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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27. 목요일

정우성













[43] 저임금사회가 아니라 고지출사회: 정말 저임금이 문제일까. 그렇다면 임금이 올라가면 행복해질까. 생존문제와 불행의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저임금의 문제는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부유한 상태에서는 단지 행불행의 갈림길 선택의 문제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적어도 기아문제는 극복하지 않았을까. 먹을 것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지금도 어디 후미진 곳에 있기는 할 것이다. 몹시 예외적인 일이다. 지금의 저임금 문제는 100년 전 노동자의 저임금의 문제와는 다르지 않을까. 물질적 풍요로움은 아사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받을 돈의 크기가 아니라 어딘가에 지불해야 할 돈이 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저임금사회가 아니라 고지출사회가 더 적당한 관점이 아닐까.

 

저임금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한다거나 작은 기업을 경영한다고 했을 때, /그녀가 과연 직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만한 의지가 있을까. 천진난만하게 시장 평균임금을 탓하면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임금을 주겠노라는 포부를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만나기 힘들었다. 기업이든 조합이든 시민단체든 말이다.

 

도대체 저임금과 고임금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적은 돈을 월급으로 받든 많은 돈을 월급으로 받든 어쨌든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대체 인간답게 생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어느 한 인생의 인간다움의 기준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한다. 사람마다 인간다움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기껏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건강함을 보장하는 물질적인 생존, 그리고 헌법상의 행복 추구권. 하지만 그 정도를 놓고서 저마다 다시 생각이 달라진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이 아름다움 표현조차.

 

행복을 추구할 권리.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을 꺾어버리는 사회 구조가 있다면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그런 사회 구조에 대해서 모두 침묵하고 있다면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유 혹은 자유의지는 인류의 가장 빛나는 성과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한다. 확실히 교과서나 철학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개인에게 그런 가치를 허락하고 있을까. 무엇이 우리의 자유를 핍박하는가. 이것이 목돈사회를 향한 질문이다. 단순히 돈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거나 자유를 잃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인류가 나약하지는 않다. 수입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달라진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이생과 저런 인생이 있는 게 아닐까.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다. 어느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목돈을 사회가 개인에게 보편적으로요구한다. 일종의 사회적 과세. 출신과 소득과 연령을 고려하지 않고 요구한다. 국가의 세금 제도는 그래도 소득의 수준에 따라 차등하여 부과한다. 주머니에 있는 돈 중 얼마를 떼서 공동체를 위해 쓰자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목돈을 국가가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돈사회는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목돈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비정한 시장 구조다. 그리고 전세보증금의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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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Francois Millet(1814-1875) “The Sower”

 

 

[44] 후대까지 미치는 연좌제: 대한민국 전세보증금의 평균 금액이 15천만 원이다. 시골지역의 전세보증금까지 고려한 통계라는 점을 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1 5천만 원이 작은 돈일까. 서울은 여기에 1억 원을 더 얹어야 한다. 이 돈을 모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이런 목돈은 어째서 필요한 것일까.

 

개인에 대한 이런 목돈요구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사람들은 그만큼 월세가 저렴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런 반문을 먹고 목돈사회가 되었다. 그런 반문에 기생하면서 만들어진 지하경제가 1,300조 원을 넘는다. 1,300억이 아니며 13조가 아니다. 그 목돈은 은행에 안전하게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임대인은 자기 욕망을 채우느라 그 돈을 아편처럼 사용하지 않았을까. 은행과 부동산업자들은 이 꽃놀이패를 만끽하며 탐욕을 부추겨 왔다.

 

목돈게임은 시지푸스처럼 반복된다. 그것이야말로 목돈사회의 진정한 폭력성이 아닐까. 성춘향은 홍길동의 집에 전세들어 산다. 그녀는 홍길동에게 임대보증금으로 3억 원을 줬다. 성춘향이 그 3억 원을 다 인출하여 써도 사실상 괜찮지 않았을까. 성춘향이 이사를 가겠노라고 홍길동에게 3억 원을 요구했다. 그러자 홍길동은 성춘향과 아무 상관이 없는 다음 임차인 임꺽정에게 3억 원을 요구한다. 3억 원은커녕 4억 원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 다음은 장길산, 황진이, 변사또.... 이렇게 하여 구슬 꿰기 놀이가 펼쳐진다.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성춘향, 임꺽정, 장길산, 황진이, 변사또가 줄줄이 임대보증금이라는 줄구슬로 엮인다.

 

목돈게임은 한반도를 하나의 패밀리로 묶는다. 목돈사회는 모든 개인을 연좌한다. 대를 이어서 연좌하다 보면 필경 후대가 비명을 지른다. 선대가 만든 사회가 젊은이들의 무릎을 꺾어버린다.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자녀가 아닐까.

