(네이버 블로그를 가지고 있었으나, 올 2월에 아이디를 삭제 당했다. 이유는? 너무 야해서)

 

(미디어몹 블로그 역시 탈퇴하면서 글을 싹 날려버렸다. 이때 양도 꽤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2번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썼던 수많은 기획서, 제안서, 실행계획서, 대본 등은 제외하겠다.

 

 출판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썼던 글들은 제외하겠다.

 

 온라인, 오프라인 기자생활을 하면서 썼던 글들도 제외하겠다.

 

 2009년부터 시작한 강연결과물, 강연원고들은 제외하겠다.

 

■ 수많은 인터뷰 녹취 역시 제외하겠다.

 

■ 현재까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내 원고의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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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80,000매.” 이다. 이는 내 스스로가 납득하는 원고의 양이다. 그 이상은 내가 납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납득의 기준은 내가 증명할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상업적으로 ‘판매’가 됐으며, “불법이나 위법성”이 없는 글들이다. 상당히 보수적인 잣대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대한민국에서 ‘팔’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을 다 써봤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평생 글 감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조정래 선생님이나 빚쟁이에 쫓겨 하루 16시간씩 글을 썼던 발자크, 작가 생활 40년 동안 단행본 분량 700여 권의 글을 쓴(장편이 약 100편, 중단편 350편, 에세이와 칼럼 포함 1천여편) 마쓰모토 세이초 선생을 생각한다면, 애들 장난과 같은 수준이다. 단순한 ‘양’ 비교에서도 밀리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비교불가의 수준이지만, 한국에서 ‘글’을 먹고 사는 것의 치열함과 구조적 문제점을 말하기 위함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이걸 통해 어떤 ‘푸념’이나 ‘동정’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한다.

 

 


3. 이유는? 

 

『...나는 가난 때문에 서둘러야만 하고 돈을 위해 글을 써야만 하기 때문이야.』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그의 ‘창작에너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돈”과의 관계를 정리한 『돈을 위해 펜을 들다』란 책이 있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감히 도스토예프스키와 날 같은 선상에 놓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라는 한 문장에 전해주는 묵직한 울림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물론,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감정적인 ‘과몰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부러웠다.

 

그가 이룬 성취? 그의 재능? 문학사에 남긴 족적? 아니다. 그가 늘 돈에 쪼들린 이유가 그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박을 했고, 그 도박 빚 때문에 글을 써야 했다.

 

...그게 난 한 없이 부러웠다. 최소한 자기 손은 스쳐지나간 돈이지 않은가?

 

(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 둘을 비교할 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은 거칠고 다듬지 않은 느낌이란 평을 많이 듣는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는 언제나 빚에 쫓겼고, 시간에 쫓겼다. 원고 매수가 곧 지폐의 매수였던 그에게 있어 ‘퇴고’와 ‘숙독’은 사치였을 것이다.)

 

나는 26살에 결혼했으며, 아내라 불리는 여자와 두 딸을 둔 가장이다. 결혼할 당시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첫째, 글로만 돈을 벌겠다.

둘째, 그 돈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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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엔 이게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를 몰랐다.

 

(이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대한민국에서 글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스타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이 두 가지 다짐을 현실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난 스스로에게 이 형용모순을 강요했고, 현실은 그걸 ‘당연하다고’ 말했으며, 의지는 이걸 관철시켰다. 그리고 숱한 ‘죽음의 유혹’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내가 만들어졌다.)

 

이 가정은 오로지 내 수익만으로 돌아갔으며, 모든 경제적 부담은 내가 책임졌으며, 수많은 사건사고를 해결하기 위한 ‘목돈’들은 오로지 내 글에서 나왔다. 부모님들에게 용돈은 못 드리지만, 필요한 가전제품들과 가구 등등을 장만해 드렸다.(대리석 식탁세트와 수입 가죽소파, 몇 대의 HD TV와 양문형 냉장고부터 시작해 자질구레한 가전제품들. 뭐 대단한 거 같아보이지만, 다 싸구려다. 그것도 한때 반짝일 뿐이었고, 상당부분은 내 여동생과 같이 한 것이다.) 전부 내 ‘글’에서 나왔다.

 

대한민국에서 ‘뜨지 못한’ 작가가(‘글자판기’가) 오로지 ‘글’을 통해서 중산층에 버금가는 혹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해 왔다는 건 기적이라고 난 믿고 있다.

 

그 중산층의 개념에 대해선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굶어죽지 않고 4인 가족이 먹고 살았던 ‘시절’이 있다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다.

 

아무래도 ‘연봉’을 말하는 게 빠를 거 같다.

 

내가 최악이었던 2001~2002년은 거의 수익이 없었다. 연봉이 1천만 원 이쪽저쪽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일당작가 생활까지 하면서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 글쟁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비록 가난했지만, 꿈이란 게 있었고, 희망이란 게 있었다.

 

다음 회에 소개하겠지만, 2003년 9월의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난 본격적으로 ‘돈에 환장한 글자판기’가 됐다.

 

2003년부터는 수익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전년도에 비해서) 잘나갈 때는 억도 찍었다.(한 번인가로 생각한다.)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됐고, 모든 걸 방기하던 시절, 그때도 생계를 위해 신문 연재 1개(주 5회)와 영화 시나리오 1~2편을 썼다. 그 당시가 아마 2009년도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걸었던 시절이다. 1년 내내 걸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도 꿋꿋이 글을 썼다. 그렇게 번 게 3천 5백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신문 연재고료와 시나리오 계약금 등을 생각하면, 3천 5백은 너끈히 넘겼을 것이다. 자질구레한 외고를 제외한 숫자다.

 

그렇게 벌고 살았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작품 없이 이렇게 버텨왔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쫓길 수밖에 없는 천형을 타고났지만, 난 정도가 심하다. 자투리 시간에도 글을 쓴다. 당장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준비를 미리미리 해 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펼쳐 놓고 있음에도,

 

“넌 너무 게으르게 사는 게 아냐?”를 읊조리고 있다. 병원을 한 번 가봐야겠다.

 

첫 회라 그런지 푸념이 많았다. 다음 회 부터는 본격적인 ‘서바이벌’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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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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