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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5. 02. 금요일

춘심애비










1. 그 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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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에 대한 TV 보도가 시작되던 즈음, 나는 늦은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내가 막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있을 즈음, 한 뉴스 앵커는 인천-제주 구간의 수학여행 학생들을 태운 한 선박이 사고를 당했으나 전원 구조 됐다는 소식을 - 후에 이 보도가 모두를 분노케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 전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큰일 날 뻔 했는데 잘 됐나보네'라는 생각을 언뜻 한 채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현관을 향했다. 


현관을 향하는 중 들려오는 - 같은 뉴스 앵커의 - 목소리는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을 때만 해도 없었던 '실종자'라는 단어가 들렸다. 이미 무심결에 안심을 한 탓에, TV화면을 쳐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상하다는 느낌만 갖고서 출근길에 올랐다. 출근길에, 그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인해 다시 라디오 뉴스를 틀었을 때, 나는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겁고 절망적인 사건을.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순간은, 선장과 일부 선원들이 구조 헬기를 타고 먼저 배를 떠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나는 사무실 내 자리에서 한 창에 뉴스 종합 사이트를 띄워놓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진과 바로 위의 기사제목을 보는 순간, 아무런 논리적 연결고리도 없이 뇌리에는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새겨졌다. 


'이 모습은 그저 내가 사는 이 사회 그 자체다.'


'나는 34세. 누가 봐도 어른이다.'


'나는 저 헬기에 타고 있는 쪽에 가깝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너무나 명백하기만 한 묵직한 책임감, 너무 무겁고 강렬해서 마치 몸통 전체가 산산히 부서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던 죄책감이 이어졌다. 평소 아무렇게나 내뱉는 글쓰기 습관과는 달리, 한글자 한글자, 어떻게든 이 죄책감을 담아내어 보자는 마음으로 트윗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트윗을 쓴 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조금이나마 그 죄책감의 일각이라도 덜어보려는 비겁한 정서였던 것 같다. 그 비겁함이 더욱 죄스러울 정도로, 그 트윗은 2000번이 넘게 리트윗됐다. 내가 지금껏 썼던 어떤 트윗도 그만큼 리트윗 되진 않았다. 아마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내 뇌리에 박혔던 저 생각과, 그로 인한 죄책감을 똑같이 느꼈으리라고 여기게 됐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이 사건의 부조리가 어떤 구조인지를 밝혀낸다면, 그건 이 사회 전체의 부조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밝혀내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 꾸준하게, 이 사건의 부조리를 구성한 그 수많은 요인들 중 어느 요인이 가장 핵심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부조리와 비상식은 넘쳐만 갔다. 





2. 부조리와 비상식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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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5월 1일 밤 11시 48분 현재 기준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종합하면, 전세계의 누구라도,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나라인지에 크나큰 우려를 갖게 될 것이라는 데에,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 크고 작은 언론의 기자들부터, 그 기자들과 그들의 기사를 책임질 언론사 데스크, 그 배를 운항하던 선원들과 선장, 그들의 책임자이자 그 배의 소유주인 해운사, 구조에 1차적 책임이 있는 해양경찰, 그 해양경찰이 지정한 민간 구조업체, 이들의 구조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지시가 필요한 사항에 지시를 내릴 정부부처들, 그 부처들을 관장하는 이 나라의 행정부, 그리고 그 행정부의 수장인 청와대까지. 이 사건에 직접적인, 말 그대로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든 집단과 개인들이 약 보름간 보여온 행동은, 가장 이상적인 대처와 가장 비상식적인 대처를 상상해 볼 때 후자에 압도적으로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아니, 이 표현마저도 부족하다.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비상식적 대처로 가득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하겠다. 


이들에 대한 분노 어린 비판 여론이 가득한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의 개인들 혹은 집단들만이, 이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며 칭송 받거나 혹은 영웅이라 불린다.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지켜낸 분들과,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분들은, 이 참사 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당연히 영웅이다. 이 분들에 대해 무언가를 분석하려 한다거나 논평하려 하는 것은 그 시도자체가 무례함의 극치이므로 이 분들을 논외로 하면, 현 상황에서 한결같이 여론의 지지를 받는 집단은 오로지,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린 소수의 언론 뿐이다. 