 

주거는 생존과 존엄성을 결정한다. 어딘가 두 발을 뻗고 자면서 내 예쁜 새끼들을 먹여살리고 키우는 게 인생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소유한다거나 모든 이가 집을 서로 공유하는 세상을 상상하지는 않겠다. 비록 목돈이 없어도 수익과 능력에 맞게 살면 되지 않을까. 비정한 목돈사회는 그러나 목돈으로 개인을 닦달한다.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목돈을 요구한다. 그러면 개인은 가족의 힘으로 다함께 맞서거나 은행을 찾는다. 개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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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1853-1890), “The Sower”

 

 

[45] 목돈사회와 복지의 문제: 복지주의자들은 현대인의 고단한 인생이 도저 개인의 힘으로 치유될 수 없음을 간파한다. 무거운 짐을 드는 게 혼자 힘으로 불가능하다면 다함께 들면 되지 않겠느냐. 나는 이 질문이 옳다고 믿는다. 적어도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복지는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왔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보편적 복지를 말한다. 그런데 과세의 증액없이 그런 복지가 과연 가능할까. 복지를 말하면서 과세의 증액을 감추는 자들을 나는 복지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복지술사에 불과할 뿐이다. 복지주의는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신뢰함으로써 존재한다. 국가가 무너지면 복지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할 때에는 국가의 영속성에 대한 플랜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온 한 문장이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급히 계산기가 필요해진다. 장난감도 필요하다. 레고통계. 통계 수치를 사랑하는 전문가들은 서구 여러나라의 세금 통계를 제시하면서 증세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논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개인은 증세를 감당할 여력이 있을까. 서구 사회는 적어도 엄청난 목돈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과세를 요구하지 않는다. 주거보증금 제도 자체가 사실상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목돈을, 사회적 과세로 준비해야 한다. 자기 임금을 초월하는 사회적 과세 말이다. 이 사회적 과세와 이 과세로부터 비롯되는 부담은 통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세금은 지출이다. 한국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목돈을 마련하느라 빚을 진 상태에서 세금을 내고 있다. 천문학적인 가계 채무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목돈사회가 지속되는 한, 복지주의자가 말하는 증세는 한국인에게 참으로 어렵지 않을까. 목돈게임은 증세 여력을 없앴다. 복지를 주장하는 선생에게 필요한 것은 통계가 아니라 통찰이다.

 

그러므로 복지예산을 말하고 증세를 말하기 전에 먼저 이런 사회적 과세를 없애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라도 보편적 목돈을 없애는 것을 우선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목돈사회의  사회적 과세가 저출산을 불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 과세가 노인문제의 악화를 야기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 과세가 기업의 창의성을 죽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돈게임은 모든 사회적 활력을 핍박한다. 자살이 늘어나는 것을 당분간 막기 어렵지 않을까.

 

[46] 돌려받을 수 있는 돈?혹자는 임대보증금의 사회적 과세 성격을 부인할 것이다. 어차피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목돈사회에서 임대보증금은 피할 수 없는 게임이다. 집을 사든가 아니면 임대보증금을 내든가. 그 크기가 몹시 커서 은행을 찾는다. 보증금을 마련하려면 빚쟁이가 돼야 한다는 것이 곧 사회적 과세다. 빚 없는 인생의 자유로움과 빚 있는 인생의 자유로움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차피 돌려줄 돈을 왜 요구하는 것일까.

 

(그 돈이 과연 소유자가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래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 혹은 그녀가 다시 임대보증금을 낼 필요 없이 거주할 수 있다면, 또 굳이 집을 살 필요도 없다면, 그 돈은 우리의 자원이다. 우리에게 석유는 없지만 어마어마하게 묶인 돈은 있다. 저마다 자유와 자원을 함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활력과 복지는 먼 곳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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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1853-1890), “The Sower”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목돈게임은 한반도를 하나의 패밀리로 묶지.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의무는 물론 있지.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회를 어른들이 만들어놓았어. 다음 임차인이 그 전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대신 지불해 줄 거거든. 이렇게 목돈사회는 모든 개인을 연좌하지. 대를 이어서 연좌하다 보면 필경 후대가 비명을 지르지 않겠어. 폭탄을 돌리다가 꽝하고 터지는 꼴을 후대가 겪겠지.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자녀가 아닐까.우리 아이들에게도 목돈사회를 물려줄 작정인가?”

 

2. 보편적 복지를 말하기 전에 보편적 목돈을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한국사람들의 높은 조세저항감은 이기적 감성 때문이 아니야. 목돈게임의 사회적 과세에 이미 눌려 있거든. 통계를 비교하지 말고 사회 현실을 통찰하자. 목돈게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부자말고는 증세를 감당할 여력이 없을 거야. 그러면 부자한테 증세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 그것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부자들의 역습을 가벼이 여기지 말자. 그것보다 목돈게임을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복지는 전속력으로 우리 앞에 올 수 있어. 부자들이 뭐라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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