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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28. 금요일

Athom







                   


“그녀를 위한 식탁”은


알고나 먹자 <요리 편>의 부제입니다.



지난 기사


[그녀를 위한 식탁 <1> 크리스마스 파뤼]

[그녀를 위한 식탁 <2> 닭죽과 생치침채]

[그녀를 위한 식탁 <3> Prologue, 그녀를 만나다]

[그녀를 위한 식탁 <4> 조제의 밥상]

[그녀를 위한 식탁 <5> 오해는 오해로 남겨두기]

[그녀를 위한 식탁 <6> 두부]


알고나 먹자 <식재료 편> 바로가기










사흘 동안 비가 오더니 곧장 봄이다. 아니,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봄이 아니라 여름이 왔나 싶을 정도다.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내 눈엔 아직 낯설다. 아직도 움츠린 나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땀을 흘리며 한낮을 보내고 있다. 마지막 꽃샘추위에 덜컥 들어선 감기는 나아가지만 혹시나 감기가 도져 또다시 그 고통을 겪게 될까 두려워 쉽사리 외투를 벗어부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봄은 봄이어서 간단하게나마 봄맞이를 하려 했다. 두꺼운 이불을 빨아 벽장에 집어넣고 창문에 걸어둔 두꺼운 담요를 얇은 천으로 바꿔 다는 정도의 봄맞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봄맞이를 하련다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더니 집에 사용하지 않는 천과 이불이 있다며 봄맞이를 잠깐만 미루라고 했다. 그야 뭐. 내년까지라도... ^^


지지난주에 시골집 매실나무전지를 했다. 2월 말에는 전지를 마쳤어야 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바빠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찾아간 매실밭의 나무들에는 꽃망울이 올라와 울먹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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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지가 늦어지면 전지과정에서 꽃망울을 건드려 꽃이 떨어지게 된다. 이럴 때는 어지간하면 그냥 놔둬야하지만 웃자란 가지가 너무 많아 그것들만 잘라주었다. 지금쯤 하얀 솜처럼 부옇게 매화가 피었을 테지.


전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배(아저씨라 부른다) 집에 들렀는데 아저씨 혼자 늦은 점심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점심도 거르고 매실나무전지를 하고 났더니 시장해 밥을 청했다. 김치냉이국에 스팸 몇 조각과 묵은지가 전부인 단출한 식사였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푸근한 밥상이었다. 쌀뜨물에 멸치를 넣고 거기에 김치와 냉이를 썰어 넣어 끓인 뜨끈한 국물이 순하디 순하게 몸을 녹여주었다.


가난하지만 순하고 편안한 밥상.


내가 꼬마둥이 때부터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이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김치냉이국 같은 사람이다. 20년 전에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지만 언제 찾아가도 밥을 내주고 잠잘 곳이 없으면 아이 둘과 부부가 살아가는 단칸방의 한 자리를 미뤄 어린놈 누워 잠들 이부자리를 펴주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 개진상질을 하고 널부러져 잠이 들어도 다음 날 나무라는 일 없이 라면이라도 끓여주던 아저씨의 김치냉이국을 받아먹다가 ‘그녀를 위한 식탁’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20년 후에 차려줄 밥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처럼 변함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자신 없었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그녀에게 뭐라도 맛있고 좋은 것을 차려주고 싶어 무리를 해서라도 화려한 밥상을 차려내지만 허세는 긴 호흡이 불가능하다. 나는 그녀가 어느 시간에 무슨 이유로 찾아오더라도 편안하게 쉬었다 돌아가길 바란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마찬가지다. 아저씨와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 그 긴 시간동안 언제든 연락 없이 찾아가고 부담 없이 밥을 얻어먹고 다음 날 새벽에, 간다는 인사 없이 돌아가더라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저씨에게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2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배운다. 길게 나눌 밥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편안해야 한다는 것을 김치냉이국을 얻어 먹으며 또 한 번 배웠다.



“이번에 오면 쌀뜨물로 김치냉이국 끓여먹어요.”