바로 앞에 쓴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린'이란 표현은, 국어사전 상의 '언론'에 대한 정의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정의의 전문은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이다.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언론사들과 지지를 받는 소수 언론들은 공통적으로 텍스트/영상/음성 등의 데이터를 송출할 수 있는 매체를 지닌다. 그리고 그 매체를 통해 서로 다른 여론을 형성했다. 결국 차이점은 '어떤 사실을 밝혀 알렸'느냐 아니냐의 차이 뿐이다. 다수 언론에 대한 거센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알렸거나, 사실을 밝히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거나, 아예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부연 설명하자면 이 언론사들은 치명적인 오보를 통해 잘못된 사실을 알린 바 있고(예 : 사건발발 초기 전원구조 보도), 전달받은 보도자료 혹은 발표자료를 검증조차 하지 않은 채 알린 바 있으며(예 : 담당 부처 및 개인들의 오락가락 발표내용 매번 그대로 보도), 실재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왜곡하거나 은폐(예 :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 삭제, 시간 순서 재배치)한 바 있다. 이러한 보도가 대중들의 분노 어린 비판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보도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이들이 '언론'이 아님을 의미하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비판받고 있는 언론사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부분적으로 언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 지점은 어떤 핑계나 해명을 덧붙이더라도 양해가 안되는 지점이다. 수박을 달랬는데 참외를 주면서 '다른 씨를 뿌려서 색과 맛이 다를 뿐 수박이 맞다'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일 뿐 핑계나 해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조차 없다. "너희가 그러고도 언론이냐."는 대중들의 푸념과 질책은, 단순히 감정적인 수사가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인 발현이라 함이 옳다.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소수 언론들은, 냉정히 말해서 무언가를 잘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기 보다는, 다른 언론사들과는 달리 '예외 없이 언론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칭찬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다. 혹시 언론 이외에 이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부부처들, 관련 기업들 모두가, 단지 각각의 사전적 정의 수준의 정체성 유지마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애초에 이념이나 진영,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A라 불리는 것이 A가 아닌' 근본적인 존재 자체의 문제가 이 부조리와 비상식의 향연이 펼쳐지게 된 근원이 아닐까. 





3.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이해가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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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심을 바탕으로, 보다 구체적인 현실을 파악해보자. 우선은 다시 언론에 집중해본다. 사건 초기 기본적 예의를 상실한 인터뷰나, 최소한의 인간미마저 상실한 기획보도에 대한 비판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사치스러운 비판이 돼버렸다. 한국을 대표해야 할 주류언론들, 특히 공중파 뉴스 및 뉴스보도 전문 방송사, 심지어 이들에게 뉴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뉴스의 총 본산'으로써 설립된 언론사 마저도 기본적인 사전 정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연이었으니 말이다. 그 행동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고 정보의 출처가 제한된 상황에서 언론사들간의 경쟁이 심화되다보니 사실 확인보다는 빠른 기사송고에 집중하게 됐다든가, 정보 자체가 출처를 정부부처에 두고 있어 이중 확인 작업을 소홀히 하게 됐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에 더해, 정식 사과문이나 해명자료에는 실을 수 없으나 타사 보도 등을 통해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까지 추가하면, 소위 '윗선의 지시'라는 양태가 추가된다. 


상식적인 상황에서라면, 언론사가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되기 어렵다. 예컨데 정부부처에서 공식 기자회견이나 브리핑을 통해 어떤 사실을 발표하면, '정부의 발표'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실이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언론사의 책임보다는 정부의 책임이 막중하다 하겠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소위 '윗선의 개입'은 정황상 사건의 핵심인 해운사를 제외하고서는 정부부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국 다수 언론사들이 '언론'이라는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 정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근본 원인은 단 하나, '경쟁'이다. 모든 보도상황은 급박하다. 그러므로 급박함이라는 요소는 이 사건의 속성이 아니라 언론보도라는 행위의 속성이다. 정보의 출처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딱잘라 '경쟁' 때문에, 언론사들은 존재를 위협할 정도의 오류를 범한 셈이다. 


이 '경쟁'이라는 것을 좀 더 파고들어보자. 여기서의 경쟁은 속보 경쟁과 특종 경쟁이리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더 빨리, 남들이 알기 전에 보도해야 한다는 것. 경쟁으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할 정도의 행위를 하게 됐다면, 그 경쟁에서 이겼을 때 얻는 보상은 뭘까. 언론으로서(정보전달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사회의 한 주체로서라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서'를 씀. 필자 주)의 사명감일리는 없다. 그렇다면 존재를 부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언제나 제1기준이었어야 하므로. 결국 뻔하게도, 결론은 돈이다. 더 빠른 속보와 특종만이 '클릭'을 부르고, 그 '클릭'이 '수익'을 증대시키므로. 


