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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5. 29.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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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시대입니다.


최근 세월호 사건과 그 언저리의 상황들이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 묘한 징후는 우리나라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한 예로, 며칠 전에는 양당 체제가 100년 이상 이어졌던 영국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이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1위를 하는 대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당의 당수 나이젤 파라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의 언행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지난 3월 러시아의 크림 병합 때 독재자 푸틴에 대해 "국제 사회의 현존하는 지도자 중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는가 하면, 헤르만 반롬푀의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는 "저급한 은행원 외모에 젖은 걸레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막말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내놓는 정책도 문제가 많아서 인종차별, 성차별, 극단적 이민자 반대 등으로 자기 당에 소속된 유일한 여성 유럽의회 의원이 '반여성적 스탈린주의 독재자'라는 비판을 퍼붓고 보수당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이끄는 당이 영국의 전국적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거죠. 


이 선거는 총선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정권의 향방과 관련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년 5월에 있을 총선에서마저 제 1당이 된다면 보수당과 노동당이 이 극우 정당과 맞서기 위해 연정을 벌여야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다른 지역에서 극우의 약진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제가 몇 년 살면서 그래도 좀 안다고 생각했던 영국 땅에서 저런 일이 일어난 것은 충격적입니다. 영국인들은 느리고 변화를 싫어하는 타입이거든요. 정치적인 상황에 그리 예민하지도 않지요. 그런 그들이 이런 변화의 '열정'을 드러냈다는 점은 영국 사회에서 어느새 일반화되고 대중화된 극우적 정서를 증거한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극우와 이기주의, 인종주의 등이 세상에 득세한다는 말은 전반적으로 근대적 가치들이 후퇴하고 있다는 뜻이죠. 특히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 주축이 문명적으로 개화했다는 서유럽 선진국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왜 이미 아프게 겪었고 그래서 극복했다고 여겼던 구시대의 세계관이 되살아나면서 세상에 점점 그늘을 드리우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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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 영국독립당 당수.

절라 좋은가 봅니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에서 왜 국제정치 이야기냐고요. 


그러게요. 


마, 과학이 그냥 과학으로만 이야기되면 그만인 세상이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군요. 앞서 말씀했듯이 최근 전반적으로 역행의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그 이전의 인간 세상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난 50여 년 정도가 그나마 예외적인 시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대정신은 합리성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기본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게 만들어지진 않았죠.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물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강한 힘은 생존-번식과 관련된 본능입니다. 문제는 이 본능이라는 넘은 나름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 될 문제가 복잡해지면 역할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본능의 명령을 넘어서서 지성과 감성이 입체적이 되어 약자나 타자의 고통이 단지 남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렇게 인류는 남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력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문명을 발전시키고 본능적 약육강식의 구조에서 조금씩 이탈해 왔습니다. 약육강식은 약자들의 고통을 유발하고 방치할 뿐더러 이를 당연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감력의 발휘는 단지 '측은지심'의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개별적인 공감은 즉자적인 감정일 뿐이라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거대한 오류로 귀결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다들 경험하듯 약간의 불편함이나 귀찮음 따위가 그 공감력이 작동하는 것을 가로막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근대 이후 인류는 이 공감력을 조직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죠. 수시로 변하는 개인들의 입장이나 감정과 무관하게 공감력을 상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해야 시민 모두가 안정적으로 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권이 보호되고 인간성이 유지되며 정의를 실현하고 삶의 질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을 위한 재료가 되는 게 바로 합리성이죠.  그리고 합리성은 인문학 이상으로 바로 과학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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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가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과학 = 기계적인 사고'라는 거죠. 하지만, 만약 주변에 그런 과학자나 과학 애호가가 있다면 과학이 아니라 그 분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과학은 태도요 방법론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과학은 매우 신중하고 부지런한 해답 찾기입니다. 과학 말고도 해답을 찾으려는 수단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충분히 신중하고 동시에 부지런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과학이 일견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이유는 따지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죠. 하지만 왜 이렇게 따지는 게 필요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건 우리 인간이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스스로 너무나 많은 환상과 착각의 덫을 지어냅니다. 그리고 그 덫에 끊임없이 제 발로 빠져 듭니다. 실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저 덫에 걸려서 허우적댄 기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오류와 실수, 심지어 죄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정답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것들이 어이없는 오답이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진리라고 추앙하던 것들이 때로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기도 했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차별과 멸시,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고통 속의 삶을 강요받았지 않았던가요. 그런 실수를 계속 반복할 수는 없으니 이제는 그 덫에서 헤어나와야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합니다. 철저해야 해요. 우리는 너무 쉽게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습니다. 합리성을 본능적으로, 마냥 수월하게 추구하는 형태로 진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덫에 빠지지 않으려고 가급적 깐깐해야 생각합니다. 대충 넘어가는 순간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쉽고 습관적인 삶을 사는 대신 이런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없거든요. 그런 열정은 기본적으로 우주와 세상, 생명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 물론 아닌 사람도 있죠.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가 보기도 했죠. 하지만 세상 무슨 일에도 그런 사람은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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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건 바로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은 과학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게 만드는 게 문명이고, 현대 문명은 인문학의 성찰과 과학의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지식의 올바른 해석은 인간에게 지혜와 통찰을 주고 본능에만 의존하지 않는 존재가 되도록, 약육강식의 잔인함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반면 생각과 감정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 쉽게 생존과 번식만을 추구하는 짐승 같은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행인 것은, 그 노력의 정말 어려운 부분은 과학자들이 대신해준다는 겁니다. 위험한 실험을 수행하거나 복잡한 수학 방정식을 만들고 풀고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일은 바로 그들의 몫이죠. 우리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엄하게 필터링하고 확인한 이론과 법칙들을 접하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믿을만한 내용들인 겁니다. 여담이지만 살다 보니까 세상에 믿을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더군요.


