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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30.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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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루저론 Intro

[특집]루저론 - 1 노력과 의지를 믿지마라

[특집]루저론 - 2 한국 사회의 노력 이데올로기

[특집]루저론 - 3 능력주의와 공정사회의 함정









1. 약육강식, 경쟁은 인간 사회의 숙명인가?

 

인간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평등’이라는 이상을 향한 거대한 실험이었던 공산주의 운동이 처참한 모습으로 붕괴됐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미명의 전체주의적 정치 제도 등 피폐한 상처만을 남겼던 구공산권과 3대 세습의 북한이라는 기괴한 체제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평등’이라는 이름을 호출하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사회조차도 지배-피지배 집단 간의 차별은 더 극명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평등주의'라는 이상은 불순한 자들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공산권 붕괴 후, 레이거노믹스의 이름을 단 시장만능주의와 무한경쟁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운위할 정도로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로 간주되고 대안 체제에 대한 고민은 현실에서 공상으로 밀려났다.


무한 경쟁 논리는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 논리로 정당화되며 중력과도 같은 자연사적 필연으로 인식된다. 또한 인간은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동물로서, 최대한의 이익 추구를 ‘합리적 자세’로 평가 받는다. 이러한 가정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류 경제학의 근본바탕에 깔린 철학이며, 여기에 근거하여 한계효용, 한계수요 이론이 도출된다. 다소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은 예외적 ‘잡음’에 불과할 뿐 이러한 ‘법칙’은 중력의 법칙처럼 전 사회에 관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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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우익 세력의 이러한 세계관은 공교롭게도 민주화로 인해 국가주의의 색채가 옅어져가던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퍼져갔다. 그 결과 이것은 승자독식구조 사회를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같은 논리로 볼 때 루저는, 경쟁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낙오자로서, 자연적 도태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적인 부산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루저가 발생하고, 더 확대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끼어들 필요가 없고, 오직 루저가 되지 않을 궁리만이 횡횡할 뿐이다. 급기야 우리는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라는 섬뜩한 광고 문구마저 담담히 지켜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요즘같은 시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운운하면 시대착오적인 인간, 이념의 화석으로 불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세계화라는 말로 휩쓴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는 본질적으로 마르크스보다 한 세대 앞선 퀴퀴한 ‘자유방임’ 고전파 경제학의 약육강식 이념을 재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파 경제학자 중의 한 명인 멜서스는 악명 높은 ‘인구론’에서 굶어죽는 빈자를 살리는 일은 악덕이라고 서슴없이 단언하였다. 식량증산에 비해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미래에 떼죽음을 당할 것을 우려한 그는 ‘구빈법’을 반대하고, 생계비 이상으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18세기 자유방임 경제 이데올로기의 21세기 부활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대부로 일컬어지는 하이예크는 50~60년대만 해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공산주의 이론이 터무니없는 낙관으로 인간과 세상을 재단하고, 교조적인 계획경제와 집단 소유제로 인민을 나락으로 빠트렸다면, 시장만능주의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비현실적인 이론적 가정과 시장에 대한 신앙심으로 극심한 빈부격차와 정글자본주의를 만들어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켰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경쟁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편견을 가져온 대표적 고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으로 유명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홉스는 인간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옹호했고, 스미스는 정반대의 처방을 내렸다. 어쨌든 그 둘은 모두 동일한 가정을 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성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한 ‘이기성 모델’은 주류 경제학적에서 보편 타당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노벨상 수상자 게리 베커는 범죄의 이점과 처벌의 대가를 이성적으로 저울질하는 범죄자의 계산을 고려해서, 처벌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이른바 수익, 비용 모델의 범죄학에의 적용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이기성과 탐욕적인 인간형을 전제한 가설이다. 방목하는 소 숫자에 제한이 없으면 농부들은 계속해서 가축 수를 늘려가고, 다른 농부들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을 염려한 농부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소 숫자를 늘리면서 공유지 풀을 남용하여 공유지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남지 않을 것을 가정한다. 때문에 재산권 옹호의 강력한 논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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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자연과 인간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존재이며, 세상은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곳인가?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신경과학, 행동경제학 등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실증적 연구는 홉스의 성악설보다는 루소의 성선설을 지지하고 있다.


 

2. 자연의 본질은 협력과 공생이다.

 

무자비한 양육강식과 자연선택으로 설명되는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의 본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자연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연계도 경쟁을 배제한 협력이 더 일반적이라는 지적도 많다.(이하 알피콘, <경쟁에 반대한다>인용, 발췌)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굴드의 말을 들어보자. 