“일드 런치의 여왕 보셨을 것 같은데... 거기 나온 오무라이스. 데미글라스 소스 듬뿍 뿌린 오무라이스 먹고 싶어요. 집에 있는 이것저것의 소스를 조합해서 데미글라스 소스를 만드는 법도 알려주세요. 누구는 하이라이스를 이용해 만든다고도 하고, 시중에 판매하는 고가의 데미글라스 소스를 사면된다고도 하고, 전문가는 진짜 데미글라스 소스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과 시간이 드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당신이라면 간단하고 맛나게 먹을 방법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아요.

대충 햄과 야채를 볶고 하이라이스 소스에 돈가스소스와 케첩을 섞어서 만들어 먹었던 기억은 있어요. 접시에 밥을 담고 그 위에 빈대떡처럼 부친 계란을 살포시 덮었었지요.ㅋ 후라이팬에 구워지는 계란 위에 밥을 올리고 싸려다가 결국 실패해서 계란 볶은밥이 되었던 적도 있고.^^


냉이 김칫국이라고 했나요? 집에 우렁이 있어요. 내려가는 길에 들고 갈게요. 냉이 우렁 된장찌개 해먹어요. 우렁이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김치로는 으음, 뭔가 활용해서 내가 찌개든 국이든 끓여 드릴게요. 한 끼 정도는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칼과 호미를 들고 들로 나갔다. 그녀는 행여 감기가 도질까 걱정스러웠는지 들에 나가지 말고 시장에 나가 사오라는 당부를 했지만 들에는 냉이 말고도 다른 것들이 가득하다. 먹을 것도 먹을 것이지만 봄을 맞은 들의 생기가 감기를 물리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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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도 캐고 쑥도 뜯고 강가에 저 알아서 난 봄동도 몇 움큼 뜯어왔다. 수확을 마치고 버려진 시금치 밭에 몇 포기 남은 시금치도 슬쩍하고 그 옆에 심어 놓은 대파도 몇 대 뽑아왔다. 이런 걸 도둑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냥 뽑아 온 거다. 산 아래 수로에는 개구리들이 벌써 나와 알을 낳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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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를 하느라 개굴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릴 땐 깨끗한 물에 낳은 개구리알은 건져 먹었는데 이젠 그짓까진 못하겠다. 튼실한 개구리로 거듭나시라. 그땐 잡아먹어주마!


따뜻한 날에 봄나물 캐는 재미가 쏠쏠했는지 둘이서 먹기에는 많은 양을 거둬왔다. 한두 시간 들에 나가 돌아다니면 이 정도는 그저 얻어진다. 냉이된장국에 쑥도 함께 넣어 끓이고 시금치는 오므라이스에 넣으면 좋을 것 같았다. 봄동은 겉절이로 무쳐먹고 달달한 대파는 이런저런 양념으로 쓰기에 그만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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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글라스 소스를 듬뿍 끼얹은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다고 했던가. 데미글라스 소스는 소뼈육수를 베이스로 한 갈색소스를 총칭한다. 돈가스 소스나 하이라이 소스는 데미글라스 소스와 성분이 비슷한 손자뻘쯤 되는 소스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면 데미글라스 소스와 비슷한 맛을 내게 된다.


오리지널리티가 철철 흘러넘치는 데미글라스 소스를 만들려면 막대한 재료비와 그와 정비례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난 그럴 수 없다!! 데미글라스 소스를 정석으로 만드는 방법은 레시피에서 소개할 테니 레시피를 참조하고 본문에선 야매조리법을 전하겠다. 야매긴 야매지만 A급 짝퉁이랄까... 큼큼;;