암튼, 그래서 우리는 작은 노력만으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접하고 과학자들이 어렵사리 얻어낸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해석과 적용에 따라서는 어떤 이론이나 원리를 만들어 낸 과학자들 자신보다 우리가 더 큰 지혜와 통찰을 얻어내지 못하리란 법도 없겠죠.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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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겨우 좀 나아지나 했더니 조금씩 역주행하는 이 세상의 모습은 그간 문명의 방향성을 제시해 온 종교, 철학, 정치, 경제 등의 한계를 반영하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이념이나 복잡한 사상, 기발한 전략이 아니라 단지 공감력의 감성과 합리성의 이성, 이 두 가지인 건 아닐까요. 그  둘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충분히 사회에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다른 것들이 필요했고, 또 이제 그 무너짐과 세상의 역주행을 막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 속에서 과학의 의미도 지금까지와는 달라집니다. 과학은 생각 자체보다는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거니까요. 수많은 이론과 법칙들이 낸 결론도 중요하지만, 실은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가 아닌 우리가 과학을 통해 가장 크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죠.


그래서 세상의 희망은 이제 과학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지, 저는 그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요. 예컨대 기술과 결합해 인간을 달에 보내거나 컴퓨터를 만들거나 스마트폰을 만드는 것이 20세기의 과학의 얼굴이었다면, 앞으로의 과학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삶의 자세이자 세계관과 연관되어야 할 것 같아요.


과학을 우상화해서 또 다른 종교로 만들자는 말은 아닙니다. 과학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인문학과 예술 등 모두 여전히 중요하고 우리들은 그 모든 걸 누릴 권리가 있죠. 허나 그와 동시에 과학과 과학적 태도가 가진 저력, 그 합리성의 힘을 깊이 깨닫고 충분히 발현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도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게 될 겁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조금 무섭습니다. 권력자들은 점점 뻔뻔해지고 세상은 이상하게 비뚤어져 갑니다. 조만간 세계적으로 차별과 증오가  노골적으로 득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누굴 믿어야 할지,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할지 점점 오리무중입니다. 세상은 어두컴컴하고 희망도 꺼져 가는 듯한 지금, 자칫하면 우리 모두 정신줄을 놓아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은 특히 제가 과학을 좋아하는 게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군요. 단지 지식이나 의미뿐 아니라 과학 자체의 즐거움, 시시하고 우울한 세상을 살아도 그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에서 또 다른 차원의 경이감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멘붕과 타락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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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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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