 

“자연선택을 경쟁을 통한 성공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문화적 편견에 가깝다. (...) 성공을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 그 목표는 상호부조와 공생을 포함하는 다양한 전략을 통해 달성될 수 있으며, 이것을 우리는 협력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자연선택이 선험적으로 경쟁이나 협력 행동 중 어느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즉, 자연선택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과정에서 경쟁만을 유일한 전략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협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생물학자 조지 게이로드 심슨의 설명이다. 

 

“투쟁도 가끔 발생하기는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은데 (...) 다양한 재생산에 유리한 것은 대부분 평화적인 과정이며 여기서 투쟁은 실로 부적절하다. (...) 이용할 수 있는 식량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미성숙한 개체들을 보호하며, 집단 내부의 불화(투쟁)을 억제하는 것 등이 이 평화적인 과정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댕기물떼새들은 다른 새들을 천적들로부터 보호하며, 암사자, 침팬지는 협력해서 사냥하고 나누어 먹는다. 펠리컨도 마찬가지다. 흡혈박쥐는 먹이를 찾지 못한 동료를 위해 피를 토해내는 습성이 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보면 식물이 산소를 만들고 동물이 이산화탄소를 만든 것은 생물종 간의 가장 기초적인 협력적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흙은 유기체 덩어리다. 1kg의 흙에는 5천 억 마리의 박테리아, 진균류 10억 마리, 다세포 생물이 많게는 5억 마리까지도 들어있다. 이러한 유기체들은 대부분 협력하여 나뭇잎과 동물의 배설물 같은 유기물을 분해하고, 질소를 추출하여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시키고 화합물을 바꾸어 식물의 광합성을 돕는다. 곰팡이는 식물이 무기질을 흡수하도록 돕고, 식물은 곰팡이에게 탄수화물을 제공한다. 벌과 꽃의 관계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 몸 안에 가득차 있는 박테리아가 없다면, 신진대사는 불가능할 정도다. 이처럼 균과 생물, 동물과 식물, 같은 종 내부 할 것도 없이 생태계 전반은 협력과 상호의존 공생의 다발로 가득차 있다. 

 

개미부터 들소에 이르기까지 동물들의 습성을 관찰한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동물 간의 경쟁은 예외적인 기간에 한정적으로 일어난다. (...) 보다 좋은 생존 환경은 상호부조와 원조 등으로 경쟁을 억제할 경우 만들어진다. ‘경쟁하지 마라, 경쟁은 언제나 같은 종에 피해를 입힌다’ 이것이 비록 우리가 잘 깨닫지는 못하지만 항상 존재하는 자연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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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함에도 어째서 우리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상호부조의 확실한 증거들을 간과하는가? 생물학자인 존 빈스의 설명이다. 

 

“많은 생태학자들이 믿듯이 경쟁은 그렇게 보편적인 경향이 아니다. 경쟁은 (...) 서구 문화의 중심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스포츠, 경제, 우주개발, 국제정치나 전쟁 등을 표현한다. 따라서 사회생태학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주된 요소가 경쟁이라고 여기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즉, 자연선택을 경쟁으로, 다양한 재생산을 착취로 변형시키는 것은 사회경제적 편견을 가지고 생물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경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이런 경향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엥겔스였다. 

 

“다윈주의자들의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학설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론과 멜서스의 인구론과 같은 경쟁적인 부르주아 경제학 이론을 사회에서 자연으로 간단하게 변용시킨 것이다. 이런 마법사의 속임수 같은 것이 재주를 부리면 (...) 이 주장은 다시 자연에서 인간의 역사로 변용되어서, 이제는 그것이 인간 사회의 불변의 법칙으로 입증된 것처럼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이 된다.”

 

 

3. ‘합리적’ 인간은 없다. 

 