일단 차를 몰고 전주에서 가장 맛있는 설렁탕집에 찾아가 설렁탕 한 그릇을 포장해 왔다. 야매스럽지만 데미글라스 소스를 정식으로 만들자면 2박 3일은 걸린다. 늙어 죽는다. 사실 데미글라스 소스는 브라운스톡을 기본으로 한다. 설렁탕은? 화이트스톡이다. 이를 어쩐다. 브라운소스는 고기와 야채를 노릇하게 구워 끓이는 소스라서 갈색국물이 나온다. 이 국물에는 약간의 탄맛이 나는데 이 색과 맛을 해결하려면 스모크향이 첨가된 바비큐소스를 넣어주면?? 된다. 사실 뭐 졸 야매니까 그러려니 하고 걸러 읽으시라. 바비큐소스가 없으면 다른 해결 방법도 있다. 설렁탕을 제외한 모든 재료를 노릇노릇하게 볶아주는 것이다. 양파, 마늘, 토마토페이스트, 브라운루, 샐러리, 당근 등을 조금 탔다 싶을 정도로 볶아주면 약간의 탄 맛과 갈색의 국물을 얻을 수 있지만 고기 태운 맛하고는 조금 차이가 난다. 정말 고기 태운 맛을 내고 싶다!! 그럼 설렁탕 두 국자 정도를 후라이팬에 올리고 태워준다. 탄다 싶으면 레드와인을 부어 잘 저어준 뒤 소스에 부어주면 색도 나고 구수한 맛도 날 것이다. 참나... 갸들은 고기를 궈먹어 버릇하던 민족이라 그런가 그렇게 탄 냄새를 좋아하데. 무튼 나는 이 세 가지 방법을 모두 활용해서 최대한 A급 짝퉁에 가깝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장하지?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잘 우려낸 설렁탕을 베이스로 데미글라스 소스를 넉넉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돌아가는 길에 손에 들려주면 집에 돌아가서도 맛있는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데미글라스 소스에 스모크향이 첨가된 바비큐 소스를 조금 더 넣고 졸이면 훌륭한 스테이크 소스로도 활용할 수 있고, 양파를 채 썰어 버터를 두른 팬에 갈색이 될 때까지 볶은 뒤 묽은 데미글라스 소스와 브라운루를 첨가해 끓여주면 묵직한 맛을 내는 돈가스 소스로도 활용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 한 가지 하고 넘어가자. 설렁탕은 설렁탕으로 한 가지 완성된 요리지만 다른 요리의 베이스로도 활용된다. 데미글라스 소스에 들어가는 토마토페이스트는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토마토장이다. 우리가 고추장과 된장을 국, 볶음, 구이요리를 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토마토페이스트도 다름없이 활용된다. 우리가 된장을 묽게 풀어 국을 끓이면 된장국이 되고, 걸쭉하게 끓이면 찌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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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소스의 기본구성도



데미글라스 소스의 mother sauce는 브라운 소스(에스빠뇰소스)이고 브라운 소스의 시작은 브라운스톡이다. 즉 갈색고기 국물을 말한다. 브라운 스톡을 졸여 만든 브라운 소스에 브라운루와 토마토페이스트, 향신료등을 넣어 졸이면 데미글라스 소스가 만들어지고, 브라운 소스에 야채나 고기등 여타 재료들을 넣어 끓이면 다양한 수프가 될 수 있고 걸쭉하게 끓이면 스튜가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되게 만들면 스테이크 소스나 돈까스 소스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렁탕을 베이스로 끓인 전골이나 설렁탕으로 지은 밥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쌈장이나 우렁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큰 틀에서 놓고 보자면 동서양의 음식은 조리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된장찌개 끓이는데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것은 된장이고 나머지는 입맛 따라, 계절 따라, 가가호호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된장찌개에 레시피가 있나? ‘이것이 된장찌개다.’라고 단정 할 수 있는 레시피는 없다. 서양요리도 마찬가지다. 베이스에만 충실하면 나머지 재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요리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방법이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른 것처럼 브라운소스를 만드는 방법 또한 지역마다 대륙마다 나라마다 집집마다 다르다. ‘닭으로 끓여라’, ‘양고기로 끓여아 맛있다’, ‘아니다 소뼈로 끓여야 한다’, ‘조까라 소고기로 끓여야 제맛이 난다’, ‘씨방새들 다 꺼져. 악어고기가 최고다 븅신아’. 등등 날고 긴다는 요리쟁이들이 이런저런 설을 이야기하지만 베이스는 구운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낯선 요리를 할 때 레시피를 강조한다. 어떤 음식의 특징이 이해되었다면 레시피에서 해방되시라.


