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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09.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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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5일, 스티브 잡스가 지병인 췌장암 악화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그저 세계적인 기업인 한 명이 운명을 달리한 것 이상으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애플 그 자체였고,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와 같은 애플 제품의 아버지였다.


잡스는 인격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폭넓게 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잡스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여서, 잡스를 마치 유명 락밴드의 멤버마냥 추종하는 부류와 그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류가 공존했다. 온전히 잡스가 혼자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애플의 제품 또한 그와 닮은 면이 많았다. 애플의 제품은 누군가에게는 전자기기와 예술품의 가치를 넘나드는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용자를 귀찮게 하는 것도 모자라 호환성까지 떨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잡스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에 대해 인정하는 지점은 그가 가진 존재감과 영향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감을 대중에 각인시키는 데 있어 잡스는 매우 탁월한 전략과 실행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잡스가 애플의 신제품을 공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이 그 단적인 예다.


신제품을 들고 나와 대중에 소개하는 잡스는, 흡사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를 연상시키기까지 했다.-실제로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했을 당시 언론은 Tablet PC인 아이패드를 들고 나오는 잡스를 석판(Tablet)을 든 모세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대 민족에 새로운 삶의 지침이 될 십계명처럼 잡스는 그의 제품이 대중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선도하게 되길 열망했다. 그리고 잡스는 그 스스로 모세가 되길 원했다.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처럼 잡스는 IT분야(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의 선구자, 방향성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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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스티브 잡스에 대한 책은 전세계적으로 수십 종 이상이 출간되었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기술, 그의 혁신적 사고, 성공 비결 등 잡스를 다룬 책의 주제 또한 방대했다. 잡스가 죽은 뒤 나온 그의 전기는 순식간에 서점가를 장악했다.


확실히 잡스는 21세기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한편, 잡스는 그의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많은 단점과 치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잡스의 어두운 면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미 웬만큼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잡스가 워낙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소상하게 드러난 이유도 있거니와 그가 전기 작가에게 의뢰하여 자신의 전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상세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술회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이루어낸 성공은, 충분히 보통의 위인전에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잡스가 과연 ‘훌륭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뒤따른다. 누군가 필자에게 ‘당신은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고 대답할 것이다. 잡스가 거둔 성공이라는 후광을 걷어 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잡스는 애플과 자신의 성공 비결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수 차례 밝혀왔다. 필자 또한 잡스의 강렬한 성공과 어두운 일면의 교차로에서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찌질한 위인전>, 열 번째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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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하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압둘파타 잔달리와 조앤 시블로 스물 세 살 동갑내기였다. 그러나 조앤 시블의 아버지가 둘의 결혼을 극렬 반대했기 때문에 대학원생인 조앤 시블은 잡스를 키울 수가 없었다. 조앤은 잡스를 낳기 전부터 아이를 입양시킬 결심을 한다.


스티브 잡스는 원래 남편이 변호사인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는 부부에게 입양될 예정이었다. 생모인 조앤이 잡스를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시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딸 아이를 원했기 때문에, 조앤은 다른 양부모를 찾아야 했다. 결국 잡스는 고교를 중퇴한 남편 폴 잡스와 그의 아내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는데, 조앤은 이를 반대하여 끝까지 버티다 잡스 부부가 그의 아들에게 반드시 대학 교육을 시키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야 입양을 허락한다. -이 서약서는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게 되는데, 스티브 잡스가 자의로 대학을 중퇴해버렸기 때문이다.-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 사내 아이는 스티브라는 이름을 얻고(정확히는 Steven paul jobs) 캘리포니아의 마운틴 뷰에서 성장한다. 양부인 폴 잡스는 자동차 수리공으로 수입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사람이었다. 잡스는 양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레 각종 기계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성장환경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자란 지역이 이후 미국 최대 규모의 첨단기술 연구단지인 실리콘밸리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입양은 원치 않는 경험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가 건실한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과 실리콘밸리에서 성장했다는 점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잡스는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고, 이후 그의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이 되는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났기 때문이다.


잡스는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잡스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빠진 적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와 가까운 지인들은 잡스가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잡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스티브 잡스는 버림받았다는 느낌보다는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인식을 어린 시절부터 가졌음을 강조했다. 양부모의 헌신적인 사랑-클라라 잡스는 스티브의 양육을 위해 가정부 일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을 받으며 자라온 스티브 잡스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들의 친자식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분리된 존재임을 자각했다. 어린 스티브는 성장하면서 양부모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데에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나는 특별하다’는 인식이 더욱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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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는 스스로 버림받았다는 느낌보다는 '나는 특별하다'는 인식이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인식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한 사람이 태어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아를 형성할 때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경험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보호 속에 영향을 받는 시기에는 자신의 세계에서 부모가 가진 존재감과 능력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리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서서히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이 부모보다 더 뛰어난 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확장은 잡스 뿐만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과정이다.