자연의 본질이 경쟁이 아니라 협력-공생이라면 최고의 고등생물인 인간의 본성이 경쟁심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협력’은 본질적으로 높은 인지 능력을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협업과 이타심 대신 경쟁에만 의존해왔다면, 현생 인간종은 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범죄자의 계산’, ‘공유지의 비극’처럼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한 인간관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인지는 최근 행동경제학에서의 실증적 연구가 잘 보여준다. 엘리노어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2009년 공유물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는지를 입증해서 노벨상을 받았다. 여기서 일례로 들었던 스페인의 농부는 공유지였던 수자원을 500년 동안 자율적으로 잘 관리해왔다. 미국의 5만 명 이상 된 도시의 75%는 가혹한 처벌이 아니라, 경찰과 주민 간의 관계를 인간적으로 관리해 범죄를 줄이는 자율 방범 제도만으로도 범죄율을 줄이는 데 더 효과를 보았다. 극적인 것은 세계에서 범죄자 처우가 가장 좋은 북유럽 국가의 범죄율이 처벌이 가장 가혹한 나라들(중국, 미국 등)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지금 시대의 IT사업 대부분은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엄청나게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우선 '지식IN'으로 급성장한 NAVER는 야후나 라이코스에 밀려 사라졌을 공산이 크다. 자신의 시간과 지식을 아끼지 않고 타인의 궁금증을 아무런 대가없이 해결해주는 유저들이 없었다면 지식IN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위키피디아는 수많은 익명의 지식기부자로 전세계 굴지의 사이트로 성장했다. 리눅스라는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예들을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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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웨어 프로그램들


무엇보다 게임 이론에서 입증된 각종 실험 모델은 이기적 인간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가정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최후통첩게임 

 

최정규 교수의 저서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게임이론과 진화론을 종횡무진하며 주류 경제학의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관에 반박하는 내용이다. 이타적 인간이 어떻게 이기적 인간을 진화적으로 앞서게 될 수 있는지, 경쟁보다 협력의 전략이 어떻게 우월하게 되었는지 최근의 행동경제학의 실험 결과를 소개하며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소개된 최후통첩게임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최후통첩게임은 이렇게 구성된다.

 

여기 1만 원이 있다. 제안자 A는 1만 원 중의 일부 액수를 응답자 B에게 제안한다. 응답자가 그 금액을 수락하면 서로 나눠 갖는 것이고, 거절하면 제안자와 응답자 모두 돈을 잃는다. 

 

이 게임에서 참가자들 대부분이 제안한 금액은 40~50%에 수렴되었다. 10% 미만의 제안 금액은 거의 거절되었다. 단 1원의 이익이라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 인간’인 것이 분명하다면, 0원이 아닌 금액은 모두 수락되어야 마땅했다. 주류 경제학이 가정한 표준적 인간은 현실에서 보면 매우 이례적일 뿐인 것이다. 이 게임을 나라별로, 민족별로 진행시켜보았지만, 의미있는 차이는 없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인간은 본능처럼 형평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게임에서의 결과가 이해타산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제안자가 매우 낮은 금액을 제시했을 경우 거부된다면 제안자 역시 손해를 볼 것이므로, 그것을 예측하여, ‘적정한’ 금액을 제시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때문에 이 게임을 약간 변형하여 응답자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으며, 제안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제안하도록 설계했다. 한 가지 선택지는 20만 원 중 2만 원만 응답자가 받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만 원씩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다. 제안자가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떤 것을 골라 제안하더라도 응답자는 거부할 수 없다. 놀랍게도 제안자의 76%가 10만 원씩 공평하게 분담하는 것을 선택했다. 

 

제안하는 금액 자체가 적어서 ‘합리적’ 인간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된 실험자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게임을 진행시켜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나왔다. 결론적으로 주류 경제학이 가정한,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은 오히려 현실에서 드문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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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게임 모델을 보자. 두 명의 공범 용의자 A, B가 있는데, 각자 다른 방에서 수사관들에게 범죄에 대한 자백을 강요받고 있다. 이 두 명의 죄수 모두가 부인하면 둘 다 징역 1년이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이 죄를 자백하고, 다른 한 명이 부인할 경우, 자백한 죄수는 석방이고, 부인한 용의자는 징역 7년이다. 두 용의자 모두 자백하면 둘다 징역 5년이다. 이것을 보수 행렬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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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의자는 자백(배신)했을 때 0 혹은 -5 두 개의 선택지가 생기고, 부인(협조)했을 때는 -1 혹은 -7의 경우가 나온다. 상대방이 부인할 때는 0이 되고, 상대방이 자백(배신)을 해도 -5를 받게 되므로, 이 행렬의 계산에 따르면 나는 항상 자백(배신)의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될 터이니, 항상 자백(배신)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상황이 된다. 물론, 둘 모두 협조해서 각각 -1만 받을 경우가 둘 모두에게 최선의 상황이지만, 이기적인 인간을 가정하게 되면 이 둘 모두 협조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둘 다 배신의 전략을 써서, 결국 둘 모두 -5라는 선택으로 내시 균형이 생긴다는 것이다. 