단순화시켜서 일반적으로 진술하자면 이렇다. 다수의 언론사들은, 더 높은 수익을 위해, 경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언론으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를 낳았다. 



잠시 환기해보자. '생선 장수'라면 생선을 팔아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사람이겠다. '야채 장수'라면 야채를 팔아 돈을 벌고 말이다. 생선 장수가 돈을 벌기 위해 생선대신 야채를 판다면, 그는 더 이상 생선 장수가 아니다. 아주 단순한 얘기다. 하지만 그 생선 장수가 야채를 팔면서 이게 생선이라고 했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게다가 그것이 '스스로 생선 장수여야 하기 때문'이라면 이 또한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종합해서, "생선만 팔아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야채를 생선이라고 해서 팔았지만, 나는 생선장수가 맞다."는 진술은 논리적인 모순임은 물론,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백히 잘못된 진술이다. 말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저런 진술오류를 범해야 할 이유 조차도 가늠하기 힘들다. 


치명적인 오보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진술은, 위의 진술오류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성인이라면, 경쟁으로 인해 오보를 야기한 언론을, 열렬히 비난할지언정, 일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중들이 '언론이 그래선 안되지'라고 말하는 가운데, 미묘한 무게 중심이 '그래선 안되지'보다는 '언론이'에 가깝다는 사실은, 증명해낼 수는 없지만 다수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이유는, 대중들의 분노와 애도에는 분명, 도입부에 언급한 '죄책감'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전혀 이해가 갈 수 없는 오류 투성이의 진술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지는 이 지점. 바로 이 지점에, 이 사건에 대한 대중들, 특히 어른들의 '죄책감'이 깃들어있다. 





4. '일'의 두 얼굴.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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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불가능한 사태에 대한 이해의 여지, 이것이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해보자. 언론사라는 존재는 앞서 말한 사전적 정의 상의 내용을 그 '역할'로 한다. 즉, 이 사회는 언론사라 불리는 집단이 매체를 통해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고, 어떤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언론사에서 '일'을 하는 기자들과 여타 직원들, 그리고 관리자 및 임원들은 그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이런 사회적 관점에서의 역할 이외에 또 어떤 역할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언론사에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경제적 관점에서 노동자다. 그들은 언론사 근무 노동자로서, 사회적으로 기대받는 역할 이외에, 자신의 노동력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이 시장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일반화 가능한 사실이다. 일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직업 및 직군에게 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그 대가로 돈을 받아 먹고 산다. 직업을 아직 갖고 있지 않다 해도, 사회적 관점에서는 모두가 '역할'을 기대받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대가로 하여 자본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생존한다. 그러한 면에서, 학생, 전업주부, 구직자 등등, 기준에 따라 노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에게 이 구도는 일반화가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있고, 이를 통해 생존한다. 우리는 기대 받는 역할을 수행하고, 또 동시에 생존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한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기술직이든, 사무직이든, 공부를 하든, 가사를 하든, 취업 준비를 하든 뭐든 간에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지니는 이 2가지 목적, 기대 역할 수행과 생존, 이 둘은 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을 위배하는 것이 생존을 보장하는 사태를, 경험하게 만든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필요한 돈이, 본인의 급여보다 적을 때'가 쉬운 예가 된다. 어떤 교통경찰은, 급여 이외의 추가적인 돈이 필요할 때, 단속 중 발견한 법규 위반자에게 뇌물을 받기도 한다. 이 때 교통경찰은 교통법규 위반자를 적발하고 이에 대한 처벌을 수행할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역할보다 경제적 추가 수익을 좇는 '일'을 한 셈이다. 


바로 이 부패 경찰의 예에서, '일'이 지니는 2가지 목적이 서로 대치 될 때 발생되는 사회적 손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러한 대치상황을 매우 익숙하게, 삶의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예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통적으로 기대되는 '법규 준수' 대신 금전적 수익을 선택한 '생계형 범죄'겠다.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반대로 좀 더 복잡성을 띄는 예로는,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비리를 대신 저질러주는 부하직원이 있다. 이 예에서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그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을 위배하는 것임은 명백하지만,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는 심리학적인 측면과 사회문화적인 측면이 혼재돼있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상사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것은 본인의 고용안정성을 높이려는 목적을 지니고, 이는 결과적으로 기대 수익의 안정성을 목표로 한다는 볼 수 있으므로, 큰 틀에서 경제적 생존을 위한 사회적 역할 위배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큰 틀에서까지 조망하면, 개인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사회적 기대 역할을 위배하는 사례는 매우 빈번히 관찰된다. 


