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5. 12. 월요일
펜더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잡문’이 돈이 될까?
2002년 기준으로 원고지 10매의 평균적인 원고료는 1만 원이었다. 신문의 박스기사가 보일 것이다. 그 박스기사 정도의 글이 10만 원이라고 보면 된다.
2014년 현재,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잡지사의 월간 연재물 가격이 A4 1매 당 7만 원으로 책정 됐다. A4 1장이면 원고지 10매 내외가 나온다. 즉, 13년 사이에 물가는 껑충 뛰었는데, 글값은 더 떨어졌다는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A4 1매당 7만 원이란 원고료가 업계 평균으로 보자면, 결코 낮은 금액이 아니란 사실이다. 딴지와 비교해 보면 확실해질 것이다(내 기준으로 보자면, a4 1매당 1만 원꼴이다).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건당 고료’를 내놓기 시작했다. 연재의 경우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연재에 들어간 게 2009년이었다. 그 이후에는 연재를 하더라도 계약서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매체 환경이 극도로 나빠지니 외부필자에게까지 돈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딴지일보를 즐겨 찾을 정도의 성향(?)의 독자라면,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즐겨 볼 것이다. 궁금한데,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들의 연봉을 아는가? 들으면 깜짝 놀랄 수준이다.
2008년 경향신문이 휘청일 때 경향신문 기자들은 월급의 반을 받고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그때 그 ‘반’뿐인 월급을 보며 허탈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걸로 어떻게 회사를 다니냐?”
88만원 세대보다 못 버는 금액 앞에서 난 연재를 접어야 했다. 기자들에게 제대로 월급을 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기고가에게 기자들보다 많은 돈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1. 선택과 집중
시나리오를 버리고 ‘잡문’으로 먹고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교보문고에 출근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딱 4년 만 파면 된다.”
그 생각에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최단루트를 계산해 봤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었다. 내가 학계에 몸 담고 있는 게 아니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분야도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후광효과 같은 걸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즉,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중’이었다.
내가 가진 리소스로 강연을 한다거나 방송에 나가 한 번에 뒤엎을 수 있을 만한 콘텐츠가 나오기 힘들었고, 설사 나온다 해도 1회용 소모품이 될 것이란 계산이 섰다. 결국 강연이나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 글은 포기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너무도 다행스럽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몇 가지 분야에 관심이 있었고 그에 관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있었다. 바로 ‘역사’와 ‘군사’, ‘섹스’였다.
...천운(天運)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돈이 되는 분야가 2개나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한 가지씩 설명해 보겠다.
① 군사분야
딴지에서 난 ‘군사분야 전문가’로 알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건 겸사(謙辭)가 아니다. 나는 그저 ‘취미가’ 수준일 뿐이다. 지금도 취미로 즐길 정도이지 이걸 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고, 나에게 ‘마니아’란 칭호를 붙이는 것도 부담스럽다. 말 그대로 순수한 취미이다. 물론, 취미가 과해서 서바이벌용 총을 사 모으고, 만화가들이 총이 필요하면 총을 들고 가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강풀의 <26년>에서 전두환을 저격한 총이 내 총이다), 어디까지나 ‘취미’다.
톡 까놓고 말해서 군사분야를 가지고 연구를 하고, 전문가로서 책을 내 먹고 사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우선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
이 업계에서 군사 분야의 최고 한계치를 ‘3만 부’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멸의 군사잡지’라 불리는(모형잡지라 보는게 맞겠지만) <취미가>의 부수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모형잡지이고, 상당수의 군사마니아를 끌어 모은 잡지이지만(이 잡지를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다), 3만 부 내외 수준이었다(또, 이때는 우리나라 경제가 유래 없는 ‘호황’이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때는 인터넷도 없었던 시절이다.
시장 자체가 작았다. 이런 데 뛰어들어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 미친 짓이다. 물론, 군사분야로 책을 써서 돈을 버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군사분야가 아니라 ‘경제경영서’ 혹은 ‘자기계발서’의 탈을 뒤집어 써야 한다.
'창조란, 무관한 두 개의 분야에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다.'란 말처럼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역사의 명장들과 조직관리, 혹은 자기계발, 경제경영을 붙이는 것이다(손자병법이나 36계가 직장인 처세술 책으로 팔리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은 너무 많이 나왔다. 이런 좁은 시장에 섣불리 투자할 수는 없었다.
② 섹스
인류의 영원불변한 화두다. 섹스를 빼고 인간을 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여기에는 ‘틈새’가 있다. 바로 <간행물 윤리위원회>가 있었다. 노골적이고 음란한 내용을 신문지면에 올리면, 바로... 그러나 ‘학계’의 연구나 ‘실험’등등의 꼬리표를 달면 무사통과였다. 결국 난 이걸 활용하기로 했다. 국내외의 모든 연구 자료를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입수해서 그걸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걸 사건사고와 연결하고, 연구 자료들끼리 결합시키고, 영화와 문화매체와 상의했다.
