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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6. 수요일

아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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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 축빠의 세계 <1>]

[탐험! 축빠의 세계 <2>]







편집부 주


<아외로워>의 “탐험! 축빠의 세계”, 

월드컵까지 매주 화요일 칼같이 연재됩니다.

(라고 본인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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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그렇다.

 

 

 

번갯불 월드컵

 

1994년 11월.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2014년 현재,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개최지가 결정된 상황임을 감안해야 한다. 월드컵 개최가 8년도 남지 않았던 상황에 유치 확정도 아닌, 유치의사 표명을 했으니 지각도 이런 지각이 없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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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유치 경쟁국은 일본이었다. 축구경기만 해도 한일전은 과열이 되기 마련인데 월드컵 유치라니? 경쟁이 과열되는 것이 당연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매우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미 1986년부터 월드컵 유치를 위해 꾸준히 준비해 왔는데 새치기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후발주자의 유치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다.

 

그러나 우리나라 축구협회 저리가라 하는 혼탁한 FIFA의 어른들이 이리 저리 볶으면서, 한국은 진짜로 월드컵을 유치할 수도 있는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하게 된다. FIFA는 유엔이나 유니세프 산하기관이 아니며, 수십, 수백억 달러의 연간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거대한 ‘국제비영리단체’다. 큰 돈 만지는 비영리단체가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거 본 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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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의 실세들은 대략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이런 곳에서 한국은 줄을 기가 막히게 잘 선 것이다. 피파의 이권을 둘러싼 암투와 권력다툼이 없었다면 한국의 월드컵 유치는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줄은 잘 탔으니 이제 월드컵 개최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피파가 비록 마피아스러운 집단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동창한테 개최지를 몰아준다거나, 피파 회장이 다니던 교회 목사의 사위가 피파 권력의 실세라거나 하는 막장 조직은 아니다.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월드컵 개최 역량이 안 되면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94년과 95년에 프로축구 구단이 집중적으로 탄생한 것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던 한국의 월드컵 유치전과 관련이 있다. FIFA실사단에게 축구 인프라가 있음을 보여야했기 때문이다. 사실 축구팀이야 운영이 문제지 만들기는 쉽다. 급전 땡겨서 사람 모으고 경기장 빌리면 된다. 문제는 아무리 서둘러도 몇 개월 만에는 준비가 불가능한 준비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럴듯한 경기장이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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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올림픽스타디움.

피치와 관중석 사이의 광활한 평야를 보라! 저기서 축구 보면 누가 어시스트 했는지 보이겠는가.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은 잠실종합운동장이었다. 88년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이 경기장은 일단 축구 전용구장이 아니었고, 깔려있는 잔디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조잡하고 관리도 안된 것이었다. 월드컵 개최하겠다는 나라의 국대 홈구장이 이모냥이니 다른 구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 전용구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전용구장이 아니었다. 비록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규격은 아니었지만 유럽 어디다 당장 갖다놔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한 시야와 축구 감상에 최적화된 구장이었다. 당시 프로리그가 열리던 종합운동장들의 상당수가 무너질까 두려워 응원을 자제하게 되는 한심한 수준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경기장은 한국에 있으나 한국의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그 무엇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경기장이 바로 ‘스틸야드’. 포항 스틸러스의 홈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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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개장한 스틸야드. 24년이 지났어도 이런 구장 없다.

 

 

포항, 천재를 낳다

 

당연히 피파 실사단은 스틸야드를 보고 돌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이 경기장이라도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지난 시간에 홍명보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예고했었다. 그런데 자꾸 경기장 얘기하니까 이놈이 지난 편에 뭐 썼는지 까묵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 다 안다. 그런데 이게 관련이 있는 이야기다. 포스코는 박태준 회장의 영향으로 이렇게 시대를 뛰어넘은 경기장을 건설할 만큼 축구에 선진적인 투자를 했다. 이런 기업이 만들고 운영하는 축구팀이 바로 포항 스틸러스다. 이런 말 참 오그라들지만, 한국 축구의 선구자적인 구단이다.

 

포항의 모기업은 포스코다. 포스코의 공장은 수백톤의 쇳물과 슬라브가 생산되는 위험한 곳이다. 대학 다니면서 주워들은 바로는 이런 이유로 포스코의 기업 문화는 매우 엄격하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멍때리면 쪼인트가 날라왔고 안전에 대한 매뉴얼이 매우 발달했단다. 이런 기업 문화는 축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항의 축구는 엄격하게 조직적이어서 모든 선수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인다. 시대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포항의 축구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본기(90년대 한국 선수들에게 없던 바로 그거)와 조직적인 전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90년대, 이 팀에는 전설적인 선수 두 명이 뛰고 있었다. 한 명은 우리나라의 대표 스트라이커 황선홍, 또 다른 한명은 아시아 축구사상 전무후무한 ‘리베로’이자, 지난 편에서 이번 편의 주인공으로 예고한 홍명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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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관점에서 보면 거지가 된 납치 피해자 운동선수 모임인 ‘공포의 외인구단’이 멋진 취급 당하고, 국가대표 선수들 소집해서 줄빠따 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선배 축빠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시절에도 포항의 플레이는 어딘가 달랐다 한다. 축구 중계만 틀면 해설자들이 투지, 정신력, 근성 타령하던 시절, 포항은 패스와 기술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런 포항의 색다른 마인드는 축구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일본 등 외국의 모범적인 운용방식을 수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재미나다. 정신력 타령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건만, 이런 일제의 잔재가 스포츠에서 패전국인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더 오래, 짙게 남아있었다니 말이다.