이러한 보편적 과정이 잡스에게 더 극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입양되었다는 사실,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친부모 슬하에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과 부모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경험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태생적 근원이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분리하여 사고할 수는 없게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잡스는 그의 양부모와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기는 인식은 더욱 강하게 확립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과 특별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자존감의 측면에서는 양극단에 있는 자의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잡스에게 이러한 양극단의 자존감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크게 작용했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자각, 부정적 자존감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길은 더욱 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굳게 자리잡은 스티브 잡스의 ‘나는 특별하다’는 인식은 이후 잡스의 인생에서 가장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모두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잡스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자기애성 인격장애와 상당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혹자는 스티브 잡스를 두고 ‘가장 성공한 소시오패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잡스가 가진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결여의 특성에만 국한시켜 바라본 의견이기에 전반적인 포괄성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원인과 검사법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잡스를 소시오패스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전기에 따르면 잡스는 로렌 파월과 만나 결혼하기 전 티나 레지라는 여성과 사귄 바 있는데, 레지는 잡스와 헤어진 후 정신의학 서적을 읽다가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대해 알게 된 후 잡스의 성격과 행동이 그것과 놀라우리만큼 닮아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잡스에 대한 티나 레지의 직, 간접적 경험 이외에도 잡스의 인생 전반에 걸쳐 그가 보여준 여러 모습들은, 확실히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특성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정신병리적 핵심이 자존감과 관련된 갈등과 결함에 있다는 점은 잡스의 어린 시절을 통하여 그 원인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이상화와 평가절하, 자신에 대해서는 과대지각과 열등감을 번갈아 가지게 된다는 특징 또한 잡스의 성격 및 태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실제로 잡스는 그가 대하는 사람을 천재 혹은 전혀 쓸모 없는 사람으로 이분화하여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평가 또한 극과 극을 오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잡스가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추정이 가능하다 하겠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증상과 잡스의 찌질함


때문에 <찌질한 위인전>에서 살펴보게 될 스티브 잡스의 찌질한 면모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막론하고 대부분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증상과 궤를 같이 한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인관계에서 남을 위할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이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잡스는 20대 초반에 게임 회사인 아타리(Atari)에서 시급을 받으며 일할 때에도 사내에서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유명했는데, 잡스는 나중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한 이유를 단지 ‘다른 모두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이러한 성격은 애플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잔인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잡스는 그가 대하는 사람을 천재이거나 아예 멍청하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분류했는데, 그에 따라 잡스의 태도 또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문제는 잡스의 눈에 천재로 비춰지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평가 또한 언제든 반대의 것으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잡스는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직원들을 잔인하고 사악하게 다루는 잡스의 밑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단 하나, 거기에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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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의 아이디어도 잡스의 이분법적 시각에는 ‘기가 막히게 괜찮은 생각’이거나 ‘쓰레기 같은 생각’으로 나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종종 잡스가 팀원이 내놓은 아이디어에 혹평을 하고서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같은 아이디어를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자랑스레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혹평했던 바로 그 당사자에게.


잡스가 스스로를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은 사회적 약속이나 일반적인 규칙들에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점 또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특징을 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운전하는 자동차의 번호판을 달지 않는다거나-관련 법규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라 불법은 아니었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CEO 전용 주차 구역을 만드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매번 사내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를 하는-애플 직원들은 이를 비꼬아 ‘Park different’라 이름 붙였다. 애플의 유명한 광고 카피 ‘Think different’를 패러디 한 것이다.- 등 일반적인 사람의 시각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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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는 때로 아주 극단적인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는데, 일종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런 이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GUI 전쟁’이었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의 약칭인 GUI는, 요즘 시대에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익숙한 작업 환경이지만, 그것이 최초로 등장할 때에는 IT분야의 혁명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애플은 80년대 ‘LISA’와 ‘매킨토시’를 통하여 GUI를 탑재한 OS환경의 제품을 출시하여 업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GUI는 애플이 최초로 고안한 것이 아니라 제록스의 PARC(제록스 팰러앨토 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이었다. 잡스를 비롯한 애플의 개발자들은 PARC 견학 중 GUI를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음 세대 IT환경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것을 깨달은 잡스는 사실상 제록스의 아이디어를 ‘훔친다’. 이는 잡스 또한 어느 정도 인정한 부분이며 잡스는 이를 두고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제록스가 위대한 아이디어를 고안하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며 애플이 훔쳤다기보다는 제록스가 실수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세간의 의견에 동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는 이후 마이크로소프트가 차세대 OS인 윈도에 GUI를 구축했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창의력도 없고 비겁한 마이크로소프트가 허락도 없이 애플의 기술을 훔쳤다고 비난한 것이다. 잡스는 이 문제에서 거의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하게 분노했으며 저작권 문제와 관련하여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법적 소송을 제기한다.-결국 애플은 이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한다.- 애플이 제록스의 아이디어를 훔쳤음을 자랑스럽게 인정했던 잡스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다.


