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홀짝 추천7 비추천0

2014. 05. 09. 금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기사



[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찌질한 위인전 <5> - 간디 (上)]

[찌질한 위인전 <6> - 간디 (下)]

[찌질한 위인전 <7>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上)]

[찌질한 위인전 <8>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下)]

[찌질한 위인전 <9> - 존 F. 케네디 (上)]

[찌질한 위인전 <10> - 존 F. 케네디 (下)]

[찌질한 위인전 <11> - 넬슨 만델라 (上)]

[찌질한 위인전 <12> - 넬슨 만델라 (下)]

[찌질한 위인전 <13> - 이중섭 (上)]

[찌질한 위인전 <14> - 이중섭 (下)]

[찌질한 위인전 <15> - 리처드 파인만 (上)]

[찌질한 위인전 <16> - 리처드 파인만 (下]

[찌질한 위인전 <17> - 허균 (上]








비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비극은 아직,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노후한 선박의 관리 부실. 부정한 커넥션에 물든, 그래서 있으나마나 한 선박 안전 검사 체계.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규정마저 무시했던 청해진 해운, 뿌리 깊게 이어져 온 해운업계의 비리.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의 안위를 위한 일말의 책임감도 보여주지 않은 선장과 선원. 심지어 사고 후 인명 구조 과정에서조차 해경과 민간구난업체 간의 관계에 의혹이 일었다. 정부의 대응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언론매체의 삐뚤어진 취재 경쟁. 말 그대로 총체적 난맥상. 대한민국의 환부가 드러났고 고름이 터졌다. 상처는 깊고, 상당히 넓었다.


지난 상(上)편의 끝에서 필자는 ‘조선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잃어가면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사회나 문제와 오염은 발생할 수 있다. 그 사회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사회인가’ 하는 문제는, 오염이 얼마나 발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오염을 얼마나 신속하게 해결하고 재발하지 않게끔 할 수 있는가 하는 ‘자정능력’의 유무에 달려있다. 그것을 잃은 사회는 균열해 갈 것이고 서서히 침몰해 갈 것이다.


세월호 사고는 그 원인부터 사고 발생, 사후 처리 및 대책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고 모든 부분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슬픔과 안타까움, 무기력함과 분노가 뒤섞인 지금,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대한민국은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아마도 수많은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잘못을 감추려는 자들의 저항이 있을 것이고 지금의 시스템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 많은 자들의 왜곡과 호도가 있을 것이다. 저항의 규모와 세기가 생각보다 커서 우리에게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넬슨 만델라는 ‘병든 나라에서는 건강으로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 병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욕’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의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지금, 지하철에서도 대형 참사를 일으킬 뻔한 사고가 일어났다. 안타까움과 죄책감에 불안감까지 더해진 지금의 대한민국이 위기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다만, 누군가는 이 위기를 사회적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밥줄 유지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을 게다. 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 위기상황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까지는 거론하지도 말자. 어쩌면 지금부터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시간일지 모른다. 이번 사건이 우리를 일깨운 것들 중 하나는,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할 순간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선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jpg


이 정도의 자각 증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변하는 것이 없다면,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찌질한 위인전>, 허균 하(下)편을 시작한다.


허균과 함께한 사람들


천재(天才)는 한자의 뜻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 혹은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재는 하늘이 내지만,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땅 위다. 땅을 딛고 자라면서 만나는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천재는 길러진다. 따라서 천재의 재주와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느냐 하는 것은 땅 위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하겠다. 이미 우리는 허균이 살다간 시대를 살펴보았다. 이제 허균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차례다.


내 재주 굴러떨어져 씀바귀처럼 되었네 - 허봉


허봉은 허엽의 삼남 가운데 둘째로 허균에게는 작은 형이 된다. 작은 형이라고는 하지만 허균과의 나이 차가 열 여덞이었기 때문에 형이라기보다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허균이 불과 12세에 아버지를 여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허봉은 허엽의 자제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1551년에 태어난 허봉은 1568년, 열 여덞의 나이에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로부터 4년 후인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한다. 장남 허성보다 무려 11년이 앞선 것이었다.