 

리 로스(Lee Ross)가 미국 대학생 및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 ‘죄수의 딜레마’ 실험에서 이 게임 실험 참가자 절반에게 이 게임의 명칭을 ‘협력하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서로 경쟁하는 ‘윌스트리트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게임 구성은 동일했다. 다만 명칭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협력하는 커뮤니티 게임’의 명칭을 받은 참가자들 70%가 협력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반면 ‘윌스트리트 게임’의 이름으로 참여한 경우는 반대였다. 이 게임에서는 70%가 협력을 택하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더 나은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그렇게 행동한다. 협력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한 경우에도 역시 그에 맞게 행동했다. 표본 집단의 40%가 상황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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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트리니티대학 동물학과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교수는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두뇌가 신체구조에 비해 과도하게 크고 지능이 발달하게 된 원인을 집단이 커지고 복잡해지며 개체 간의 상호작용이 늘어나면서 지능이 발달했다는 ‘사회지능설’로 설명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공지능을 가진 디지털 생물을 만들었더니 서로 협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뇌의 용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이 지능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타심의 근원인 공감능력은 뇌의 특정 신경분비구조에서 나온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거울뉴런이라는 이름의 신경세포는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등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곳은 언어 발달 등 인간이 고등생물이 되어가며 진화된 부분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상대방 행동을 따라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고통을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거울뉴런은 이런 공감을 가능케하는 신경세포로서, 인간 협동의 진화적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협동과 이타심도 경쟁심 못지 않은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기심과 경쟁심보다 그것이 인간 본성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진화 역사에서 90% 이상을 차지하는 시간 동안 채집, 수렵의 생활을 했던 원시사회에서는 공평성과 평등함이 인간 사회의 성격이었다.


 

4. 무한 경쟁은 왜 미친 짓인가? 

 

앞에서 최후통첩게임을 소개했다. 최후통첩게임은 무한 이기적(합리적)이라는 인간성 가설이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 예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실험에서 ‘퀴즈’라는 변수를 집어넣었을 때 결과가 매우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 실험과 무관한 매우 간단한 퀴즈를 내고(구구단 같은 산수문제나 영화 주인공 알아맞히기 등) 그것을 먼저 맞춘 사람에게 제안자 역할을, 틀리거나 늦게 맞춘 사람에게 응답자의 역할을 부여하면 경제이론이 예측한 결과대로 나온다. 즉 제안자는 최소금액을 제시하고, 응답자는 그것을 수락한다. 제안자는 퀴즈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이고, 응답자는 패배자로서 그것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게임의 모든 규칙은 동일하고 다만, 게임과 전혀 무관한 간단한 퀴즈로 제안자, 응답자 역할을 갈라놓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쟁 환경 속에 놓여있는 인간 의식 내면에 이러한 '평가'의 개념이 자리잡았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치열한 경쟁으로 몰아넣는 환경이 어떻게 불만 없이 재생산되는지를 암시한다. ‘평가’ 그 자체를 절대적 ‘공정함’으로 보기 때문이다. 입시, 스펙 등의 평가 시스템이 어떻게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능력 여부를 판별하는 제도로 보이지만 평가를 비롯한 경쟁시스템은 불평등과 인간 차별을 합리화하고 순응케 하는 기능에 주력하게 된 셈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만큼 그 보상의 수준도 더 높아지면서 승자와 패자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는 확대재생산 과정을 밟는다. 때문에 불평등 수준이 높으면 높아질수록 평가의 수준은 무의미하게 높아지고, 낭비적 경쟁은 더욱 확산되고 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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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면 뒷자리의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야 하는 수순과 마찬가지다. 모두가 편히 앉아 볼 수 있는데도, 경쟁을 부채질하는 분위기에서는 모두가 일어서서 봐야만 하는 비효율적인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때 키 작은 사람은 루저가 되는 것이다.

 

 

낭비적 경쟁; 아이리쉬 엘그와 공작

 

자연에서도 불필요한 경쟁으로 제 살 깎아 먹는 예가 많다. 엘크의 뿔이 대표적이다. 서상철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무한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한다>, 지호)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 엘크는 기형적인 크기의 뿔을 늘리는 경쟁에 몰두했다. 2미터 정도의 키에 무려 3미터가 넘는 뿔을 키웠다. 그들은 많은 양의 칼슘 등 주요 영양소들을 허비해야 할뿐더러, 뿔이 너무 무겁고 커서 자유롭게 움직이는데도 제약이 있다. 이러한 잘못된 경쟁 아래 아이리쉬엘크는 과도한 뿔 키우기에 너무나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되어 환경 변화와 같은 위험에 대처할 여력이 남지 않아서 그 생존까지 위협받게 된다.

