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홀짝 추천13 비추천0

2014. 04. 10. 목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기사



[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찌질한 위인전 <5> - 간디 (上)]

[찌질한 위인전 <6> - 간디 (下)]

[찌질한 위인전 <7>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上)]

[찌질한 위인전 <8>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下)]

[찌질한 위인전 <9> - 존 F. 케네디 (上)]

[찌질한 위인전 <10> - 존 F. 케네디 (下)]

[찌질한 위인전 <11> - 넬슨 만델라 (上)]

[찌질한 위인전 <12> - 넬슨 만델라 (下)]

[찌질한 위인전 <13> - 이중섭 (上)]

[찌질한 위인전 <14> - 이중섭 (下)]

[찌질한 위인전 <15> - 리처드 파인만 (上)]

[찌질한 위인전 <16> - 리처드 파인만 (下]










할 말이 있다!”


1618 8 24. 광해군에 대한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 허균이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사형 집행을 위해 죄인 허균의 자백을 받고 결안(結案:사형 할 죄로 결정한 문서)을 작성했어야 하지만 이 조차 생략할 만큼 급하게 처리된 처형이었다. 억지로 만든 결안에 서명을 시키려 했으나 허균은 이를 거부하고 붓을 내던졌다. 서명은 끝내 강제로 이루어졌다. 할 말이 있다는 허균의 외침은 허공에 메아리 쳤을 뿐 아무도 들은 채 하지 않았다. 허균은 역모 혐의에 함께 연루된 자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겼다.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기자헌의 말이다. 기자헌은 영의정을 지내다가 인목대비 폐모 문제로 허균 등과 마찰을 일으켜 유배까지 간 바 있는 인물이었으니 허균의 사형에 얼마나 의혹이 많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JPG



조선왕조에서 지워진 이름, 허균


그러나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는 기자헌의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뒤 광해군 시절 역모 혐의로 사형 당한 인사들은 복권되었으나 허균은 예외였다. 이후로도 허균은 조선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그가 언급될 때면 성도 없이 ()’이라는 이름만 씌어지거나 아예 무명 씨로 불리었다. 허균의 이름이 조선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왜 유독 허균은 그렇게 특별취급을 받았던 것일까?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에 격서(檄書)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민인길의 고발에서 드러났고, 이홍로와 결탁하여 동궁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허균이 진 죄명이야말로 오늘날 신자(臣子)된 입장에서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이었는데…(중략) 이런 죄명을 진 사람은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후략)”

-광해군일기 10, 4 29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외람되이 작위를 차지하여 녹을 훔쳤다.”

-광해군일기 10, 9 6

 

허균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8 24일 전후의 실록을 살펴보면 허균은 천지간의 괴물이자 개돼지 같은 행실의 인물로 기록된다. 4 29일과 8 22일 두 차례에 걸쳐 괴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사형 이틀 전인 8 22일에는 홍문관 관원들이 허균을 하늘이 낸 괴물이라고 비난하며 삭탈관직과 함께 국문(임금의 명령으로 죄인을 신문하는 것)하기를 청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괴물이 된 천재 허균. <찌질한 위인전>의 아홉 번째 인물이다.


명문가의 천재


허균은 1569(선조 2) 12 10(음력 11 3)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의 부친 허엽은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명조 때부터 관직에 올랐는데 청백리에 녹선되었을 정도로 청렴결백 했으며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질 때에는 동인에 가담하여 동인의 영수에 추대될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허엽은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허엽의 큰 아들 허성, 작은 아들 허봉, 삼남 허균과 딸 허초희(허난설헌)도 글재주가 남달라 이들 다섯을 일컬어 허씨 5문장가라 부를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허균의 재주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도 영특했다. 태어난 지 아홉 해 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허균의 매형 우성전이 뒷날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되기는 하겠지만, 허씨 집안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한 것을 전하며 허균이 역모 혐의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이 예견된 일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남긴다.  