데미글라스 소스에 들어갈 토마토와 파인애플을 사러 시장에 나갔더니 후리지아가 눈에 들어 한 단 사들고 들어와 컵에 꽂아 두었다. 향기도 좋고 색깔도 화려해 칙칙했던 집안 분위기가 살아난다. 이것이 바로 연애질의 기본 스킬이다. 이거뜨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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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전주역에 도착했다. 커튼으로 사용할 연두색 천과 직접 바느질 해 만들었다는 여름이불, 된장국에 넣을 우렁, 김치와 함께 끓일 콩비지와 고기, 멸치액젓, 사용하지 않던 식기와 젓가락세트 등을 싸들고 서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전주로 내려왔다. 서울녀스럽지 않은 그 ‘싸듦’이 흐뭇하고 예뻐보인다. 보통 이런 그림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의 풍경이지 않던가?? 그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잼있기도 하고 예뻐보이기도 해서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울살이를 아무리 오래 해도 변하지 않는 품성이란 것이 있나 보다.


집안에 들어와 들고 온 짐을 펼쳐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흐뭇해 보였다. 창문에 걸려 있던 두꺼운 담요를 걷어내고 연두색 천을 압정으로 박아 고정시키니 근사한 커튼이 되었다. 어두컴컴했던 집안이 연두색 면포 한 장으로 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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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들고 온 봄에는 맛있는 우렁도 들어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쌀을 씻으며 쌀뜨물을 냄비에 받아 두었다. 냉이와 쑥으로 끓이는 된장국에 우렁을 듬뿍 넣어 끓이면 봄나물국이 한결 구수해지리라.


커튼을 달고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쌀뜨물에 잔멸치를 넣고 끓이다 된장을 풀었다. 된장국물에 우렁을 넣고 우렁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봄동겉절이를 만들었다. 별다른 양념 없이 고춧가루와 향신즙을 넣고 황석어젓국으로 간을 맞췄다. 봄동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식초를 조금 넣고 설탕으로 단맛을 더했다. 들기름과 참깨를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봄동을 무치고 끓는 된장국물에 냉이와 쑥을 넣어 국을 끓였다. 냉장고에 표고 두 개가 남아 있어 썰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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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분 만에 뚝딱 만들어진 단출한 밥상이지만 봄날처럼 따뜻하고 신선했다. 그녀를 만나 그동안 많은 음식을 나눴지만 가장 뿌듯하고 편안한 식사였다. 뜨끈한 된장국물은 구수했고 쫄깃한 우렁의 식감이 식욕을 자극했다. 식초를 조금 넣어선지 봄동겉절이의 상큼한 맛이 그만이었다. 날씨도 좋고 해도 좋아 창문을 활짝 열고 점심을 먹으며 겨울을 돌려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풋고추 몇 개를 더했어도 좋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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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데미글라스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렁탕을 사용한다지만 적어도 세 시간은 끓여야 만들 수 있는 소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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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파인애플, 토마토, 샐러리, 마늘, 당근 등 재료들을 준비하고 집에 키우던 로즈마리의 허리를 댕강 잘랐다. 이날을 위해 너를 키운 것은 아니지마능... 음, 그래. 이 집에서 사느라 고생 많았다.


재료를 준비하고 가마솥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뭉근한 불에 오랫동안 끓여야 하는 음식은 두꺼운 솥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가마솥에는 양파를 볶고 후라이팬에 버터를 녹여 브라운루를 만들었다. 브라운루는 버터에 밀가루를 넣고 갈색이 나도록 볶아 사용하는데 농도를 조절하고 구수한 맛을 내는 서양 요리의 기본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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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루



브라운루를 볶은 팬에 설렁탕 두 국자를 부어 갈색으로 말라붙을 때까지 졸였다. 하얀색의 설렁탕을 갈색으로 바꾸기 위한 야매스러운 잔머리지만 팬에 올려 누룽지처럼 만들면 구수한 맛도 나고 색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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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누룽지가 된 설렁탕에 레드와인을 부어 뭉근하게 끓이는 사이 가마솥에서는 양파가 갈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양파를 갈색이 날 때까지 볶으면 단맛과 고소한 맛이 강하게 나고 물을 부어 끓였을 때 갈색국물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볶아진 양파에 토마토페이스트를 넣어 함께 볶아준 뒤 레드와인과 함께 끓이고 있던 설렁탕을 넣고 자작하게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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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준비해둔 재료들을 함께 넣고 볶다가 나머지 설렁탕을 부어 뭉근하게 2시간가량 끓이면 브라운소스를 얻을 수 있다. 파인애플은 단맛을 내기 위해 넣은 것인데 사과나 다른 과일로 대체해도 되고 귀찮으면 설탕을 넣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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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소스가 다 완성되었을 때 조금 쓴맛이 났는데 레몬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의심해 본다. 토마토소스를 만들 때도 레몬껍질은 아주 조금만 넣는 것이 기본인데 아무 생각 없이 레몬 반 조각을 썰어 넣었던 것이 폐단이지 않았을까. 무튼 좀 뻘쭘했다. ‘어라. 쓰네.’ ;;



“소스가 써요...”