"허봉은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열 살에는 경전과 역사에 통했으며, 시를 지어도 그 나름대로 일가를 이뤘다. 또한 총기가 뛰어나서 책을 보아도 한 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허경진, 『허균 평전』 


허봉은 뛰어난 능력으로 일찍이 선조의 인정을 받았다. 글 잘하는 젊은 관리에게 일종의 유급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오로지 글만 읽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얻기도 했다. 문과 급제 후 벼슬이 종9품에서 2년 만에 정6품까지 오른 허봉은 명나라로 떠나는 조선의 사신 일행에 서장관(조선시대 외국에 보내던 사행 중 정관의 하나)으로 따라 나서겠다고 직접 청하여 사신길에 오른다. 이미 상(上)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은 아무나 뽑혀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20대 초반의 젊은 관리였던 허봉이 얼마나 능력을 인정 받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허봉의 이러한 행보는 허균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데, 그뿐 아니라 윗사람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는 성품마저도 허씨 집안의 형제는 한결 같았다. 부친 허엽의 강직한 성품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던 허봉의 생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선조가 자신의 친할머니인 창빈의 사당을 대궐 안에 모시려고 한 사건부터였다.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안씨)은 정실이 아니기 때문에 대궐 안에 사당을 봉안할 수 없다고 허봉이 임금에게 진언한 것이다. 왕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허봉은 선조의 면전에서 안빈을 '첩모'라고 불렀는데 어떤 임금이 자신의 친할머니를 '첩'이라고 부르는 신하에게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봉은 이 일을 계기로 선조에게 큰 미움을 샀다.


허봉의 삶이 불행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 사건은 허봉의 나이 서른 셋, 허균의 나이 열 다섯에 일어났다. 당시 허봉은 박근원, 송응개와 함께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선조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허봉을 비롯한 3인은 동인의 젊은 기수였던 반면 율곡 이이는 서인의 후원자였던 터라 당쟁으로까지 번진 이 사건에서 선조는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워낙 두터웠던대다 허봉이 선조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허봉을 좌천시키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유배를 보내버린다.


4.jpg

율곡 이이


한 해가 지나 율곡 이이가 죽자 이 일로 유배 간 세 명의 신하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청이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이어졌다. 선조는 허봉을 유배지에서 풀어줬으나 끝내 수도인 한양에 발을 들이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1585년, 허봉은 나이 서른 다섯에 벼슬 길이 완전히 끊겼다. 


이 때부터 허봉은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자연을 벗삼아 글을 짓기도 하고 술에 의지하여 설움을 달래기도 했다. 인간사의 괴로움 때문에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빼어난 재주를 지니고도 세상에 나아가 써 먹지 못하게 된 허봉의 시름은 날로 깊어갔다. 그가 써 내려간 편지와 글에는 설움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결국 허봉은 1588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워낙 대주가였던대다 마음의 병까지 깊어졌으니 그의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듯하다.

 

허봉이 비록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기는 했지만 허균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허균이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맞은 것은 손곡이 허봉의 가까운 글벗이었기 때문이며, 승려 사명당은 허균을 알기 전부터 이미 허봉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허봉의 또 다른 벗인 서애 유성룡은 허균에게 문장을 가르쳤고 허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허봉은 그 자신의 삶 자체로도 동생 허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출신의 한계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들 


허봉 말고도 허균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많았다. 허균은 남녀와 노소는 물론 신분도 가리지 않고 말과 글이 통하는 이들이라면 기꺼이 친분을 쌓았다. 이렇게 허균과 깊게 교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세상에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초희는 우리에게 '난설헌'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허균의 누이다. 부친 허엽은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교육했는데 허난설헌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라서 오라비 허봉, 스승인 손곡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기량을 닦았다. 허난설헌의 시는 이후 허균이 엮어 <난설헌집>을 내면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작품이 워낙 훌륭하여 당나라의 시를 끼워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던 <난설헌집>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허난설헌은 당대에 국제적으로 칭송 받는 여류 시인이었던 것이다.


2.jpg

<난설헌집>


그러나 허난설헌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여인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 '자'와 '호'까지 가졌던 허난설헌이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여성이었기에 감내해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오히려 남성을 뛰어넘는 출중한 재주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안동 김 씨 문벌가의 자제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선비였다. 때문에 아내 허난설헌에 대한 미묘한 열등감과 시기로 툭하면 허난설헌을 독수공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더 만만치 않아서 허난설헌은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고, 그나마 마음 붙일 핏줄이었던 아들과 딸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유산되었다. 허난설헌의 시와 편지는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하필이면 자신이 조선 땅에 여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허난설헌은 스물 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1589년, 허봉이 죽은 다음 해의 일이었다. 허균은 사랑하는 누이와 형을 연이어 떠나 보냈다.