 

어쨌든, 한국에 체계적인 육성이나 관리를 통해 자라난 선수가 없던 시절, 비록 어린 시절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지는 못했지만 타고난 재능을 감출 수 없었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황선홍과 홍명보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이들이 한국과 세계에서 맹활약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본기가 아니라 뛰어난 두뇌 덕분이다.

 

황선홍의 골은 개인기가 출중하다거나, 동물적인 감각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지독한 연구와 연습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뭐 진짜 그랬는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팬이 보는 입장에서는 그랬다는 말이다. 홍명보는 공격수와의 1:1 대결에 상당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2 월드컵 3-4위전에서 보여준 수비 실책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홍명보는 길과 흐름을 볼 줄 아는 선수였던데다가 주위 선수들을 한 몸처럼 부리는 카리스마 역시 무기로 쓸 줄 알았다.

 

한국축구 특유의 빠르고 거친 선수들이 아닌, 정교함과 기술, 여우같은 지능을 무기로 쓸 줄 아는 이런 선수들이 뒤늦게나마 각성해서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포항 구단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본다.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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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의 완성

 

축구선수가 감히 한국땅을 떠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 축구선수는 잘해도 한국을 뜨고 못해도 한국을 뜨지만 옛날에는 축구선수가 한국을 뜨려면 엄청난 투쟁이 있어야 했다. 최근 여자배구의 김연경 선수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구단과 협회가 선수의 행보에 전권을 쥐고 있다면 전국구 스타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수많은 난관 끝에 홍명보는 외국으로 나간다. 멀리 가지도 못했다. 이웃나라 일본의 그저 그런 구단인 쇼난 벨마레로 간다. 그리고 마침내 ‘좀 나은’ 구단인 가시와 레이솔에서 커리어의 꽃을 피우게 된다. 당시 일본은 86년부터 월드컵 유치를 계획하면서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리그를 만들어온 상황이었고, 여전히 헝그리한 90년대 초중반의 한국 축구에 비하면 매우 좋은 여건에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외국 생활은 현재의 홍명보를 이해하는 몇 가지의 코드를 던져준다.

 

일단, 기존 권위의 압박이 크게 사라진다. 한국에서 운동을 하려면 선배 눈치 봐야지, 지도자 눈치 봐야지, 협회 눈치 봐야지 골치 아프다. 일본은 운동선수 간에 선후배의 위계가 우리나라만큼 강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일본의 축구 환경은 우리나라보다 자유로웠다. 숨막히는 위계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운동하는 홍명보는 마치 홍세화 씨가 프랑스에 발을 딛으며 느꼈던 가벼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재발견하는 계기도 됐을 거다. 홍명보는 가시와 레이솔에서 외국인 선수이면서 붙박이 주장을 맡았다. 그는 포지션상 좌우에 수비수를 거느린 3백의 중심이었고, 단순한 중앙 수비수가 아니라 최 후방에서부터 공을 끌고 올라가는 공격의 시발점이었다. 따라서 팀의 중심이었으며, 반대로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부족한 홍명보는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는 위치였다.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포지션이기도 하지만 그 포지션에 있기 때문에 카리스마가 배양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의 권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십을 제한당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쳐도 선배 눈치 보고 감독님 눈치 보고 해야 했던 한국에 비해 일본에서는 다른 선수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한국에 있는 선수들은 기존의 권위에 눌려 홍명보의 카리스마에 포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축구선수로서 정체성도 발견했다. 리베로의 역할을 발견한 곳은 포항이었지만 그 능력을 이해하고 극대화 시킨 곳은 가시와 레이솔이었다고 한다. 선수 개별의 역할을 중요시하고, 예쁘게 만들어나가는 일본이, 이기기 위해 팀 운용의 원칙이 자주 바뀌곤 하던 당시의 한국보다 포지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유능한 감독 홍명보

 