“이게 쓴맛인가, 무튼 향기나 색은 정말 좋은데요. 맛도 이 정도면...”


“탄 맛은 아니고 쓴맛이나네. 레몬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그래도 뭐 근사한데요. ^^”


“아하하하...;;;”



채로 국물만 걸러내고 볶아놓았던 브라운루를 넣어 농도를 조절했다. 그래도 쓰다. 그래서 설탕을 조금 더 넣어 단맛으로 쓴맛을 감춰 보려 했다. 그래도 조금 쌉싸름하다. 씨바. 데미글라스 소스 실패!! 이걸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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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찮은데요. 오므라이스에 얹으면 또 괜찮을지 몰라요.”


“아하하하 ;;;;;;”



모든걸 다 용서하는 그녀의 은혜로움이란.


소스를 만들고 나자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춥지는 않아 한옥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아 쌀쌀한 저녁이었지만 목련과 매화가 담장너머로 피어있었다. 한옥마을을 산책하며 다우랑 만두에 들러 만두를 사먹고 길거리야 바게뜨에 들러 바게뜨빵 하나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다양한 맥주도 구입했다. 술 없이 이 밤을 어찌 찢어 발기겠나. 흠흠.



“안주꺼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쏘야 좋아해요? 만든 소스로 쏘야를 만들면 맛있을 것 같은데...”


“아하~ 좋아요. 맛있을 것 같아요.”



맥주를 사며 쏘세지도 한 봉지 사들고 집에 들어와 쏘세지야채볶음을 만들었다. 소스를 만들고 남아있던 야채들을 썰고 소세지에 칼집을 넣었다. 그녀가 문어를 만들어 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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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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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야채와 파인애플, 파프리카, 샐러리 등을 소세지와 함께 넣고 볶다가 케찹과 데미글라스 소스를 1:1로 넣어 볶고 간장으로 간을 맞췄다. 치즈가 조금 남아있어서 위에 뿌렸더니 근사한 소세지야채볶음안주 완성! 길거리야 바게뜨도 썰어 접시에 담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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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야 바게뜨는 지난 겨울에 그녀와 함께 집에서 만들어 보기도 했었다. 그 이야기는 난중에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겠다. 쌉쌀했던 데미글라스 소스를 넣어 만든 쏘세지야채볶음은 쓰지 않았다!! 케찹과 설탕을 더해 볶아서 맛이 중화된 것도 있었겠지만 소세지나 여러 가지 야채의 맛을 살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 으쓱해진 이노매 어깨! 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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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애니원형이 소개한 에페스와 바이엔슈테판도 맛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산미구엘의 손을 들어주었다. 촌것들이라 그런지 묵직하지 않고 가볍게 목으로 넘어가는 청량감에 한 표를 준 것이었다. 에페스와 바이엔슈테판은 다양한 맥주맛이 혼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은 반면에 산미구엘은 딱 하나의 청량한 맥주 맛만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 베어비어는 뭐임?? ‘하이트베어스’더군. 그녀는 “맥스도 아닌 그저 하이트.”라고 말하며 술잔을 내려 놓았다. 값은 저렴하니 술이다 생각하고 마시면 문제는 없을 테지만 수입맥주에도 이런 오줌맛이 있구나 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달지. 술을 그저 술로 먹는 우리 입맛에도 저렴함으로 기억되어 버렸으니 베어비어는 조만간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지기 전에 한 잔씩들 해 보시라구. 하이트의 맛과 매우 비슷하다능. 쩝;;


맥주를 마시며 알딸딸해지면서 앞치기, 뒷치기, 옆치기,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등 다양한 포지션 등을 상상하던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말았다. 그녀가 급하게 화장실에 다녀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날이 왔어요.”



