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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잉여를 꿈꾼다

2014-06-2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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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27. 금요일

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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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곳에 양해를 얻어 6월 4일 지방선거 투표를 마치고 양파 농사를 짓는 처갓집에 다녀왔다. 6월 6일에 인력 3명을 맞춰 놓았다고 했는데 올해도 약속이 어그러졌다. 작년엔 이른 장마가 온다고 일당이 18만 원까지 올라갔었다. 비를 맞고 양파색이 변색이 되면 상품가치가 없다.


처음 처갓집에 갔을 적엔 일을 시키지 않아 밭에 가는 장인어른을 어슬렁거리며 따라 나섰다가 잠깐 도와드리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기력이 딸리는지 말로도 쉬다 가라는 말이 안 나오고 "딸네 있을 때 바쁜 일을 끝마쳐야 한다"라고 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칠순이 넘은 노인 둘이 며칠간 양파를 뽑아 한 뼘 안 되는 꼭지만 남기고 싹을 잘라 놓았다.


빨간 나일론 그물망에 다부지게 눌러 담아야 무게를 맞출 수 있다. 주먹보다 좀 큰 양파 6개를 바닥에 둥글게 두르고 좀 더 큰 놈으로 가운데 부분에 박아 넣어 밑바닥을 만들고 양파 뿌리부분이 망의 바깥쪽을 향하도록 밀어내듯 돌려쌓는다. 미곡수매때 벼를 검사하는 것처럼 양파도 검사를 받는다. 한망의 무게 망 안에 담겨 있는 양파의 크기를 검사받는다. 속안에서 등급외의 양파가 몇 개 이상 발견이 되면 수매를 해주지 않는단다.


양파 값이 안 좋아서 어쩌냐는 질문에 그나마 농협에 수매가 돼서 큰 걱정은 없단다. 양파 값이 비쌀 해에 농협에 넘기지 않고 판매상에 넘겼던 사람들이 값이 안 좋을 때 농협에서 받아주지 않아 애먹는단다. 상인들이 값이 안 좋을 때는 장마철에 양파가 썩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똥값에 가져간다. 판로가 따로 없는 농민들이 그럴 때마다 농협과의 의리를 되짚어 보는 것 같다.


동틀 무렵 밭에 나와서 일하다가 아침을 밭두렁에 놓인 마대자루에서 꺼낸 부루스타로 라면을 끓여 먹고 또 일을 한다. 예전엔 일도 더울 땐 피해서 쉬엄쉬엄하며 품앗이도 좀 있었는데, 시골 노인들이 늙고 아픈 사람들이 많아 품앗이 문화도 사라졌다. 대신 파견업체를 통해 일용직 인부를 쓴다. 8시에 출근해서 참 시간에 쉬고, 점심시간 한 시간 쉬고, 오후 6시 전에는 보내줘야 하는데 양파대도 자르지 못하는 분이 오신 적도 있더란다...


오후 2시 칠팔월의 열기에 비하면 일 할 만한 날이긴 하지만 밭두렁을 기어 다니며 양파를 담아내다 보니 허기는 모르겠지만 체력이 바닥이 났는데, 쉬었다가 하자거나 점심 먹고 하자는 말도 안 하고 두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이 부담이 된다. 항복 선언을 했다. “죽을 것 같으니까 밥 좀 먹고 열 좀 식히고 쉬었다가 하십시다.”


집에 가는 시간 5분이 아까워서 밭두렁에서 라면을 아침으로 드셨다. 그래도 명색이 사위가 죽겠다니까 못이기는 척 집으로 향한다. 장인은 막걸리 한 사발만 마시고 작은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서 식사하시라는 소리를 입맛이 없다며 거부한다. 장모도 조금 뜨다 이내 수저를 놓는다. 나만 밥이 꿀맛이라 한 사발 더 먹고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열을 식히려다 깜빡 잠이 들었다. 해를 봐선 삼십분에서 한 시간이 지났다.