앞서 인용한 광해군일기 10, 9 6일 기사에서도 허균에 대해 행실이 개돼지 같았다고 비난하지만 한편으로는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우야담과 광해군일기에 등장하는 허균의 모습. 비록 사실이라 단언할 수 없는 야담과 이미 역적으로 처형 당한 허균에 대한 악의적인 언급으로 채워진 실록이지만 위에 두 기록은 오히려 허균이 자신의 능력 만은 인정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허균의 나이 20대 초반에 이미 그의 작품을 표절한 시가 세상에 돌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시를 비롯한 문장의 창작과 기존 작품의 해석, 비평 등에 두루 탁월한 재능을 가진데다 방대한 독서량과 암기력까지 겸비한 허균은 벼슬에 오른 뒤 중국()과의 외교에서 크게 활약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조선에게 있어 당시 명과의 외교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조선에 당도한 명나라의 군대와 사신을 맞이하는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국가적 위기의 극복 여부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허균은 최소 6번 이상 사신으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수 차례 명과 조선의 국경까지 가서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임무를 맡았다.


허균이 이러한 임무에 계속해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과 조선의 외교 문화 때문이었다. 당시 명과 조선의 사신은 외교적 사안을 두고 각자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교환했을 뿐 아니라 유학과 불교, 도교에 이르는 폭넓은 학문과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 그리고 서로가 지은 시를 주고 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쌓고자 했다. 그렇기에 외교 석상에 파견되는 관리들은 자국의 학문적 수준과 깊이를 상대국에 드러내는 얼굴과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허균은 이러한 역할을 맡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의 천재 허균은 명나라 사신과의 만남에서도 전혀 꿀리지않았던 것이다.


2.jpg


외교 사절로 활약한 허균이 명나라 사신 앞에서 천재성을 드러낸 사례도 적지 않다. 임진왜란이 끝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원군과 함께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 시인 오명재는 당시 조선의 시를 연구하고 있었다. 오명재는 이때 모은 조선의 시들을 엮어 명나라에서 조선시선(朝鮮詩選)이라는 책을 냈는데, 허균이 오명재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명재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 허균이 그의 앞에서 신라 시대부터 조선까지 전해오는 문인들의 시 수백 편을 외워 보였던 것이다. 오명재는 조선시선 서문에 허균의 도움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균이 선조의 명을 받아 명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허균이 만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명나라 3대 문사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주지번과의 대화에서도 전혀 막힘이 없었다. 문학, 유교, 불교, 도교에 걸친 대화에서 허균은 그간 읽어왔던 책들을 그 자리에서 외워서 인용하였는데 함께 간 다른 조선 관리 중에서는 허균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허균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된 신흠은 그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습도 또한 류()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여우나 살쾡이, 뱀이나 쥐 같은 짐승의 정령이다.”

-허경진, 허균 평전



당시에는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에게 나라에서 따로 체류비를 지급하지 않았는데, 대신 그들이 중국에서 사치품들을 사들여와 본국에 팔아 이윤을 남겨 충당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허균은 중국을 오갈 때 도자기나 장신구 같은 사치품을 사지 않고 가진 돈 전부를 책을 사는 것에 썼다. 보다 넓은 세상과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허균은 명에서 돌아올 때 수레에 4천여 권의 장서를 싣고 와서 독서에 탐닉했던 것이다. 뛰어난 문장력과 말재주, 방대한 독서량과 암기력을 갖춘 허균은 분명 당대 조선의 천재였다.


관직 생활 20여 년,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


허균은 처음 벼슬길에 올라 사형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 2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사이 허균이 무려 여섯 차례나 파직(罷職) 당했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을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단언하기 어렵겠으나 한 사람이 여섯 차례 파직을 당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문제를 일으켜서 수 차례 파직을 당하게 되면 그 이후로는 관직에 오르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 이 단순한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허균에 대한 두 가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먼저, 허균의 능력이 출중했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이 당시 조선에 매우 필요했다는 것이다. 여섯 번의 파직은 뒤집어 생각하면 여섯 번이나 관직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허균은 29세에 첫 번째 파직을 당한 후 불과 한 달이 지나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여 예조좌랑이 된 바 있다. 이미 살펴본 허균의 천재성을 볼 때, 그가 스스로 시험을 통하여 다시 벼슬을 얻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다. 게다가 허균이 관직에 있지 않는 동안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거나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일이 생기면 조선의 관료집단은 허균을 다시 찾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국가의 위신과 체면이 걸린 외교 석상에서 허균만큼 이를 잘 수행할 만한 재목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벼슬 없이 상대국의 사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허균은 그 때마다 새로운 관직을 받았다.  