그날!!!! 그날이라는 쉐끼가 왔단다. 어떤 쉐끼냐고 존슨 씨는 포효하며 물었지만 알려줄 수 없었다. 술도 다 떨어졌는데?? 존슨 씨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나와 그녀는 잠들었어도 존슨 씨는 밤새 이불을 찢어발길 기세로 헐떡거렸다. 내가 다 미안하다. 어쩌겠니;;; 그럴 때도 있는 거다. 너무 화내고 그러지 말어.


다음 날 아침에도 존슨 씨는 지칠 줄 모르고 시위에 열을 올렸지만 그녀는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렛미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존슨 씨의 렛미인 페러디를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영화 <렛미인>을 보면 뱀파이어인 엘리가 오스칼의 집 앞에 서서 오스칼이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뱀파이어의 운명. 존슨 씨의 운명과 매우 닮았다. 오스칼이 엘리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냐고 묻자 엘리가 집으로 들어서서 피눈물을 흘린다. 비유적인 표현의 그 피눈물이 아니다. 실제로 피눈물을 철철흘리며 서 있자 오스칼은 당황해서 엘리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엘리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는데 불온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누며 존슨 씨를 떠올렸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들어간 존슨 씨가 피눈물 흘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거리는 이 변태스러운 커플을 보았는가. 강도하 슨상님께 이 아이디어를 전하는 바이다.ㅋㅋㅋ


비웃어도 풀이 죽지 않는 존슨 씨를 달래는 방법은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는 방법 말고는 없다. 그만 약올리고 아침이나 차려 먹자꾸나. 아침밥으로 그녀가 고대하고 고대했던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몇 가지 야채를 다지고 다진고기를 넣어 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시금치를 큼직하게 썰어 넣으면 색도 좋고 소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보통 오므라이스 볶음밥은 소금으로 간을 하는데 고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진간장을 넣어 밥을 볶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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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과 계란은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데 스크램블에그에 데리야끼소스를 얹어 먹으면 맛이 좋다. 그 맛을 떠올리며 간장으로 밥을 볶았는데, 역시. 오므라이스의 계란과 맛이 잘 어울렸다.


밥을 볶고 계란을 풀어 후라이팬에 부쳤다. 얇은 계란옷보다 두툼한 계란옷이 좋아 계란 4개를 풀어 약한 불에 두툼하게 부쳤다. 여기에 볶은 밥을 올리고 오무려 접시에 올리고 데미글라스 소스를 듬뿍 끼얹었다. 전날 먹고 남은 된장국과 파인애플, 김치, 피클을 반찬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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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은 맛이 좋았지만 소스의 쓴 맛은 여전했다.



“아, 여전히 쓰다. 어제 쏘야는 맛있었는데 다른 걸 첨가하지 않으니까 밥하고 비벼도 그 맛이 변하지 않네.”


“그래도 이 쓴맛이 싫지는 않아요. 쌉쌀한 나물맛 정도라 먹기에 거북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갠찮아. 맛있어. 맛있어. ㅎㅎㅎ”




약간의 쓴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부드럽고 진한 소스가 볶음밥과 잘 어울렸다.



“소스를 집에 가지고 가면 케첩과 설탕을 조합해서 사용해 보세요. 결국 야매가 되어버렸네. ㅋㅋ;;”



조금 쌉쌀한 오므라이스가 만들어졌지만 그런들 어떤가. 다음에 또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겠나. 다음에는 레몬을 넣지 않고 데미글라스 소스를 다시 만들어 보아야겠다. 아마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차를 몰아 광양으로 향했다. 전날 한옥마을에서도 간간이 눈에 띄었던 매화를 구경하러 섬진강변으로 마실을 나선 것이었다. 구례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있었고 길가에는 간간히 벚꽃과 개나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초록이 물들지 않은 산과 들에 하얗고 노랗게 피어난 꽃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강바람은 차디찬데 무엇으로 너희들은 봄임을 알고 피어나는 것이냐며 그녀는 꽃들에게 묻고 있었다. 섬진강에는 은어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고 강변으로 자리한 언덕과 천수답에는 매화가 흐드러져 있었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봄인가 했는데 너희들은 언제부터 봄이라고 환호성을 질럿길래 벌써 이만큼 피어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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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떼는 정말이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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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고 느릿느릿 강변과 매화숲을 거닐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순하게 흐르는 섬진강변에 솜이불처럼 매화가 산을 덮고 있었다.


