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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해전이 끝나고 나서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걸 확인한다.


러시아의 경우는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트함대가 쓰시마 해협에 수장된 마당에 더 꺼내 놓을 뭔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러시아 내부에서도 수상한 기운이 있던 상황(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라 섣불리 전쟁을 이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발트함대가 전세를 뒤엎었다면 이를 기반으로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정치의 새로운 동력원을 찾았을 수 있었겠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일본의 경우는 더 했다. 이미 관세 수입과 담배 전매 이익금을 담보로 미국과 영국에서 외채를 엄청 끌어다 썼음에도 전비가 모자랐고 병력도 없었다. 거기다 사망자 숫자만(전사자, 질병사 포함) 80,000명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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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불태웠어...


군인들이 두 손을 든 상황에서 남은 건 정치인들의 ‘협상’이었다. 여기에 두 팔 벌리고 나선 이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러시아를 비난했고 전쟁 기간 내내 일본의 뒤를 받쳐 줬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와 일본 정부 사이를 주선했고, 이들은 뉴햄프셔 주의 작은 도시 포츠머스에서 만난다. 이게 바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5.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6. 동해·오호츠크 해·베링 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몇 가지 조항이 눈에 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라는 대목을 잘 살펴보자. 이 전쟁의 전리품으로 조선이 일본의 손에 떨어진다는 걸 국제사회가(미국이 주선자였고, 조선을 사이에 놓고 다투던 러시아가 인정했고, 러일전쟁 내내 일본을 지원했던 영국이 묵시적으로 동의했으니 전 세계가 승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정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그 누구도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았다(러일전쟁 당시 보여준 대한제국의 졸렬함과 백성들의 안이한 태도를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나눠줄 ‘걱정’은 없었다. 거기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의리’와 ‘신의’, ‘윤리’를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이 있을까? 철저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 국제정치 무대이며, 명분은 그 뒤에 만들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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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은 결정됐다.


그러나 러-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상금, 배상금, 배상금!!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 하기 앞서 일본 외교관들은 배상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전비만 19억 8400만 엔이 들어간 러-일 전쟁은 말 그대로 ‘빚잔치’였다. 미국과 영국이 12억 엔을 지원했다지만, 모두 ‘빚’이었다.


‘자위를 위한 국민적 전쟁’


이라며 일본 국민을 쥐어 짜낸 것은 성공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이후에도 정부와 국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등 뒤이은 거국적인 전쟁 분위기를 유도하는 ‘기술’을 확보하게 됐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전쟁의 승리가 곧 국민의 생존과 연결된다며 승리까지 인내하라고 말했던 이면에는 전쟁 승리 이후의 ‘배상금’이 있었다. 이미 청일전쟁에서 2억 냥, 엔화로 환산하면 3억 2천만 엔이나 되는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 냈던 일본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1년 세출이 8천만 엔이었으니 4년 치 예산이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 청일전쟁보다 8.5배나 더 많은 돈을 썼다. 일본 국민들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배상금이 나올 테고 이 배상금이 지난 20개월 동안의 고통을 상당부분 치유해 줄 것이라 믿었다. 이를 두고 순진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고, 배상금이란 언제나 전쟁후의 전리품으로 따라오던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러시아가 배상금 지불을 거부했다. 아니, 배상금을 논의 선상에서 아예 제외시켰다. 러시아도 일본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다 소진한 상태다.”


러시아도 일본도 배상금 지불 거부를 핑계로 일본이 전쟁을 속개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쟁을 속행한다면 패배할 것은 일본이라는 건 자명했다.


물론 러시아의 사정도 여의치 않다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일본에게 남은 길은 패망밖에 없었다. 일본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 러시아와 싸워 이겼지만(러시아 전체가 아닌 극동지역에서, 러시아가 아닌 ‘제정 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이라며 폄하하지만 승리는 승리였다), 이 20개월 동안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궈 낸 모든 성취를 다 토해내야 했다. 그야말로 ‘올인’이었던 것이다.


하얗게 불태웠던 일본은 팔 하나 올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이 ‘배상금 없는 강화조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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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조약의 당사자들.

러시아 비테 (왼쪽)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가운데) 일본 고무라 (오른쪽 둘째)

우리나라에겐 이 때가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는 즉각 나왔다. 강화조약을 체결한 날부터 3일간 동경, 요코하마, 고베 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고베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철거되기까지 했다. ‘승리’만을 위해 20개월 동안 참아왔던(그 이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한다고 참아야 했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다음해 1월엔 가쓰라 내각이 총사퇴를 하기도 했다.