단언하건대 ‘섹스’를 주제로 한 글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나올 것이고, 팔릴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난 ‘섹스’에 관한 글을 쓰고 있고,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심지어 비뇨기과 학회지에도 때 되면 한 편씩 글을 쓴다).
③ 역사
지상학 선생님에게서 글을 배울 때부터 선생님은 내게 ‘사극’을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워낙 역사를 좋아해서 말이다. 그때는 한 귀로 흘려들었는데, 본격적으로 ‘글’로 밥벌이를 하겠다고 마음먹자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섹스와 함께 이 땅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 돼 주었던 것이 역사다.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콘텐츠가 가지는 파괴력과 흡입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적이다. 재탕삼탕에 뼈까지 흐물거릴 정도로 우려내도 기본은 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2차 시장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바로 '교육'이다. 정 안된다면, ‘교과서’나 ‘학교’란 타이틀을 찾아다 붙이면 망하진 않을 것이다(이건 2003년 기준이다. 지금은 또다시 환경이 바뀌었다).
교보문고를 찾아가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아울러 인터넷과 잡지, 신문에 나오는 글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2주 정도 발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덤벼 볼 만하다.”
실제로 덤벼 볼 만 했고, 내 계산은 정확했다. 운도 따랐다. 아니, 운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내가 했던 건 ‘확률’을 높였던 것 뿐이다. 지옥문을 활짝 열었다.
2. 투자
예스 24, 교보문고, 알라딘, 리브로... 한 때 난 인터넷 서점의 최우수 고객이었다. 당시 구매기록을 보면, 1년에 3천 만 원 가까운 책을 샀었다. 헌책방에서도 그 비슷한 수준으로 책을 샀을 것이다(이건 증명할 수 없지만). 인천 배다리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차를 몰고가 닥치는대로 책을 사 모았던 기억이 난다.
시바 료타로를 따라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보니 시바 료타로를 따라하게 됐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서재에서 펜 한 자루에 의지하여 소설을 쓰는데, 시바 료타로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를 들고 와서 소설을 쓴다.'
시바 료타로
<언더위의 구름>을 쓸 당시 러일전쟁을 소재로 쓰려던 작가가 있었는데, 그 전에 시바 료타로가 고서점의 책을 싹 쓸어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전설’은 일본 문학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취재파와 서재파로 나눈다면 난 서재파였다. 어쩔 수 없다. 취재를 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난 책에서 책을 찾아내야 했다.
당시 아내에게 했던 말이 있다.
“앞으로 5년은 이걸로 먹고 살 것이다. 투자 금액의 5배는 너끈히 뽑아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이 말은 거짓이었다. 5배? 내가 보기엔 10배는 넘게 뽑아먹은 것 같다. 아울러 5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르지 않고 파 먹고 있다. 지금 내 방에는 ‘역사’와 ‘군사’, ‘섹스’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석사 논문 급은 나올만한 자료와 책이 있다.
책을 산 다음에는 공부였다. 그리고 틈새를 확인하고, 문체를 가다듬고, 나만의 ‘작업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당시 일부 선배들은 내가 매문(賣文)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이제사 고백하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 그 손가락질이 참 뼈아팠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에둘러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결혼을 한 내 실수란 대답과 가족을 핑계로 도망가는 것이란 공허한 메아리였다.
그 뒤로 한 5년이 지났을 때 그 선배들은 하나 둘 이 판을 떠나야 했지만, 어쨌든 난 말석에 이름 한 자 얹어놓고 끝까지 버티고는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난 그때 이 결정이 잘못된 결정이 아닌가를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확신은 없었다. 그저 ‘돈’이었다.
3. 운(運)
‘덕질’의 덕을 보게 됐다.
덕질인생 15년의 결과가 ‘인연’을 만들어줬다. 같이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하고, 토론을 하던 이들. 그들 중 대부분은 오르고 올라가(?) 사회에 나와 보니 ‘멀쩡하게’ 사는 이들이 돼 있었다(라이프펜도 어찌보면 덕후다. 글에 그리 미치다보니 세상만사 한 발 안 걸친 분야가 없다. 심지어 잠수함관련 글도 쓸 정도로 말이다. 차라리 이 사람을 군사전문가로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덕질인생 중 알게 된 후배(?!) 겸 동료(!)가 신문사 기자로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내가 만나 희희덕거리던 인물들이 나중에는 문화관련분야 요소요소에 박혀 있었다. 그때 외쳤다.
“오시이 마모루 만세!! 가이낙스 만세!! 선라이즈 만세!! 마루이 만세!!”