산과 강을 돌아다니느라 지쳤을 법도 한데 그녀는 비지찌개를 끓여 저녁을 차려주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오기 며칠 전 방어를 손질해 된장에 재워뒀었다. 비지찌개와 방어구이로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그녀는 콩비지에 돼지고기와 김치, 청양고추, 파를 썰어 넣고 콩비지찌개를 끓이면서 김치전도 만들었다. 오므라이스에 올려 먹겠다고 준비해 뒀던 해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김치전 반죽을 만들 때 생각나 반죽에 해물을 넣어 김치전을 만들었다. 오븐에 된장을 바른 방어를 올려 굽고 콩비지찌개를 끓이고 김치전을 부쳤다. 구수한 콩비지찌개와 김치전이 시장기를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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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구워지길 기다리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서로 밥을 해 먹이는 연애질은 신선한 것 같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이러진 않겠죠?”


“우리의 연애질 자체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죠.”


“보통 밥을 해 먹이는 것은 연애질 다음 단계잖아요. 결혼을 한달지 동거를 하게 되었을 때의 과정인데 우린 처음부터 서로 밥을 해 먹이면서 연애질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보통 극장이나 놀이공원 같은 데를 다니고 맛있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인다거나 뭐 그런 건데...”


“그래서 타인의 눈에는 재수 없게 보일지도 몰라요. 결혼을 해도 밥 한 끼 얻어먹기 힘든 관계들이 많을 텐데 저것들이 미쳤나 하며 짱돌 날라 오지 않는 게 이상한 거죠. 혹시 마질을 당하더라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쳐 맞을 일인데 마질 정도로 젠틀하게 짱돌 던지는 거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구수한 콩비지찌개와 김치전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우자 방어가 다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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탔다고? 걱정마시라. 된장을 발라구워 색이 이렇게 나온 것이다. 콩 비지찌개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방어구이에 소주 한 병을 마저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왔다. 낮 동안 많이 돌아다녀 몸이 피곤했던 우리는 12시가 조금 지나 자리에 들었지만 ‘뱀파이어’ 존슨 씨는 벌떡 잠에서 깨어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쳐자. 새꺄!”


존슨 씨에게는 고문일 테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침은 돌아오기 마련이고 뱀파이어들에겐 잠들 시간이다. 미안하지만 얘야. 나는 그저 내 옆에서 그녀가 잠들어 있고 그녀 뒤에서 셔츠 안으로 손을 넣고 가슴을 만지며 눈을 뜨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단다. 그렇게 그녀를 안고 다시 잠들어도 좋을 일이지. 언젠가 다시 만나면 서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좋아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거야. 너무 서운해 하지 말자고. 그녀의 엉덩이골 위에서 다음을 기약해 보자꾸나. 얘야. 쯧쯧쯧.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지만 다시 그녀를 안고 잠들어서 9시가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박죽 먹을래요?”


“호박죽?”


“응. 엄마가 호박 하나 줘서 그걸로 호박죽 끓여 놓은 게 있어요. 뎁히기만 하면 돼.”


“맛있겠다. 배도 좀 고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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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호박죽을 끓여 먹이고 영화 한 편을 보며 딩굴거렸다. 언제 봐도 난해한 <비우티풀>을 보며 그녀의 가슴에 손을 넣고 쪼물딱거린다. 그녀는 할머니처럼 가슴을 내어주며 영화에 집중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영화를 바라보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등으로 안아준다.