 

장인어른이 젊어서 개간하신 산밭에 두 노인분만 나가셨다. 딸아이는 좀 더 자게 두고 익숙지 않는 밭일에 지쳐 잠든 집사람을 깨워 밭으로 나갔다. 밭일을 하던 일용직 인력들이 퇴근시간이다. 승합차를 타고 퇴근하는 일용 인력 중엔 동남아 계열의 사람들이 보인다. 아직은 해가 많이 남았다. 그래도 힘써야 하는 일이라도 빨리 마무리하길 원하는 노인들의 마음이 급하다. 저수지에 외지차량이 들어서고 붕어 낚시를 한다. 팔자 좋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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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이 이제 농사일을 버거워하신다고 장모님이 걱정이다. 농지도 주택처럼 연금으로 받는 방법이 있다는 걸 들었다고 운을 떼니 땅값이 안 돼서 어림도 없단다. 가끔 장모님께 용돈은 드려도 생활비를 따로 부칠 형편이 아니라 더 할 말이 없다. 장인은 장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 번거롭지 않게 다음 날 약을 드신다고 했단다. 그라목손이 판매중지된 걸로 아는데 남은 게 있는 건지, 멀지않은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장모님을 도닥거리느라 하신 말인지 모를 일이다.

 

행여 그런 말은 마시라고, 남은 자식들이 죄책감으로 어찌 사냐고, 행여 번거롭지 않음을 감사하게 되면 그건 더 비참한 일이라고 굶어 죽을 걱정만 아니면 그런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 몇 해 전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개간하신 밭 가장자리에 묻어 달라던 말에 “그렇게 해 드릴께요.”라는 대답만 하고 화장을 원하실까 매장을 원하실까 하는 생각만 하고 물어보진 못했다.

 

장인은 지난 대선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표를 주었다. 왜 그러셨냐는 손녀딸의 질문에 노령연금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시더란다. 입이 쓰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뻐근한 몸에도 노인 분들 일을 덜어드리고 온다는 뿌듯한 마음이 있던 여느 해와는 다르게 돌아오는 길이 좀 피곤했다.

 

올라오고 나서 뉴스를 보니 다른 지역은 품이 나지 않아 양파를 갈아엎는 곳도 나온다. 경기도지사는 남경필 씨가 되었고 안산시장은 김철민 전 시장의 처절한 선거운동에도 제종길 씨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풍속영업규제 위반과 뇌물공여 전과가 있던 분이 도의원에서 당선되지 않았다. 승패를 가름하고 다음 선거 전략을 준비하는 정치인들은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 같다. 팔자 좋은 사람들이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선거 현수막을 철거하면서 단원고 정문의 국화꽃과 간식들이 놓여있던 제단이 치워졌다. 제단을 덮어주던 비 가림 차양도 함께 치워졌다. 2학년 아이들도 등교해야 하니 언젠가는 치워야 하고 남은 아이들은 남은 아이들 몫의 삶을 살아 내야 하겠지만 쓰레기에 가까운 내각 후보자 나리님들의 면면을 보면 답답한 마음에도 실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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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에 충성하는 여당과 여당에 협조하는 제1야당,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사는 것 같은 소수당 사람들 중에 선택지가 별로 없었을 터이지만 교육감만은 효용보다 사람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뽑혔다. 자신들이야 이미 똥통에서 구르지만 자식들만은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인 것 같다.

 

일이 좀 일찍 끝나는 날엔 두 해 전 음독하신 아버님의 뒤를 이어 토마토 농사를 짓는 후배 일을 해질녘까지 두어 시간 돕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기댈 곳 없는 외로움이 커서 제 아들에게는 형제를 만들어 주려고 올 봄에 동생을 낳았다. 덕분에 농사일은 대부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다.