손곡 이달은 허봉의 벗이자 허균의 스승으로 양반인 아버지와 기생첩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이었다. 때문에 능력이 출중해도 벼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젊은 시절 함께 수학하던 친구들이 높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손곡은 성품이 자유분방하고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예를 갖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탓에 곧잘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니 제자인 허균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 손곡은 허균에게 학문과 글 짓는 것 뿐 아니라 사람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스승 손곡을 보면서 사람의 재주와 능력, 됨됨이를 신분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허균은 살아가면서 사람을 사귀는 것에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손곡을 비롯한 능력 있는 서얼 친구들을 보면서 허균은 조선 사회의 부조리를 더욱 뼈저리게 체감해 갔다.


천재가 괴물이 되기까지


허균이라는 당대의 천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탁월한 식견과 안목으로 다른 누구보다 명확하게 조선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을 꿰뚫었으며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아픔을 통하여 그 자신이 직접 모순을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키웠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그 실현 방안을 모색한다는 것. 그것은 기득권 세력에게 그야말로 괴물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허균의 벼슬길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능력은 있으나 특유의 사람됨 때문에 관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와 의지가 모두 없었던 허균은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는 일이 드물었다. 떠돌이 마냥 전국을 돌고 중국을 오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출세에 대한 꿈을 접고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으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평생을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던 허균.



밤에 불경 읽어 집착하는 마음은 없으나

 

아내도 있고

 

고기도 먹는다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내 운명 편안히 여기나니

 

서방정토로 가고픈 꿈은 여전하다오.

 

(후략)


-허균 「파직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聞罷官作)」 中, 

정길수 편역 허균 선집,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허균이 삼척부사에 부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 당한 뒤 쓴 시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으니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라고 표현한 것에서 허균이 파직 당한 것에 그리 크게 상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거듭되는 탄핵과 파직에 대해 허균이 일종의 체념을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허균은 자신이 남기 여러 작품을 통하여 끊임없이 귀거래(관직을 사임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것)와 입신의 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단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권세를 움켜쥐는 출세의 꿈을 꾸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허균은 중앙관직에서 일하며 신임을 받아 요직에 진출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허균은 계속해서 지방관이 되고 싶어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중앙 정부 바깥 자리를 도는 것이 출세에 크게 득 될 것이 없는데도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부탁하거나 희망하는 자리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허균은 지방의 수령 자리를 부탁했으며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의중을 곧잘 털어놓았다. 


왜 허균은 지방 수령이 되고 싶어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허균이 다른 벼슬아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윗사람 앞에서 크게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 허균의 성품이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또 다른 이유는 허균이 지방 수령직을 수행하면서 사회 개혁 혹은 혁명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을 가능성이다. 허균은 삼척부사에서 물러난 뒤, 내자시정으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 받아 그토록 바라던 공부 목사에 부임하게 된다. 공주 목사가 된 허균은 능력은 있으나 뜻을 펼칠 기회를 제약 받고 있던 서얼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내가 비록 운수 사납다지만 이천 석의 태수 녹봉이 오히려 족하니, 달팽이의 침으로 스스로 적실 수는 있다네. 그대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사방을 떠돌아 다니니, 모두 우리들의 잘못일세. 자네의 얼굴을 대하면 문득 땀이 흐르고, 밥을 먹어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네. 빨리 와주게.