이번 만남을 끝으로 우리는 1년간 헤어져 지낼 계획이다. 나는 몇 가지의 생필품과 조리도구들만 싸들고 들로 나서기로 작심했다. 인간의 손으로 길러지지 않고 자연에서 나고 자란 것들만 먹으며 1년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자본주의와 도시국가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자 크게는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구라를 풀어보려했지만 그건 개소리다. 단지 1년을 쉬고 싶다는 생각에서 튀어나온 뻘 생각의 실현일 뿐이다. 1년을 놀고 싶은데 어떻게 놀아야 할지 궁리하던 중 글항아리 강성민 대표가 “스스로 농사지은 것만 가지고 1년을 살 수 있다면 멋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1년간 농사지은 것만 가지고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농지도 알아보고 경작해야 할 작물들의 목록도 구상하던 중 인간의 손으로 길러지지 않은 것을 자연에서 구해 먹으면서도 1년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산과 들과 바다를 돌아다니며 체득한 채취 방법과 사냥 방법, 저장 방법 등을 활용한다면 1년간 충분히 살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순간 실천할 방법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이제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텐트와 채취도구, 낚시, 생활용품 등은 모두 갖춰진 상태이다. 그동안 찌들었던 식습관과 생활패턴, 인간관계와의 싸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당장 그녀와의 이별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녀는 사흘간 휴가를 내서 나를 찾아와 할머니처럼 푸근하게 격려해주었다.


역마살이 낀 사람은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평화롭다.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려 잠을 설칠 정도다. 음력 3월 1일 새벽, 해도 뜨기 전에 길을 나서 이듬해 음력 3월 1일 새벽에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이 야만인 프로젝트는 300블로그에 일기처럼 써나갈 계획이다. 구체적인 상황은 300블로그에 기재할 테니 이 모난 인간의 1년간의 도전을 함께 응원해 주시라.


그녀는 가슴을 내어 주고 종종 나를 돌아보며 키스를 해 주며 <비우티풀>을 보고난 뒤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지 많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독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일생은 설명할 수 없이 많은 관계와 관념과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욱스발이란 인물을 만들어낸 감독이라고 욱스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을 테죠. 나를 낳은 내 부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조차도 그가 만든 피조물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단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이곳에서 생을 이어나가면 되는 것이겠지. 네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아이들을 키운다.고 영화에서 말했고 우주가 나를 살릴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매운잡채로 덮밥을 만들어 그녀에게 먹였다. 남아있는 몇 가지 재료들과 물에 불린 당면으로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 먹였다. 편안하고 즐거운 식사였고, 이 시간을 1년간 머리속에 담아두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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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그녀에게 데미글라스 소스와 만들어 두었던 약고추장을 들려 보냈다. 그녀는 돌아갔고 나는 들로 나선다. 1년 후 다시 기차역에 서 있으면 그녀는 방긋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1년 후에 만나요.


11월부터 3월까지 그녀와 많은 음식을 나누고 함께 여행을 다녔다. 이 이야기는 들에 나가 곰곰이 떠올려 보며 계속해서 식신불패에 연재하도록 하겠다. 그녀를 위한 식탁은 계속된다.


투 비 컨티뉴.






레시피



레알 데미글라스 소스


소뼈 3kg

토마토 페이스트 300g

브라운 루 300g

샐러리 1단

양파 3개

마늘 5통

사과 2개

큰 토마토 3개

당근 3개

파프리카 혹은 고추 3개

레드와인 300ml

소금

후추

타임

로즈마리

설탕

물 30리터


고기가 붙은 소뼈를 잘게 썰어 토마토 페이스트에 버무려 130도의 오븐에 넣고 3시간 동안 구워준다. 노릇하게 익은 소뼈 위에 샐러리, 양파, 마늘, 사과, 토마토, 당근, 파프리카를 썰어 올려 1시간 동안 더 구워준다. 고기와 야채가 노릇하게 익으면 통후추와 레드와인을 첨가해 커다란 솥에 넣고 물을 부어 30시간 동안 끓인다. 브라운스톡이 완성되면 채에 걸러 건더기를 걸러낸다. 건더기를 걸러낸 육수에 타임과 로즈마리를 넣고 다시 10시간 동안 약한 불로 졸인다. 졸여진 브라운소스에 브라운루를 넣어 농도를 조절하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조절한다.


뱀빨


데미글라스 소스가 대단한 인내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그리 대단한 것만도 아니다. 된장이나 고추장을 생각해 보라. 숙성과정까지 따져보면 1년 이상 걸린다. 일본의 요리사 노부 마츠히사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미소장국을 먹으며 비아냥 대는 양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장국에 들어간 다시마를 만들어내는 데만도 1년이 걸린다.” 이거뜨롸~!!! 


쫄지 말자. 갈색 설렁탕 끓이는 수준이니까.







athom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