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04. 17. 목요일

수습기자 퍼그맨






sewol.jpg



이게 정녕 현실일까? 가슴에 뭔가 매달고 있던 끈이 퉁하고 끊어진 듯 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장난감 수준의 무인기에 왜 이렇게 국방부와 언론이 호들갑인가 싶었다. 근데 어제 사고를 보니 우리 사회는 또 왜 이렇게 호들갑을 안 떨었나 싶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라 조심스럽지만, 불법 개조로 하중이 늘어서 빨리 침몰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구명조끼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도 나온다.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해 디비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 얘기들에서 연상된 안전불감증과 불과 며칠 만에 '호들갑'에서 '안 호들갑'으로 느껴진 이 나라의 모순적인 현재를 디벼보고 싶은 마음이다. 




안전불감증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한가



안전불감증


이런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꼭 나오는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 좀 이상하다. 사람이 자신의 안전에 둔할 수가 있을까? 매슬로우 욕구 단계 대로라면 안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다음이다. 배고프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안전을 무려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maslow.jpg



당연한 얘기지만 이전 단계인 생리적 욕구에 의해 안전의 욕구가 무시되는 경우는 있다. 배고프면 눈 앞에 있는 존재가 맹수라도 싸워서 고기를 취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20년 전 성수대교를 부실하게 지은 것이, 그리고 청해진해운이 20년 전 만들어진 배를 쓰고 있었던 것이 위의 경우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건들의 원인은 돈에 대한 욕망이라 봐야 이해가 간다. 다리를 대충 지어서 남겨 먹는 것이 누군가가 죽지 않는 것보다 중요하다, 는 20년 묵은 생각. 이것이 20년 전 배에 그대로 실린 채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영해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mbingsin.jpg

사회가 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하다는 '팩트'가 이런 장면을 만든 것 아닐까





세상이 좆 같은데 지랄하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대한민국을 돌아다니고 있던 생각의 정체는 '잘 살아보세'다. 새마을 운동 때부터 내려오던 걸 왜 20년이라고 하느냐고? 주어가 생략된 게 중요하다. 그 생략된 시점으로부터 따지면 20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때는 그래도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였다. 독재라는 공공의 적도 있었고 그 끝은 좋지 않았으며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야구만 해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나왔다. 집집마다 칼라 테레비가 들어섰다. 먹고 사는 것이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동안 못 챙긴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건 문제가 있지 않나, 바꿔야 되지 않나,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지금은 상상이 안 가겠지만 아이돌조차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쿨한 줄 알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hot.jpg



그런데 IMF가 터졌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을 20년은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이란 걸 했고 그 과정에서 대우그룹을 망하게 한 김우중은 해외로 도망을 갔기에 무사했다. 부실 경제에 한 가닥씩 책임을 져야할 대기업의 주인들은 돈 드는 혁신 대신 자기 명령대로 일한 죄 밖에 없는 사람들을 해고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때 해고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되려 나라를 살리겠다고 금 모으기를 했다. 씨바. 그 뒤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지랄을 할 만도 한데 사람들은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었구나, 하며 자중했다. 사고가 생리적 욕구를 추구하는 수준으로 돌아가 버린 거다. 열심히 내 걸 내어주는 사람은 못 살고 남 등쳐 먹는 놈은 잘 사는 세상이 그렇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제 독재와 싸우던 때처럼 세상은 정의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질리도록 그 꼴을 봐온 사람들은 그렇게 '잘 살아보세'의 주어였던 '우리'를 생략해버렸다.


내가 잘 '살려면' 남을 등쳐야 된다. 정권을 잃으면 좆되니까 국가 기관을 동원해 댓글이나 달게 해야 한다. 이래도 우리나라가 안전에 불감한가? 아니, 문제는 오히려 너무 안전에 민감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남의 위험을 애써 무시하는 데에 있는 거 아닐까?




사실은 지랄 떨고 싶은데 지랄할 힘이 없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 이 말을 못 들어본 사람들은 아래 기사를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seoulsinmoon.jpg

기사 링크 - 지랄 총량의 법칙을 아세요?



간단히 요약하면 무언가에 지랄을 많이 떨면 다른 일엔 지랄 떨 힘이 없다는 거다. '안전불감증'을 넓게 해석하면 사람들이 안전에 대한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사회적 자성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의미로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 우리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유감이다. 우리는 너무 지쳐있다. 


어떤 놈들이 그러는데 우리 경제가 어렵댄다. 한강의 기적 말할 때는 언제고 아직까지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생각해야 할 때란다. 그래서 떼돈 버는 일도 아니고 고작 입사하는 일, 생계 수단을 확보하는 일에 살벌한 노력을 하도록 만든다. 임금 수준을 낮추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신분 마냥 구분하여 어떤 일을 하든 먹고 사는 데 문제 없다는 생각을 불순한 것으로 만든다.  


북한? 물론, 위협이다. 하지만 국가는 어지간히 골골 거리지 않고서야 개인보다는 강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위협은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실체화되지 않지만 개인의 위협은 우리가 보지 못할 정도로 작아도 쉽게 실체화된다. 성수대교 붕괴로, 삼풍백화점 붕괴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로, 인천 호프집 화재로, 대구 지하철 방화로 실체화되었다. 기타 지금 여기 쓰지 못한 여러 안전 사고들로 실체화되었다. 그리고 이미 수명이 다했다는데도 바득바득 연장시켜 돌리고 있는 고리 원전 1호기로 다시 한 번 실체화될 지 모른다. 통일이나 전쟁이 도둑처럼 오는 게 아니라 인명 사고가 도둑처럼 오는 것이다. 



thieves.jpg

도둑처럼 오면서 떼로 몰려 올 수도 있는 게 사고다





지랄 떨 곳은 따로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지랄을 떨고 있나? 사람을 두렵게 하는 데에 지랄을 떨고 있나,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데에 지랄을 떨고 있나? 


지랄 좀 떨 만한 곳에 떨자. 이 사회가 호들갑스러웠으면 좋겠다. 배 탈 때 안전 교육, 탑승한 사람이 질려서라도 외워버릴 만큼 반복하자. 구명조끼 실밥 몇 개만 뜯어져 있어도 이런 거 왜 교체 안했나, 생 난리 좀 쳤으면 좋겠다. 사람 안 죽이려는 지랄이라면 얼마든 성가셔주겠다. 


개개인의 안전불감증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이런 세월호의 비극이 반복되는 걸 막기 힘들다. 힘을 모아야 한다. 슬픔에 잠긴 유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 있다면, 안전에 지랄 떨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아닐까? 


끝으로 뭔가 위로의 말을 쓰고 싶은데... 타자치는 손이 너무나 무겁다.








퍼그맨

트위터 : @ddanzipugman

Profile
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