코 찔찔 흘리며 LD 뜨러 다니다 만난 인연들이 사회에 나와 보니 멀쩡하게 양복입고, 신문사 기자, 출판사 편집자, 문화평론가 등등의 타이틀을 달고 앉아 있었다.
(지금의 ‘덕질’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움직이기에 그 ‘인연’의 깊이가 얇다고 본다. 우리 세대의 ‘덕질’은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금전적인 출혈을 수반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지금이야 방안에 앉아 컴퓨터만 부팅하면 수많은 영상물을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발품을 팔아야 했고, 교류해야 했고, 상영회를 해야지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아날로그적 ‘덕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에는 불편하다 생각했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와 보니 이게 다 재산이 됐다. 덕질도 잘만 하면 경쟁력이 된다)
(에반게리온과 카우보이 비밥을 비디오로 떠서 본 세대와 P2P로 내려 받아 본 세대. 그 세대의 차이일까? 아니, 지금 P2P로 내려받아 본 세대도 한 10년 지나면 나와 같은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 인연이란 게 묘했다. 작정하고 ‘생존’을 위해 뛰어다닐 때 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펜더님 신문연재 안 해 볼래요?”
“펜더야, 나랑 전시회 한 번 안 해볼래?”
“펜더야, 알바 한 번 안 해볼래?”
내 소문을 들었던 건지, 아니면 일이 되려고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시장을 조사하고, 문체를 가다듬고, 자료를 모으고, 아이템을 정리하던 그때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정말 인생은 운이었다.
이 연락이 오기 전 이미 한 매체에서 ‘섹스칼럼’을 연재하고 있었고, 그 반응이 괜찮아서 다른 곳에서 입질이 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불에 기름을 부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아니, 네이팜탄에 테르밋을 까 던진 거라고 봐야 하겠다.
신문연재 2개를 돌리기 시작했고, 전시회를 하게 됐고, 사보 알바를 뛰기 시작했다.
4.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예전 상수역 옆의 자투리 벽면에 어떤 미대생(?)이 휘갈긴 그래피티가 있었다.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먹먹했다. 그 벽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많은 응원을 보냈지만, 결국 그 그래피티는 지워졌다. 안타까웠다. 그 그래피티를 한 사람이 그 도전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랬다.
‘잡문’. 선배들이 보기에 매문(賣文)을 해 돈을 벌던 내가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됐다. 내가 글자판기인지, 작가인지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건 어렵다.”란 단순한 결론이다.
며칠 전 내 수입 현황을 확인했다. ‘꽤’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일반 샐러리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게 많이 번 건 아니었다. 당시 내 원칙(지금도 마찬가지지만),
① 최소한 한 달에 1번 이상 입금이 되도록 한다.
②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돈을 번다.
아마 윤태호 작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4년도인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윤태호 작가의 철학을 들으면서 크게 동감했다. 지금은 <이끼>와 <미생>으로 최고의 웹툰 작가 반열에 오른 윤태호 작가였지만, 당시에는 오프라인 매체에서 더 유명한 작가였다. <YAHOO>
“한 달에 얼만큼을 아내에게 주겠다는 건 아내와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야지만, 아내와 내 관계가 유지되고, 우리 가정이 지켜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다 걸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건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의무입니다.”
당시 윤태호 작가의 작품을 보면, 편차가 너무 컸다. 퀄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다루는 소재와 그림체, 풀어내는 과정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어떨 땐 부조리극을 보는 듯 한 느낌으로, 어떨 땐 정극으로 사회비판을 하는 느낌으로. 어떨 땐 선 몇 개가 슥슥 지나가는 무성의함으로... 인정했었다.
“연재해야죠. 가정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이 새롭다. 가족과 만화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이라는 질문이었는데,
“당연히 가족이죠. 그림 따위가 뭐 대수라고. 내 가족이 있고, 그림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진정한 생활인이었고, 최고의 작가였다. 자신의 생활과 작품을 훌륭하게 양립시켰다.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보다 내 가족을 위한 일을 하고, 그 다음 자신의 걸 준비한다는.
나 역시 그랬다. 얼마를 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글로 돈을 번다. 그리고 그걸 다 준다. 그게 내 원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었다.
① 글값은 싸다. 때문에 개별단가를 올리지 못하는 한 박리다매 형태로 많은 글을 써야한다.
② 작가도 사람이기에 '휴식'과 '공부'가 필요하다.
③ 대한민국에서 4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내 기준으론(!!)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입금이 되고, 내가 번 대부분의 돈은 생활비로 나갔다는 것이다.