4.jpg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허균이 관직에 오래있지 못하고 번번히 파직 당했다는 것은 허균의 사람됨과 행실이 당시 조선 관료 사회와 맞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서른 한 살의 황해도사 허균은 기생을 너무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두 번째 파직을 당했으며, 서른 아홉 살에는 삼척부사로 부임한 지 불과 13일 만에 세 번째 파직을 당했다.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였다.


파직 당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허균은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부임지로 향하던 중 임명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으며, 관직을 받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나 바로 다른 사람으로 자리가 갈려나간 것도 최소 두 차례 이상이었다. 이는 허균이 그만큼 당시 관료들에게 책 잡힐 만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허균 자신이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의 사람들에게 눈엣가시였다는 것을 뜻한다. 허균은 조선의 이단아였다.


조선 후기의 시작, 균열의 징후


허균은 선조 때 태어나 광해군 때 죽었다. 20대 초반에 임진왜란을 겪었으니 조선 왕조의 전기와 후기를 걸쳐 살았던 것이 된다. 보편적으로 조선조를 전, 후기로 나누는 기준을 임진왜란으로 놓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 국가의 왕조가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해 다른 왕조로 교체될 때에는 대부분 그와 함께 시대의 패러다임 또한 바뀌었다. 이제껏 이어져 오던 왕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기도 하거니와 대게 그러한 혁명이 이전 왕조의 쇠락과 균열을 발판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난 왕조는 통치 이념과 제도, 사상 등을 새로이 정비하고 정착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져나간다. 그러한 유지, 보수가 비교적 착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왕조의 역사와 전통은 오랜 기간 이어질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왕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져버릴 것이다.


조선 왕조 또한 이와 같이 시작되었다.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던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은 유교적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국가를 건설했고 각종 제도와 규약은 물론 사회 규범과 도덕률을 유학의 기반 위에 세웠다.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이 1910년 한일합방까지 518년 동안 이어졌으니 조선 왕조가 굳건한 기반 위에 오랫동안 그 명맥을 잘 유지해 온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지 정확히 200년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그것을 기점으로 시작된 조선 후기의 시작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미 그때부터 조선은 균열의 징후를 뚜렷하게 보여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자리에. 허균이 서 있었다.


허균의 이름이 조선에서 지워진 이유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허균은 광해군 시대에 역모 혐의로 처형 당한 인사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인조 반정 이후에도 복권되지 못했고, 이는 조선 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허균은 단순히 광해군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만 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정확히 표현하면 조선을 지배하고 유지하는 세력과 시스템-의 적이었다.


허균이 조선의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종교와 사상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조선의 근간이었다. 유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과 종교를 가지고는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었고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이 후기로 들어서면서 더욱 경직되어 유학 중에서도 주자의 성리학 만이 유일한 학문으로 인정 받아 그 외의 유교 경전의 해석과 학파는 모조리 사문난적으로 몰려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은 주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자유롭게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허균은 작은 형 허봉의 소개로 알게 된 승려 사명당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찰의 승려들과도 교분을 쌓았으며 불교 자체에도 심취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야 허균의 그러한 행동이 무에 큰 문제가 있겠나 싶겠지만 당시는 허균이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만으로 파직이 가능했던 환경이었다. 극단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학문과 사상의 풍토 속에서 허균의 행동은 충분히 조선 관료 사회의 질서, 나아가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허균은 조선의 기득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첩의 소생이나 재가한 여인의 소생을 서얼이라 하는데, 조선 건국 당시만해도 이러한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또한 서얼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이후 서얼의 관직 등용에 제한을 두는 서얼금고(庶孼禁錮)’를 제도화하면서 본격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이후 서얼금고는 지배 계층인 양반의 숫자가 커지는 것을 막고, 동시에 양반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6.jpg