지금 대한민국 대표팀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팀을 꼽으라면 나는 포항 스틸러스를 꼽겠다. 이 팀은 홍명보 국가대표 감독과 거의 비슷한, 포항-가시와 레이솔 테크를 탄 황선홍 감독이 지휘하고 있다. 선수들은 전략의 이해도가 높고, 매우 조직적이다. 끝 없이 패스하며 골문 앞에서 감각적인 찔러주기로 골을 만든다. 선수 구성만으로 봤을 때 리그 최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약팀으로서 월드컵에 도전하는 우리나라 대표팀과도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황선홍 감독과 홍명보 감독은 고집스러운 마이웨이를 보여준다. 황선홍 감독이 외국인 선수 없이 팀을 꾸린 지 2년째다. 물론 외국인 선수를 사올 돈이 없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지원을 받는 같은 기업의 팀 전남 드레곤즈가 스테보나 코니 같은 외국인 선수를 데려와서 기존 선수들과 조화롭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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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를 소총수로 만기 전역한 것으로 유명한 포항의 김원일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에서 복무했다

 

 

황선홍 감독이 축구인생을 통해 그려왔던 그림을 포항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황선홍 시대 이후 포항은 선수가 잘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 섬 같은 팀이 됐다. 특히 들어가기는 더 어렵다. 이번 시즌 포항이 영입한 공격수 강수일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포항이 선수를 사올 돈이 없어서라고도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전남이나 서울을 봐도 이 정도로 선수단 변화가 없지는 않다. 즉 황선홍 감독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구현하려는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그 전략이 몸에 밴 선수라는 뜻이다.

 

홍명보 감독도 마찬가지다. 홍명보호의 주축은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때 부터 같이 해 온 선수들이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대표선수 선발에는 외압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원래 그러면 안되는데 우리나라는 알게 모르게 그래왔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발은 감독에게는 전략의 일환이지만 선발 자체가 선수와, 선수를 둘러싼 축구판에는 이권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발이 되면 갑자기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하고 마담뚜가 몰려든다.

 

그런데 홍명보 감독은 연령대별 감독을 거치면서 자신이 처음부터 데리고 있던 선수들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가고 있다. 이게 외국에서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다. 당장 2002년만 생각해도 당시의 포르투갈 대표팀은 이렇게 성장한 황금세대였다.

 

홍명보 감독은 지금 국가대표의 주축 멤버들, 그러니까 기성용, 구자철, 박주영 등의 선수와 유소년부터 함께 해왔다. 감독이 선수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이 감독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영화 감독들에게 페르소나 역할을 하는 배우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조니뎁 없는 팀 버튼을 상상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홍명보 감독의 박주영 선발 논란이나, SNS파문으로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던 기성용 재발탁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박주영은 홍명보 감독이 생각하는 축구가 어떤 건지 보여주는 선수다. 일단 문전에서 공을 예쁘게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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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아아…

 

 

전임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최강희 감독이 이동국과 더불어 외국인 선수 에닝요를 고집스레 선발하려 했던 이유도 같다. 특히 최강희 감독의 경우 새로운 팀을 만들어 나갈 여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신이 잘 아는 선수들을 선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2006년부터 만들고 다듬어 온 전북현대를 통째로 들고 국대로 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홍명보 감독이 선수 시절 얻은 성향은 국가대표 운영에도 드러난다. 일단 홍명보 감독은 한국 축구계의 권위의 대척점에 서려고 한다. 이것은 그가 탈권위의 저항정신을 가져서라기보다는 이것이 팀을 장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홍명보 감독이 거느린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외국 리그에 진출했고, 또 새로 선발되는 선수들은 대부분 외국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외국에 있는 선수들에게 홍명보 감독의 국가대표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황석호(산프레체 히로시마)나 김영권(광저우 에버그란데)이 강민수(울산 현대)나 정인환(전북 현대)보다 국가대표로서 적합한 이유는 ‘한국을 떠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과 선수는 사제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예를 들어 전북 최강희 감독과 이동국 선수는 관련 BL물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소울메이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성남의 공격수 김동섭이 안익수 전 성남 감독의 관계 역시 유명하지 않던가. 이런 관계가 단절된 외국리그의 선수들이 홍명보호의 주축이다. 따라서 1년에 불과 몇 차례 소집되는데 불과한 대표팀이지만 구성원들의 유대감, 감독의 존재감은 끊이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기대되는 2014월드컵

 

FC코리아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인기있는 축구팀은 국가대표팀 밖에 없다는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정말로 한국의 국가대표가 프로페셔널한 축구팀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표팀은 약간 다르다. 그간 다른 대표팀에서 보기 어려웠던 응집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어디로든 일단 한국을 뜬 홍명보의 아이들은 해외파를 우러르는 세태와 맞물려 특권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기성용 SNS 파문이 그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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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이정도는 애교지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23세 이상 대표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세대가 이제 월드컵에 출격한다. 결과는 어찌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대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가장 공들여서, 가장 폐쇄적으로 만들어낸 대표팀이다. 황선홍 감독이 포항 스틸러스에서 거둔 성공 공식이 국가대표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만약에 성공한다면 이것이 우리나라 축구를 어떻게 바꿀지 궁금해진다.

 

 

 

 

 

 

 아외로워

트위터 : @vforveri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