-허균이 이재영에게 쓴 편지 中. 허경진, 『허균 평전』


이처럼 허균은 자신의 녹봉까지 할애하면서 서얼 친구들을 거두어들인다. 이재영과 심우영, 윤계영이 공주 관아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두고 ‘허균이 공주에 삼영(三營, 원래는 조선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허균이 불러들인 서얼의 이름 마지막 자가 모두 ‘영’으로 끝나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필자 주)을 설치했다’는 비난을 하는 무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허균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3.JPG

공주 목사가 근무하던 공주목 동헌


허균의 서얼 친구들 가운데는 사회의 전복을 꿈꾸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총동원 체제에 들어간 조정은 인재가 부족하자 일시적으로 서얼금고를 철폐하여 서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그러나 난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얼금고를 부활시키면서 이들의 대대적인 원성을 샀다. 이 과정에서 급진적인 자들은 무리를 만들어 혁명을 기도했다.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차라리 혁명을 시도하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허균은 이들을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들과 함께, 또는 별개로 허균은 사회 변혁을 위해 필요한 나름의 준비를 갖추려고 했다.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만드는 일을 도성인 한양에서 할 수는 없는 일, 그렇기에 허균이 그토록 지방 수령직을 얻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평전의 저자 허경진 교수는 공주 목사자리에서마저 불과 아홉 달 만에 파직 당한 허균이 곧장 도성에 올라오지 않고 부안에 머물렀던 이유 또한 그곳을 기반으로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허균의 혁명 


여기서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만약 허균이 정말 혁명을 원했다면, 그가 그리는 혁명의 그림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역모 혐의로 붙잡힌 허균의 석연치 않은 처형 과정 때문에 허균이 어떤 혁명 계획을 세우고 시도하려 했는지,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짜기는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때문에 그가 남긴 글과 여러 작품, 당시의 정황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허균이 꿈꾸었던 사회의 모습은 적어도 왕정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소개한 유재론 외에도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호민론에서 허균은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 항민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백성을 뜻하며 원민은 사회에 불만을 품고는 있으나 그것을 뒤집을 힘이 없기에 원망만 하는 백성이다. 항민과 원민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크게 걱정할 존재가 아니지만 호민은 다르다는 것이 호민론에서 허균이 주장하는 바다. 때를 기다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항민과 원민을 이끌고 들고 일어나 국가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jpg


그러나 호민론에서 허균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백성이 가진 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지 호민이 나타나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그들의 힘이 폭발하는 사태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호민론의 핵심이다. 그 외에도 허균이 남긴 여러 글들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책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허균이 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정체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주인공인 서자 출신 홍길동은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이라는 가상의 이상사회를 건설하여 스스로 왕이 된다. 율도국은 적서(嫡庶)의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이상국가로 묘사되는데, 국가 통치 체제가 왕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조선과 같다. 


왕정체제 하에서 허균이 꾀할 수 있는 혁명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가장 약한 단계의 혁명. 따지고 보면 혁명이라 할 수 없는 이것은 허균이 광해군 통치 아래에서 실권을 잡는 방법이다. 이 경우 허균은 광해군의 신하로서 임금 못지 않은 혹은 그 이상의 권력을 쥐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 변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허균의 주도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다른 왕을 앉히는 길이 있다. 이 경우 앞서 말한 방법보다는 허균이 왕권 교체 초반, 왕보다 확실히 더 큰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은 역성혁명(易姓革命).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길이다. 역성혁명이 성공할 경우 일반적으로 혁명의 주도자가 스스로 왕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허 씨 왕조의 탄생을 의미한다. 실현하기도 어려운데다 가장 큰 위험 부담-왕조의 교체는 가장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므로-이 따르지만 성공하게 된다면 가장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사회 변혁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허균이 혁명을 꿈꾸었다면, 허균이 계획했던 혁명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다루어보도록 한다.


칠서의 옥사 - 동지를 잃고 구사일생하다. 


허균이 공주 목사에서 파직 당했던 해는 1608년으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이후에도 허균은 탄핵과 파직 당하기를 거듭하여 여전히 벼슬길의 부침은 계속 되었다. 1613년, 허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위기를 맞는다. 이른바 ‘칠서(七庶)의 옥사(계축옥사)’가 일어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허균과 가까웠던 심우영, 서양갑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서얼은 자신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부르며 죽음도 함께하기로 작정한 벗들이었다. 높은 벼슬 아치의 아들이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뜻을 펼치지 못한 일곱 명의 서얼은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며 그들 스스로 어울리기를 즐겨하다가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여 문무(文武)와 병법을 익히며 후일을 도모했다. 거사를 위해서는 자금 조달이 필요했고, 때문에 도적질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이들 가운데 한 명인 박응서가 체포 당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박응서에게 접근한 것이 광해군 정권의 실세 이이첨이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잠재적 위협인 영창대군(선조가 말년에 남긴 어린 아들로 당시 8세였다. -필자 주)과 그의 친모 인목대비(선조가 승하할 당시의 정실 부인으로 광해군에게는 관계상 어머니였으나 나이는 오히려 연하였다.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다. -필자 주)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의 역적 모의 배후에 영창대군을 엮어 들이고자 한다. 이에 박응서를 회유하여 거짓 진술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6.jpg