그러나 허균은 이러한 서얼금고에 비판적이었다. 비록 그 자신이 양반이기는 하였으나 서얼금고라는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능력 있는 자들이 등용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균은 자신의 글 유재론(遺才論)’에서 좁은 땅에서 가뜩이나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신분에 따라 등용에 제한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논조로 서얼금고의 폐지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허균은 평소에도 토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양반과 서얼을 가리지 않고 어울렸으며 자신이 지방관으로 봉직하는 동안에는 능력 있는 서얼 친구들에게 자리를 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허균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공고한 신분제 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당시 양반들에게 허균의 주장은 불온을 넘어 위협적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허균이 아니어도 당시에 많은 서얼들이 서얼금고의 폐지를 요구하며 임금에게 수 차례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차별 받고 있는 서얼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서얼도 아닌 허균이 이미 불만이 가득한 서얼 집단과 교류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을 것이고, 그렇게 허균은 점차 위험인물로 찍혀갔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양반 계층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에 더욱 위험했다. 허균은 유교 사상에만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도 유교적 원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기생과 어울려 노는 것을 꽤나 좋아했던 허균은 중앙 관료로서 지방 출장을 갔을 때 자신의 수청을 들었던 기생의 이름과 잠자리에서의 이야기까지도 기행문에 남겼다. 당시의 관례상 중앙 관료가 지방에 당도하였을 경우 지방관이 알아서 접대의 자리를 마련하고 기생을 보내 수청들게 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허균처럼 그런 기록을 세세하게 남기는 관료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허균은 자기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관리들의 이야기까지 글로 남겨 한 기생을 차지하기 위해 관리들이 다투는 모습까지 내용에 담았다. 어차피 속을 따지고 들면 거기서 거기인 양반들의 행실이었겠으나 체통과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허균의 행동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같은 양반으로서 허균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도 모자라 양반 사회 자체의 권위에 해를 입혔으니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허균이 너무 많은 기생을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양반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알아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것을 허균은 너무 드러내놓고 다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허균은 모친의 상() 중에도 3년상을 지키기는커녕 그 시기에 기방에 출입하여 크게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허균이 처형당하는 그날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허균을 비판하는 좋은 구실을 했다.


3.jpg


그것도 모자라 허균은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예의 바르고 공손한 인물이 아니었던 듯하다. 허경진 교수는 허균 평전』에서 병조에 봉직했던 시절의 허균을 두고 남들을 깔보고 제멋대로 구는 행동 때문에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사헌부에서도 계를 올려서 파직시키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드는 것 투성이였던 허균, 그런데다 성품까지 모가 났으니 행여 다른 사람에게 질타를 받더라도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고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게다. 허균의 천재성을 감안하면 그를 직접 대하는 사람들에게 허균은 소위 말해 그저 재수 없는 인간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면들을 모두 종합해봤을 때 허균이 여섯 번이나 파직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등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렇게 허균은 점점 조선의 적이 되어갔다. 허균을 비판하는 무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괴물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조선의 사상적 근간인 유교 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다 넓은 인재 등용의 기회를 주장했으며, 스스로의 권위를 허물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던 허균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눈에 과연 괴물의 모습일까?


조선조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겪은 왜란과 호란, 전란으로 파탄 난 민생을 도외시한 당쟁. 분열된 당파의 싸움은 어차피 큰 틀에서는 유학을 벗어나지 못한 해석의 차이에 기인했을 뿐 민초의 삶과는 완전히 괴리된 것이었으며 사상 논쟁을 가장한 권력다툼에 불과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허균이 살다간 시대. 조선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어가면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이어지는 하편에서는 조선의 적이 되어갔던 허균의 성장환경과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는 한편, 허균이 꿈꾸었던 혁명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려보도록 한다. 그의 찌질함과 함께.


5.jpg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는 없다.

-허균(1569~1618)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