 

그래도 한번 농사를 지어 보았다고 작년보다는 작물 상태도 좋고 한번 아이도 만들어 보았다고 둘째 얼굴이 좀 더 곱상하다. 그새 더 타고 핼쑥해진 얼굴로 투표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푸념처럼 털어 놓는다. 지친 얼굴에 담배를 피우는, 잠깐 쉬는 시간에, 졸음에 감기는 눈을 비비며 맥없이 하는 말에 역시 무어라 타박할 말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 진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노동자, 농민을 기원으로 하는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지식계층과 여성을 기원으로 하는 변화를 기대하는 것 같다. 노동에 소모되고 마모된 사람들은 옳은 판단을 할 에너지가 부족하고, 행여 옳은 판단과 생각을 하더라도 실행에 옮기기에 힘이 부친다. 순간적인 분노로 끓어오를 수야 있겠지만 지친 삶이 갈구하는 건 편안함과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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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투쟁을 하던 지난 시절 노동운동가를 자처하는 이로부터 모멸감이 드는 말을 듣고 투쟁을 중간에 접으려 할 때, 형이 지금 그만두면 우리는 누구를 보고 끝까지 가냐며 붙잡던 녀석이었다. 덕분에 2년 반을 더 버텨 아름답진 않지만 끝을 보긴 했었다. 그 시절 등을 맡길 아군이란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매주 수요일에 지역 노동조합 주관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안산 25시 광장에서 연다. 광장 구석에서 열린 집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규모도 작고 조촐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쪽지와 편지를 붙여두었던 판넬에 누군가 불을 질렀다. 장사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인근 상인인지 이제 그만 대통령님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사 삶을 이어가는 노동자지만 이번 달엔 별반 돈이 되지 않는 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그러고 보면 아직 하루의 모든 노력을 동원해서 하루살이의 삶을 이어가는 절대 빈곤은 아니다. 운이 더 없으면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잉여분의 노동력과 잉여분의 시간을 생존이 아닌 마음이 가는 곳에 쓸 수가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밑바닥 노동자에게 이나마의 잉여가치를 분배하도록 싸워온 투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고, 그 당시론 신성한 권리로 상속받았을 권리를 내려놓은 기득권자들에게도 개미똥구멍 만큼은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전통이 있었다는 예시로 가르침을 받았던 화백제도에 대해 생각한다.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의 의사결정을 하던 귀족들을 좌식자라 부른다. 노동에 소모되지 않고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 좌식자만이 자신과 일족의 이익을 다지고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의견을 내고 설득을 하고 대립각을 유지해서 반대급부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톱니바퀴처럼 닳아지고 소모되는 노동자로만 살아지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더 잉여를 꿈꾼다.

 

인간만큼의 무게로 지구를 살아가는 개미들의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구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태어난 대로의 계급과 직군에 따른 철저한 헌신과 근면함을 어리석은 백성들이 본받아 신분체제가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목표를 가진 종교와 사람들이 있다. 생식을 담당하는 여왕개미 하나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개미사회와 각자의 생식기를 용도에 맞도록 사용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공통점을 찾아볼 수도 있다.

 

모체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일개미들은 군집유지의 효율을 위해 생산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여왕개미를 죽이고 새로운 여왕을 모신다. 먹이를 찾은 일개미는 페르몬으로 표식을 남기고 다른 일개미들은 표식을 따라 줄지어 이동해서 먹이를 저장고로 운반한다. 각자의 역할에서 전체를 위해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줄을 벗어나는 개미가 있다.

 

일하는 동료들을 버려두고 다른 곳을 배회하다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또 다른 먹잇감을 발견하고 표식을 남기는 개미가 된다. 개미사회의 영웅으로 대접받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군집이 번성한다. 사람들의 사회도 그렇게 발전해 온 것 같다. 현실에 순응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 중에 다른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문명이 이만큼 발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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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이디 조명으로 자연광보다 빠르고 수확량이 많은 식물을 키워내는 재배기가 있고, 공산품이 아닌 개별 디자인으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3D프린터가 만들어졌다. 쉽지는 않겠지만 에너지와 자원분배의 문제만 해결 된다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야기하는 문제와 식량수급의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비극들이 해결될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해 하루를 소모하던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잉여 시간을 나누어 줄 수도 있다.

 

그렇게 풍부해진 잉여로움과 에너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몫이겠지만 교육과 언론과 정치의 역할이 크다. 그래서 교육과 언론과 정치에 관심을 두고 응원하고 격려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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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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