영창대군 묘(경기도 안성)


박응서는 음모의 대가로 역적에서 밀고자로 지위를 탈바꿈하여 제 한 목숨을 보전하였지만 나머지는 이러나 저러나 역적 혐의를 가진 것이기에 처형 당한다. 당시 허균은 호남 지방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던 터라 자세한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역적의 주범인 심우영과 서양갑이 허균과 막역한 사이였으므로 까딱하면 화가 허균에까지 미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만약 허균까지 연루되어 붙잡혀 들어간다 하더라도 누명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이들 모임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불순한 계획-당시 조정 입장에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허균은 위기를 모면한다. 벗으로서, 동지로서 의리를 지킨 심우영과 서양갑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끝내 허균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심문 과정에서 김응벽이라는 자가 허균의 이름을 꺼내기는 하였으나 이마저도 고문 때문에 실언을 한 것이라 여겨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허균은 동지를 잃은 슬픔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균이 역적으로 처형당한 심우영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대다 계축옥사 한 해 전 죽은 허균의 큰형 허성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승하 직전 세 살배기 영창대군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평소 신뢰하던 몇몇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의 뒤를 부탁한다는 내용을 담은 유서를 전했는데 그 신하 중 한 명이 바로 허성이었다. 이이첨의 계략으로 영창대군이 졸지에 계축옥사의 배후가 되었으므로 앞서 말한 선조의 밀명을 받은 신하들은 모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비록 허성은 이미 죽고 난 뒤였지만 그런 허성의 아우가 허균이었다는 점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한 번 의심을 품고 뒤를 캐면 허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혐의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여전히 허균의 입지는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놀랍게도 허균은 오히려 이 때부터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


이이첨의 사람이 된 허균 


이이첨은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권력의 실세 중 실세였던 인물이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정통성과 입지가 튼튼하지 못했던 광해군 밑에서 잠재적 위협이 될만한 정적(반정을 통해 왕으로 추대될 만한 대군)을 제거하는 데에 앞장섰던 이이첨은 권모와 처세에 능했지만 인망이 있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허균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인 권필은 이러한 이이첨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그와 상종하는 것도 꺼려했을 정도였다. 허균 또한 이이첨의 됨됨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계축옥사 때 심우영과 서양갑을 잃은 허균의 입장. 이이첨이 아니었어도 처형을 당했을 그들이지만, 그의 계략 때문에 심우영과 서양갑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여러모로 이이첨은 허균이 곱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허균은 이이첨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민다. 공주 목사에서 파직 당했던 그 해(1608년)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해로 이이첨이 실력자로 급부상한 때이기도 하다. 이미 그 시점부터 허균은 이이첨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계축옥사로 인하여 허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지자 허균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이첨에게 다가갔다. 이러한 허균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위해 적서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무능한 고위 관료를 비판했던 허균이 온갖 음모와 계략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아 권세를 움켜쥔 이이첨과 야합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8.jpg


이 지점에서 평전의 저자 허경진 교수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추론한다. 허균이 이이첨에게 다가간 것 또한 혁명 준비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허균이 이이첨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허균이 공주 목사에서 파직당한 후로 허균이 부안에서 세력을 규합했던 시기와 맞닿는다. 혁명의 준비를 해나가야 했던 허균은 권력의 핵심에 선 자들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고, 거기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이이첨이었다는 것이다. 권세는 있으나 학식과 인망으로는 존경 받지 못했던 이이첨에게도 허균의 접근은 반가운 일이었을 게다. 행실과 태도로 구설에 오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문장과 능력에 있어서 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허균이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터진 계축옥사는 허균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을 통하여 허균은 위기감과 조급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허균과 이이첨의 밀월관계가 시작되었다. 