남몰래 웃음 짓던 이들


일본을 지원했던 영국과 미국은 남몰래 웃음 지었다. 러시아의 팽창 앞에서 ‘그래, 일본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지켜보자’라며 슬며시 일본의 등을 밀어줬던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영일동맹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더 컸다.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노선인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포기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파트너인 일본. 처음으로 체결한 동맹국이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일본은 훌륭히 그 임무를 수행해 냈다. 영국이 그때까지 고수해 왔던 고립노선을 포기한 직후에 올린 성과는 영국 정부를 충분히 고무시켰다. 그들의 선택은 옳았고, 1904년과 1907년 프랑스와 러시아와 협상을 체결하는 단초가 돼 주었다. 그 덕분에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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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덕분에 영국은 100년 가까이 달려왔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는 영국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극동함대와 발트함대의 몰락은 사실상 러시아의 해외 투사력을 0에 수렴하게 만들었다. 육군 강국으로서의 위상은 남아 있었지만,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필수 요소였던 ‘해군’의 부재는 러시아의 대외정책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해군의 활약상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쓰시마 해전 이후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몰락했다고 보는 게 옳고, 이후 국제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니콜라이 2세의 ‘사회주의 발흥으로 혼란해진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작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분위기를 쇄신하고, 국론을 통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 하에 시작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일본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고 니콜라이 2세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했고, 이후 러시아 혁명까지 상당히 골치를 썩어야 했다.



충격적인 데뷔. 뒤이은 견제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 열강클럽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전까지는 서양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였던 일본이 어느새 러시아를 꺾을 정도의 ‘제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발언권은 커졌고, 이후 일본의 광폭행보는 국제사회에 많은 주목을 끈다.


러-일 전쟁을 상처뿐인 영광, 배상금 문제만 보자면 피로스의 승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국제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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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충격적인 국제사회로의 데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근대화에 성공해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한 일본을 두고, 국제사회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음에도 일본의 승리는 특기할 만한 일이고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화론(黃禍論)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색인종이 대두해 칭기즈칸처럼 서양인종을 괴롭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혹은 망상 말이다. 처음에는 중국을 경계했지만, 중국이 병든 돼지였다는 걸 확인 한 서양 제국들은 다음 타깃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이런 시선에 가장 앞에 있었던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의 등 뒤를 밀어줬던 영국과 미국이었다.


영국은 러-일 전쟁 직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들어갔고, 영일동맹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축소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었다. 한때 등 떠밀며 싸움을 부채질 했던 영국이었지만, 일본이 갑작스럽게 대두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미국은 러-일 전쟁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 배척 운동을 했고, 캘리포니아 주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배척과 탄압을 시작했다.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서양에 대한 도전의 징조로 여겨졌으며, 태평양의 장래는 동서 세력의 대립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은 러-일전쟁 이후 태평양의 장래는 일본과의 대립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계기는 바로 ‘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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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만주를 차지한 일본이 1931년에 세운 만주국


러시아가 만주에서 가졌던 권익을 승계한 일본은 본격적인 ‘만주진출’을 위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만주에서 군정을 계속 이어나갔고, 계속해서 만주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배권을 행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영국과 미국 중 특히 미국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러-일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의 등을 밀어 준 이유는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대한 견제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만주 진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본을 통해 견제를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일본이 러시아를 꺾어버리고는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 삼아 대륙으로 진출해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첫 발을 내 딛어야 한다는 사명(?!)을 품고 있었고,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미국과 영국의 눈에는,


‘곰이 물러가니, 원숭이가 들어와 설치는 꼴’


처럼 보였던 것이다. 죽 쒀서 개 준 격이라고 해야 할까? 만주에 대한 진출을 꿈꾸던 미국은 일본의 급작스런 대두에 눈살을 찌푸렸고, 이후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는다. 일본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러-일 전쟁에서 정점을 찍고,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계속해서 하향 추세를 보인다. ‘중국’이라는 이익 앞에서 일본과 미국이 서로의 욕망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돌발적인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러-일 전쟁 직후부터 일본과 미국은 끊임없이 그리고 보이지 않게 소소한 갈등을 빚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일전쟁이 나오고, 중일전쟁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만주’가 나온다.


러-일 전쟁은 ‘태평양 전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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