잡스가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잡스는 위대한 예술가로서 제록스의 아이디어를 훔쳐내 더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비겁한 집단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의 결과물을 어설프게 베껴 졸작을 만들었기 때문에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잡스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을 들어줬다. 윈도 시리즈가 이후의 OS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스는 이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사꾼 MS가 소비자를 현혹시켜 형편없는 제품으로 시장을 지배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잡스의 이중성 또한 그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또 다른 특징은 자존감이 양 극단을 오간다는 것이다. 잡스 또한 마찬가지여서, 평소 하늘을 찌를 듯한 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가도 본인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좌절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자신에 대한 상대의 비판에는 설사 그것이 합리적 비판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때면 종종 잡스는 사람들 앞에서 울기도 했다.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을 시작하면서 잡스와 워즈니악은 수익을 50 : 50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워즈니악이야 어차피 금전적 부분에 있어서는 큰 욕심이 없었던 사람이라 별 이견을 갖지는 않았으나 스티브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달랐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아들 워즈니악이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을 반반으로 나누는 것이 부당해보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잡스는 워즈니악의 아버지와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급기야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공로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마저 드는 듯했다.


잡스는 자신이 발 벗고 나서 CEO로 영입한 존 스컬리와 애플의 통제권을 두고 갈등하게 되면서 이사회에 신임을 묻지만 결국 스컬리에게 밀려 경영권을 잃게 된다. 자신이 설립한 자식과도 같은 애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 잡스는 분노에 찬 비난을 스컬리와 주주들에게 퍼붓기도 하고, 가다듬은 말과 표정으로 설득하기도 했으며, 울며 읍소하기까지 한다. 그러다가도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예의 독설을 다시 쏟아냈다. 이러한 잡스의 모습은 냉철한 이미지의 그가 절박한 상황에서는 얼마나 감정 조절에 취약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잡스가 사람들 앞에서 우는 장면은 그의 전기에 수차례 나타나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눈물조차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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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자신의 딸을 버리다.


잡스는 자신의 이익과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거짓말 등을 통해 상대방을 기만하거나-이 또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한 증상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잡스는 젊은 시절, 인생 최대의 오점이자 가장 찌질한 경력을 남겼다.


잡스는 20대 초반에 크리스앤 브레넌이라는 여성과 가깝게 지내다 얼마간 동거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잡스의 아이를 임신하고, 딸을 출산한다. 브래넌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잡스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무시'였다. 뱃 속의 아이가 자신의 자식일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브레넌은 아이를 낳기도 전부터 잡스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잡스는 자신이 브레넌과 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이 브레넌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그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결국 이 문제는 양육비 소송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스티브 잡스는 잔인하리마치 필사적으로 크리스앤 브레넌이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그의 딸 리사(잡스는 딸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돕기는 했다)는 태어나서 어머니인 브레넌의 손에 길러지고 있었다. 결국 분쟁은 리사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난 시점에 잡스가 DNA 검사에 동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리사가 잡스의 딸일 가능성은 94.41%였다.


잡스는 매달 크리스앤 브레넌에게 양육비를 지급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잘못까지 덮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잡스는 인터뷰에서 통계적으로 미국 남성의 28%가 리사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한 바 있으며, 리사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딸과 자신이 얽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친부모가 양육을 포기하여 입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자신의 딸을 그렇게 반쯤 버리다시피 했다. 스티브 잡스는 찌질하다 못해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여담이지만 브레넌이 리사를 임신했을 당시 브레넌과 잡스의 나이는 스물 셋, 공교롭게도 스티브 잡스를 임신했을 당시의 생모 조앤 시블과 아버지 압둘파타 잔달리의 나이 또한 스물 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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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딸 리사와 관련된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고 밝힌 바 있다. 리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 흔적도 엿보인다. 하지만 당시 잡스의 행동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에 대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과 일에 대해서도 잡스는 언제든지 그것을 기만하고 상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잡스의 현실 왜곡과 기만을 주변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현실 왜곡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下편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현실 왜곡장과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면면들이 어떻게 그를 IT 업계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는지, 인생의 경험을 어떻게 자신의 편으로 돌려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한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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