권력의 심장부로, 자신의 최후로 


뛰어난 재주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관직에서 쫓겨나고 다시 부름 받고를 반복했던 허균은 이이첨을 가까이 하면서 빠르게 벼슬의 품계를 높이고 권력의 중심에 진입해갔다. 허균은 광해군과 이이첨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적자인 영창대군과 큰형인 임해군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가진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을 허균은 정확히 간파했다. 허균은 명나라에서 돌아다니는 야사에 잘못 기록된 조선왕조의 족보를 바로 잡았다고 광해군에게 보고하여 치하를 받더니 이미 이전에 잘못을 바로 잡은 바 있는 명나라 국사의 내용 또한 자신이 명 황제의 인준을 받아 고친 것처럼 보고해서 광해군을 더욱 기쁘게 했다. 


1615년, 허균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어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계축옥사가 일어난 지 불과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벼슬길에 오른 뒤 근 20년 동안 관직의 오르내림과 드나듦을 반복하며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던 허균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한 뒤 불과 몇 년 만에 이렇게 가파르게 직위가 상승하는 허균의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음해인 1617년, 허균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계축옥사 이후로 들끓고 있던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폭발한 것이다. 광해군에게 있어 인목대비의 폐비는 잠재된 위협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표면상 아들이 어머니를 내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대놓고 나서서 일은 주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전까지 보통 이런 사안에서는 이이첨의 주도 하에 음모와 계략으로 일을 꾸며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이 활용되어왔다. 인목대비 폐비론이 대두되자 이번에도 이이첨이 앞장섰다. 그리고 허균이 가세했다. 


인목대비를 끌어내리기 위한 이들의 계략은 치밀하면서도 한편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허균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마치 반정을 계획한 자들이 인목대비에게 보내는 밀서인 것마냥 흉서를 꾸며 인목대비가 기거하는 경운궁 안뜰에 던져 넣게 하고는 그것을 발견한 자가 밀고를 한 것처럼 일을 꾸몄다. 밀서에는 광해군이 기겁할 만한 내용들이 채워져 있었다.


일을 키우고 난 뒤에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선비들을 동원했다. 허균은 자신의 집에 수십 명을 불러들여 먹이고 재우며 밤낮으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는 상소를 짓게 했다. 허균은 꼼꼼하게도 그들이 써 내려가는 상소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문구를 고쳐 쓰게 하거나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사람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7.jpg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만, 그럼에도 이를 주도한 이가 허균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허균이 권력 다툼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가장 지저분한 음모를 꾸민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신임을 얻고자 했던 허균의 기대와는 달리, 이 일은 허균이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인목대비 폐비론이 대세로 굳어지게 되었지만 영의정 기자헌을 비롯한 몇몇 대신은 끝까지 이를 반대하며 버텼다. 이에 유생들은 폐비론을 반대하는 기자헌까지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고립시켰고, 끝내 기자헌과 이항복은 유배지로 떠나게 된다. 문제는, 인목대비 폐비론에 대한 일련의 일들이 허균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이로 인해 영의정 기자헌이 귀양을 갔다는 것, 그리고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기준격은 허균이 벌이고 있는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자였다. 


허균의 최후 


아버지인 기자헌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기준격이 허균을 고발하는 비밀 상소를 올리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기준격은 상소에서 허균의 그간 행적을 낱낱히 밝히며 역모를 고발했다. 공주 목사 시절과 계축옥사로 처형된 심우영과 서양갑까지 언급해가며 허균의 계획이 꽤나 오래된 것임을 주장했다. 역모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기준격 본인마저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 상소였기에 그 내용에 더욱 거침이 없었다.


아직 인목대비 폐비 문제가 완전히 처리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광해군은 결정을 유예하지만, 이미 장작더미에 던져진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한 술 더 떠서 일이 위험하게 돌아가자 이이첨은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워 허균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너무 커져버린 허균에 대한 견제 심리까지 작용한 결과였다.


그 와중에 허균의 심복이 백성을 선동하는 격서를 써 붙여놓고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신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국 허균은 의금부에 잡혀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이첨은 허균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인목대비 폐비를 위해 허균이 했던 것처럼, 이이첨은 유생을 동원하여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그러면서도 이이첨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허균을 안심시키며 조금만 참으면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자칫 허균이 앙심을 품고 자신까지 엮고 들어가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허균이 이이첨의 거짓말을 곧대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이첨이 누구보다 치밀한 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혁명을 위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기 위해 이이첨의 손을 잡은 허균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이이첨이었다.