 

각각의 엘크 입장에서 보았을 때, 큰 뿔을 갖는 것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리쉬 엘크라는 종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선택은 그 집단에 치명적인 낭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조그만 나빠져도, 멸종이라는 극단적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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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 공작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단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 외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천적에게 노출이 쉽게 되는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영양분을 많이 소모하는 꼬리 경쟁은 종 번식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배우자인지 신호를 보내는 기능만 따진다면 너무나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이스트섬의 비극

 

<총,균,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비극>에서 소개한 이스트섬의 비극은 극적이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이었던 이곳은 발견 당시 인구가 약 2천 명에 불과했고, 닭과 곤충을 제외하고는 나무도 없이 황량한 곳이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섬에서 무려 887개의 석상이 발견된 사실이다. 큰 것은 높이가 20미터가 넘고 무게가 270톤이나 된다고 한다. 

 

변변한 나무 하나 없고, 밧줄 하나 만들 재료가 없는 섬에서 이렇게 거대한 석상이 어떻게 운반되었으며,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근자에 학자들이 꽃씨를 분석해서 이 섬에서 번성했던 식물을 조사했더니, 원래 이스트섬은 많은 야자나무와 잡목으로 우거진 비옥한 곳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황무지 섬으로 변했을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설명은 이렇다. 석상을 세우기 시작한 후로 그 석상은 점점 더 커져갔다. 석상의 크기가 부족의 우월성을 상징하면서 상대 부족과의 경쟁이 벌어졌고, 산림이 파괴되고 그들의 삶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트섬 주민들은 그 경쟁을 멈추지 못했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상대 부족을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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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경쟁의 첨단; 대한민국 

 

이런 바보 같은 경쟁과 한국 사회는 과연 무관할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낭비적인 입시 경쟁과 취업경쟁에 아이들이 죽어가고,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기러기 가족까지 만들어지는 극단적인 경쟁 현실은 지구상에 대한민국보다 더한 곳이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모두가 문제 의식을 갖고 있지만 각 개인들은 그저 무력하고 참담하게 지켜보면서, 불나방처럼 비극이 보이면서도 그 바보 같은 경쟁에 같이 뛰어들 수 밖에 없다. 이런 무한 경쟁 체제가 앞으로 지속된다면, 한국은 문명사회의 이스트섬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것은 이런 무한 경쟁체제에 고통을 호소하고, 정신적 질병까지 앓고 있으면서도 오직 이 체제 외에는 경험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경쟁이 없다면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우리들 모두가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기독교인(종교인)은 도덕적 가치관, 선악의 문제를 종교 안에서 배우며 자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종교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 없이는 선악을 구별할 수도 없고, 도덕의 기준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와 논쟁을 하던 CBC 뉴스 진행자는 종교 없이 어떻게 도덕이 사회에 구현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신론자들의 도덕심이 종교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다는 것을 타민족이나 심지어 주변 이웃을 통해 흔히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인들은 여전히 선과 악, 윤리의 기준을 종교 외에선 찾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경쟁의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들은, 등수 놀이를 하지 않는다면 공부할 동기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단 하루도 강요 받지 않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서열을 중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학습력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고 들어도, 여전히 경쟁 없는 교육을 상상조차 못한다.

 

수능시험중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 후, 미처 OMR 카드에 답을 다 옮겨적지 못한 어떤 수험생이 10초 정도 늦게 답지를 제출하게 되었다. 같은 교실 안의 옆 학생이 감독관에게 가서 따졌다.  왜 규정을 어긴 이 학생을 부정행위로 단속하지 않느냐고. 결국 감독관은 답지를 늦게 제출한 학생을 부정행위 처리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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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만 명의 경쟁자 중 한 명이라도 탈락시키고야 말겠다는 경쟁의 괴물을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만들어낼 것인가? 

 

물론 현실적인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경쟁일변도의 교육과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원은 희소하고, 욕망은 무한하다’는 근대경제학의 기본 전제는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희소한 자원을 두고 무한한 욕망을 가진 개인들 사이에선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인간은 상대소득을 통해 상호비교를 하면서 행복과 불행을 가늠한다. 공산주의식으로 무조건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능력에 따른 상대적 소득의 불균형은 불가피하지 않은가? 또 지구상 인구가 이미 70억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유한한 자원을 모두에게 만족스러울 정도로 평등하고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어떠한 기준을 세워 자원의 배분을 해야 한다면, 그에 따른 경쟁은 여전히 뒤따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과 문제제기는 매우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음 시간에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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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C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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