무간지옥의 삶이었다. 한 달에 마감 70개를 돌리던 시절에는 내가 정말 자판기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란 글을 쓰지 않으면 백수처럼 보일까봐 글을 쓰는 존재다.'란 말이 있다. 중의적인 의미이다. 작가를 밖에서 바라보면, 백수처럼 보이지만 진짜 ‘뭔가’를 하려는 작가들이라면, 그 시간은 오롯이 창작활동이다. 창작은 통찰에서, 통찰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작가들의 통찰과 관찰, 사유의 시간을 밖에서 보면 ‘노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인정한다.
(여담이지만, 내가 이 직업을 가지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게 내 주변인들이 내게 보여준 반응이었다. 집안행사나 모임, 일 같은 게 있다면 평일 오전, 오후에 직장인을 부르진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연락이 온다)
“넌 놀고 있잖아.”
화가 났다. 돈은 남들처럼 버는데, 시간도 내야 한다니. 얼마 전 미술과 설치, 음악을 하는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이 ‘사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이외수를 팔아야지.”
“이외수?”
“예술하는 이들의 기행(奇行)하면 이외수잖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것 때문에 멀쩡한데도 일부러 기행을 하는 작가들도 꽤 돼. 주변에서 못 건들게.”
“슬프다. 멀쩡한데, 주변이 귀찮아서 AT필드 치는 거잖아.”
“안 그러면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데. 어쩌겠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반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가치는 다르다. 그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와 사회 사이의 골이 깊어져 갔다. 결국 난, 내가 그 골을 메우려 했다. 처절했다.
5. 돈... 그리고 글
신문연재를 하고, 책을 쓰고, 그 책이 터졌다. 강연도 다니게 됐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운’이다.
'인간의 노력은 운과 마주칠 ‘확률’을 높여나가는 행위.'
인생이 운이라면, ‘노력’은 그 운의 확률을 높여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판단이다. 뒤돌아보면, 난 참 ‘운’이 좋은 놈이었다.
작정하고 돈을 벌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글로 할 수 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의외로 그 시장이 넓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장에는 작가를 ‘뜯어먹기’ 위해 존재하는 포식자들도 많다는 것도 확인했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자. 사보에 글을 써주는 ‘알바’가 있다. 이 알바는 제대로 자신의 글을 발표한 적도 없고, 자기 이름으로 나간 책 한 권도 없다.
제대로 원고청탁을 받아본 적도, 작가란 ‘타이틀’로 불려본 적도 없다. 다만, 글을 쓰고 싶어하고, 글을 쓰는 재주가 있다. 이 알바는 몇 군데 사이트나 블로그에서 키치한 글을 올려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글로는 생계를 꾸리기 힘들다.
이때 이 사람에게 연락이 온다. 사보(私報) 대행업체 혹은 그 매니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작가와 업체 측을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거간꾼들이다.
10년 전 쯤 당시의 시세로는 원고료의 25%였다(이건 양심적인 수준이고, 30% 혹은 그 이상도 있었다). 거간비로 생각하면 순순히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들은 모델 에이전시의 그것처럼 절대로 작가의 개인 연락처를 업체에 알려주지 않는다.
인정하는 게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고료의 25%라 해도 워낙 글값이 싸기 때문에 얼마 안된다. 이 사보에이전트의 확장 개념이 출판 에이전트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데,
한때 나도 출판 에이전트를 고용했던 기억이 있다. 이 에이전트와는 다른 일로 틀어졌지만(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기획력도 좋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사석에서 보면 꽤 괜찮은 훈남이다. 게다가 미혼. 쿨럭), 이 사람의 경우 당시 출판사 수십 군데에 오퍼를 넣어 ‘기획실장’이란 타이틀로 활동했다. 내가 알기론 내 인세에서 매절로 얼마를 받아갔고, 출판사 측에서 또 얼마를 받는 걸로 알고 있다(이 분과 계약했을 무렵, 내 책 인세는 7%였었다. 평균적인 작가 인세가 10%였는데, 3% 차익이 이 분의 수익인 걸로 추측했다. 책이 터진 경우엔 괜찮지만, 아닌 경우에는 그야말로 ‘용돈벌이’도 안되는 수준이다). 이 분은 책 뿐만이 아니라 신문연재도 소개해 주곤 했는데, 이 경우에는 일정수준 이상의 사례비를 보내야 했다(액수가 설정 돼 있었다. 그 연재처의 질은 이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한 번인가 연결 받고는 그 뒤로는 내가 직접 찾아나섰던 기억이 난다).
아마 이 판의 뒤쪽.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놀랄 것이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그 돈을 가지고 프로야구 선수의 FA계약 같은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아직 ‘낭만’이라는(혹은 몇 푼 안 되는 돈이기에 무시하는) 이름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엄연히 계약이고, 발주처와 납품처, 선금과 잔금, 마감일자가 박혀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쎈 거부터 가보자. 이 사회에 ‘민폐’를 끼친 글부터 가보자. 다음회에는 내 마음 속 양심의 소리를 꺼내보겠다.
펜더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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