9.JPG


그 이후의 일은 상편의 서두에 소개한 그대로다. ‘할 말이 있다’는 외침을 마지막으로 허균은 능치처참 당하여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겼다. 결안을 받지도 않을 정도로 처형이 급히 집행되었던 이유를, 독자들도 이제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허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그를 구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손 쓸 겨를조차 없었다. 혁명을 꿈꾸었던 허균의 최후는 이렇게나 허망했다.


허균의 혁명 2


허균이 처형된 후, 허균을 따랐던 무리를 색출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서둘러 처형을 하긴 했으나 정작 역적 수괴 허균의 자백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추종자들을 잡아들여 그들에게서 역모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어 달 동안 90여 명이 잡혀들어가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이들이 고문에 못이겨 허위 자백을 하거나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명확하게 계획의 전모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자백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내용에 엇갈림이 많았다. 기준격은 상소에서 허균이 인목대비를 정부(情婦)로 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실록에는 허균이 인목대비를 시해한다는 명분으로 무사와 승군을 준비해놓고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인목대비를 시해한 뒤 광해군까지 죽이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황정필은 허균이 반정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고 자백했다. 허균에게 처형 전,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면 그는 자백을 했을까 아니면 혐의를 부인했을까. 허균이 그렸던 혁명의 밑그림은 오늘까지도 완전하게는 밝혀지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왕정체제 하에서 허균이 택할 수 있는 혁명의 길을 다시 상기해보자. 광해군 밑에서 실권을 잡는 길, 반정을 도모하여 다른 임금을 앉히는 길, 스스로 왕이 되는 길. 허균은 어떤 길을 염두해 두고 계획을 세웠을까. 아니, 처음부터 허균은 이 세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염두한 것이 아닐까? 


소설 「홍길동전」에 나타난 이상 국가 율도국은 적서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왕정 국가였다. 허균은 스승 손곡 이달과 그의 서얼 친구들을 보면서 신분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했고 서얼들이 가지고 있는 울분과 절망에 깊이 공감했다. 허균은 유재론과 같은 글을 통하여 이러한 기회의 제한이 결국 국가에도 해로운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더 나아가 허균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를 꿈꿨을 것이다. 적어도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게다. 중국을 오가며 들여온 수천 권의 책과 중국에서 본 더 넓은 세상의 문물을 두루 섭렵한 허균은 심각하게 경직된 조선 사회을 떠올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허균은 분명 조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자신이 직접 실력을 행사하여 뒤바꿀 생각도 했도. 계획을 했고, 준비했다. 허균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길, 세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광해군 정권의 실권을 잡는 것이 되었든, 허수아비 왕을 세워놓고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 되었든, 아예 왕이 되어버리든 간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허균에게 필요했던 것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과 조정의 실세 이이첨의 지원이었다. 허균은 광해군의 최측근에 진입하게 되자 광해군과 여러 개혁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이 가지고 있던 사회 개혁의 필요성과 변화의 정도를 광해군도 공감하고 인정했다면, 그리고 충분한 개혁 의지를 보여주면서 반대를 극복해나갔다면 허균은  어쩌면 지금까지 광해군의 충신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허균은 처음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공주 목사 시절을 전후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혁명은 준비했다. 허균이 무사와 승군을 준비해놓고 있었다는 실록의 기록은, 그 시점에 혁명을 위한 무력의 준비를 허균이 어느정도 갖추어 놓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신이 바라는 개혁을 광해군과는 함께 해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허균은 반정 내지 역성혁명까지도 시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허균의 혁명 계획은 자신의 권력의지보다는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그 수단이 어떤 것이냐는 허균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허균은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 수만 있다면 꼭 스스로 왕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허균이 실제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크게 아쉬운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허균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허균이 혁명을 위해 사용했던 한 가지 수단. 그것만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의명분, 목적과 수단.