이에 덧붙여,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라는 점에서 이러한 대치 상황은 개인 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으로 확대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모든 기업은 '이윤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한다. 동시에 사회적 관점에서 모든 기업은 업계, 업종, 규모, 형태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을 기대받는다. 이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이윤이 상충되는 상황은 기업 차원에서도 빈번히 벌어진다. 기업 이외에도 대부분의 단체는, 비영리단체라 할지라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을 필요로하고, 그 자본과 그 단체의 사회적 역할이 상충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이 때 그 기업이나 단체가, 경제적 목적으로 사회적 역할보다 우선시한다면, 그 사회적 손실은 개인 차원과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결국, 소위 '기레기'라고까지 불리는 기자들, 한 사회에서 언론보도의 역할을 기대받음과 동시에 한명의 노동자로서 경제적 생존을 유지해야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사회적 역할보다 경제적 생존을 우선시한 것이,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이 연결고리는 사회적 손실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대중들의 분노 어린 비판을 받게 된다. 이 흐름은 아주 전형적인 구조라는 점에서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그 사회적 손실이 너무나도 컸다는 점에서 분노를 야기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분노가, 사실은 매우 익숙한 구조로 비롯됐다는 사실이, 다수의 죄책감을 자아냈다. 


이제 좀 더 노골적으로 들어가보자.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이득이 대립되는 상황이 매우 빈번하다는 사실 이후에, 과연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이를 추리하기 위해 현재 시점의 언론사들을 다시 돌아보자. 대부분 야채 파는 생선 장수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한손으로 꼽을 만큼의 극소수만이 사회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중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소수를 칭송한다. 이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다 썩었는 줄 알았는데, 당신들이 있어줘서 감사하다'는 얘기다. 이는 언론 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이득이 대립할 때 경제적 이득을 선택한다는 얘기가 된다. 경제적 이득을 선택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그 와중에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주는 소수의 언론이 소중하다는 얘기다. 


이 말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사회적 손실을 야기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5. 일 못하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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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한다'는건 무슨 의미일까. 앞서 논의한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일'이라는게 2가지 얼굴을 지니듯, 일을 잘한다는 진술도 2가지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혹은 돈을 잘 벌어들일만한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앞선 추리가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개인들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을 잘하기 위해,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일을 못한다는 말이 된다. 즉, 한국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경제적으로는 일을 잘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일을 못한다. 실제로 프로페셔널리즘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을 경제적 이득보다 우선시 하는 것 보다, 사회적 역할은 안중에도 없고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것을, '프로답다'고 표현하곤 한다. 


대중들은 세월호 참사의 과정에서 문제가 된 대부분의 주체들이 경제적인 이득에 혈안이 돼있음에 절망했다. 젖은 돈을 말리는 선장, 사업을 위해 공개채널로의 무전송신을 금기시하는 해운업계, 성과 몰아주기를 위한 민간 구조대 및 타 부처의 구조활동을 막은 해경, 경쟁을 위해 사실확인 조차 게을리하는 언론, 정권의 안정을 위해 갖은 편법과 무리수를 반복하는 정부 등등.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이들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형편없이 무능하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절망했다. 기본적인 메뉴얼조차 따르지 못하고, 구조정 하나 펴지 않은 선장과 선원들, 기본적인 승객 확인마저 하지 않는 해운사, 해양구조 경험이 없는 간부들이 자리잡은 해경, 기본적인 보도원칙도 모르는 기자들, 보고 체계가 상실된 정부 등등. 


결국,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이득이 서로 대치되는 이 대립 구도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으며, 동시에 압도적인 다수의 개인들이 이 대립구도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는 행위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다는 점이 바로 이번 참사의 거시적인 근본원인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저 이 사회는, 사회적 역할 관점에서, 일을 너무 못한다는 거다.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회. 


이 평가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숙제는 2가지다.


도대체 왜,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이득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이렇게도 빈번히 발생하는가.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할 수록 경제적 이득이 비례해서 증가한다면, 이런 사회적 손실이 만연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소위 말하는 '시스템'의 몫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어떻게, 일을 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어쨌든, 우리는 사회적 관점에서 기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돼야하므로. 그래야만, 이러한 참사가 다시 벌어지지 않을테니. 



다음 편부터, 이 2개의 숙제를 차근차근 풀어보려 한다. 


아직도 생생한 그 순간이 내게 안긴 한없이 무거운 죄책감에 대해, 죄 없는 희생자들이 나에게 낸 숙제라고 생각한다. 




다음 화에 계속…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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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