만약 허균이 한낱 권력 욕심을 갖고 일을 꾸며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다른 왕족을 앉히려다가 실패하고 처형되었다면, 허균의 이름이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지워지는 일은 없었을 지 모른다. 그랬다면 허균은 광해군의 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조선 사회의 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허균이 조선의 자유주의자이자 혁명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반역을 꾀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그가 바라는 사회의 변화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공감을 얻고 있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른바 대의명분. 그것으로 허균은 조선 사회에서는 이름을 잃었고 지금은 그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그러나 허균이 자신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 이이첨과 야합하여 벌인 일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회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한 혁명을 바랐던 허균이 권력의 중심에 서서 보여준 모습은 당시 조선 사회 기득권 층의 지저분한 암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렇다할 빼어난 능력과 인덕도 없이 권모 술수와 처세로 권력을 손에 넣은 이이첨은 허균이 그토록 경멸하는 고위 관료의 전형이었다. 그와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권력 유지를 위한 진흙탕 싸움의 최전선에서 음모를 진두지휘했던 허균의 모습을 두고, 우리는 그저 혁명의 대의를 위해 잠시 구정물에 발을 담근 것이라 이해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10.jpg


자신에게 대의가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모든 수단을 별다른 고민 없이 정당화할 수 있게끔 하기도 한다. 물론 당시의 허균으로서는 그것말고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왕의 측근에서 신임을 얻어 거사를 준비하고 일으키지 않는 이상 도성 밖을 떠돌면서 그리 크지도 않은 세력을 모아봤자 혁명을 성공시키기는 커녕 준비 과정에서 발각되어 비참하게 끝맺음을 할 가능성이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 힘으로 능력을 인정 받아 임금의 곁에서 함께 개혁을 추진해보려 할 수도 없었다. 허균이 20년 가까이 벼슬길에서 부침을 겪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이첨의 손을 잡고 허균이 벌인 일들을 보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허균은 조급했다. 칠서의 옥사로 동지를 잃고 자신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조급함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 조급함에 한 시라도 빨리 왕의 신임을 얻고자 거짓 보고까지 한 것일테고 인목대비 폐비에 더욱 앞장섰던 것일 게다. 그 조급함의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달라진 세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오직 자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가 전자가 아닌 후자라면 허균은 정말로 찌질한 인물로 불려도 손색(?)이 없겠지만 거기까지는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논외로 하자.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조급함이 패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허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결정적 이유 두 가지는 기준격의 고발과 이이첨의 배신이었다. 모두 허균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 스스로 벌인 일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 결과였다.


허균의 선택, 우리의 선택


세상 일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허균의 선택에도 백 퍼센트의 옳고 그름이 있지는 않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에 따라 누군가는 허균의 행동에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끌어내리기 위해 꾸며내는 추잡한 음모의 찌질한 짓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허균도 그런 음모가 얼마나 비겁하고 찌질한 일인지 몰랐을 리 없다.


혁명이라는 거창한 대의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명분은 있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온갖 찌질함이 널려있다. 김 과장이 능력 없는 김 부장의 라인을 타기 위해 죄 없는 박 과장을 험담하는 와중에도 김 과장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처자식이라는 대의가 있다. 인류사에 먹고 사는 일만큼 유구하고 절박한 명분이 어딨겠나. 박 과장을 험담하는 김 과장은 스스로를 찌질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뿐이다. 처자식을 생각하든, 아님 박 과장이 진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든. 물론, 그러다 믿었던 김 부장이 명예퇴직을 당해 김 과장마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아니면 김 부장과 함께 명예 퇴직을 당해서 이제 정말로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이에서 끝없이 묻고, 고민하는 일이다. 그것이 비록 주저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라도 그런 식의 고민은 여러모로 우리가 찌질함의 나락에 빠져 절망할 가능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고민은,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한 누군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절대적 찌질함은, 절대적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허균


허균이 죽고나서 5년 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실각한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붙잡혀 참형에 처해졌다. 서얼금고는 1894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철폐되었다. 그러나 허균의 이름은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11.jpg

허균의 가묘


허균은 생전에 불여세합(不與世合)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했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이 세상을 바꾸려 했기에 그 대가가 더욱 가혹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허균은 자신의 혁명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홍길동은 관군에 붙잡혀도 도술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현실의 허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허균의 찌질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겠다. 그보다는 허균이 이단아 취급받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조선 사회가 더 찌질하다 할 수도 있다.


괴물이 된 천재 허균.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허균을 괴물로 만든 것은 결국 땅 위의 환경이었다.


<찌질한 위인전>, 허균 편은 여기까지다.




※허균의 생애와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등은 허경진 교수의 『허균 평전』을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